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성립과 발전


20110204 이동엽

20110219 한기수

20133023 조현기


 

- 목 차 -

 

 

1. 서론

 

2. 본론

 1) 전기가야

(1) 가야의 기반 형성

(2) 소국 형성

(3) 가야 연맹의 성립

(4) 전기 가야 연맹의 동요

(5) 전기 가야 연맹의 소멸

 

2) 후기가야

(1) 후기 가야연맹 성립

 

 

(2) 대가야권의 세력권의 확립

(3) 후기 가야연맹의 약화

 

3) 가야연맹의 여러나라

(1) 아라가야

(2) 고령가야

(3) 성산가야

(4) 소가야

 

3. 결론

 

※ 참고문헌


1. 서론

 역사현장답사를 통하여 고대시대의 가야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여러개의 가야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이 글을 서술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가야연맹의 성립과 전기가야연맹의 형성 그리고 몰락 이후 후기 가야연맹형성 과정과 몰락에대하여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가야 의 여러나라 에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역사 현장학습전에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하여 알고 가는 것이 크기에 이글을 서술하게 되었다.

 

1) 전기가야


 (1) 가야의 기반 형성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에 낙동강 유역에는 지석묘-민무늬토기 문화로 대표되는 농경 문화가 발달했으나,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금속기 제조 능력이나 사회 조직 수준이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진성을 극복할 계기가 외부로부터 닥쳐왔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 무제가 보낸 군대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군 등의 한군현(漢郡縣)이 들어섰는데 그러한 전란의 와중에 수많은 유이민이 발생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로, 또는 육로로 남하하던 중에, 이미 소국 연맹으로서의 정치제를 구성하고 있던 진국 또는 마한을 피해 문화 수준이 낮은 소백산맥 동쪽의 영남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1세기 초 이후로 낙동강 유역에는 기존의 지석묘나 석관묘와 다른 목관묘가 여기저기 조성도기 시작했다.

또한 이들이 가지고 온 선진 제철 기술 및 관련 문화 양식은 선주민 세력들과의 상호 연관 아래 점진적으로 토착화되면서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2) 소국 형성

 가락국이라고 지칭할 정도의 작은 단위 소국이 나타난 시기는 중국 진 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제30권 위서 동이전에 이른바 ‘변진 12국’ 가운데 하나로 ‘구야국’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일단 삼국지가 편찬된 3세기 후반 무렵에는 구야국, 즉 가야국이라는 정치적 실체를 중국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위나라 경초년간에 위나라 명제가 낙랑*대방태수를 파견하여 바다 건너 두 군을 정하고 삼한 소국 신지들에게 읍군과 읍장의 인수(印綬)를 주었다고 한다.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 및 진*변한 70여 국의 이름을 그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 가운데 하나인 구야국의 성립은 3세기 전반보다 앞선 어느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3) 가야 연맹의 성립

 가야의 정치 및 문화적인 차별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대외 교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위지> 진*변한조에,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여, 한*예*왜 및 두 군, 즉 낙랑군*대방군에 공급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이 이를 나타낸다.

 그런데 낙랑군*대방군같이 선직적이고 규모가 큰 외부 세력과 교역하는 경우에, 10여 개의 변진 소국들이 개별적인 형태로 교역에 나서는 것 보다는, 하나의 통합 체계를 이루어 교역에 나서는 것이 보다 큰 이익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소국들은 모두 규모가 작고 자치 성향을 가졌으며, 아직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초월적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변진 소국들은 그 세력 크기에 따라 서열화된 상태로 통합되어, 마한 연맹체의 하위 조직을 이루는 별도의 연맹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변진 소국들이 변한 연맹체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은, 각 소국 거수들의 대내적인 통치 능력이 일정한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국 거수들이 자기 영역 내에 있는 여러 소군장들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조절하거나 또는 억압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과 무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들이 대외적으로 나서서 다른 소국들과 연대하거나 외부의 도전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진 소국들은 상당한 통치 체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비슷한 문화 기반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상호간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대외적인 의사 결정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한두 개 소국에게 위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때 구야국이나 안야국같이 지리적으로 대외 교섭에 유리하고 비교적 큰 소국들이 그런 역할을 맡곤 하였다. <위지> 왜인전 서두의 교통로 기록으로 보아서는, 대방군과 마한 계통의 여러 소국들을 왜의 소국들과 연결하는 중심지가 구야한국, 즉 김해의 구야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위가 점차 관례화되면서, 구야국을 비롯한 12국으로 이루어진 변한 연맹체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변한 연맹체의 형성은 개별적인 변진 소국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각 소국 하나하나의 성장을 바탕으로 대외적인 공동 이익을 추구하다가 나타난 결과이다.

 일단 정치적 지배자가 등장하여 소국이 나타나자, 외부 상황 변화에 대한 대처가 전에 비해 신속해지고, 그에 따라 정치 체제의 발전 속도는 빨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 시기는 낙랑군*대방군을 통한 중국 문물의 대량 수용, 왜와의 활발한 교역 및 북방으로부터 지속적인 집단 이주민의 파급 등 대외적인 자극이 많았다. 그러므로 가야 지역의 소국 연맹체 형성 시기는, 이 지역의 정치 단위들이 한 단계 발전하여 소국을 형성한 시기보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2세기 후반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아무리 늦어도 3세기 전반을 넘기지 않았다. 즉, 3세기 전반 이전에 변진 12국은 김해의 가락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 연맹체, 즉 전기 가야 연맹을 이루었다.


 (4) 전기 가야 연맹의 동요

 낙랑이 멸망하고 이후 가야국은 위기 의식을 느껴 신라에게 화친을 청하였고, 그 몇 년 후에 포상팔국이 연합하여 가야를 공격한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은 가야국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신라의 군사 원조를 받아 겨우 이를 물리치고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야를 공격했던 포상팔국은, 전쟁의 결과로 가야 연맹체 내의 세력 균형을 뒤바꿀 수는 없었지만, 신라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유지한 가야국의 영도력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가야국 침략을 배후에서 지원한 세력은 전부터 가야국과 경쟁세력이었던 함안의 안라국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마산과 고성 등지의 세력들은 해운 교역 입지의 측면에서 김해와 큰 차이는 없었으나, 그 교역을 내륙으로 연결시키려면 김해와 달리 육상 수송로를 이용하여야 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들의 내륙 배후에 위치한 함안의 세력은 이들과 연계될 만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가 중국 동진의 선진 문물을 토대로 가야와 왜를 연결하는 상업적인 교역로를 개척해오자, 가야 소국들은 백제 문물 중개 지역으로 포섭 당했다. 이로 인해 전기 가야는 신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쪽과 백제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파로 나뉘게 되었다.


 (5) 전기 가야 연맹의 소멸

 서기 391년에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큰 변화를 맞았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고 관미성을 함락시키더니, 396년에는 백제의 58성을 빼앗아 한강 이북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삼았다.

그리고 백제가 왜국과 화통했다는 소리를 듣고 평양성으로 갔고, 이때 신라 사신이 와서 왜인이 신라를 공격한다고 하자 공동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렇게 되자 왜구들은 고구려군을 보자 물러갔는데 이들이 간 곳이 임나가라로 갔는데, 이를 고구려군이 쫒아가 임나가라를 정벌하면서 왜구들에게도 항복을 받아 내었다. 이로 인해 김해 가락국을 대표로 하는 전기 가야 연맹은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도 가야 연맹권은 신라의 중앙 집권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자기 지역에 대한 자치 기반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다만 신라 문화의 발전에 눌려 한동안 기준을 찾지 못하고 침체기를 겪는다.  


2) 후기가야


 (1) 후기 가야연맹의 성립

 전기가야연맹의 해체 후 가야세력은 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존속하다가 5세기 후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다. 고령지역은 경상도 내륙지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군 침입 때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령 지산동의 거대한 고분들은 바로 대가야 세력의 성장을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이다. 대가야는 점차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가야국가들을 포괄하면서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가야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을 금관가야가 주도한 가야연맹과 구분하여 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2) 대가야권의 세력권의 확립

 삼국 및 가야 사이의 국제관계는 6세기에 접어들어서도 큰 변화는 없어서 잦은 분재이후에는 전쟁이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또한 신라는 당시 고구려의침입을 막기위해 가야에대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 원활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가야권의 세력권은 고령에서부터 서쪽으로 확산되어 합천, 거창, 함양 등을 거쳐 지리산북부의 남원군 야영면 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월산리 고분군과 건지리 고분군의 유적 , 유물성격이 고령계통의 것임을 보아 확인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 임실군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을 볼수 있으며 우륵 12곡 중에 이들의 지명과 같은 강기물 . 하기 물의 두 곡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물, 즉 기문은 상당기간 대가야의 영유아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륵 12곡은 대가야 왕정에서 특별한 의식 때 연주되던 궁정음악 및 연맹체 소속 국들의 음악을 궁정악사인 우륵이 듣고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 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의식 때 기문국이 사람을 보내 고유음악을 연주케 할 정도였다면, 그 취득 방식도 백제의 부진함에 실망한 기문국 이라는 곳이 대가야에 편입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3) 후기 가야연맹의 몰락

 당시 국제적으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고립되었던 후기가야연맹은 백제의 가야 고립으로 인하여 가야를 거치지 않고 왜와 교류하면서 점차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껴 신라와 결혼동맹을 하게 된다. 대가야는 522년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였으며, 신라의 법흥왕은 대가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가야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는 한편으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부체제를 굳건하게 정비한 다음, 서쪽 가야지역으로 무력진출을 적극 꾀하고 있었으며, 결혼동맹을 받아들인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미 신라는 지증왕대에 가야지역을 침략하여 김해지역 등을 한차례 점령한 적이 있었고, 524년에는 법흥왕이 직접 남쪽 변방지역을 순행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532년 지속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위협하였다. 

 후기가야연맹의 몰락의 첫 신호탄은 탄기탄국의 신라 투항 (529년) 에있다.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후기가야연맹 과 신라사이 즉 대가야와 신라사이의 에 존재하던 탄기탄국이  가야연맹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투항함으로써 신라에 편입되면서 가야연맹의 동남부지역 국가들의 멸망 또는 이탈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로인하여 남부 제국은 그것을 지지 못하고 방조한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면서 자구책으로 자체 내의 단결을 도모하게 되었다. 안라국이  남부제국의 맹주가 되면서 대가야 와  분열되었다. 안라국으로 중심이 되었던 남부제국은 백제의 침략으로 백제의 영향아래 놓여지게 된다. 탁기탄이 신라에 병합되고 안라에 백제군이 진주해 들어와서 이제 가야 남부지역에서 독립세력은 낙동강 하구 부근의 남가라(금관국)와 탁순만 남게되었다. 이두세력은 자체적으로 연합하여 지키기는 무리가있어 백제와 신라사이의 중개 중립지역을 꾀했다. 그렇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남가라국(금관국)은 신라의 침입에 항복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금관국의 왕족을 신라의 진골로 편입시키고 금관국을 금관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안라연매의 백제의 영향에 놓여있었지만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독립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백제의 안라경영을 하면서 신라에 의해 선점당한 왜와의 해운교역을 탁순국을 치면서 해운주도권을 차지하려고 탁순국을 멸망시킨다.

 대가야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은 5세기후반 이후 6세기 초에 걸쳐서 세력을 떨치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아직 그 영역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지 못한 6세기 전반에 들어와 그보다 고대국가의 성장도가 우월한 백제. 신라의 조직적인 침투에 의하여 분열되어 그 남부제국을 잃었다. 그 결과 후기 가야연맹은 남부지역의 영토 및 주권이 축소되는 과정 중에 약화되어서 가야로서의 통합 움직임은 상당한 타격을 입고만 것이다. 이후로 대가야 안라 이원체제로의 분열로 후기가야연맹은 무너지게 된다. 점차세력이 약해져 이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3) 가야연맹의 여러나라


 (1) 아라가야

 1세기경 6가야 형성기에 함안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된 아라가야는 6세기 중엽 신라에 복속되기까지 안으로는 강건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세력경쟁을 벌이면서 고대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자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극히 부분적으로 기록, 역사를 복원할 길을 잃어 버렸다. 또한 가야가 6세기까지 신라 백제 등과 대등한 입장에서 성장을 계속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왜국의 역사와 관련되는 부분만이 다루어져 마치 삼국에 부수하는 역사로 취급되어 왔다. 함안에 관한 기록이 처음으로 역사에 나타난 것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한에 관한 기록 가운데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을 언급한 부분이다. 경남과 경북 일부지방에 해당되는 변한 12국 가운데는 오늘날 김해지방인 변진구야국[弁辰狗倻國], 부산 동래지방인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과 함께 변진안야국이 있었다. 오늘날 함안은 바로 이 변진안야국에서 출발한다. 서기 1세기가 되면서 이 지역도 차츰 세력의 통합이 이루어져 마침내는 6가야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함안은 바로 이 6가야중의 하나인 아라가야이다. 6가야는 신라나 백제처럼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들 세력간에는 연맹관계를 형성하면서 신라나 백제와 대치했다. 아라가야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문에 ‘安羅仁武兵’ 으로 등장할 만큼 신라 백제와 대항했던 큰 정치세력이었다. 그래서 함안에는 큰 고분군이 밀집 분포하며 분지외곽에는 대규모 방어 시설인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三國志] [韓傳]은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가야지역 국가규모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弁.辰韓合 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 속진왕 辰王常用 馬韓人作之 世世相繼

이를 보면 가락국과 아라가야 등은 대국의 규모인 4천~5천호에 인구 2~3만 명에 이르렀으며 총인구는 25만 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락국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6가야의 왕은 모두 금합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로 하고 각기 도읍한 땅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아라가야의 시조는 수로왕이 바로 아래 동생인 아로왕 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아라가야는 4세기에 이어 5~6세기에도 한반도의 격변하는 세태 속에서 그 당시의 강국인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취할 때에 기습을 가해야 할 정도로 고구려에 부담을 준 하나의 국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라가야는 본래 아시양국으로서 4세기 이전에 이미 성립하였고 4세기 중엽 전후에는 한기를 중심으로 한 관료체제가 형성되었으며 5~6세기에는 가야의 여러 국가 중에 이 시기를 이끈 대표적인 국가로서 활약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지역은 주변의 강대세력인 신라와 백제의 공세를 크게 받았다. 아라가야는 이들 나라의 공세에 버티지만, 신라는 주변의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신라 제4대왕 석탈해가 진한지역 전체를 통일한 후 옛 변한지역인 가야의 여러 나라를 넘보기 시작했다. 강성해진 신라는 법흥왕 때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불교의 수용,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진흥왕 대까지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게 된다. 김해의 가라국이 신라로 병합되면서 함안의 아라가야도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신라에 멸망당하고 만다. 아라가야는 역사에 자취를 감추게 된 시기가 서기 560년대 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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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읍에서 함안면으로 가다보면 야산 구릉지대에 도항리 고분군 사적 84호로 지정된 고분이 보인다. 아라가야 고분에서 발굴을 통해 가야의 국가구모를 어느 정도 추정을 하였고, 말안장, 화문 투장, 고배 토기 등 철기문화가 한껏 무르익었음을 알려주며 다양한 장법과 무덤의 구조를 밝힌다.

 도항리 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84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은 41,207㎡이다. 사적 제85호로 지정된 함안 말산리 고분군과는 같은 구릉 내에 있다. 도항리 고분군과 말산리고분군을 나눈 것은 현 행정구역상의 구분에 따른 것이다.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함안지역의 최고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지로 삼국시대 전 기간 동안 조영된 중심고분군이다. 함안군의 남쪽을 에워싸고 있는 높은 산줄기를 배경으로 분지의 한가운데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대형봉토분들이 밀집되어 분포하는 대표적인 가야지역의 고분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대형분 중에 비교적 규모가 큰 2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된 바 있는데 그 중 34호분(현재의 고분 호수로는 4호분)은 내부 매장주체부까지 노출되었으나 5호분(현재 25호분)은 봉토조사에 그쳤다. 그 후 오랜 동안 학계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다가 1987년 이래 고분의 정밀한 분포조사와 봉분 측량이 이루어졌고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많은 유구들이 발굴 조사되어 유적의 성격이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2) 고령가야(古寧伽倻)

 고령가야는 삼국사기(三國遺事) 5가야조(5伽倻條)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육가야국서실록(六伽倻國書實錄)에 이름이 전한다. 구체적인 사회실상을 살펴볼 자료는 현재로서는 매우 부족하며 여러 자료를 통해 그 위치와 연대만 추정할 뿐이다. 육가야국서실록(六伽倻國史實錄)에 고령가야는 김해 가락국이 건국하던 해인 서기 42년 首露王[수로왕]의 셋째동생 고로왕이 나라를 세운 후 2대 마종왕을 거쳐 3대 이현왕까지 213년간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령가야의 마지막 왕 이현왕은 신라 12대 첨해왕(沾解王)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다른 가야국들과 연합하여 대치하다 힘이 부쳐 김해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처럼 6가야 가운데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고령가야는 실체를 입증할 문헌이나 유적이 별로 없다.

 한편, 이병도 등의 역사학자는 경상북도 상주와 문경 지역은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가야의 영역으로 보기 어렵다며 고령가야가 경상남도 진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학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 이유로 첫째, 함녕은 가야의 영역에서 너무나 떨어져 다른 가야와의 위치와 상응하지 않으며 둘째로는 진주는 아라가야의 근접지이고 신라에 병합된 이후 웅도로 발전한 남강유역의 중요한 곳이며, 진주보다 고령이 뒤에 생긴 이름이지만 발음에 비슷하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리가 역사적 문헌이나 유적 유물의 고증이 아닌 지리적 위치와 거리, 또는 지명의 유사한 점을 들어 주장한 것이어서 실체 규명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고령가야는 경북 상주시 함창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에서 건국된 가야제국중의 한 왕국으로 보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함창읍은 영강과 이안천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부와 서북부는 해발 2백 미터 내외의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는 오아도가 있었음을 입증할 유적이나 유물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야유적으로 전해오는 왕릉가 몇몇 성곽이 함창 주변에 존재해 있다. 국방의 방어를 위한 성곽이 남아있으며, 낙동면에 성밑 성골 성둑 등으로 불리는 자연마을 주변에 쌓아졌던 가야성을 비롯하여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는 상안 능선 따라 축조한 봉황산성(鳳凰山城)과 이안리 덕봉 3면에 쌓은 토성이 있다.

 또한 가야시대 고분은 합창읍 신흥리(新興理) 뒷산 오봉산의 북쪽 면에 흩어져 있다. 이 오봉산은 도읍의 안산으로 고분들은 모두 북향이며 산정의 다섯 봉우리가 거의 일자형을 이루고 있다. 고분들은 대부분 도굴되었거나 나무가 들어서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곳에는 5백~6백기의 고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분들이 가야고분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 외에 도굴될 때 표출된 몇 가지 묘제와 유물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수혈식[竪穴式] 석곽[石槨]과 개석[蓋石]등으로 보아 가야시대의 묘제임이 분명하고 둘째는 고배[高杯]등 토기 조각들이 가야시대 토기이기 때문이다.


 (3) 성산가야(星山伽倻)

 벽진가야(碧珍伽倻]라고도 불리는 성산가야(星山伽倻)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네 번째 동생 벽로(碧露)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관련기록과 유물 등의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지금 성주 땅에는 성산가야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고 또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에는 성산가야를 “지금(고려 초)의 경산(京山)”이라고 하였다. 경산은 오늘날 성주군의 중심인 성주면에 있는데, 옛 지명인 경산부(京山府)가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벽진가야는 지금의 성주군을 중심으로 한 가야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따르면, 성산군의 영현(領縣)에 본래 본피현(本彼縣)인 신안현(新安縣)이 있었는데, 신안현은 고려 초에 경산부라고 하였다.

 경산부는 위와 같이 성주군 성주면이므로 현재의 행정 구획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반피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놓고 백제와 서로 빼앗으려 한 기사가 보인다. 이 반피국은 위의 본피현, 즉 지금의 성주군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성주 지역은 백제의 국경과 가까워 기문이라는 땅을 서로 빼앗으려 했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기문은 지금 어느 위치에 있었던 땅인지 분명하지 않다. 532년과 562년에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각각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아 성산가야도 이 때 를 전후해 신라에 합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산가야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성산가야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줄 유적이 없지는 않다. 성주에는 성주읍 성산리에 사적 제86호인 성산리고분군(星山里古墳群)을 비롯해 2백70여 기의 고분이 있다. 성주읍 성산 아래 성산리, 선남면, 신부동, 용암면, 장학동 등에 흩어져 있는 이 고분군은 성산가야의 왕족 또는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전해온다. 고분의 구조는 직사각형으로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부장품을 함께 묻고, 돌방의 벽은 평평하고 큰 돌을 몇 개 덮은 후 안쪽 입구 역시 돌을 쌓아 막은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다.   또한 이와 함께 순장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출토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관을 비롯하여 철제품, 자기, 도기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성산가야시대로부터 신라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석기와 철기의 병용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도 성주군에는 금수면 명천동, 대가면 옥화동과 도남동, 월항면 인촌동 용각동 등에 크고 작은 고분이 흩어져 있으며, 성주에는 가야백성들의 피난지였다는 일명 백운산성(白雲山城)이라고 하는 가야산성지(伽倻山城地)가 있다. 성주군은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성산가야의 성곽을 복원하거나 유물전시관을 건립하는 등 가야의 역사를 깨우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4) 소가야

 김수로왕(金首露王)의 6형제 중 막내인 말로(末路)가 가락건국 15년 후인 서기 57년, 지금의 고성지방에 나라를 세운 후 9대 이형왕 29년 서기 532년,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475년간 이어져 왔으나 대가야가 신라에 토평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고성은 삼한시대의 변진(弁辰) 12국 가운데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또는 포상팔국 중의 한 작은 부족사회인 고자국 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작운 부족사회가 삼국시대에 이르러 다른 5가야와 함께 소가야로 발전 되었다. 삼한시대 낙동강 서쪽 지역에서는 변한의 24부족이 연명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당시 낙동강 하류인 김해의 구야 부족은 주변의 부족사회를 통합해 금관가야(金官伽倻) 불리는 가야와 낙동강 중류 경북 고령지방은 대가야가 건국돼 세력을 키워 나가자 고성지방의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도 주변의 부족사회를 통합해 가야연맹 중 가장 작은 부족국가인 소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소가야는 건국에서 멸망까지 18읍을 영토로 다스렸고, 도읍지는 지금의 고성읍이다. 한편 지한지역을 통일한 신라는 차례로 가야 지역을 흡수 하였고, 신라 22대 지증왕(智證王)대에 이르러 소가야는 완전히 세력을 잃어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737년에 명칭도 고자군(古自郡)으로 바뀌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때는 고자군(古自郡)이 고성군(固城郡)으로 바뀌었으며 828년 군태수로 부임한 소가야 말로왕의 17대손 김양은 신라왕으로부터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해지기도 했다. 지금 고성지역은 소가야 왕국의 실체를 유추할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으며, 고성읍을 비롯한 주변지역에 고분이나 산성 등이 있기는 하지만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만 될 뿐 이다. 소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으로는 고성읍 송학리고분군과 동해면 내산리고분군, 율대리고분군, 연당리고분군, 오방리고분군, 사천 예수리고분군, 진주 중안동고분군, 가좌동고분군 등의 무덤유적과 고성 동외동 조개더미 등의 생활유적이 있다. 동외동 조개더미에서는 왜의 야요이토기와 중국의 도장무늬토기가 출토되어 당시 활발했던 소가야의 교역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산리고분군 안에는 고사리무늬가 3곳 붙어있는 받침 달린 항아리2점과 철제품으로 된 등자(鐙子:말의 안장에 달아 양 옆구리로 늘어뜨려 두발을 디디는 제구) 등이 나와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소가야의 왕궁 터라고 알려진 고성읍 수남리와 동외리 일대에는 당시의 흔적이 별로 없지만 그 가운데 토성이 일부분 남아있다. 성안은 대부분 민가가 들어서 성벽은 무너지고 일부 남아있던 석축도 정유재란 때 왜인들이 읍성을 개축하여 왜군의 남해안 장기 주둔을 목적으로 쌓았다고 한다. 기단부의 성벽은 안팎으로 협축수법으로 쌓았는데 외벽은 큰 돌을, 내벽은 흙과 작은 돌로 쌓았으며 적심석은 잡석으로 채웠다. 그러나 남은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아 전체적인 크기를 알 수 없다. 그 주위에 송학리고분군이나 동외리패총, 만년사 토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시대 도성으로서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3.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이글을 통하여 가야의 기본적인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그 시대의 상황과 가야라는 위치적 입장 그리고 가야라는 연맹체국가의 한계점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현장학습을 통하여 가야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 신라∙가야』, 탐구당, 2003.

김정복,「가야는 신비의 왕국이었나」, 청아출판사, 2001.

이점호,「잊혀진 왕국 가야」, 선우미디어, 1999.

김태식,「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