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절
(97, 이희규)
Ⅰ. 序    論

  불교의 절(寺)이라는 곳은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닦고 불교의
교법을 설하는 곳을 말한다. 절을 다른 말로 사원·사찰·가람 등이라고도 한다. 절의
어원은 상가람마(Samagharama)로서,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남자와 출가한 여자,
재가의 남자신도와 여자신도의 사중(四衆)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역
(漢譯)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라 하였고, 줄여서 가람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전도 초기인 서기전 6세기 무렵의 인도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
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않고 숲 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서 좌선하
거나 유행(遊行)을 통하여 불법을 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 특성 때
문에 우기에는 이와같은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외출보다는 한곳에 모여 정진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우기를 피하려는 실리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교단이 비대해지는 데 따른 화합의 필요성이라는 이념적 이유에서 우기의 석
달 동안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안거를 하게 될 때 가장 필요한 일은 규율을 정하는 것과 공동으로 생활할 장소를 마
련하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절을 세우게 된 것이다.

Ⅱ. 本   論
 

.     1. 가람배치
  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당우와 탑이다. 특히, 탑은 불상보다도 그 건립
시기가 빠른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이미 서기전 2세기부터 건립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불교도입 초기부터 탑의 건립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신라말부터 특히 산지
가람에서는 간혹 탑을 조성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드물
기는 하나 탑이 절의 외곽지대로 밀려나거나 건립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있어서 탑과 불전은 가장 기본적인 구조물이므로, 우리 나라의 가
람배치를 논할때에는 탑의 배치형식에 기준을 두고 있다. 즉,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 두 탑이 불전 앞 동서로 대칭하여 세워지면 쌍
탑식(雙塔式) 가람배치, 탑이 하나에 금당이 셋일 경우에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
式) 가람배치라 한다. 이는 탑과 불전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 하는 차이점에
서 생겨난 가람배치이다. 탑이 예배의 주대상이 될 때에는 일탑식으로 배치하였고, 불
상이 주된 예배대상으로 될 때에는 쌍탑식 가람배치를 취하였다. 우리 나라의 사원은
불전중심으로 된 가람배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리신앙(舍利信仰)이 열렬하였기 때
문에 탑에 대한 숭배도 매우 컸다. 따라서, 양자를 동시에 숭배하는 가람배치법이 우
리 나라 가람배치의 골격을 이루면서 발전되어왔다.
  가람배치는 크게 나누어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탑원(塔院)·금당원(金堂院)·승
원 등이 함께 있는 복합형식과 탑이 있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형식, 그리고 탑이 없
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형식이다. 첫째, 탑원·금당원·승원의 복합배치 형식은 탑을
모신 지역과 불상을 모신 곳, 승려들이 거주하는 지역 등이 담장에 의해서 엄격하게
나누어진 형태를 가리킨다. 이른바 일탑가람식으로서 탑과 금당을 병립시키는 형식이
다. 따라서, 사상적으로는 탑신앙과 불상신앙이 동등한 비중으로 생각되는 가람의 경
영형태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경주 암곡의 고선사지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사
리의 발굴 결과 이곳에는 탑원·금당원·승원 등이 엄격히 분리된 것으로 추정되었
다. 삼국통일 이전에 이와같은 양식이 유행하였을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경주 낭산
의 황복사지도 이와같은 유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둘째, 탑이 있는 예배원과 승
원의 복합배치형식은 탑과 금당, 또는 탑과 금당·강당 등이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인
예배원과 기타 부속건물이 있는 승원으로 나누어진 배치형식이다. 그러나 예배원 안
에도 탑과 불적이 여럿 있는 경우와 하나씩만 있는 경우 등 다양한 가람배치를 가지
고 있다. 일탑일금당의 형식은 문경 봉암사, 이탑일금당은 불국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일탑다불전(一塔多佛殿)은 한 예배원안에 불전이 여럿 있는 경우로서, 경주 황
룡사지가 가장 대표적인 배치이다. 이밖에도 이탑다불전과 다탑다불전 등의 유형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로는 보령 성주사지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예배원 안에 여러 건
물들이 복합적으로 배치될 때에는 금당과 탑이 주로 관음전·비로전·영산전 등의 독
립된 불전들과 복합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 예배원은 중문을 중
앙에 두고 좌우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탑·석등·금당·강당 등을 입지조건에
맞게 배치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회랑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지켜져온 배치원칙
이었다. 이것은 신라시대까지 그대로 지켜온 신라가람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고려 이
후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산지사원(山地寺院)의 건립이 성행하게 되어 변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인왕문·천왕문 등을 배치하고, 탑과 주불전을 중심으로 하여
누각이나 기타 건물들을 그 둘레에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평지사원의 경우에
도 중앙의 핵심적 건물과 탑 이외에는 많은 불전들을 나누어서 건립하는 경우가 많았
다. 때에 따라서는 이 불전들을 각기의 군(群)으로 묶어서 관리하기도 하는데, 통도사
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 실례이다. 통도사는 이를 세 단으로 나누어 각각 상로전(上爐
殿)·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이라고 한다. 셋째, 탑이 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배치형식은 고려시대까지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부터 탑 없는 사원
의 건립도 있었는데, 이것은 둘째 방식에서 탑을 없앤 배치형식을 가리킨다. 이와같은
경우에는 예배원 안에 다양한 불전이 있어서 예배소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와같은
유형 외에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나라의 절이지
만, 기본적인 배치는 이 세가지 유형에서 파생되어 조금씩 변형시키거나 편의에 맞게
개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2. 불상
  우리 나라에 불상양식의 발달은 시대에 따라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데 대체로 그 변
화는 중국의 불상양식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4세기말 불교가 고구려(372)와 백제
(384)에 전해진 이후 불상이 만들어져 예배되었으나 현존하는 예들은 대부분 6세기
이후의 불상이다. 5세기초로 추정되는 금동불좌상이 뚝섬에서 발견되었으나 북위양식
이 강하여 중국의 전래품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강하다.
  고구려 불상의 대표적인 예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에 북위양식이 반영되어 있듯이
6세기의 고구려 불상은 북위 내지 동위의 영향을 받아 강직하고 예리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백제 불상의 대표적인 예는 부여 군수리사의 납석제불좌상과 금동보살입상
인데 같은 시기의 고구려 불상과 형식면에서 연관성을 보이지만 둥글고 부드러운 조
형성은 중국 남조의 상과 비교된다. 불교를 가장 늦게 공인한 신라는 공인 직후에 흥
륜사를 지었으나 6세기의 불상으로 남아 있는 예는 없다. 다만 566년 황룡사를 완성
하고 574년 금당에 금동장륙존상을 모셨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듯 현재 금당지에 남아
있는 거대한 대좌를 통해 당시의 불상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통일신라시대
에는 불교문화의 전성기로 불상 표현의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고 종교적인 뒷받침
으로 위엄있고 이상적인 불상이 조성되었다. 중국 당과 일본 나라의 불교문화와 밀접
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와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신
라의 불상은 국제적이면서도 신라적인 불상양식으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에도 역시 불
교문화가 발달하여 여러 지역에서 불상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
불정책으로 인하여 다른 시대에 비해 불상 제작이 별로 없었다.
  불(佛)이란 나집역본(譯本)만이 불(佛)이라 하고, 다른 유지본·진제본·급다본·의
정본 등은 불바가바(佛婆伽婆) 또는 간단히 바가범(婆伽梵)으로 번역하고 있다. 범어
는 Bhagavat로서 세존으로 번역되지만, 일반적으로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 부르는 호
칭으로 이 말이 사용된다. 佛이란 Buddha(佛陀)의 약칭이다.또한 여래(如來)라고도
한다. 즉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이다. 보편적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佛은 Sakyamuni를 가르키는 말이다. 석가모니란 Sakya족 출신의 성자(聖
者)란 뜻이다. 석가모니는 이 세상의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가 된 분이므로 응신불이라
고 한다. 석존 이전에도 연등불, 다보불 등의 과거7불이 있었으며 석가 열반 후 56억
7천만 년 후 나타나는 미륵불이 있다. 불교에서 삼세불이라는 것은 연등불, 석가모니
불, 미륵불을 가르킨다. 대일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같이 인간세계에 태어나지 않
는 부처도 있다. 이들 부처는 석가여래를 절대적인 부처로 믿는 소승교에서 발전한
대승교에서 말하는 부처이다. 대승불교 관에서 삼신불 사상은 응신불인 석가불과 보
신불인 서방 아미타불과 동방 약사불, 진리 그 자체를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집합 체
로 보며 부처의 으뜸인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본다.
3. 탑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며, 탑파의 준말이다. 그러므로 탑
파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가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
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하였다. 이 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 그
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어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
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였다. 사리 신앙은 이 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
며, 따라서 불탑의 기원 역시 이 때부터 시작된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지 100년이
지나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불사리를 안치한 8대탑을 발
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나누어 전국에 많은 사리탑을 세우고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음
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탑을 세우는 의식은 인도에서 비롯되어 8기의 탑을 쌓았는
데, 최초의 탑은 반구형을 이루어 마치 분묘와 같은 모양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탑은
본래 원분형을 이루고 있고, 차차 후대에 이르러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도 그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돌러 아름다운 조
각을 새겨놓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불교수용과 탑파의 건립 경로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인도·중국과 다른 독특한 탑파의 양식이 이루어졌다. 한국 고대 유적 유물
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적인 조형물이다. 이 가운데도 양과 질에서 볼 때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탑파와 불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상황은 탑파
와 불상이 불교의 예배대상으로서 불교도들의 신앙과 정성이 모두 이 두 곳에 결집되
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불교에서는 사원을 건립하는 목적이 이 탑파를 세우고 불
상을 봉안하여 이 탑파와 불상에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탑파는 불교
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고, 불상은 직접 그를 향
하여 예배를 올리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탑파와 불상은 가장 뛰어난 불교미
술로서 한국의 고대미술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
된 우리 나라의 탑파는 1000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이 탑들을 건조한 재료에
따라 분류하여 일반적으로 목탑, 전탑, 석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이라 칭하고 있
다. 우리 나라에서는 초기에는 목탑이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형식을 모방하여 누
각형식의 다층목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지역에서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비롯되고, 또한 신라는 전탑을 모방한 석탑에서
부터 시작되어 바야흐로 석탑이 우리 나라 탑파의 대부분을 차치하게 된다.
  시대에 따른 탑의 특징과 형식변화 첫째, 목탑은 우리 나라 초기 탑으로 추측되며,
목탑은 일본에서 유행했다. 우리 나라 목탑은 현존하는 것은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 뿐이며, 황룡사 목탑·고려 개경 7층탑·조선 연복사 탑이 있었던 것으로 전
해진다.
  둘째로, 전탑은 한국 탑파 중에서 이색적인 존재로 중국에서 유행했다. 현존하는 전
탑은 안동 신세동 7층전탑, 안동 조탑동 5층전탑, 칠곡 송림사 5층전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등이 있다. 전탑의 특징은 단층 기단이며, 옥개 추녀가 단족하고 옥개 상하
에 층단을 마련하고 감실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석탑은 고구려시대의 석탑은 알 수가 없다. 백제탑은 한국의 석탑의 시원이
라 할 수 있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
과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뿐이다. 초기 석탑인 이 2기의 각 부를 살펴봄으로써 석탑
의 발생과정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탑들은 목탑양식의 석탑으로 백제에서 석탑
보다 목탑이 앞서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이 두 탑에서 건조 재료가 화강암이고, 가구
수법이 매우 견고한 점에 주목하게 된다. 신라에서의 석탑 발생 사정은 백제와는 다
르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탑의 모방에서 출발하였다고 보겠다. 그러
나 그 받침의 형식 등이 전탑의 양식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
의 양식 발생사적인 계열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에서는 화강암을 사용하
였으되 목탑계 양식을 따랐고, 반면에 신라에서는 화강암을 혼용하였으나 안산암을
주재로 삼아서 전탑계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국의 초기 석탑은
그 기본 평면을 정방형으로 하는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양국이 똑같이 석재를 사
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7세기 전반인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와 신
라에 세워진 석탑의 초기 형태와 양식은 서로 달랐지만, 얼마 후에 두 지역의 석탑은
같은 유형의 탑으로 서로 합쳐지게 된다. 그리하여 참된 의미의 한국 석탑의 전형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라 석탑의 전형이며, 그 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삼국 통합
이었다. 통일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가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변
형이 나타나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고려는 한반도를 통일한 후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불교적인 조형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탑파 또한 많이 건
립되었다. 고려 초기문화는 신라 하대의 지방세력들이 바로 고려 초의 호족 연합 정
권 시대의 지배세력이기에 지방적 색채가 농후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탑의 건립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였다. 이 시기의 석탑은 고려 이전의 석
탑을 모방하였다.

Ⅲ. 結    論

  불교가 유입되면서 우리 나라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불교는 정치·경제·사
회의 모든 면에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불교의
유입과 동시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절이다. 절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교를 널
리 전파시키려는 목적을 띠고 세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절은 가람배치라는 독
특한 형식에 따라서 지어졌으며 여기에는 탑과 당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불상과 탑은 절에서는 빠질 수 없는 불교신앙이자 불교의 미술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절이 언제나 이익만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다 보니 악영향도 많이 끼쳤다. 절이 단지 지배층을 위한 장소로 변하기도 하였고
토지를 독점하기도 하고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를 혼란 속에 넣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절은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우리 나라의 서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
히 일제강점기때에는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아낌없는 투쟁을 하였다. 그리하여 아직
까지도 우리 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통사』, 정의행, 1992, 한마당
 『한국의 탑』, 장충식, 1992, 일지사
 『한국의 불상』, 황수영, 1993, 일지사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http://www.buddhis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