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의 생애와 활동


20100213 김홍철

20100213 원종엽

20100267 최원상


 

-목 차-

 

 

1. 서론

2. 생애와 정치활동

 1) 전반기의 생애와 활동

 2) 후반기의 생애와 활동

 

 

3. 임진왜란기의 활동

 1) 정치상황

 2) 국난극복정책

 3) 전쟁이 끝난 후

 

※참고문헌

 

 


1. 서론

 류성룡은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때 문신과 무신으로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율곡과 함께 양현(兩賢)이라고 칭해지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수습하는데 주력하였지만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관직에서 물러나 향촌으로 내려가 저술활동을 하였다. 임진왜란에서의 공적 뿐만 아니라 그는 대표적인 저서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영모록』·『지행설』 등을 지었다.


2. 생애와 정치활동

 

1) 전반기의 생애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오늘날 ‘하회마을’로 불리는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豊山縣)의 하회촌에 세거하던 풍산류씨 집안에서 관찰사를 지낸 중영(柳仲郢)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영의정에까지 오른 정치가요, 임란을 극복하여 조선국가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뛰어난 경세가로서 일생을 보내고 지금부터 꼭 400년 전인 선조 40년 66세를 일기로 작고한 인물이었다. 자는 이견(而見)이라 하고 아호인 서애(西涯)는 향리인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 건너편 절벽의 이름에서 따 왔다.

 10대의 시기는 주로 서울에서 보내면서 견식을 넓히고 때로 인근의 산사를 찾아 독서하였는데 이순신과의 교분은 이때 맺었다고 한다. 21세 되던 해에 예안의 도산서당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 뵙고 『근사록』(近思錄)1)을 수강하여 사제관계를 맺는 한편, 조목〮〮〮·김성일 등과 교유함으로써 후일 퇴계를 종주로 하는 영남학파의 정토에 서게 되었다.

 25세가 되던 명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서부터 시작해 57세인 선조 31년,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오명을 쓰고 영의정에서 물러나기까지 30여 년 간에 걸치는 서애의 정치적 생애는 48세 때를 경계로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48세 때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그 이전까지는, 물론 43세 때 예조판서로 임명되어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경재(卿宰)의 반열에 들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언관직이나 승지직에 머물러서 국정의 담당보다는 이를 감독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있었고, 더욱이 부친상과 신변·정세의 불안 등으로 자주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거나 지방 관직을 지낸 기간이 많았던 데 비해, 48세 되던 해 12월 이후는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면서, 임진왜란 초에 대신으로서 외침을 불러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으로 잠시 벼슬이 떨어지기까지 하면서도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국사를 담당하였다.

 앞 시기의 서애는 맨 처음의 승문원 부정자에서 예문관 대교,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과 이조·병조의 좌랑을 30대 중반까지 거친다. 이들 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이라 하여 모든 관인들의 선망의 적이어서 학문과 인품이 뛰어남은 물론 집안의 배경도 좋아 앞에서 끌어주는 선진이 있어야 가능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홍문관의 수찬·교리·응교 등의 관직은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의 측근세력이 되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였다. 당대 제일의 강독관이란 칭송을 받은 서애는 바로 이런 경연관의 자리를 10년이나 역임하면서 임금 선조의 군덕성취에 진력하였다. 서애 보다 10년 연하로서 당시 20대의 한창 나이이던 선조에게 이런 서애의 존재는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서애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으로 표출되어 그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서애가 역임한 관직 가운데 또 달리 주목해야 할 것은 이조의 전랑직2)이다. 서애가 활동하던 시기의 정치에서 이조전랑직은 이조의 참상관(參上官)3)인 5~6품직이기는 하되 이조의 장관인 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관료의 수장인 영의정과도 맞설 만한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바로 이조전랑이 지닌 삼사언관에 대한 통청권(通淸權) 때문이었다. 통청권이란 청직이라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를 천거하는 권한을 말한다. 이조전랑이 밀어주지 않는다면 통청은 바랄 수도 없으며 그러기에 3사의 관리, 특히 사헌부·사간원의 언관들은 전랑의 뜻을 살펴야만 하였다.

 서애는 이런 이조전랑 자리를 29세와 32살 때에 걸쳐 두 번을 지냈다. 당시 신진사류의 영수로서 서애의 위치와 명망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런 명망과 경연을 통해 구축한 임금의 신임은 서애 정치활동의 든든한 자산이었고 출세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 기간 서애의 정치활동으로 드러나는 것은 선조 초에 국가의 기둥과 같은 대신이라고 말해지던 이준경이 죽음에 이르러 올린 상소에서 조정에 붕당의 조짐이 있다고 했다가 이이·정철을 비롯한 후배 사류들로부터 사림을 붕당으로 몰아 사화를 일으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몰려 삭탈관작(通淸權)될 위기에 몰렸을 때 이를 진정시킨 일과, 선조 10년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 박씨의 상에 기년복을 주장하는 대신 예조에 맞서 3년복을 관철시킨 일이었다.4)

 서애의 정치체질은 급진적이고 강경한 투쟁노선과 주장보다는, 합리적이고 온건하며 형세가 불안하다면 다음을 기다리는 현실적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명분을 내세워 과감하게 논리를 펴는 율곡의 주장과 경장론(更張論)5)을 위험시하고 급진적이라 경계하였으며, 율곡 또한 서애가 재주는 뛰어나면서도 때로 이해에 흔들린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청요직에 있던 30대 시기의 서애 정치활동은 기강확립과 탄핵을 위주로 하는 언론의 측면보다는 경연을 통한 군덕의 성취에 모여지고 있었다.


2) 후반기의 생애와 활동

 서애는 38세 되던 해인 선조 12년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올라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4~5년간 홍문관의 부제학과 대사헌·대사간을 교대로 역임하면서 당시 조정 사류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동인·서인의 분립과 대립을 몸으로 겪었다. 이제는 낭관이 아닌 당상관(堂上官)6)이며 언론 기구의 장이 된 만큼 언론을 빌어 벌어지는 동인·서인간의 상호비판과 시비논쟁을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했다.

 처음 그는 율곡과 함께 동·서인의 화합에 힘썼다. 율곡이 동인을 공격하는 서인을 다독거려 동·서인의 조제보합(調劑保合)7)을 꾀했다면, 그는 사류가 주축이된 동인의 언론이 과격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이끌었다. 그래서 조정 관료는 물론 임금까지 양현이라 칭할 정도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 기간의 정치는 율곡으로 대표되지 아직 서애의 시대는 아니었다. 서애의 시대는 임진왜란을 기다려야 하였다.

 정국주도세력이 아니었다고 해서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서애의 관심이 멀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둠에서 오는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가능했고, 자신의 정치론을 보다 논리화할 수 있었다. 그는 율곡 경장론의 허점을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그 급진적 주장이 가져올 정치적 파장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퇴계 이황을 통해 전수받은 성리학적 학문기반을 토대로 벼슬살이하면서 현실에 적용해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식견을 높이고 국정운영에 관한 경륜을 쌓아갔다. 뿐만 아니라 향리에 머무는 시간을 활용하여 군사관계는 물론 국가재정과 만생의 생계대책 같은 경제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고 그 대안과 방법론을 강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후일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임기응변의 난국타개책과 능란한 현실수습책은 이런 토양 위에서 싹틔워졌다.


3. 임진왜란기의 활동

 

1) 정치상황

 서애 정치적 생애의 후반기에는 북인 진출에 따른 정세의 불리와 마침 부인의 상고도 있고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를 자주 찾았다. 그러나 정여립의 옥사로 북인이 몰리고 정철을 앞세운 서인의 정국주도가 가시화되자, 남인을 끌어와 이를 견제하려는 선조 임금의 정국구상에 의해 이조판서로 특진되고 바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정여립 옥사로 흔들린 조정 분위기를 진정하고 마침 일본의 ‘명을 칠 테니 길을 빌려라’(征明假道)는 요구에 대한 선후처리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는 문제로 채 두서가 잡히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발발, 국난 극복에 신명을 바치게 된다.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동안 좌의정에서 출발하여 영의정에 오른 직후 대신으로서 전란을 사전에 예방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으로 면직되어 한동안 풍원부원군, 평안도 도체찰사(都體察使)8)의 직함을 가지고서 명나라 군사의 내원에 대비한 군량미의 확보와 전비점검 등 군무에 종사하였고 평양성을 수복한 후에는 삼도체찰사가 되어 명군과 협조하여 도성 수복에 진력하던 서애는, 임금이 환도한 선조 26년 10월 영의정이던 최흥원의 병사로 다시 영의정이 되어 그동안 조정을 이끌어 온 좌의정 윤두수와 교대해 국정을 총괄하고 전란극복을 수행하면서 전란이 끝나는 시점까지 조정을 이끄는 자리에 서게 된다.

 전후 7년간에 걸치는 국난극복과정에서 나타나는 서애의 정치활동상은 여러 면으로 말해질 수 있다. 전란의 기간이었다고 하여 치열하였던 동서인의 정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기축옥사(己丑獄事)9)에서의 최영경·정개청·이발 등의 신원문제와, 역모를 빌어 사감을 보복하고 당화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는 정철의 문제는 동인내의 남·북인 분기와도 맞물려 있어 언제든지 분쟁이 재발할 소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도 피난지 의주에서 환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 현감 권유가 앞서 병사한 정철의 죄를 논하고 그 아들 정종명이 신원소를 올리는 등 파문이 일었다가 최영경에게 추증(追贈)10)하는 것으로 가라앉는 듯 했으나 선조 30년 왜군의 재침예상에 따른 대비가 바쁜 속에서도 나주의 전도사 나덕명과 성균생원 최희남등이 다시 이발의 신원과 정철의 죄를 다스리기를 요청하는 데서 보듯이 서인·남인·북인의 당론으로서 이 문제는 재연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당론으로 인한 정쟁이 전쟁수행을 위한 조정의 단합을 깨뜨릴 정도로 위협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물론 당장 발등에 떨어진 국난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우선이어서 당론문제는 거론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신 남인의 영수로 지목되는 데서 보듯이, 각기 서인·남인·북인의 당색을 지닌 재조관인들을 잘 다독거려 조정의 보합과 인협을 끌어냄으로써 국난극복에 총력을 쏟을 수 있게 한 조정정국의 주재자인 영의정으로서 류성룡의 정치적 역량의 역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전란기간 내내 서애는 대신으로서 서인의 영수 격에 있는 윤두수와 의논하고 그 협조를 얻었으며, 역시 서인계 산림학자로서 율곡의 제자까지 포함한 다수의 문인을 통해 정계에 발언권이 크던 우계(牛溪) 성혼과도, 명과 일본 사이에 진행되는 화의교섭에 서애가 당국자로서 반대만 할 수 없었던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 우계의 일시적인 강화론으로 협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인계의 영수인 이산해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며 귀양 가 있던 이산해의 사면을 반대했다는 혐의를 받아 그가 영돈녕(領敦寧)11)으로 복직되어 조정에 나오게 되면서 서애의 정치적 지위가 흔들리고 결국 그 당여인 이이첨의 공격으로 삭탈관작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정치적 특징으로 본다면 국정을 책임진 대신으로서 능률적인 국정운영과 전쟁수행을 위한 임기응변적 조처의 신속한 처리와 유리한 여론조성을 위해서는 삼사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래서 서애는 그와 가까운 인물들을 삼사에 포진시켰다. 후원과 협력에 의해서 서애는 조정의 안정을 구축하고 토적을 통한 전란의 극복에 진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애의 국정수행이나 정국운영 방식이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정치사상이 달랐거나 권력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거나 간에, 정적 내지 비판세력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서애의 국란극복을 위한 제시책의 장단점을 비판하였고 정권의 인적구성을 시비하였다. 훗날의 일이지만 임진왜란 중에 취한 서애의 제반 시조가 훈련도감을 제외하고 난 후에 모두 폐기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데 기인하였고, 서애 실각을 가져 온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탐권식세, 즉 권력을 탐내어 정부요직에 그 당여인 남인을 심었다는 죄목이 바로 그런 예였다. 비록 이렇게 그의 정치적 역량이나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그러나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국난을 만나, 서인·남인·북인으로 갈라진 조정 관료들을 결속시키고 그 결집된 힘을 통해 난국을 성공적으로 타개할 수 있도록 한 서애의 정치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12)


2) 국난극복정책

 국난극복에 있어서 서애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결승책과 후방지원책으로 말할 수 있다. 우선 전쟁이 벌어지는 천리 밖에서 전쟁과 연관된 모든 상황과 국면을 살펴 면밀한 계획을 세움으로써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오게 한다는 결승책과 관련해서 서애는 전란 기간 내내 조정의 피난이나 군사의 배치, 명군과의 연합작전, 방어선 및 공격작전 등을 구상하고 실천계획을 수립하였다. 물론 이때 조정에는 비변사가 있어서 여기에 시·원임 대신을 비롯한 중신들이 모여 당면한 전쟁업무를 포함한 모든 국사를 논의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런 결승책의 수립은 비변사에 속한 여러 신하들의 합작품이지 서애 한 사람이 이룬 성과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비변사나 묘당에서의 논의를 주도하고 대책을 끌어낸 인물은 대부분의 경우 서애였다. 영의정이란 직책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전국을 조망하는 넓은 안목과 탁월한 식견 때문이었다.

 왜란 초에 서울을 버리고 평양까지 피난했다가 그마저 위태롭다하여 다른 곳으로 피난처를 찾을 때였다. 조정의 여론은 심산궁곡이 많아 적은 병력으로 방어에 유리하므로 보다 안전하다하여 함경도 방면으로 가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서애는 이미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해놓은 상태에서 조정이 북쪽으로 피난 가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적이 중간을 차단하면 그나마 명과의 연락마저 끊길 것이고, 만약 더욱 쫓기게 되면 두만강 넘어 오랑캐 땅으로 들어갈 것이냐고 반대하여 결국 서쪽으로 해서 의주로 가도록 결정 보게 하였다.

 후방지원의 측면에서는 민심진정과 군수공급을 들겠는데 사실 이 두가지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오성대감으로 더 알려진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白沙集)에는 ‘서애유사’가 실려있으며 민심진정과 관련한 서애의 고사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즉 서울을 떠난 피난길인 동파역에서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면서 도승지이던 이항복이 형편이 부득이하게 되면 중국으로 망명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자, 서애가 한 걸음이라도 나라를 벗어나게 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해 망명논의를 꺾어 버렸으며 뒤에 사람을 시켜 전하기를 “만약에 임금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들어가려 한다는 말이 한 번이라도 퍼지게 되면 인심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 텐데 그렇게 되면 누가 능히 이를 수습할 수 있겠소”라 하여 민심동요를 우려했는데 뒤에 과연 그 말이 옳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항복만 하여도 임기응변에 뛰어나고 한음 이덕형과 함께 명재상으로 이름난 인물인데 이들이 생각지 못한 민심문제를 서애는 벌써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심의 진정은 임금이 망명을 하지 않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의 굶주림과 고통을 다소나마 면해주고 위로하는 조처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서애는 기민구제책 마련에 부심하였고 공물진상작미법(貢物進上作米法) 마련과 둔전 경영등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들 대책은 목전의 시급한 군량미 확보를 주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기민구제를 위한 양곡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도 있었다.

 서애는 군사력 증대를 위하여 전력을 강화하였으며 아울러 전술도 개발하였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방안은 상대방의 전술을 파악하고 이를 격파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데 있음을 간파한 그는 새로운 전술을 명나라로부터 도입하였으며 이를 더욱 개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총에 대적할 수 있는 신무기를 명으로부터 도입하고 개발하였다.

 먼저 서애는 정보전을 중시하였다. 서애는 적의 첩자를 색출하여 아군의 실정에 어둡게 하였으며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척후선을 활용하여 정보전에서 이미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애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략적 측면에서 산성을 쌓고 청야전법을 실시하여 적이 식량을 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수군으로 하여금 보급로를 차단하도록 장책(長策)을 수립하였다. 또한 왜적은 전국에 전장을 펼쳐 놓고 있어서 이를 갈라놓아 후방을 위협하는 정책을 펼쳤다.   

 새로운 전술인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을 도입하였다. 절강병법은 왜적을 물리친 방법을 기술한 것으로 남병(南兵)의 장기(長技)였다. 서애는 이러한 병서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번역하고 명장(明將)의 도움을 받아 우수한 군사를 선발하고 훈련을 받게 하여 그 전술을 익히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전을 장수들에게 인식시켰고 전략적으로도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방어전에서 명의 축성술(築城術)을 받아들였으며 더욱이 왜적의 축성술까지 도입하여 만전을 기하였다. 이렇게 적의 장점까지 도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술을 개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무기를 도입하고 개발하였으니 종래와는 판이하게 다른 신기(神器)라고 불리는 조총에 대항하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야만 하였다. 먼저 우리나라 재래의 병기인 화전(火箭)과 화차(火車)를 대량으로 제조하였으며 명으로부터 화포 제조 기술을 배워서 새로운 대포를 제작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개량하여 더욱 우수한 화포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조총의 제조기술을 명나라로부터 도입하였고 장인들을 교육시켜 양산하였다. 이와 같은 전술의 개발을 통하여 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3) 전쟁이 끝난 후

 임진왜란이 사실상 막을 내리는 선조 31년 11월 19일 그 소임을 마친 서애는 비록 모함 때문이기는 하나 벼슬에서 물러나 조정을 떠나게 된다. 서애에 대한 공격은 그동안 궁금과 결탁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했고 섣불리 거빈론(去邠論)을 내어 도성을 포기하게 했다는 언관의 탄핵으로 오래 귀양 가 있던 이상해가 귀양이 풀려 돌아와 부원군으로 복직되어 북인세력의 만회를 도모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에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와 통모하고 또 죽은 왕의 묘호에 조·종을 참칭한다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것을 변호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하기로 한 변무사 선정 문제에 대한 서애의 조처에 크게 실망하게 된 임금의 불만이 그 빌미를 제공하였다. 정여립과 비슷한 급진적인 정치론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부터 서애를 배척하고 비판해 오던 정인홍 등이 서애에 대한 공격 분위기를 잡았다. 이산해 계열의 이이첨에서 비롯되어 이호신, 문홍도로 이어지는 탄핵소는 서애에 대해, 중국 남송 때의 권간으로 충신 악비를 죽이고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한 진회에 비유하여 주화오국의 죄목을 갖다 붙이는 것을 물론, 탐묵하여 재산을 쌓아 놓은 것이 후한 때의 권신 동탁에 비유된다는 인신적인 모함을 더하는 데까지에 이르렀다.

 한번 언관의 탄핵을 받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조정의 관행도 그렇지만 6~7년간의 격무로 인한 병고로 자주 사직의 뜻을 보여 온 서애로서 더 이상 조정에 머물 필요성은 못 느꼈을 것이다.


4. 결론

 그가 삭탈관작 되어 물러난 시점은 공교롭게도 남해 노량에서 이순신장군이 임란 최후의 전투에서 순국한 때와 일치한다. 만약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패배했다면 최고의 장수와 최고의 재상을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기록한 『징비록』은 전란 극복의 비전과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한 위기돌파 능력과 외교에 있어서의 대처능력,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등을 천거한 그의 인재발탁 능력 등 난국을 극복해야 할 우리 후손들에게 지금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이며,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알려준다.


※ 참고문헌

이성무, 이태진, 정만조, 이헌창,『류성룡의 학술과 경륜』, 태학사, 2008.

이덕일,『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역사의 아침, 2007.

조정기,「서애 유성룡의 군정사상」, 경남사학회‧역사와 경계, 1988.


1) 중국 송(宋)나라 때 신유학의 생활 및 학문 지침서.

2)  품계는 낮았지만 각 부서의 당하관의 천거, 언론 기관인 삼사의 관리 임명, 재야인사의 추천, 후임 전랑의 지명권 등을 가지고 있어 권한이 매우 강했다. 전랑직은 중죄가 아니면 탄핵받지 않았고, 퇴임 후에는 정승으로의 승진이 보장되어 있었다.

3) 문산계, 무산계(文·武散階)에서 종6품 이상의 관원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4) 이성무, 이태진, 정만조, 이헌창, 『류성룡의 학술과 경륜』, 태학사, 2008 235~240쪽

5) 왕조의 변천 단계를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으로 나누고 경장은 태평한 세월이 장기간 지속되면 폐단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것이 누적되면 기존 질서가 붕괴되어 과감한 개혁으로 구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이는 경장을 조상이 지은 옛집이 오래되어 재목이 썩어서 곧 무너지려는 상황에서 미봉적으로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경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6)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

7)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각). 붕당의 인물 가운데 온건한 자들을 관리로 등용하는 것.

8) 국가비상시 왕명에 따라 1개 도(道) 또는 몇 개 도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였다.

9)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한다.

10) 공(功)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을 일컫는다.

11) 영돈녕부사 (領敦寧府事)는 조선 시대에 돈녕부의 장관이었다.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 내리는 벼슬이며, 정1품이었다. 영돈녕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2) 이성무, 이태진, 정만조, 이헌창, 『류성룡의 학술과 경륜』, 태학사, 2008. 246~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