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의 편찬과 의의


 20100177 김진구

20100199 신광호

20100236 이원호


 

-목 차-

 

 

1. 서론

2. 징비록의 편찬

 1) 징비록의 편찬 목적과 체재

 2) 징비록의 성격

 

 3) 국제전으로서 임진왜란과 징비록의 보편성

3.「징비록에 반영된 대일·대명관」

4. 결론

 

※ 참고문헌

 

 


1. 서론

 임진왜란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기록으로는 무엇보다 국가의 공식 문헌인「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전쟁사와 관련된 사찬서로는, 서애의「징비록」과 이순신의「난중일기」, 이항복의「백사집」과 조경남의 『난중잡록』, 안방준의「운봉전서」등 매우 다양하다. 이중「징비록」은 전쟁 중에 정치를 이끈 재상으로서, 자신의 기억과 여러 자료들을 중심으로 편찬된 사찬이지만, 국가 차원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쟁의 실상과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여 원인과 과정, 결과를 이해하는데 매우 요긴하다. 무엇보다 당대 관료가 본 당대사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원천 자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일 수 있지만, 후대의 역사는 분명히 그 사실에 대한 평가가 따른다. 그러한 역할은 기록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유성룡과「징비록」이 가지는 의미가 작지 않다고 생각된다.


2. 징비록의 편찬과 성격


1) 징비록의 편찬 목적과 체재

 징비록의 ‘징비’는 “내가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여 나무라고(懲), 훗날의 환난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한다(毖)”는 시경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서애는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고,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경계하려는 목적에 따라 징비록을 편찬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국가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면서 몸소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전란 중에 얻은 사료와 지식들을 그대로 담아냈던 것이다. 당대의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일 수 있지만, 후대의 역사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정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사관의 자세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와 이에 대한 조정 관료들의 대응을 보면, 당파 간 갈등이 본격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애는 동문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김성일의 의견에 동의하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는 등 당면한 국가 현실의 정확한 진단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조정 관료들의 분위기는 현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는 표현처럼, 안이함 그 자체였다.

 주지하듯이, 임진왜란 당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관찬 실록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 따라서「징비록」을 비롯하여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사찬 기록이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서애는 전쟁 기간 동안 국정과 군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직접 경험한 바를 기록하여, 전쟁의 대책과 대안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주지하듯이「징비록」의 본문 곳곳에는 장수들의 활약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패장은 물론, 전략과 전술이 부족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승장에 대해서는 당색의 구분없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신분과 관계없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기술하였다. 전쟁에 대비한다는 저술 목적에 따라 승장과 패장을 예리한 안목으로 포폄하였던 것이다. 국가가 직면했던 전쟁의 실상을 정확하게 서술함으로써, 후대의 교훈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본문 곳곳에 그대로 녹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하튼 당파 간의 갈등이 심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변호하고 당파를 옹호하기 위해 편찬된 당론서는 아니라는 확신이 선다.1)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현실 정치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징비록」의 저술 목적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당대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요긴한 사찬 야사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임진왜란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요긴한 자료는 당파의 입장이 반영되었고, 다소 부실한 기록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더라도『선조실록』과『선조수성실록』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외에 개인이 편찬한 다양한 사찬사서가 있다. 이 중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고 전쟁의 전반적인 실상을 가장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라면『징비록』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의『난중일기』를 비롯한 다른 야사류 역시 전쟁의 실상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난중일기』도 이순신이 전투 현장에서 몸소 체험한 바를 기록했지만, 특정 지역에서의 전투(전라도와 경상도 및 해상 전투 위주) 개황 및 개인적인 면에 국한된 점이 없지 않다. 『난중잡록』이나, 『재조번방지』를 비롯한 많은 야사류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징비록』은 영의정과 도체찰사, 명군 접반사 등 국정과 군정, 외교의 최고 책임자가 서술했다는 점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치른 전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징비록』은 당대사와 전쟁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징비록』의 자료적 성격

 서애는『징비록』을 통해 전쟁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전쟁의 진행 과정만을 수록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정치와 경제, 외교 관계등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임진왜란 전쟁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가치가 크다. 이는『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이 소홀하거나, 당파의 이해가 반영되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진행과정, 결과 등 상세한 실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요긴한 자료는 선조 당대의 역사적 사실이 망라되어 편찬된『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선조실록」은 전쟁의 상황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저급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쟁 중에 중앙 정부가 지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일상적인 기록이 그 때 그 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전란으로 지방의 보고가 제대로 수합되지 못한 점, 극심한 당쟁으로 실록편찬에도 당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 등이 이전과 이후에 편찬된 실록과 크게 다를 것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사관의 기사 활동이 중단되어 실록 편찬시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이용되는 사초가 작성되지 못했고, 작성된 것조차 제도로 수합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편찬되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다른 실록과 비교해서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대 인물에 대한 왜곡된 평가 역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당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중요한 관찬 기록은 없다. 사찬 야사에 비해 많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의 경우 사찬 기록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겠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실록의 가치를 넘을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기록이 자의적인 해석과 주관적인 감정이 반영될 여지가 많으므로, 행간의 의미를 면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일부의 단점으로 장점이 가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관련 사실의 기록에 있어서 어느 정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므로, 전쟁의 한 보간에서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징비록의 가치가 보다 크게 다가온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관찬 실록의 한계점이 인정되는 만큼, 상대적으로 징비록의 자료적 성격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체적인 정황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직접 견문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이럿과 관련된 중앙의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에 역사 자료로서의 성격이 크다는 사실이다. 특히 찬자가 전쟁의 현장에서 직접 견문한 바를 바탕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는 물론, 당대사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요긴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전쟁의 원인과 진행 과정, 관군의 전투상황과 의병활동, 명군의 지원과 활동, 군량조달 및 다양한 군사 전략 전술 등이 매우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임진왜란 전쟁사를 연구하는데 다른 어떤 자료보다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관찬 실록이 지닌 원천적 한계를 극복하는데 가장 요긴한 사찬사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야사류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각 야사의 찬자가 겪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견문한 바를 중심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가치의 우열을 논하기는 어렵다. 찬자의 역사의식에 근거하여 저술되었기 때문에 야사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징비록의 찬자는 다른 사찬 야사의 찬자와는 처한 위치가 달랐다. 국정 및 군정의 최고 책임자였다는 점, 군주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면서 전황의 전모를 파악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다른 야사와의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징비록을 통해 전쟁에 임하는 국가 차원의 입장과 대응방안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과도 직결된다.

 넷째, 이상과 같은 징비록의 자료적 가치는 실록 편찬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예단을 가지게 한다. 실제로 징비록의 내용 중에서 실록에 전문 그대로 수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 중에 발생한 사초의 소실과 사관의 부실한 기사 활동으로 실록의 편찬 자료가 상당히 부족한 상황에서 징비록의 기사 내용이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본문에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상당히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징비록을 통하여 서애의 교훈적 역사관과 투철한 기록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징비록의 편찬은 제목 그대로 전쟁에 대비한다는 목적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전 일을 바탕으로 현재를 반성하고, 앞으로 이와 같은 참담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감계주의 사관, 즉 교훈사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3) 국제전으로서 임진왜란과 징비록의 보편성

 「징비록」이 근세 일본에서 널리 읽히면서, 그 저자인 류성룡의 행적도 여러 형태로 평가된다. 그중에는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달았가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을 속였다” 라며 류성룡이 편파적이고 자기 합리화적 기술을 했다고 비판한 아카사와 도사이와 같은 시각도 있었고, 일본의 애국주의적 유학 학파인 미토학의 인물 중 하나인 가와구치 조주는 류성룡과 정파적으로 대립했던 의병장 조헌의 제자 안방준이 남긴 은봉야사별록을 전면적으로 이용해서 류성룡과 징비록을 일부 비판 한다. 예컨대, 조선정벌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 등에 보이는 ‘간신 류성룡’ 비판 부분에 대해 가와구치는 정한위략에서, 은봉야사별록과 비교하면 류성룡의 행적에는 미심쩍은 바가 없지 않으나 징비록과 서애집을 보면 그는 우국지사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조선에 대한 아사카와 도사이의 비판은 조선정벌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와 같은 17세기 전기의 일본 측 임진왜란 문헌에 보이는 기술에 따른 것인데, 이들 일본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민을 비판한 대목의 출전은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주었던 명나라의 제갈원성이 쓴 양조평양록이다.

 양조평양록은 조선이 이와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초기에 맥없이 무너졌고, 명이 원군을 보내 주면서 비로소 나라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말하자면 명 측에서 만들어 낸 ‘재조번방’의 논리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논리를 담은 양조평양록이 17세기 초기에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자, 일본의 저자들은 조선의 동맹국인 명에서까지 조선을 이렇게 바라보았으니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에 문란한 상황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이라 믿고, 일본이 조선을 공격한 것은 문란한 국가를 하늘이 외국을 이용해서 정벌한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침략국이 자신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긴 하지만, 일본의 주장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동맹국이었던 명 측의 문헌임을 생각한다면 오랜 동맹국이라고 해도 이처럼 믿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제후의 나라 번국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명나라 군대에 대해 조선 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조선에 유리한 방식으로 동맹관계를 이끌어 가려 한 류성룡이 곱게 보였을 리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명청 시대 중국의 임진왜란관에는 ‘믿을 수 없는 조선’, 특히 ‘간신 류성룡’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중국 청나라의 초대 주일공사였던 하여장을 따라 1880년 일본에 건너온 학자 양수경은, 일본에 전하는 중국의 희귀한 고서를 수집해 작성한 해제집 일본방서지의 권6에서 일본판 조선징비록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한위략에서 가와구치 조주가 류성룡에 대해 내린 충신이라는 평가를 받아들여, 양조평양록과 무비지 등에 보이는 조선과 류성룡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적는다. 류성룡은 기존의 중국 문헌에 보이는 것처럼 간신이 아니라 오히려 충신이고 징비록의 기술은 진실되기 때문에 일본인 가와구치 조주도 정한위략을 집필하면서 가장 중요한 근거로 징비록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양수경의 이런 평가는 현대 중국에서 간행된 임진지역사료회집에 실린 징비록의 해제로 계승된다. 참고로 임진지역사료회집에 실린 징비록은 조선의 초본이나 16권본, 2권본이 아니라 1695년 교토에서 간행된 일본판 조선징비록이다. 또한 이 책에는 가와구치 조주의 정한위략도 함께 실려있다. 그리고 1880년(고종17)에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을 준 황준헌 역시 양수경과 함께 하여장을 수행하고 있었다. 양수경이 일본방서지에 조선판 중국 문헌뿐 아니라 징비록, 대전통편, 동국사략 등 조선에서 집필된 책까지 수록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의 관료가 기록한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일본판으로 간행되고, 이 일본판이 다시 중국으로 유출되면서, 조선을 도왔지만 조선을 무시했던 명청 대 중국인들의 임진왜란관을 후대의 중국인으로 하여금 교정케 했으니 말이다. 징비록을 단순히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사실(史實)을 전하는 ‘사료’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징비록이라는 책 자체가 지닌 포괄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와 완결된 구조, 그리고 조선을 벗어나 일본과 중국의 독자들에게도 얽혀 그들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우리는 징비록이 지닌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징비록이 지지는 이러한 보편성은 임진왜란이 국제전이라는 데에서도 기인한다.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과 임진왜란을 테마로 한 징비록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한다.


3. 징비록에 반영된 대일·대명관

 인간이 역사에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한 개인이 당면한 시대를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시대정신과 그 개인의 현실인식을 살피는데 빼 놓을 수 없는 작업의 하나이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와 시대의 실상을 살필 수 있으며, 그들의 역사적 기능과 각 시대 내에서의 위상을 파악 할 수도 있다. 다시말하면, 한 인물이 격동과 변혁의 현실에 대응했던 각양각색의 방식과 경험을 통해 일정한 시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추체험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실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를 통해 당면 문제의 해결 대안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에 구분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기(혹은 시대)가 가장 격렬하고 역동적이었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누구나 동의할 정도의 격동의 시기였고, 본인이 정국 운영의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면 확신의 정도가 더욱 분명할 것이다. 서애가 살았던 시기는 분명히 조선왕조의 역사를 넘어 한국의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전쟁을 몸소 겪고 국정을 책임져야 했던 서애의 현실의식 및 자세, 구체적인 행위의 모형을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시대가 그로 하여금 어떤 대응방식과 자세를 선택하도록 작용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고, 그의 의지에 의해 시대의 모습과 성격을 바꾸어 놓은 측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쟁의 와중에 당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관료이자 지식인, 학자이자 외교가였던 서애의 고민은, 왕조의 고민과 직결되는 문제였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실인식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학문적 및 이론적으로 체계화될 때, 현실개혁사상으로서의 의미와 실천성을 가진다. 성리학적 경제사상의 성립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리학 이론이 체계화되었을 때 가능하다. 성리학자이자 정치가, 관료이자 외교관이었던 서애의 현실관 역시 성리학 사상과 이념에 근거하였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징비록에는 서애의 현실인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본다. 전쟁 직전의 상황과 직접 경험한 전쟁의 실상, 전쟁에 임하는 조정의 관료와 장수들의 태도, 명나라와 일본 장수들의 행동 양태 및 명·일에 대한 의중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보다 군사의 양성과 군량의 확보, 무기의 확보 등 전투준비태세의 완비에 있으며, 이와 더불어 군주를 비롯한 장수들의 리더십과 승리가 담보되는 전략과 전술의 수립, 그리고 싸우면 이겨야 한다는 절대 신념이라고 강조하였다. 우선 왜군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것은 백여 년 동안 태평세월이 지속되면서 전쟁에 무지했던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이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용맹한 사람은 결단을 내리지 못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길이 없게 되었음을 우려하였다. 그렇게 만든 것은 왜군의 꾀이자 계책이라고 하면서, 상대적으로 대비파지 못한 조정의 태도를 비난하였다. 평양전투 이후 느슨해진 왜군을 공격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능력 있는 장수가 없었던 점, 한양 이남에서 공격하지 못한 점, 명나라 장수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점 등이 원인이라고 하였다. 만약 이때 성공했더라면 수십, 수 백 년 동안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등 교훈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전투에 익숙하고 무기가 예리하며, 예전에 없었던 ‘조총’을 가지고 있는 왜군을 적극 경계하였다. 평지에서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이므로, 먼저 지형을 잘 선택해서 험준한 산이라든가, 빽빽한 숲 지대에서 매복한 뒤 화살을 쏜다면 비록 조총과 예리한 창, 칼을 가진 왜적이라도 승리할 수 있다고 예리하게 판단하였다.

선조가 평양을 떠나 안주로 파천했을 때에도 평양 사수를 위한 독특한 전략을 제시하였다. 왜군이 얕은 여울을 찾아내 침략할 것이므로, 강바닥에 마름쇠를 깔면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서애만의 독창적인 전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서애는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인화가 천시와 지리보다 중요하고 민심수습이 가능해야 전쟁에서 승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광취인재’와 ‘용인지도’란 신분에 구애 없이 실력을 보고 택하는 것이며, 고위 공직자 및 지방 수령의 인재 추천과 적재적소의 배치를 주장하였다. 이는 전쟁 수행과정에서 신분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 관료들의 무능과 비겁함을 경험하고 얻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신분질서의 과감한 타파와 노비도 입대시켜 국방력을 향상시키자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주장은 실학자들의 군제개혁안과 비교해보더라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서 인재를 널리 구하고 능력에 따른 인사를 주장하는 실용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직전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결과적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점과도 일맥상통한다.2) 따라서 명나라 장수들의 주화론적 태도와 전투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다. 명․일 강화를 주도했던 심유경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서애는 명군의 애매한 태도와 조선이 배제된 채 진행되는 강화회담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여겼던 것이다. 실록의 졸기에 서애가 주화를 주장했다는 표현은 분명히 음해성이 강한 왜곡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애가 강화반대와 왜군의 격퇴를 주장하였지만, 약소국으로써 결국 명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화협상 기간 서애는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서애의 외교 능력이 대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배경이다. 즉 그의 대일 대명관은 주전론적 국가관에 기초하였으며, 왜의 침략에 대해서는 강렬한 격퇴 의지, 명에 대해서는 적절한 실리노선의 외교술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4. 결론

 임진왜란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으로는 무엇보다 국가의 공식적인 문헌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실록이 편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수정실록이 다시 편찬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관의 사초를 비롯하여 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편찬되었다는 이유이다. 둘째, 당파 간의 갈등에 의해 왜곡된 서술이라는 것이 주 요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이 다시 편찬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했던 것은 선조실록의 보완과 함께 당파의 입장에 의해 왜곡된 인물에 대한 평가였던 것이다.

  선조실록의 임진왜란 기사가 부실한 이유는 첫째 국왕의 파천으로 인해 전국의 전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점에 있었다. 선조가 의주에서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의도를 비치자 호종하던 사관이 사초를 불태워버려 전쟁 초기의 기록이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선조실록의 수정과정에서 각도의 감사에게 편찬 자료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내 널리 수집했지만, 자료의 원천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개인의 저술을 바탕으로 관찬 실록의 한계를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개인이 기록한 임진왜란 전쟁사와 관련된 것으로는, 서애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 이항복의 백사집과 조경남의 난중집록 안방준의 운봉전서 등 매우 다양하다. 이중 난중일기가 수군의 활동과 해전의 승리 등을 주로 수록했다면, 난중잡록은 현장성이 특징이며, 특히 정유재란에 대한 기사 내용이 다른 자료에 비해 많다는 특징이 보인다.

  이에 비해 유성룡의 징비록은 차별성을 지닌다고 본다. 전쟁 중에 저이를 이끈 재상으로서, 자신의 기억과 여러 자료들을 중심으로 편찬된 사찬이지만, 국가 차원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애의 국가의식은 국가를 수호하고 백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러한 국가의식은 평시는 물론, 전쟁 중에도 멸사봉공의 실천으로 표출되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 국정을 책임진 최고 관료로서, 군무를 총괄한 군사 책임자로서, 당쟁의 와중에 당파 간의 갈등을 조정한 조정자로서, 명나라 지원병을 요청하고 접대했던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한 인사가 기록했다는 사실만으로 징비록의 위상은 다른 사찬서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방의 실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일부의 약점에 가려 장점이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 참고문헌

김경수,「징비록에 대한 사학사적 고찰」, 2012.

류성룡, 김시덕, 「교감징비록」, 아카넷, 2013.


1)  ‘서애는 속일 수가 없으며, 이원익은 속일 수 있지만 속이지 못한다.’는 표현은, 서애가 자신의 상황을 변호하기 위해 『징비록』을 서술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 서애와 이순신의 관계는 독특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에서 입수한 해전과 육전, 화공에 관한 전술을 증조전수방략을 보내고, 현장 지휘관에게 필요한 대외 정보 및 국정 상황을 전달했고, 명 제독 진린의 성격을 알려주기도 했다. 이순신의 죄상을 논하는 과정에서의 신의와 우정 역시 둘사이의 친밀성을 살피기에 요긴한다. 특히 이들의 관계는 40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