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비교


20110183 김진실

20120169 김은선

20120203 전유찬

 

-목 차-

 

 

1. 서론

2. 본론

1) 하회마을

(1) 하회마을 형성 배경

(2) 하회마을 역사

(3) 하회마을 전통가옥

2) 양동마을

(1) 양동마을의 형성 배경과 유래

 

(2) 안동마을 역사

(3) 양동마을 전통가옥

3)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비교

(1) 공통점과 차이점

 

3. 결론

 

※참고문헌

 

 

     

1. 서론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주의 양동마을은 세계문화유산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만큼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문화를 수백 년간 이어 내려온 역사적 공간이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씨족마을은 성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하여 이루어진 정주 형태로서, 조선 전기 이후 재산과 제사의 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씨족마을에는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에 주도권을 가지며, 벼농사가 경제적인 기반이 된다.

 두 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두 가지 전형을 각각 대표한다. 하회는 주변지역으로부터 새로운 정주지를 찾아 이주하면서 정착하게 되는 개척입향의 경우이고, 양동은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는 처가입향의 경우인데, 조선시대 씨족마을 형성의 대표적인 두 모습을 보여주며 두 마을에서는 입향 이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그 후 계속해서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두 마을은 조선시대 명망 높은 씨족마을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이 두 마을의 입향 초기 선조들은 국가와 유림에서 인정하는 불천위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씨족적 결속이 강화되어 현대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을 순찰하거나 여행하는 선비들에게 이 두 마을은 주요 방문지 중 하나였으며, 영남에서 손꼽히는 가문으로서 두 마을 문중 간에 빈번하게 혼인이 이루어졌다. 마을 내의 노거수는 6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주며 입향기인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남아있고, 각종 기록문서들을 가지고 있어 입향 이후 전기간에 걸쳐 마을과 관련된 풍부한 증거를 남기고 있다.

 17세기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지나 지도에 두 마을의 이름과 옥연정사, 병산서원, 옥산서원 등이 기재된 사실에서 당대에도 이미 두마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두 마을은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씨족마을 중에 마을을 구성하는 유형적, 무형적요소들이 잘 남아 유지되고 있으며, 일찍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어 왔다. 가옥 뿐 아니라 서원, 정사, 서당 등 학자를 제사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유교관련 시설이 보존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제사의례와 공동체적인 결속을 위한 마을 동제 및 공동체놀이(선유줄불놀이1), 줄다리기)가 전승되어오는 점도 씨족마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씨족마을이 수백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지형적 특징과 역사, 두 마을 간의 차이와 공통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본론


1) 하회마을


 (1) 하회마을의 형성배경

 하회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한다. 풍천면은 동쪽으로 풍산읍과 접하고 있으며, 낙동강이 휘감아 서쪽지역으로 나가 평야지대를 이루어 산지가 대부분인 안동에서 볼 수 없는 풍산들 평야 통해 하회마을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하회마을은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잠시 동북쪽으로 선회하여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터 잡은 마을이다.2) 마을을 둘러싼 주변의 산수는 동북으로 마을의 주산인 꽃뫼 곧 화산이 든든히 뒤를 받치고 남쪽은 화천을 사이에 두고 영양의 일월산에서 그 맥이 흘러온 남산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같은 일월산의 지맥인 원지산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에는 강 건너 벼랑처럼 우뚝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는 부용대3)가 있으며, 동쪽은 영양·청송과 통한다. 무엇보다도 긴 타원 지형에 자리 잡은 마을을 낙동강이 감싸 흐르니, 이러한 형국을 두고 태극형 자리 또는 산태극수태극이라 한다.4) 이렇게 물이 돌아나간다고 해서 ‘물돌이동’ 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하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풍수에 있어서 물은 계수즉지5) 작용으로 생기가 물줄기를 만나면 멈춘다는 풍수적 의미를 갖고 있다.6)


 (2) 하회마을 역사

 하회마을은 안동의 사족 가운데 명문대가로 손꼽히는 풍산류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집성촌으로 풍산류씨를 하회류씨 라고도 불러 하회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회가 처음부터 류씨 마을은 아니었다. 고려 말 하회탈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김해허씨가 화산 남쪽 기슭의 거묵실골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뒤에 들어온 광주안씨는 화산 북쪽 기슭인 행개골7)에 삶터를 이루고 있었다. 풍산류씨는 풍산8) 상리에 대대로 살다가 조선 초에 이곳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은 3대에 걸쳐 계속 풍산현의 호장을 지냈고 시조 류절의 증손 류백이 고려 충렬왕 때 은사(로 급제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7세조인 류종혜(서애 류성룡의 6대조)가 조선 초에 가선대부 공조전서를 역임하면서 비로소 풍산류씨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류종혜가 벼슬을 마치고 낙향하면서 하회에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서애의 9대조 류난옥이 어느 높은 풍수지사를 모시고 자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만한 명당을 찾아 나섰는데 지관이 하회를 소개하면서 3대에 걸쳐 적선을 한 뒤라야 후손들이 살 수 있다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들은 류난옥은 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을 짓고 지나가는 불쌍한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었으며 이일은 그 아들과 손자 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드디어 손자인 류종혜가 공덕으로 인심을 얻어 이주할 수 있었고 류씨는 이미 허씨와 안씨가 화산 기슭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그곳을 피해 낮은 지역인 진혈터에 자리를 잡았으며9) 풍산 류씨는 조선 중기 이후 관직과 학문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마을의 중심이 자연적으로 하회로 집중되게 되었고 허씨와 안씨는 점차 세가 약해져 하나 둘 마을을 떠나게 되어 18세기 이후에는 오로지 풍산 류씨들 동족 마을로 남게 되었다.


2) 하회마을 전통가옥


그림입니다.

 (1) 양진당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의 종택으로 1606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산 류씨 대종택이기도 하며 보물 제 30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겸암의 6대손인 류영의 호가 양진당인데, 당호를 집의 이름을 삼았다고 하며 어릴 때 이름에서 것이라 한다. 중문채와 대문채가 연결되어 긴 행랑채를 이루고 행랑채 너머로 왼쪽이 안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후 다시 지어졌고 대저택으로 99칸이라고 하나 지금은54칸이 남아있고 사랑채 뒤에는 사당이 있는데,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불천위사당10)으로 높은 지붕에는 입암 류중영의 위패를 모시고 옆에 사당엔 겸암 류운룡의 위패를 모셔져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충효당.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26pixel, 세로 272pixel  (2) 충효당

 충효당은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보물 제 414호로 지정되어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고 국난 극복에 힘쓴 서에 류성룡의 종택으로 후손과 문하생들이 류성룡의 유덕을 기리기 지었다. 충효당 편액은 전서체로 그 글씨가 특이하며 글씨체는 류의하가 사랑채를 중수할 때 당대 명필가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것이다. 당호를 충효당이라 짓게 된 연유는 서애가 임종할 당시 자손들에게 남긴 시구절인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서체의 멋들어진 선은 남촌댁의 사당 담장 흙벽에도 발견된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북촌댁.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79pixel, 세로 339pixel  (3) 북촌댁과 남촌댁

 북촌댁은 양진당과 함께 동향으로 하회마을 북촌을 대표하는 집이며, 72칸으로 하회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기도 하다. 이정표에는 화경당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의 북촌댁은 조선 정조21년(1797)에 류사춘이 사랑채와 좌우 익랑(날개체), 대문채를 건립하였고 그 후 철종 13년(1862) 경상도 도사를 지낸 석호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채, 사당을 지었으다. 큰 대문채의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크게 안채, 별당, 대문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가옥 규모가 커서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작은사랑인 수신와가 있고 우측에 커다란 해서체 글씨로 북촌유거라 쓴 큰사랑이 11) 중간사랑은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곳이고 별당채에 은퇴한 주인이 여생을 보낸 곳이 지어져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 48호로 지정되었다.

 남쪽댁은 충효당 뒤편에 있으며 향조좌랑을 지낸 류기영이 조선 정조21년(1797)에 지어 대문채, 몸채, 사당채, 별당채, 정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954년의 화재로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사당만이 남아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주일재.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45pixel, 세로 327pixel  (4) 주일재

남촌 충효당 뒤편 골목에 면한 남향집으로 사랑채, 문간채, 안채, 광채, 사당채를 세우고, 담장을 방형으로 둘러치고 사이사이에 사잇담을 쳐서 여러 개의 마당을 이루고 있다. 골목에 면한 담장의 중간 끊어진 곳으로 들어서면 정면 북쪽에 사랑채와 문간채가 남향하여 一자로 늘어서 있다.

 사랑채인 주일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왼쪽인 서쪽에 사랑방 2칸, 오른쪽인 동쪽에 대청 2칸을 두었는데, 전면은 창호나 벽체 없이 개방하였다. 문간채는 사랑채 서쪽으로 연이어 있는 一자집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인데, 사랑채 서쪽에 대문간 1칸, 다음 작은사랑 2칸, 불때는 아궁이 1칸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선 안마당의 정면 북쪽에는 안채가, 왼쪽 서쪽에는 광채가, 또 동쪽에도 광채가 자리잡고, 동쪽 일각문을 나서면 사당마당에 이른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서쪽에서부터 부엌 1칸반,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2칸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방과 대청 전면에는 반칸폭의 툇마루를 두었고, 건넌방은 앞뒤의 두 방으로 나누어져서 윗상방과 아랫상방으로 불린다. 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동향하였고, 사당은 1칸이다.

 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중앙의 앞뒤기둥은 두리기둥이다. 납도리의 3량집으로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3량가구로서 홑처마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12)


2) 양동마을


그림입니다.  (1) 양동마을의 배경과 유래

 양동마을은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면 양동리에 위치해 있다. 경주에서도 제법 먼 거리로 버스로 30여 분 정도 걸리며, 경주 기점으로 20Km정도 된다. 주변에는 형산강이 흐르고 있다.13) 양동마을은 전통마을이 다 그러하듯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어진 선비들이 사는 마을로 알려진 곳인데, 소문난 인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한자로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으로 생겼고, 산세는 경주의 재물이 형산강의 안착천에 실려 양동마을로 다 들어오는 형국이라고 한다. 상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본다는 배산임수형 인데, 마을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풍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임신한 가 새끼를 낳은 형상으로 땅의 기운이 勿자 어깨 부분에 모두 응집된다고 한다. 14)

 마을은 내곡, 몽봉골, 거림, 장터골을 중심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勿자 능선으로 중심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勿자의 능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낮고 북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데, 각 능선과 그 사이의 진입로가 있는 골짜기들은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즉,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으로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이 마을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마을의 사회적 구조와 신분적 질서에 따라 서 주택들이 적절히 입지를 정한 것으로 보여지며 마을의 뒷배경이라 할 수 있는 주산인 설창산은 마을 앞을 감싸고,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고 있어, 마을안의 공간을 아늑하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바깥에서 는 쉽게 마을의 내부를 볼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보호가 용이하게 되어 있다. 국의 방향축과 시야의 방향은 주산인 설창산으로부터 마을의 입구로 이루어지며, 마을 서쪽의 설창산 넘어에 있는 안강평야에서는 북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기계천과 남으로부터 경주를 거쳐 흘러온 경주천이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형산강을 이루러 동해로 빠져나가는 지세를 가지고 있다. 이중환의 배리지에서 이 지역의 지형은 외동고조형으로 경주부를 싸고 돌아온 산세가 다시 윗 갈래에서 나오는 설장산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라 하였다.

 양동은 옛 경주부의 거의 전 지역을 둘러싸는 지리체계의 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마을의 서쪽 안강평야를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산강을 타고 올라오는 이 종착점이기도 하여 농업과 상업에 모두 편리한 곳이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양동마을의 내부는 각 골짜기를 중심으로 갈곡, 안골, 몽봉골, 거림, 장터골 등으로 세분되며, 양대 가문인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중요한 골짜기를 나누어 자리잡고 있다. 양가문의 갈등과 대립구조도 지형에 따른 입지에서도 보여지는데, 서백당- 안골, 무월당- 몽볼골의 손씨가인 관가정 같은 건물을 마을입구에서 눈에 잘띄는 산둥성이에 자리를 잡고, 이씨가인 향단은 같은 산둥이에 위치하면서도 좌향을 달리해 독자성을 확보하는 대립과 갈등이 입지국면을 보이고 있다.

 양동마을 인근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4~5c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에 아산장씨가 거주하면서 양좌촌이라고 했으며15) 이후 고려시대에는 오씨와 장씨들의 세거지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알 수 없다. 양동마을을 이야기 하면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명문가의 인물을 빼고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손씨, 이씨를 합쳐서 문과 26명, 무과14명, 사마 76명을 과거급제자가 총 117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에서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도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명실공히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2010년 8월, 세계문화유산등재 이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2) 양동마을의 역사

 양동마을의 뿌리가 되는 역사를 보면 여강 이씨인 이광호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자사위가 된 풍덕 류씨 류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16)조선 류복하 사위인 양만공 손소가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이때부터 양동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손소는 조선 세조때 이시애의 난17)을 평정한 공신으로 5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손백돈이 후사가 없이 일찍 죽자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이 상속자가 되었다. 이광호의 5대종손이며 성종의 총애를 받던 찬성공 이번이 손중돈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어 역시 영일에서 처가인 이곳 양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이들이 낳은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 이다. 이로써 양대 가문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양동마을이 형성되었고, 외손마을이 탄생된 것이다.18) 현재 양동마을에는 손씨18호, 이씨78호, 다른 성씨 30여 호가 있다고 한다.19) 양동마을을 다니다 보면 가옥들에 자주 언급되는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그중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에 양민공 손소(1434~84)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양동의 인물 역사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jpe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20pixel, 세로 559pixel  양동의 첫인재 손소의 호는 송재이며 아버지는 참의 손사성이다. 1457년에 만호 유복하의 딸을 맞어 세조5년(1459)에 점필재, 김종직과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로 등용된 뒤 21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승정원주서로 있으면서 문예시에 장원을 했다. 조선 세조가 즉위하면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20) 2등에 녹훈되고, 내섬시정으로 특진되었다. 예종 1년 (1469)에는 경주에 있는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스스로 청하여 외직으로 나가 성주목사와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계천군21)에 봉해졌는데 성주목사로 있을 때 큰 기근이 들자 구휼을 잘해서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성종 7년(1476)엔는 진주목사로 가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왕의 특명으로 녹봉을 지급받았으며 시호 양민을 하사 받았고 불천위22)에 오르게 되었다. 손소는 사람이 어질고 조심성이 있어 관리의 자격이 있고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위해 언제나 외직을 자원했으며, 세 고을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검소하다는 소문이 났다고 정평이 난 인물이다.

 손조의 초상화는 성종7년(1467)에 나라에서 직접 하사한 것으로 보물 제1216호로 지정되어있다. 산호영, 옥연적, 상아도 이 세 가지는 손씨 삼보 혹은 송첨 삼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정백리 손중돈이 그의 아들이고, 대학자인 회재 이언적이 외손이다.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의 도움산 자락에는 손소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 상달암23)이 있으며 인근에는 손소와 정부인 류씨의 묘비, 석인상24)도 있다. 손소의 아들로는 손백돈, 손중돈, 손숙돈, 손계돈, 손윤돈이 있다.25)


3) 양동마을 전통가옥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게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대문 앞에‘ㅡ’자형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또한, 혼합배치 양식으로‘ㄱ’자형이나‘ㅡ’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일반적인 특색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산과 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오랜 전통을 간직한 저택들, 양반계층을 대표하는 많은 자료들을 보유하고 유교사상 및 생활관습들이 보존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학교 맞은편의 성주산 끝자락 중터에는 월성 손씨 가문의 서당이 안락정이 있다.


 (1) 안락정

 안락정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만나는 건물 인데 손씨와 이씨가 각각 자기 문중의 글씨 공부를 하는 당시의 서당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손씨 문중에서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지은 서당이며, 손씨 문중에는 수운정도 경영하고 있다. 이서 당이 지어진 후에 이씨 문중에서는 서당인 강학당26)을 지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건립하였으며 마을에는 1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는데, 이씨 문중에서는 일곱 곳의 정자를 경영하고 있다. 이처럼 마을에서는 두 성씨가 공조하여 함께 번성의 토대를 이루었던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 82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 크기로, 앞쪽에 툇마루를 둔ㅡ 자형의 평면집이다. 앞면과대청 뒷면은 둥근 기둥을 세웠고 온돌방은 네모난 기둥을 세워 달리하고 있다. 이것은 앞이 열려 있는 대청은 여름철에, 온돌방은 겨울에 대비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앞쪽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며 양쪽 끝 칸은 방을 두었다. 대청 주간 부분에 앞면에는 안락정, 뒷면에는 성산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주변 대청마루에 영산재와 술선당과 사검실27) 현판이 달려있다. 안락정의 기둥은 주두에 새겨진 조각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고, 대들보는 곡선을 이루고 중간에 걸린 등자쇠도 눈에 띈다. 등자쇠는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으로 안장에 달아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려 사용했다.28)

그림입니다.  안락정 마루로 올라가는 디딤돌로 네모난 큰돌이 놓여 있는데, 이는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며 중간의 네모난 흠을 후에 시멘트로 막아놓았고 가공한 흔적이 보이고 있으며 안락정을 지나면 마을의 전경이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 정면으로는 마을 한중간에 가장 크고 멋진 향단 건물과 관가정이 보인다.


 (2) 향단

그림입니다.

향단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집이며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향단이라는 오래된 향 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언적의 아우 이언괄의 손자 이의수의 호가 향단이며 향단파 종택이다.29) 향단은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기도 하지만 규모에 있어서도 큰 건물이다.

 원래99칸의 건물로 홍자 형태였는데 6.25전쟁 때 일부 파괴 된 것을 1976년에 보수하여 56칸으로 줄인 것이라 한다. 30)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는 몸체는 월자형이고 일자형의 행랑채와 칸막이를 두어 용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해와 달이 함께 있어 생기를 복 돋워 주는 풍수지리설과 관련 있으며 부귀공명사상을 받아 만들어졌다. 낮은 구릉 위에 집 뒤로 후원과 숲이 한눈에 들어오며 양동마을의 가장 앞쪽 경사진 곳에 남향하여 축대를 쌓았고 이 높은 축대위에 사랑채가 있어 눈을 가로막는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조금 비껴서 왼쪽의 안채와 오른쪽의 사랑채 사이에 있다. 향단은 건축적요소가 매우 제약적이고 관념적이며, 일정한 틀에 얽메이는 구조이며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하나로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파자형 평면을이룬다.31) 계단이 없는 행랑채가 가장 먼저 보이는데, 정면9칸, 측면1칸 규모의 가로로 긴 형태다. 계단을 올라 가보면 주변에 절터에서 옮겨진 부재들 중 탑의 몸돌이 보이고 행랑채 대문 밑에는 짐 기둥을 받치는 신방목이 있다.32)

 향단 내부는 한마디로 폐쇄적인 미로와 같은 구조로 행랑체 협문을 통해서 사랑채로 연결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형태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는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부엌으로 길게 나있는 동선을 따라가 보면 수장고33)가 나오는 누마루방이 있다. 부엌은 남북으로 좌측에 있으며 중층 상부의 수장 공간은 안대청 좌측으로 온돌방과 다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3) 관가정

그림입니다.  관가정은 우재가 서백당에서 분가하여 살았던 집이다. 서백당보다 늦은 148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간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망이 좋은 위치라 마을 초입에서 보아도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인 건물 배치는 크게 안채와 사랑채, 좌우 부속채 등으로 이루어지며, 입향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영역으로 나뉜다. 생활하는 건물과 사당 2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중 사람이 생활하는 안채건물의 기본 형태는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와 있다. 기단을 높게 하여 지었다.34)

 관가정에는 대문이 없는데 중문을 통해 들어가서 사랑누마루의 편액이 있는 곳 앞에서 보면 마을의 전경이 다 들어오는데, 경관이 마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건너편의 심수정도 보인다. 또한 강당 한쪽에는 송첨구려라는 편액이 있다. 35) 중앙에 중문을 사이로 왼쪽에는 사랑채를, 오른쪽에는 안채를 두었다.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 정자 건물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난간을 두른 것은 제자각 난간인데, 다듬은 모양이 닭의 벼슬 모양과 같아서 그렇게 부르며 누마루나 대청의 난간에 이용된다.36) 만약 앞이 막혀 있으면 평난간을 설치하게 된다.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 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ㅁ’자형으로 보통 추운 북부지방의 형태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고 산 사람의 공간이 안채라면 죽은 사람들의 공간이 사당이 전통 뒤편에 있는데 단청이 칠해진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이처럼 생활공간과 사당으로 구성된 관가정은 전체적으로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잘 지어진 주택 건축으로 보물 제 422호로 지정되어 있다.37)


  (4) 근암고택과 상춘헌 고택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55?(???)-??????_nocleaf.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20pixel, 세로 294pixel 그림입니다.

향단과 관가정을 지나 근암고택과 상춘헌 고택이 보이는데 근암고택은 정조 4년(1780)경에 이정수(1758~1784)가 지은 것으로 그의 증손자인 근암 이희구의 호를따 지은 저택으로써 여느 집들과는 달리 안채의 담장 밖에 따로 사랑채가 서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사랑채는 원래 안채와 직각으로 놓여 있다가 소실된 것을 20세기에 새로 지으면서 현재 우치로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랑채 뒤로는 비탈진 지형을 그대로 살려 마을의 전경과 주위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근암고택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가옥인 중요민속자료 제75호인 양동 상춘헌 고택이 보이는 데 상춘헌 고택은 조선 영조 6년(1730)에 어서 동고 이덕록이 지은 집이며, 그의 후손인 이석찬의 호를 따‘상춘헌’이라 지었다. 38)

 

 (5) 이밖에 다른 가옥들

 이 밖에도 다른 가옥들인 이향정과 강학당, 심수정을 살펴보면 이향정은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이 살던 곳으로 이범중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조선 숙종 21년(1695)에 지었다고 하며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튼‘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잇으며 안채 , 사랑채, 아래채 ,방앗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큰 규모의 건물이다. 사랑채 오른쪽 끝에 중문을 내어 안채로 드나들게 하고, 튼‘ㅁ’자를 이룬 건물들 사이 공간에는 담을 쌓아 안채 공간을 만들고 있다. 들어가면 사랑채에 만취채라는 초서채가 보이고 양동마을의 많은 건물 중에 유일하게 쓰인 초서체로 쓰였다. 안채는 서쪽 끝에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고, 왼쪽에 광고 아랫방이 있다. 방과 대청 앞뒤로 반 칸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안채 부엌 뒤편으로는 방앗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문방 1칸, 사랑방 2칸이 접해 있으며, 마루는 아자형 난간을 둘러 누마루의 분우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래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크기로 가운데 헛간을 두고 양옆에는 광을 두었다. 이렇게 규모가 큰 이향정은 중요민속자료 제 79로 지정되었다.39)


3)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비교


구 분

공통점

차이점

역사적

배경

- 오육백여 년의 역사

- 조선 초에 입향

- 조선 중기 마을 형성

- 하회마을 : 주요성씨는 풍산 류씨, 마을형태 동성마을

- 양동마을 : 주요성씨는 월성손씨, 여강이씨, 마을형태 양성 마을

자연

경관

- 배치기법 : 용한

- 전망 : 마을에서 평야지대를 바라봄

하회마을 : 감입곡류형, 주산으로 부터의 주축(동⤑서)

양동마을 : 능선형, 주산으로부터의 주축(북⤑남)

전통마을의 공간구조

공간

특성

- 남. 북촌의 취락형태

- 양반들의 고가와 서민들의 민가가 어우러짐

- 하회마을 : 반사형의 취락 구조, 두 종가 가옥 마을 중심배치, 민가들이 주변배치. 도로 중심의 공간 분할

- 양동마을 : 네 개의 산등성이(골짜기)를 따라 마을 형성, 고지대에 양반들의 살림집, 저지대에 소작인이나 노비들의 가람집, 하천 도로 지형 중심의 공간 분할

공동체

공간

요소

공동생활공간은 차별적 발전을 하였고 유교적, 민속적 , 의례공간은 마을 특성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을 했다.

하회마을 : 정치, 집회, 휴식(경로당), 공동 생활공간(빨래터, 도선장)

양동마을 : 정치,집회,휴식(마을회관,장터골 정자), 공동 생활공간(공동우물, 물레방아)

민속적제의

공간

무속 신앙공간이 독자적으로 발전

하회마을 : 당집(서낭당, 국사당) , 당목 삼신당. 돌탑(성황당)

양동마을 : 은행나무(고사목),당집 돌탑 기타 상징물 미약

<표 1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비교>


3. 결론

 우리나라에는 전통한옥마을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 마을은 조선시대 규모가 큰 대표적인 반촌마을로서 유교적 삶과 가치관을 지키면서 생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예를 들어서 장독에 된장을 담듯 오래오래 발효되어야만 깊은 맛을 내는 고유의 장맛처럼 역사가 깊은 곳일수록 사람들의 나눔과 온기가 더 커지는 듯하다. 우리의 한옥이 아름다운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자연을 벗삼아 생활했던 조상들의 지혜에서 전통 가옥의 우수성을 다시 금 깨닫게 된다. 과거 성현들이 넋을 간직하고 현재도 그 맥을 잊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 명문대가의 자취와 선조들의 삶이 배어나는 두 마을을 살펴보면서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충과 효를 느꼈으며 안동과 양동을 보며 낯설었던 된 풍경 속 전통의 미학을 알게 되었고 마을의 가치를 위해 앞으로 미래에 잘 보존된 문화유산을 물려줄 수 있어야할 것이다.






















※ 참고문헌

한국문화유산답사회,『경북 북부』, 돌베개, 1997.

안동대학교민속학연구소,『하회마을의 세계』,민속원,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의 길잡이10 경북북부』, 2000.

임재해,『하회마을의 세계』, 민속원, 2012.

강동진,『경주 양동마을 이야기』, 한국학술정보, 2006.

김환대,『경주 양동 안동 하회마을』, 경향미디어, 2010.

임재해,『세계문화유산으로서 하회마을 민속의 문화적 가치』, 한국국학진흥원, 2008.

최병돈,「良洞ㆍ河回마을 空間構造 分析에 관한 硏究」,동국대학교 산업기술환경대학원, 1999.

정명섭 외 6인,「하회마을의 주택 배치에 관한 조사 연구」, 한국주거학회, 2000.

김희정,「경주 양동마을 ‘관가정’과 ‘향단’의 조형적 특성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08.

송진숙,「한국의 문화 :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생활문화와 관광체계」,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임충신 외 3인,「양동마을 17c~18c 주택의 건축석 특성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 1997.


1) 음력 7월 기망에 즐기던 양반들의 놀이며 공중에 길게 걸어 놓은 줄에 숯가루를 넣은 봉지를 주렁주렁 매단 뒤 정화하면 불꽃이 튀면서 떨어지는 장관을 즐기던 민속놀이로 품격과 운치가 겉들어 있으면서 불꽃놀이와 뱃놀이 그리고 달걀불과 선상의 시회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놀이다.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북 북부」 , 돌베개 , 1997

3)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안동하회마을의 서북쪽 강 건너 광덕리 소나무 숲 옆에 있는 해발 64m인 절벽

4) 임재해 ,『하회마을의 세계 :하회마을 기록화 사업』 ,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 2012

5) 풍수지리 용어로 물을 만나면 지기는 멈추어서 혈을 맺는 다는 말

6) 실제 S자를 형성하면서 흘러나가는 하회마을의 물줄기는 마을을 안쪽에다 놓고 있음에서 계수즉지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데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본래의 모습대로 잘 보존된 둥근 마을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연꽃 같다고 하여 연화부수형 이라고 말하며, 배산임수에 적합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 형세가 아름다워 특별한 길지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7) 화산 북쪽 행개골

8) 풍산은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의 대현으로 풍산류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풍산현 호장을 지낸 류절이다.

9) 진혈처 풍수사상에서 좋은 터 중에 하나

10) 하회에서는 류중영,류운룡,류성룡,류경심 4분을 불천위로 모시고 불천위 사당 담 너머로는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수령이 600여 년 이상 된 거대한 느티나무앞에 삼신당이 있다.

11) 북촌댁 당호의 유래

1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2043&cid=46673&categoryId=4667 네이버참고

13) 대동여지도에는 형강이라 기록되어 있다.

14) 김환대 ,「경주 양동 안동 하회마을」 , 경향미디어 ,2010년 12월 27일 , p23

15) 양동마을 조사보고서 경상북도

16) 류복하는 고려말~조선 초의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만호다.

17) 1467년(세조 13) 세조의 집권 정책 이시애는이시애가 난을 일으킨 원인은. 세조가 그 당시에 무신이였던 병마절도사를 문신으로 바꿨는데 문신이 되면 무신의 힘이 약해지자 불만을 드러내 반란을 일으켰다.

18) 앞의 글을 참조. 두씨족에 의해 마을이 만들어진 것을 뜻함

19) 마을에 처녀가 있는지 모르지만 예전부터 양동 처녀라면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20)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44명을 뽑아 서 3등으로 나누어 공신을 책록한 것

21) 양동마을 앞으로 흐르는 실개천의 이름

22)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로 불천위 사당은 상당히 상징적인 것

23)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90호

24)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90호

25) 최병돈 , 『良洞ㆍ河回마을 空間構造 分析에 관한 硏究 』 ,동국대학교 산업기술환경대학원 ,1999

26) 사진출처 및 내용 블로그주소 : http://blog.naver.com/gajan/120166878534 참고

27) 선조의 뜻을 있는다는 의미인 술선당과 검소함을 모범으로 보여준다는 사검실

28) 한옥에서는 문을 걸어두거나 접어서 들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이는 여름철을 시원하게 나기 위해 문을 접어 올리고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9) 회재 이언적이 1543년경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중종이 회제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전통가옥들이 그러하듯 책자마다 다소 설명에 차이를 보인다.

30) 또 다른 자료에서는 51칸이 남아있다고 한다.

31) 김희정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과 ‘향단’의 조형적 특성 연구』 ,한국 교육대학원, p3, 2008

32) 마치 호루라기처럼 생겼는데 여기에 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33) 음식을 보관하거나 제사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수장고로 사용하는 누마루방이다.

34) 땅 가까이에 집을 지으면 습기가 올라와 여름철에 매우 눅눅하여 댓돌을 여러 겹 겹쳐 높게 만들어 그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습기가 적어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다.

35) 송첨의 옛집이란 의미로 송첨은 우재 손중돈의 아버지 손소의 야호

36) 김희정 ,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과 ‘향단’의 조형적 특성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08

37) 김환대 ,「경주 양동 안동 하회마을」 , 경향미디어 ,2010년 12월 27일

38) 네이버 지식백과 한옥의 미 출처

39) 최병돈 , 『良洞ㆍ河回마을 空間構造 分析에 관한 硏究 』 ,동국대학교 산업기술환경대학원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