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향교
(97, 이영숙)
I. 序    論

 향교(鄕校)란 고려(高麗)시대에 설립되기 시작하여 조선(朝鮮)초에 와서 전국각지에
보급되었던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교생(校
生)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의 향교(鄕校)제도를 살펴보면,
 "本國鄕校之制 廟學同宮(본국향교지제 묘학동궁)"
이라 하여 문묘(文廟)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향교(鄕校)는 공자(孔子)와 선현(先賢)을
모시는 문묘(文廟)와 강학(講學)장소인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교생(校生)들의 거접(居
接)장소인 동(東)·서제(西 )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향교(鄕校)의 교육 내용이 유교적인 내용에 한정되어 있고 향교(鄕校)에의 입
교에 신분상의 제한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때 당시에 향교 교육을 받은 자의 수에 있
어서나 그 교육의 보급 지역 면에 있어서 향교는 다른 어떤 교육기관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고려(高麗)·조선(朝鮮)의 교육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향교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II. 本    論

1. 鄕校의 성립
 일반적으로 향교가 처음 설립된 것은 고려(高麗)시대로 보고 있으나, 그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중앙집권화를 지향하는 고려조정은 성종(成宗)대에 오면 중앙관제를 개편함과 동시
에 지방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비로소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고, 지방세
력의 수중에 있던 지방학교를 일단 폐쇄하면서 지방 교육 제를 다시 중앙의 통제하에
재편성하였다. 즉, 정치이념으로 수택(授擇)한 유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성
종(成宗) 6년 8월에는 전년(前年)에 귀향시킨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케 한다는 전제하
에 경학(經學)·유학(儒學)박사를 12목에 파견하는 한편, 8년 4월에는 이들을 독려(督
勵)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교수가 생도를 기르자면, 장소가 있어야 할 것이요
규모는 어떠했던 간에 이 교육 시설은 향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향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을 봉사(奉祀) 하면서 지방 자제
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지방의 관립학교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향교란 개념은 단순
히 '지방 학교'라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이 명칭이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인종(仁宗)
20년 2월이 처음으로, 그 이전의 것도 향교로 규정할 수 있겠냐는 문제가 있으나 성
종(成宗) 2년 공자묘도(孔子廟圖)와 72현찬기(賢贊記)가 전래되고 유학을 정치이념으
로 삼고 이를 확대 보급하려던 성종(成宗)의 정책으로 보아 지방학교에 공자(孔子) 및
그 제자들을 봉사(奉祀)케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지방학교라는 의미에서 향교라
칭한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종(成宗)이후의 지방 학교를 향교라
할 수 있다.

2. 鄕校의 구조와 기능
  향교의 기능은, 중앙의 국학과 같이 선성(先聖)인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
리 나라 선현을 제사 지내는 봉사(奉祀)기능과 자제를 교육하는 교학(敎學)기능의 두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공자(孔子)와 선현을 모신 사당(祠堂)과 자제들을 가
르치는 학당(學堂)인 명륜당(明倫堂)은 향교구성의 기본요건이었다. 유교이념으로 지
배된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향교는 고을의 대소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시
설·규모·학생정원·생도의 법제적 지위 등이 완전한 정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시
설을 보면,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을 모신 대성(大
成)전이 북쪽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잡고, 좌우로 선현을 모신 동서무(東西 )
가 있고, 담을 사이 하여 교육장인 명륜당(明倫堂), 그 좌우로 유생의 기거(寄居)소인
동서제(東西 ) 남쪽에 대문에 딸린 행랑(行廊)·주방(廚房)·도서실(圖書室)·제기(祭
器)보관소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며, 향교에 따라서는 학문연구의 몰두에서 오는 답
답하고 지루함에서 벗어나 맑은 기운을 쐬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누각(樓閣)이
있었다.
 
 

3. 鄕校敎授와 生徒
 1)향교교수
  향교가 있었으면 교육자와 피 교육자 간에 교수관계 즉 교육이 실시되었을 것이다.
이미 고려(高麗) 태조(太祖) 13년 왕이 서경에 行幸(행행)하여 수재정악(秀才廷顎)을
서학(書學) 박사로 삼아 육부(六部)생도를 가르치게 했으니, 이때에 이미 지방학교에
교수를 두지 않았나 싶지만 정악(廷顎)이 그 지방 사람인지 중앙에서 파견된 인물인
지도 분명치 않다.
  그러다가 전국규모로  중앙에서 지방에 교수를 파견한 것은 성종(成宗) 때인바, 즉
성종(成宗) 6년 3월 전년(前年)에 귀향시킨 생도들의 교육을 담당케 한다는 명목으로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搏士) 각 1인을 파견한 것이 최초이다. 이
중에서 의학박사(醫學搏士)는 의학생을 교육하는 외에 지방의 의료업무를 맡았을 가
능성이 크고, 경학박사(經學博士)가 지방 생도의 유학교육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면
계속 증가되고 있는 고을 향교의 교육은 누구에게 맡겨졌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예종
(睿宗)대에 오면 현에까지 향교가 보급되었거나 보급시킬 계획이었으나 당시 실정으
로 모든 고을에 교수를 파견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지방관에게 학사(學事)를 겸영
(兼營)시켜 교수부족문제를 해결하려 하게 된다. 고려(高麗) 전기에는 급제(及第)자가
지방의 사록(司祿)·장서기(掌書記)·수령(守令)으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 환로(宦路)
였으니 이들이 지방교육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면 후기 향교 교수
문제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무신(武臣)난 이후로 국사가 다단(多端)하여 지방교육에 거의 관심을 둘 여유가 없
었으므로 파괴된 향교 시설마저 복구하지 못하는 처지에 향교에 교수를 파견할 수가
없었다. 충선(忠宣)·충숙(忠肅) 이후에는 문신수령들에 의해 향교가 복구(復舊)·중수
(重修)되었고 교육까지도 수령이 직접 책임을 맡아야만 했다.
  고려시대 향교 교수의 유형을 분류하면 첫째, 수령이나 지방관원이 직접 교육을 담
당하는 경우로,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지방관으로서는 매우 벅찬 일이어서 영해부(寧
海府) 향교에서는 '약간 장성한 자를 뽑아 가르치게'했으며, 이러한 풍습은 시골 서당
에서 최근까지 볼 수 있던 현상이다. 다음, 사장(師長)을 초빙하는 경우도 충선(忠宣)
왕대의 강릉(江陵)향교와 같이 승려(僧侶)를 맞아오는가 하면 공민(恭愍)왕대의 강화
(江華)향교에서와 같이 유사(儒師)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기에 내려오면서
불교의 폐단이 심화되고 성리학의 그 배타적 속성은 불교를 이단시하기에 이르는데,
공민(恭愍)왕대의 강화(江華)향교에 유사(儒師)를 초빙하는 것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향교의 교관 파유원칙(敎官 派遺原則)은
고려말기의 교관 파유원칙을 그대로 습용하였다.
 2)향교생도
 고려 시대의 향교 생도는 일단 8품 이하의 자(子)와 서인(庶人)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향교입학에 대한 신분상의 제약은 고려초기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성종(成宗) 6년 지방에 유학교수를 파견하면서 '장리(長吏)나 백성(百姓)자제'의 향
교입학을 권유하고, 그들은 계수관시(界首官試)만 거치면 예부시(禮部試)에 직부(直赴)
할 수도 있었다. 문종(文宗)대에 오면 제술(製述)·명경(明經) 응시자는 부호장(副戶
長)의 손(孫) 이상과 부호정(富戶正)의 자까지로 한정하여, 일반 백성은 제외되고 있
다.
  조선시대 향교의 생도인 교생이 자격을 살펴보면, 조선사회는 유교주의에 입각한
엄격한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에 입교할 교생의 자격은 법제상으로는 구체적으로 명시
한 곳이 없었지만 1334년(태조(太祖) 3년) 4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토관(土
官)자제들이 향교교육을 통하여 국가고시에 응시토록 한 것으로 보아 교생의 신분이
지방(地方)토족의 자제여야 입교할 수 있었다. 또한 교생들이 향교에 부교(赴校)하는
목적이 과거준비에 있었기 때문에 교생의 자격은 양반자제로 한정되었다고 할 수 있
겠다. 그런데, 1431년(세종(世宗) 14년) 10월에 이미 양인신분에 해당하는 신 백정(新
白丁)의 향교입학이 허락되고 있는 기록이 보이며 중종(中宗)때에 이르면 양반자제이
외의 자가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향교 교생에게 부여된 군역면제의 특전을 이용하려
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는 양인의 자제가 입교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리하여 향교의 교생은 점차 양인자제들로 바뀌어 가게되는데 이들 양인신분의 교생들
은 향교에 부여된 특전인 군역의 무를 면제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향교를 통하여 국가적 제도의 공인 하에 신분의
상승을 도모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4. 敎科課程
  향교교과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없으나 고려시대 중앙관학의 유학부인 국자(國
子)학·태학(太學)·서문(西門)학이 신분에 따라 구분된 것이어서 교과상의 차이는 없
었고, 향교 또한 제술(製述)·명경업(明經業) 지망생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유학 부
와 같은 교과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인종(仁宗)대에 제정한 유학 부의 교과과정
은 기본 자서(基本字書)와 공통필수과목인 논어(論語)·효경(孝經)을 읽고, 9경(經)을
익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문교수도 없는 향교에서 이 방대한 과목을 모두
교수 했을 리는 없고 과문(科文)중심의 교육이 실시되었을 것이다. 과거가 처음 실시
된 광종(光宗) 9년부터 성종(成宗)대까지는 시(詩)·부(賦)·송(頌)·책(策)으로, 목종
(穆宗)대부터는 예경(禮經)이, 예종(睿宗) 14년부터 충숙(忠肅)왕대까지는 6경이 등장
하고 있으며, 명경업(明經業)에서는 5경이 출제되고 있다. 과업(科業)에 있어서 지방응
시자들에게 가장 큰 난관은 시부등 문학수련이었으니, 왜냐하면 경서는 주소(註疏)를
참고하면서 독학이 가능하지만, 과문의 제술(製述)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대표적 과문을 모아 놓은 과문수련용 교재가 있었
던 것 같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한·당·송의 절구만도 아닌 요령위주의 과
문체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향교교육의 목적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인재양성과 민풍(民風)순화에 있
었기 때문에 교과내용은 유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향교에서 사용한 교과로는
소학(小學)·삼강(三綱)행실·사서삼경(四書三經)·성리(性理)대전·여씨(呂氏)향약·
근사(近思)록·심경(心經)·제사(諸史) 및 중국 선유(先儒)의 제설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교과 중에도 가장 중요시했던 교과는 소학(小學)이었는데 이 소학(小學)은 학도
의 도의심(道義心)이나 사회윤리의 대립을 위한 것으로써 교재로서의 의미를 넘어 기
성학자들 까지도 필독의 윤리 서로써 강조되었다.  소학(小學)과 더불어 중요하게 여
겨졌던 교과로는 삼강(三綱)행실과 이륜(二倫)행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도덕·윤리
과목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III. 結    論

  고려시대의 향교는 무신정권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성
종(成宗)으로부터 예종(睿宗)말까지로, 성종(成宗) 6년(987) 12목에 유학교수를 파견하
면서 설치되기 시작한 향교는 문종(文宗)대에 와서는 지사(知事)군 이상에 교수가 파
견되는 등 괄목할 발전을 하여, 대거 진출하는 향공(鄕貢)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
게까지 이르렀다. 그 수 예종(睿宗)대에는 지방관 중 문과출신자는 학사를 주관케 함
으로써 향교교육이 보다 조직적으로 운영되어 군 현에까지 보급되었고, 인종(仁宗)대
에는 속현까지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지방관학의 완성기에 이르렀다. 후기는 다시 무
신(武臣)집권기와 몽고(蒙古)간섭기 이후 부터 고려말까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고려왕
조는 무신정권이 등장하면서 심한동요를 일으켰고, 지방교육(향교) 또한 큰 타격을 받
았다.  많은 문신들이 화를 당하거나 산곡으로 피신하는 형편이었으니, 중앙에서 지방
교육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지방교육의 발전이 아니라 그
시설마저 황폐해 가는 향교교육의 침체기였다.  그후 몽고간섭기로 접어들면서 내우
외환이 어느 정도 종환(終患)되고 사회도 다시 안정을 되찾자 위정자들도 교육에 눈
을 돌리게 되어 중앙에서는 국학과 사학이 부활하고, 지방에는 교육에 관심 있는 문
신수령들에 의해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향교가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앙에
서 교수를 파견할 형편도 되지 못하여 수령이 공무의 여가에 직접 가르치거나 승려나
유사를 초빙해 오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교육의 질적인 면에서의 성과
는 알 수 없으나 수령들의 독훈에 의해 연한·정원의 제한도 없이 고을 자제들을 모
집하여 실시한 당시의 교육은 지방교육의  확대·보급이라는 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향교의 부흥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각지에 향교가 세워졌고 그
성과도 상당하였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제도상으로 볼 때 성균관과 똑같은 것으로서
다만 그 규모만이 작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중앙의  교육을 성균관이 담당
했다면 지방의 교육은 향교가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 참 고 문 헌 ☜

高麗時代의 鄕校』,朴 贊 洙, 1982년, 高麗大學校 大學院.
 『朝鮮時代 鄕校의 發達과 現況에 관한 硏究』, 朴 興 圭, 1989년,
             全南大學校 敎育大學院 敎育學科 敎育行政 專攻.
 『朝鮮時代 敎育機關의 運營과 財政 構造에 관한 硏究』, 宋 炳 旭,
       1986년,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敎育行政 專攻.
 『麗末鮮初의 江陵鄕校』, 崔 聖 洙, 1985년, 高麗大學校 敎育大學院
              歷史敎育科政.
 WWW. kangung. kangwon. kr.
 WWW. cybercity. shinbro.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