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호남사림

 

20140361 윤혁준

 

 

. 서론

 

. 호남사림의 형성

1. 호남사림의 정계진출과 사회

1) 연산군의 사화

(1) 무오사화

(2) 갑자사화

2) 호남사림의 집권

2.명종 이후 호남사림의 동향

 

. 결론

 

 

. 서론

여말선초 때 고려조정은 이색과 정몽주를 필두로 한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이 중심이 된 급진 개혁파로 크게 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색과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급진 개혁파들은 조선의 훈구파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대로 이색은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살아남은 온건 개혁파들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개창에 반대하며 고려의 신하로써 충절을 지키고자 지방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사림세력을 형성하였다. 후에, 훈구의 세력이 과해지자 성종은 그들을 견제하고자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종직 등 이색의 제자들을 중앙 정계에 등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점차적으로 사림 세력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연산군 시기부터는 호남지방의 사림들이 정계에 서서히 등장하였다. 호남사림들이란 말 그대로 호남 지방에서 은둔하여 살았던 사림세력들을 일컫는데 왕조교체시기 두문동에 은거하였던 범세동과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된 김종서의 자손인 김효우 등도 대표적인 호남사림세력이다. 이들이 호남지방을 은거지로 택한 데에는 중앙인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가 좋으며 물산도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연산군 시기 정계에 점차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이 시기 일어난 두 사화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는 호남사림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호남사림의 형성

 

1. 호남사림의 정계진출과 사화

 

1) 연산군의 사화

 

(1) 무오사화

1498 연산군 4, 사림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첫 번째 사화가 일어났다. 이는 연산군이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사국(史局)을 열었는데, 당시 사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던 데에서 기인하였다. 이를 빌미로 훈구세력은 연산군을 꾀어 김일손과 그 일파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고, 김종직을 부관참시 하였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의 권력이양의 수단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유자광은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임을 당하게 하고 권력을 쥐었으며, 이극돈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실록을 편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극돈은 사초(史草)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 당했고, 오히려 유자광에게는 득()이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이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몰아내고 권력에 빌붙기 위해 왕을 꾀하고 실록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2) 갑자사화

두 번째로 일어난 갑자사화는 훈구와의 대립에서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오사화와는 다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문제로 훈구와 사림들이 모두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선왕인 성종의 비였던 윤씨는 질투와 투기로 왕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다가 폐비가 된 후 사약을 받은 인물이다. 이 일이 권력을 탐하던 임사홍에 의해 연산군이 알게 되자 그는 훈구와 사림의 껄끄러운 세력들을 한꺼번에 제거하였다. 어떻게 보면 임사홍의 고발이 이 사화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연산군은 성종 때부터 강해진 언관(言官)의 권한에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더욱 전횡하려던 연산군이 기획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소생 아들들을 죽이고, 윤씨 폐비를 주장했거나 방조 또는 침묵한 이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등 10여 명은 사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 당했다. 또한 이는 실정을 거듭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던 연산군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통해 폐위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2) 호남사림의 집권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호남사림은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의 세력 확대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당시 호남사림은 기묘사림12%를 점하였다.

또한 이 기묘사림들로는 1507 중종 2, 진사시에서 1등으로 합격한 박우와 같은 해 문과에 장원급제 유옥, 1526 중종 21년에 문과중시에서 장원을 한 박상, 그 이외에도 나세찬, 고경명, 정철 등이 있다.

아울러 호남사림은 훈척에 대항하여 사림을 정치적으로 결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중종 7, 소세양의 소릉부위(昭陵復位) 주장과 중종 10, 박상, 김정 등의 신비부위소(愼妃復位疏)였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되면서 폐릉이 되었으며, 신비는 중종의 왕비로 중종반정 때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살해되자 반정세력에 의해 강제로 폐위 당했다. 따라서 이 두 주장은 두 왕비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다시 원상태로 복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현덕왕후 복위는 1년간에 걸친 논쟁 끝에 뜻을 이루었으나, 신비의 복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상과 김정은 유배되었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그리고 그 이후의 고변사건으로 인해 김식, 최산두, 양팽손, 박상, 고운, 윤구, 유운, 유성춘 등 많은 사림 인물들이 유배나 파직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으나, 오히려 대다수 호남사림은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 명종 이후 호남사림의 동향

명종 대에 이르면 서경덕과 이황과 조식학파가 형성되면서 호남사림 역시 학문 경향에 영향을 받거나 대응하면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인맥에 학맥으로 고려한다면 호남사림은 크게 서경덕 계열과 송순계열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서경덕 계열에는 서경덕 문인이었던 박순, 정개청, 노수신, 윤행, 윤의중, 박응남 등이 활동하였고 최부 계열 또한 여기에 속해있었다. 그리고 송순계열에는 송순, 김인후, 나세찬, 임형수, 임억령, 양산보, 양응정, 유희춘, 오겸 등이 활동했는데 최부계열을 제외한 김굉필, 송흠, 박상 그리고 이항계열이 여기에 속하였다.

서경덕과 송순 두 계열은 명종 말부터 서서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다가 선조가 즉위한 이후에 노수신, 유희춘, 김난상 등이 을사피화인(乙巳被禍人)으로 복관하여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노수신, 박순, 윤의중, 박응남과 유희춘, 기대승, 이후백, 오겸, 송순 등 선조 초에 고위관료로서 활약했던 인물 중의 대다수가 서경덕, 송순계열의 호남사림이었던 것이다. , 사림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시키는 방법의 하나였던 경연을 주도한 것은 유희춘과 기대승이었고, 정치적으로 홍담, 김개 등 구신(舊臣)들과 대립하면서 사림 중심의 정치를 확립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은 을사복관인인 노수신과 박순이었으며 여기에 오겸과 송순 등 또한 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선조 8년 동서분당을 계기로 중앙정계가 동인과 서인, 서경덕, 이황, 조식학파와 이이, 성혼학파로 정치적, 학문적으로 나뉘면서 호남사림도 서경덕 계열은 동인으로, 송순계열은 대부분이 서인이 되어 중앙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서경덕 계열의 중심 인물은 이발, 이길 형제와 정개청 등이었으며 송순계열의 중심 인물은 정철, 고경명, 김천일, 이후백 등이었다.

특히 이발이 동인의 영수로 활약하고 정개청이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등 서경덕 계열은 송순계열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선조 22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몰락하게 되고 정철을 중심으로 한 송순계열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의 주축은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김천일, 최경회, 변사정, 양산숙 등 대부분 송순계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경덕 계열은 주로 관군인 이순신, 이복남 부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전쟁 이후 송순계열의 정치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철 등 주요인물들이 죽고 인조반정을 경기, 충청도지방 서인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서인의 학문이 이이 이후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시가, 문학 활동에 열중하였던 호남사림의 학문적 기반은 점점 약화되어 그 독자성을 상실해가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인조 대에 가면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 고경명의 아들인 고용후와 손자인 고부천 등이 중앙정계에서 활동하였으며 안방준 등이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쓰는 정도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호남지방이 모두 서인에 의해 지배된 것은 아니었으며 해남의 윤선도 집안 등은 명맥을 유지해 17세기 중후반 북인계통세력과 함께하여 서인과 대립하였다. 또한 박소집안의 후손인 박세채도 노, 소론이 분립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같은 집안의 박세당은 정통 주자성리학과는 다른 학문을 하였기 때문에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들 집안은 모두 16세기 서경덕 계열에 속했던 집안으로 학문 차이에 따른 세력분화가 조선 후기에도 계속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양득중과 임상덕 등도 윤증, 박세채 등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소론화 되었다. 서경덕 계열의 근거지였던 나주는 영조 대에 임상덕 등 나주 임씨를 중심으로 소론의 근거지로 변화하여 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 등으로 노론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이 역시 이전의 지역적 특성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 결론

결론적으로, 정쟁에 의해 받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호남지역으로 이주해온 호남사림은 연산군 때부터 서서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당시 일어난 두 사화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을 통해 본격적으로 흥기하였다. 비록 군대를 일으켜 반정을 하려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그만두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이후 과거시험을 통해 다수의 인재가 정계에 진출하여 반정을 일으킨 기묘사림들 중 12%를 차지하며 정치·학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호남사림은 크게 서경덕 계열과 송순계열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선조 이후 이조전랑 문제로 중앙정계가 동인과 서인으로 양분되면서 서경덕 계열은 동인으로, 송순계열은 대부분이 서인이 되어 중앙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도 대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사림이란 세력 중 호남지역의 사림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전혀 없었고, 때문에 이번 주제도 다소 생소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찾아본 결과, 호남사림이 정철, 윤선도와 같은 낯익은 인물들이 있으며 선조 초년에는 중앙정계를 주도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호남사림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정계에서 소외되다시피 되었지만, 정치·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만큼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가치가 큰 부분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청아출판사, 2009.

이성무, 단숨에 읽는 당쟁사 이야기, 아름다운날, 2014.

고영진,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 혜안,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