한국의 성곽
(96, 최경순)
Ⅰ. 序    論
 
  우리 나라 곳곳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 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山城),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土城)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는 퇴락 했지만 읍성(邑城)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곽이라는 것은 군사적 방어 시설을 의미하여 성(城)은 내성(內城)
을, 곽(郭)은 외성(外城)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
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또 조선 시대에는 곽(郭)은 생략하고 성만 쌓기도 하였다.
  현재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성지(城地)는 1천2백26곳에 이르며 이러한 성곽의 유적
은 우리 조상들이 우리 역사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지
키려 했던 호국 의지의 표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일찍이 조선 세종 때 양성지(梁誠
之)는 "우리 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고,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함부로 쳐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성곽에 관한 연구는 극히 미비하여 몇 편의 논문을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래도 요즘 많은 연구들이 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래도 이 방면
에 대해서 연구가 미비한 것은  이런 성곽에 관한 연구가 한 개인의 힘으로는 전국에
산재한 성곽을 조사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글을 통하여서 우리 조
상의 발자취이고 역사의 매듭인 성곽에 대해 관심이 조금씩이나마 생겨나고 이런 성
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이러한 점으로 이 글에서는 성곽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1. 성곽의 개념 2.
성곽의 기원과 발달 3. 성곽의 특징 4. 성곽의 종류에서 대표적이고 가장 많은 도성,
읍성, 장성, 산성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Ⅱ. 本    論

1. 성곽의 개념
  성곽은 대체적으로 성을 말하는데 이는 군사적 방어의 시설로 만들어졌다. 전형적
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 안쪽의 것을
城, 또는 내성(內城)이라고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며, 만약
도성이면 왕성(王城)또는 궁성(宮城)이나 황성(皇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쪽의 것은 나
성(羅城)이라 부른다. 성은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적인 재해로부터 성안의 인명과 재산
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인위적 시설을 말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의 성곽의 발달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의 경우에는 산지가 많아, 특히 산성(山城)이 발달하였으며, 네모꼴보다는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하여 부정원형(不整圓形)이 많다. 옛말에 성(城)을 '잣'이라 하였
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성이 중국계통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대체로 청동기시
대에는 신전이 나타나게 되거나, 신성구역(神聖區域)이 있게 되며, 이때 신전을 포함
하여 지배자의 거주지를 둘러 쌓을 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의 성곽은 집락(集落)의
형성과 지배자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 곧 정치집단의 발생을 전제로 하므로 국가의
기원과 연계된다. 고전적 성곽발생 이론에 의하면 농경집단이 유목집단의 약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대략
넓은 농경지를 가진 매후의 낮은 구릉 위의 성곽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
며, 이는 남부 시베리아 지방에서 만주지방에 걸치는 도피용(逃避用) 목책
(Gorodisthche)과 관련을 지어서, 일찍부터 방어용인 산성 위주의 성곽이 많이 축
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곽의 기원과 발달
 1) 성곽의 기원
  인류 사회에 성곽이 등장한 것은 수만년전으로 원시적인 방어 시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 5천년경에는 이스라엘 예리고성과 같은 본격적인 성곽의 출현
과 메스포타미아 지방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일대에는 수메르인이나 앗카드인에
의한 성곽 도시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이후 성곽 도시는 고대 이집트, 인도, 주위에서
고대적 공동 사회의 방어 수단으로 확대 전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성곽 시
설이 있었는지 분명히 밝힐 수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사기(史記)」 조선
전(朝鮮傳)에 평양성(平壤城)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최초인데 이것은 B.C 2세
기에 해당된다. 한편 남한에서는 이 보다 훨씬 늦은 삼한 시대에 성곽에 관한 문헌
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적인 성곽으로는 대체로 서기 2세기 이후에 남한 지역에서 처
음으로 성곽이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예로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되는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성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철기 문화를 누
리고 삼국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삼한아니 삼국에
성곽과 비슷한 방어시설이 생겨났다고 보이며 백제나 신라는 그 영역을 확장함에 따
라 성이나 책(柵)을 신축했으며 성을 기초로 한 성읍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
  2) 성곽의 발달
  삼국의 성곽 시설로는 대부분 목책(木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본격적으로 석축
에 의한 성곽은 삼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3세기 이후에 가능했다. 처음에
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
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석성을 쌓았다.
  목책은 나무기둥을 엮어 세워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원시적인 울타리 성이며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이를 방어시설로 사용했다. 또한 토성은 흙을 다져 넣어가며
쌓고 판축법과 토성이 축조될 듯이 좌우 흙을 파내 둔덕을 쌓아올리는 삭토법이 있
다. 이런 목책성과 토성, 석성등은 그 출현 시기는 각기 다르지만 실학자들에 의해 고
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능에 따라 혼재해 왔으며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
해 벽돌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정조 때 수원성 축성에서 부분적으로 채택되었을 뿐
우리나라 성곽의 대부분의 주류는 석성이다. 삼국시대의 성곽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
었으며 그 발생 과정도 산성이 다른 형식의 성곽보다 먼저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나
라의 지세가 산악으로 중첩되어 있어 자연 지세의 험고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성곽은 초기에 토성에서 후기로 갈수록 석성이며, 또한 처음에는 산봉우리를 중심
으로 정상부부근에 테를 두른 듯한 퇴뫼형이 많으나 후기에 외면 골짜기를 둘러싸는
포곡형이 주류를 이룬다.
  석축의 구조적인 공법으로는 협축과 내탁의 두가지 축성법이 있는데 협축은 성벽의
안팎을 모두 수직에 가깝게 석벽으로, 내탁은 바깥쪽만 석축을 이루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밋밋하게 쌓아올린 것을 말한다. 이 두가지 방법중에 내탁법이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산성에서까지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내탁법의 산성에서 성안
사람들이 성곽을 방어하기에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석축 방식은 물림쌓기로 아랫돌
에 비해 윗돌을 일정하게 뒤로 물려 쌓아 전체적으로 성벽이 약 15도 가량 경사를 유
지하게 하여 성벽의 단면이 사다리꼴을 이루게 되어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견고
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한 공법상의 배려이다.
  이러한 성곽의 발달로 특히 삼국시대에는 백제를 통해 일본에 축성술이 전해져 규
슈지방과 대마도에는 '조선식 산성'이란 이름으로 많이 남아 있다. 일본에 건너간 백
제인 기술자들은 7세기 전반부터 후반에 걸쳐 대규모의 '조선식 산성'을 쌓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북규슈ㄹ 태재부(太宰府)방위를 위해 축조한 대야성(大野城), 기진성
(基진城)과 대마도의 금전성(金田城)을 들 수 있다.

3. 특징
우리나라의 성곽은 다른 여러 나라의 성곽과 비교하여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의 지형에 따라서 또한 우리 민족의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과 중국과 다르게
유사시에 대비해서 도성주변에 산성이 구축된 점들이다. 이런 특징들을 형태상, 축성
기술상, 위치선전상, 배치상, 구조상의 특징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1) 형태상의 특징
  우리 나라의 성곽은 평면구성이 중국의 방형(方形)이나 중세 서양의 별모양(星形)과
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복잡한 평면
을 이룬다. 따라서 성곽은 여러개의 계곡을 포위하여 설치되기도 하고 산등성이의 구
불거리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지형이 산지
가 많으므로 이 산지를 그대로 이용하며 축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도 부근의 산돌을
깨어 이용하거나, 돌이 없는 산은 삭토(削土)하여 성벽을 구성하였다. 한편, 적의 침입
때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전통적인 전술 때문에 따로 부대시설을 갖추지 않고 적당한
지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옹성, 치성, 망루 등의 시설을 따로 축조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축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2) 축성 기술상의 특징
  우리나라의 성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축성 재료는 돌이다. 중국의 성이 주로 판축
의 토성으로 축조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성은 주로 내탁(內托)의 석성이라고 할 수 있
다. 특히 축성의 기술에 있어 자연할석의 평평한 한쪽면을 성벽의 바깥부분으로 맞대
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를 뗄 때의 부스러기를 넣으며, 다시 그 안쪽의 흙고 잡석을
채우는 내탁의 방법은 작업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성을 부수는 무기
인 충차(衝車)가 산의 험한 지형을 올라오기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산성에서의 축성기술은 산비탈을 적절히 이용하되 자연적인 경사면을 더욱
경사지게 하여 성벽으로 이용하는 삭토법이 발전하였다.
 3) 위치선정 및 배치상의 특징
  우리나라의 성들은 평지의 경우에는 물을 이용한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었고 산서의
경우는 규봉(窺峯: 넘겨다보는 산)을 피하여 위로 부터 공격을 못하도록 위치선정을
하고 있다. 평지성의 경우는 대개 앞에는 물이 좌우에서 합쳐서 자연적 참호를 이루
게 하고 뒤에 험준한 산에 의지하도록 하여 방어력을 자연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사람의 힘을 가장 덜들이고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점에서 지형
의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대개 물을 이용한 천연장벽을 가긴
평지성은 배후의 산에 산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상태는 이른바 기각
( 角)의 형태를 이루는데 이것이 더욱 큰 규모의 지역에 적용되면 산성들 사이의 기
각지세( 角之勢)가 이루어진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산성은 이 기각지세에 해당하여
하나의 단위성곽이 적의 공격목표가 되면, 다른 성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배치
되어 있다.
 4) 구조적 특징
  우리나라의 성곽의 구조상의 특징은 부대시설의 배치에 있어서 산의 능선을 최대로
활용하여 축조한 점이다. 우선 수문과 성문을 계곡의 중앙과 그 좌우에 설치하여 통
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S자형으로 굽이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그 반대로 암문은
산등성이로 통하는 능선부의 바로 아래 비탈진 부분을 이용하여 설치되어 있다. 치성
은 산성의 경우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성벽이 곧게 뻗은 것에서 산등성이 쪽에 배치
되었으며 대부분 곡성을 이룬다. 옹성은 가파른 계곡 경사면일 경우 대부분 곡성으로
대치되며 대지일 경우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마루는 가장 높은 정상부, 혹은 산등성
이와 연결되는 각부(角部)에 위치한다. 성내의 가장 낮은 못은 방형 혹은 원형의 단을
두로 깊게 축조하여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여장은 평사(平射)보다
는 내려다보고 쏘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 높지 않다.
  이러한 특징으로 우리 나라는 남다른 성곽을 발전시켰으며 삼국시대에는 이를 일본
에게 전수시켰다.

4. 성곽의 종류
  우리 나라 성곽은 그 위치나 형태, 재료,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그 명
칭도 다양하다. 이병도 박사는 첫째, 구조의 재료에 의해 분류하고 둘째, 구조의 형태
와 규모에 의해 분류하고 셋째, 위치 및 지형에 의한 분류와  넷째, 거주 주체에 의한
분류 등 네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다. 또한 신영훈씨는 첫째로 구조 형상과 둘째 축성
위치, 지형에 따른 구분, 셋째 축성 목적 등으로
분류하고 특히 구조형상에서 구조의 자재와 형태별로 세분화하고 축성 목적을 다시
행정적 용도, 군사적 용도로 나누고 있다. 종합하여 자세히 보면   성곽의 형태로 보
면 평면의 모양에 따라 네모꼴·둥근꼴·반달꼴·길다란 꼴로 구분하며   성곽이 축
조된 위치에 따라 평지성·낮은산성·높은 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곽을 축조
한 목적과 기능에 의해서는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도성(都城), 지방의 행
정·군사·경제의 중심지인 읍성(邑城), 유사시에 대비하여 방어용·도피용으로 쌓은
산성(山城), 창고를 보호하기 위한 창성(倉城), 군사적 요충지에 쌓고 군인이 주둔하던
진보(鎭堡), 왕이 행차할 때 일시 머물기 위한 행재성(行在城),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장성(長城) 등으로 나눌수 있다.  축조에 사용된 재료에 따라서는 토성(土城)·토축
성·석축성·벽돌성·목책·목책도니성 등이 있다.
  이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성곽인 도성·산성·읍성·장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1) 도성
  도성은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고조선시대에
평양성의 존재가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도 도성을 쌓았다.  시대별로 주
요 도성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건축 초기에는 산성에 도읍을 정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대표적
인 것으로는 유리왕 22년(서기3)에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겨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
았는데 국내성은 왕궁이고 위나암성은 이에 부수된 산성으로 왕은 평상시에 국내성에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수도
인 평양성(장안성)도 평양 동북방의 대성산성과 그 아래의 안학궁터로 전해지는 평지
궁성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안성인데 수(隨)나라의
도성제도를 참고하여 쌓은 것으로 성 안 평지에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를 만들어 규칙
적으로 이방(理坊)을 배치하였다. 바둑판 모양의 가로에는 큰 냇돌을 깔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장안성은 현대적인 도시 계획의 방식을 보여 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은 아직 그 위치를 잘 모르고 후기에 대표적인 웅진(熊津:지
금의 공주)의 공산성과 사비(泗 :지금의 부여)의 부소산성을 보면 백제의 도성은 산
과 강들의 지형 지세를 최대로 이용하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또한 부서산성
은 토성으로 지었는데 이는 백제말의 국력의 약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고구려나 백제의 도성과 달리 신라에는 도성을 따로 쌓지 않았다. 왕궁의 주위에
나성이 없는 대신 경주 외국에 명활산성이 도성 방어의 관문 구실을 하였으며 문무왕
때 남쪽에 남산성, 북쪽에 북형산성(北兄山城), 서쪽에 서형산성(西兄山城) 등이 갖추
어지면서 나성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신라의 왕국인 월성(月城)은 남천(南川)가에
반달 모양을 한 낮은 언덕 위에 축조되었는대 이 월성을 중심으로 넓은 평양의 각 처
에 여러 궁궐이 배치되어 있었다.
  통일 신라 때에 왕궁은 여전히 월성이었으나 훌륭한 전각 건물들이 외곽에까지 뻗
치고 안압지가 조성되는 등 월성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또한 당(唐)나라 제도를
모방한 방리제(妨里制)가 실시되었으며 남북 대로와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가 이루어
졌다. 인구가 늘어나고 도읍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새로 도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막
대한 노동력의 동원과 경비 때문에 결국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고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개경도성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개경에 도읍을 정한
뒤 시전을 세우고 방이를 구분하는 등 수도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도성을 쌓지 않았
다. 북방의 개척과 거란, 여진에 대한 방비가 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개경에
도성이 축성된 것은 거란의 침입을 받은 뒤인 현종 20년(1029)에 이르러서였다. 개경
도성은 송악산으로부터 남산으로 이어지는 원형으로 산형지세에 따라 축조되어 중국
의 네모 반듯한 도성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고려의 도성은 삼국 시대 이래의 자
연 포곡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도성 안도 도시계획이 질서 정연
하게 되어 있지 않고 지세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 부락을 단위로 도로와 수
로가 이루어졌다. 또한 고려 고종24년(1237) 강화에 외성과 내성을 축조하여 몽고군에
저항했다.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성은 조선 건국과 함께 태조, 세종의 2대에 걸쳐 축성되었
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옭기고 궁궐과 여러 관아들을 짖고 왕 5년 (1396)에 도성
축조에 대역사(大役事)를 시작하였다. 한양 도성은 서울의 북악,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을 나누어 감독자의 이름을 성벽에 새겨 놓았
다. 성벽은 높고 험한 곳에는 석성을 평지에는 토성을 쌓았는데, 토성이 석성보다 2배
나 길었다. 그러나 토성이 곳곳에서 무너지게 되자 세조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벌
려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바꾸고 성첩(城堞)을 쌓기도 했다. 축성공사의 감독은 매우
엄하였고 세종때 수축한 이후 282년이 지나 숙종 30년(1704)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착공되었는데 6년이나 걸리고 성첩의 수도 7,081개나 되었다.
  한양 도성은 축조된 시기에 따라 축성 방법과 성들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숙종때 근대적 축성의 기술의 완성을 보이고 있다.
 2) 산성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유행하였던 형식이다.
산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지 않고 또 성에서
오래 항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갖추었다. 성벽은 산꼭대기로부터 골짜기
에 걸쳐 고리 모양으로 돌아나가고 가장 낮은 쪽 근처에 성문과 수구를 설치하고 가
장 높은 곳에 망루를 세웠다. 골짜기에는 성문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 때 노출되지 않
도록 했으며 성문 주변의 성벽은 큰돌을 사용하여 다른 곳에 비해 더 튼튼하게 쌓았
다.
  적이 침입하면 군사들과 백성들도 일단 산성에 들어가 장기적인 항전을 해서 피란
성(避亂城)이라고도 한다. 이때 적에게 군량과 물자를 제공하지 않게 청야작전(淸野作
戰)을 쓴다.
  산성은 평야를 앞에 둔 높은 산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들판을 건너오는
적을 빨리 발견하여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평지와는 동떨어진 깊은 산
속에 산성을 쌓기도 하였다. 이는 천험을 이용하여 지구전을 펴려는 생각에서였다. 칠
곡의 가산성, 문경의 조령관문, 북한산성, 창녕의 화왕산성이 이에 속한다.
 3) 읍성
  읍성은 지방 행정 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안에 관아(官衙)와 민가를 함께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아울러 갖는 특이한
형태이다. 읍성은 평지에만 쌓는 일은 드물고 대개 배후에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
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형으로 축조되었다.
  읍성의 형태는 부정형의 타원 또는 원형을 이루며 돌이나 흙으로 쌓았다. 평상시에
는 읍성이 행정 단위가 되지만 유사시에는 방어 기능의 성곽이 되어 성문을 굳게 닫
고 군, 관, 민이 하나가 되어 성을 지킨다. 이러한 읍성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존재로 고려말에 처음등장하여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읍성은 남해, 서
해안 지방과 북쪽의 변방에 주로 축조되었는데, 읍성이 많은 것은 왜구와 거란, 여진
족을 막기 위해서 였다.
  고려에는 주진성(州鎭城)을 많이 쌓았는데 평지에 자리잡은 읍은 주위를 둘러싼 성
벽의 일부가 뒤쪽의 산위까지 뻗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지형 때문에 자
연 발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읍성은 고려시대의 주진성의 모체였던 것으로 본다.
  읍성 가운데 순수 평지성이 나타나 것은 조선 초기로 승주군의 낙안읍성이나 홍성
의 해미읍성 등은 평지에 축조된 대표적인 읍성이다.
 4) 장성
  국경의 변방에 외적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 장성인데 행성(行城) 또는 관성(關城)
으로도 부른다. 장성은 이름 그대로 길이가 수십킬로미터나 되는 큰 규모의 성으로
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구려와 통일신라 고려 때의 똑같이 천리장성이란 이름으로 장성이 축조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구려는 당의 침입 직전에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았고, 통일신라시
대에는 북방의 국경선이 확정됨에 따라 헌덕왕 18년에 패강장성 300리를 쌓았다고 한
다. 또한 성덕왕때 왜병을 막기 위해서 관문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그 규모도 매우 크
다.
  우리 나라 장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은 고려 때 쌓은 천리장성이다.
현종 때 착수하여 정종 10년(1044)때 완성된 천리장성은 서쪽으로 압록강 입구부터
동쪽으로 동해안 정평(定平)에 이르는 웅대한 규모로 3대에 걸쳐 12년이나 걸렸다. 산
등성이를 통과하는 부분은 토축에 의거하였고 평지는 석축인데 평지의 성벽은 높이와
너비가 각 25척이나 되었다. 대체로 초기에 축성된 여러 성들을 연결시켜 쌓았다. 천
리장성은 고려가 3차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받은 뒤 개경에 도성을 축조하고 나서 쌓
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때 여진을 막기 위해 의주에서 경원에 이르는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에 많은 행성을 쌓았는데 이를 통틀어 장성이라고 불렀다.

 Ⅲ. 結    論
 
  세계 각국에 있는 성곽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의 성곽도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고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며 외침이 많았던 우
리 역사속에서는 외적을 막아 국토를 지키려 했던 선인들의 끈질긴 호국의지의 선물
이다. 중국과 서양과 다른 형태의 우리나라의 성곽은 우리나라의 자연 형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에 거슬리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의 민족성도 남아 있다.
  방어적 수단으로 구축된 성곽들은 지금 평지에 산위에 바닷가에 얼핏보기에는 폐허
나 돌무더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흔적들은 우리에게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는 점을 인식하고 많은 연구와 보존에 힘써야 할 것이다. 미비한 성곽의 연구가 처음
일본 학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 나라 학자들의 연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연구가 대학을 중심으로 많이 되어가고 있다. 현재 충남대
학교 백제연구소와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백제지역의 성지조사와 충북대학교에서의
삼년산성·상당산성 등에 대한 정밀조사와 발굴, 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야주산성·경
주월성 등에 대한 발굴조사, 공주사범대학에 의한 공산성 조사, 전북대학교에 의한 익
산지방 산성의 조사, 전주시립박물관에 의한 전라도 지역 성지조사들이 시행되고 있
다. 또한 북한과 일본의 성곽연구결과를 비교하여 성곽의 기원과 발생, 성읍국가의 구
조와 성격, 축성술의 발전과정, 관방사상과 각종 공격·방어 시설의 발전과정, 성곽의
위치선전과 배치관계 등이 폭넓게 연구 되고 있다.
  성곽의 연구는 성곽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그곳에 담겨져 있는 우리 숨은 역사와
선인들의 삶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곽의 연구가 고대 자료의 미비한 점을 메
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성곽에 대한 연구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
이 성곽을 많이 훼손하고 있다. 이것은 성곽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이
글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성곽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 참고 문헌 ☜
『한국의 성곽』, 반영환, 1978, 세종대황기념사업회
『한국의 성곽』, 반영환, 1992, 대원사
 http://www.kohap.co.kr/together/event/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