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쇄술의 발전

 

20133012 이나원

20133026 최병성

20110206 이장호

 

- 목 차 -

 

 

1. 서론

2. 본론

 1) 목판 인쇄술

 2) 활자 인쇄술

  (1) 활자의 개요

  (2) 목활자 인쇄술

   ① 한반도 목활자 인쇄술의 변천

   ② 영남지방 목활자

   ③ 목활자의 재질

 

 (3) 금속활자 인쇄술

   ① 금속활자의 개요

   ② 고려시대 금속활자

   ③ 여말선초의 인쇄기관

   ④ 조선 초기 금속활자

3. 결론

4. 부록

 1)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표

 

※ 참고문헌


1. 서론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인쇄물을 쉽게 만나곤 한다. 물병의 표지, 책, 거리의 광고물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인쇄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점차적으로 정보들이 디지털화 되고 있는 현대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이 인쇄술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발전하였을까? 그 기초적 개념은 필사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사는 인간이 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수가 발생하거나, 글의 내용이 바뀐다거나, 혹은 대량 생산이 불가능 하는 등 여러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쇄술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태동하게 되었으며, 그 시작은 목판 인쇄술이었다. 순차적으로 보았을 때 목판 인쇄물에서 제작 일자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제작물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으로 4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해 868년 5월 11일에 종이에 잉크로 인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일본 호류 사에서 770년경에 인쇄된 것으로 알려진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이 발견되어 최고 목판 인쇄물의 지위가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그 이후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을 보수하던 도중, 다량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무구정광 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됨에 따라 현재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목판 인쇄물들이 가지는 중요한 점은 이 시기들에 이미 목판 인쇄술이 확립되어 이런 내용을 인쇄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언젠가 새로운 목판 인쇄물이 발견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뜻하는 것이기도 한다. 위와 같이 최고 목판 인쇄물이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라는 관점에서 앞으로의 글을 서술하려고 하며, 그 인쇄물의 보편적 특징과 한국적 특수성에 대해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2. 본론


1) 목판인쇄술

 인쇄술의 발달에는 종교적 열의와 욕구가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은 따로 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중·일 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국가들은 불교의 전파를 위한 불경과 불화의 인쇄에 집중하였으며, 이집트에서는 십자군의 공세가 한창일 때 코란의 구절이 인쇄되었고, 유럽에서는 목판 인쇄가 들이 성화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쇄를 하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보자면 한국의 경우는 다라니경과 대장경의 인쇄에 집중되어 역시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약간 범위를 줄여 다라니경이 왜 선택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다라니경은 영생을 위한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써, 기존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필사의 방식을 통해 제작되었었다. 그러나 이 경문을 77부 혹은 99부를 작성하여 탑에 묻어야 했는데, 이는 너무나도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에 인쇄라는 방법이 고안되게 된다.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 인쇄된 종이는 닥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난 것이었다. 구례 화엄사의 석탑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불경에 쓰인 종이 역시 통일 신라 시기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얇고 질기며 아름다운 백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통일 신라의 기록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 704년에 한역된 대다라니경이 신라에서 목판인쇄로 인쇄되어 나왔다는 것은 중국의 불교문화를 신라로 들여오는 데 있어서 얼마나 빨랐고, 열심히 노력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원래는 불경을 필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과 동시에 중국이라는 동아시아 문화 중심의 그늘에서 사상체계를 빠르게 받아들여 통치에 도움을 받으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음이 보인다. 이러한 필요성과 의욕이 합쳐져 선택된 목판인쇄술은 여러 가지 선행조건을 가지는데, 종이·잉크·목판 제작 등의 것이었다.

 신라는 중국의 불교문화를 어느 누구보다 일찍 받아들였고, 그것을 퍼뜨리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의 지위는 불교문화가 융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를 일찍이 수용하여 신라 왕조의 지배구조를 완성하고 이것의 가호를 불교신앙에 의해 이룩하자는 강한 의도에서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여 불국사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면, 신라는 다라니경을 들여왔을 때 다량 인쇄를 필요로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의 수많은 전화를 겪는 도중에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도난당하였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던 많은 수의 인쇄물들 또한 소실되었다. 8세기 초에 목판으로 인쇄된 다라니경 다음에 제작된 신라의 목판본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또한 기록에도 신라에서 인쇄된 그 밖의 책에 대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 체계가 정비됨에 따라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모두 모아 체계화하는 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경·율·론의 삼장으로 구성된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의의가 높은 유산이다. 현종 2(1011년)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70여 년의 오랜 기간 동안 목판에 새겨 간행한 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개경에 보관하였다가 대구 팔공산 부인사로 옮겼는데, 몽고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의천은 고려는 물론 송과 거란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속장경(續藏經)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만들고, 선종 3(1086년)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10여 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몽고 침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19(1232년)에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현재까지 합천 해인사에 8만 매가 넘는 목판이 모두 보존되어 있어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11세기에는 송, 고려, 거란 삼국이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하였고, 이 대장경판의 소유 여부는 곧 그 나라의 문화 척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불교 서적뿐만 아니라 유학 서적도 차츰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1056년에는 비각(祕閣)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유학 서적 판본들을 한 본씩 찍어서 서경에 보내도록 한 일이 있다. 유학 서적에 대한 지방의 수요는 광종 때에 과거제의 채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수도와 지방을 막론하고 11세기에는 목판인쇄가 성행하였다. 당시의 고려는 서적의 판각이 우수하여 송판에 못지않은 발달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091년에는 송의 철종(哲宗)이 송에서 이미 없어진 백십 여 종의 서적을 고려에 구해 보내달라고 청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는 송이 고려에 선본, 즉 희서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외적으로 고려는 서적을 중히 여기고 두루 수집하며 외래의 학문 서적들을 귀중하게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열성을 인쇄에 쏟았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려가 풍부한 장서량을 자랑하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종이의 생산이 일찍부터 이루어 진 까닭이다. 12세기 초 고려에서는 종이의 주재료를 닥나무로 하였으나 가끔 등나무를 섞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목각에 쓸 나무로는 박달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같은 조건에서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11~12세기 초까지 큰 발전을 하였다. 물론 이 시기 목판인쇄는 송판의 서체를 본받고, 송의 인쇄술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고려의 목판인쇄는 송 못지않게 성행하였다.


2) 활자 인쇄술


 (1) 활자의 개요

 일단 활자란 활판 인쇄를 위해서 찰흙, 나무, 쇠붙이 따위의 재료로 만든 각종 크기의 모나고 판판한 면에 글자를 뒤집어 쓴 모양으로 볼록하게 새기거나 부어서 만든 것을 뜻한다. 오늘날의 활자는 네 면이 가지런하고 판판하지만 옛 활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글자가 있는 면은 판판하지만 그 뒷등은 타원형 또는 원형으로 옴폭 파여 있거나 송곳처럼 뾰족하게 만들어졌던 것이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활자의 크기 또한 같지 않아서, 예전의 것은 활자에 따라 큰 자, 중간 자, 작은 자의 구분이 있었을 뿐 그 크기가 서로 같지 않았다. 그리고 옛 활자도 글자가 한 자씩 떨어진 단자 활자로 된 점은 근래의 것과 비슷하지만, 간혹 몇 개의 글자를 한 개의 네모꼴에 잇달아 새기거나 부어 만든 연자 활자도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와 같이 몇 개의 글자를 짧거나 긴 하나의 네모꼴에 잇달아 새기거나 부어 만든 예는 ‘춘추강자’라는 활자로 찍어낸 「춘추좌전」과 ‘인력주자’로 찍어낸 「책력」등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 왜 목판 인쇄에서 활자 인쇄로 변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 과정을 설명하면서 천천히 해결 해 보도록 하자. 목판본을 제작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글자를 새기기에 적합한 나무를 베어 적당한 크기와 부피의 판목으로 켠다.

2. 켠 나무를 짠물 또는 민물 웅덩이에 오래 담가 결을 삭힌다.

3. 삭힌 나무를 밀폐된 곳에 넣고 쪄서 살충과 동시에 진을 뺀다.

4. 충분히 건조시켜 뒤틀리거나 빠개지지 않게 한 다음판면을 곱게 대패질 한다.

5. 간행하려는 책을 종이에 깨끗이 써서 뒤집어 붙이고 정성스럽게 새겨 낸다.


 이렇게 위와 같은 목판 인쇄는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도 다른 책을 찍는 데는 쓸 수 없고 오직 하나의 문헌만을 찍어 내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게다가 목판은 수량이 많고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보관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일 잘못 간수하면 썩고 닳고 터지고 부서져서 못 쓰게 되는 것 또한 큰 단점이었다. 그 결과 새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활자 인쇄였다.

 이 활자 개발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북송의 정치가였던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필승(畢升)이라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에 의하여 교니활자(膠泥活字) 인쇄술이 발명되었다고 나온다.

 이는 찰흙을 동전처럼 부피를 얇게 만들어 글자를 새겨 하나씩 떼어내어 불에 구워 활자를 만든 다음, 철판에 점착성 물질을 깔고 그 위에 철로 만든 틀을 놓은 다음, 그 안에 책 내용대로 활자를 배열한 후 불에 쬐어 점착성 물질을 녹이고 다른 평평한 철판으로 활자면 위를 눌러 활자의 높이를 고르게 하여 책을 찍어내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니활자에서 멈추지 않고 필승은 나무 활자와 관련된 실험도 해 나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목활자를 사용하는 경우 먹물을 바르면 높낮이가 평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약을 바르면 서로 달라붙어 사용할 수가 없어 흙을 구워 쓰는 것만 못 하다는 결과를 얻어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니활자 인쇄술은 문제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판을 짤 때 쓰는 점착성 물질이 송진과 종이를 태운 재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응집성이 약했고, 인쇄 도중에 활자가 자주 움직이거나 떨어지고, 재료가 흙이기 때문에 잘 부서지고 일그러져 결국 실용화 하는데 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교니활자 인쇄술은 하나의 시도에 그치고 말았지만, 여기서 비로소 활자 인쇄의 이로운 점을 깨닫게 되었고 그에 대한 창의적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2) 목활자 인쇄술


 ① 한반도 목활자 인쇄술의 변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목활자 인쇄술이 실용에 성공한 것은 원대의 왕정(王禎)이었다. 그는 농업생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농업에 관한 글을 정리하여 「농서」라는 방대한 저술을 편찬하였는데, 공장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설계로 약 3만 여개의 목활자를 제작하였으며, 위에서 제작한 목활자를 바탕으로 단기간 내에 약 6만자 가량의 「정덕현지(旌德縣志)」를 찍어내는데 1개월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효율적이었다는 설명이 적혀있다.

 그러나 이 목활자 인쇄술이 언제 고려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고종 23(1234년)에 쓰인 이규보(李奎報)의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는 오히려 금속활자에 대한 기록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 뒤로 시대를 이동하여 태조 4(1395년)에「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가 목활자로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처음 보이고, 그 다음에 태조 6(1397년) 제작된「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이 목활자로 되어있다. 이렇게 목활자가 금속활자보다 뒤늦게 사용된 기이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목활자가 금속활자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우왕 4(1377년) 제작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에는 부족한 활자를 나무활자로 보충하고 있는 것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일찍부터 목활자가 인쇄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왜 한반도에서 목활자가 각광을 받지 못 하고 금속활자가 주로 사용되었는지, 그러면 목활자는 어딘가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이후 기록을 살펴보면 1397년에 나온 목활자 이래로 조금씩이나마 목활자를 사용한 기록들이 나오고 있는데 세종 30(1448년)의「동국정운(東國正韻)」이나 세종 31(1449년)「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등에서 그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그 외에는 조정에서나 민간에서 초기에는 목활자 사용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지만 현존하는 목활자 인쇄물들이 기록 대신 목활자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따라 목활자의 본뿐만 아니라 인쇄공과 활자 자체를 가져간다거나, 책들이 약탈된다거나, 전란에 타버린다거나 하는 등의 일로 점차적으로 인쇄라는 개념 자체가 침체되어 갔으나, 전란 이후 광해군 때 문물을 재정비하는 도중 서적에 대한 관심의 일부로 서적출판을 활발하게 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에서 독특하게 바라볼 것은 훈련도감에서 목활자 서적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일반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군비충당이었는데, 군비 충당을 위해서 목활자를 만든 다음 군대에 있는 인쇄공들로 하여금 필요한 서적을 인쇄 한 다음 판매하여 군비를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으로 침체된 인쇄술은 다시금 재기의 발판을 삼음과 동시에 그 후 민간 목활자 인쇄 발달에 큰 파급효과를 주게 되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문집(文集)을 많이 간행하였는데, 이전에는 주로 목판으로 간행하였으나 19세기 중엽부터는 목활자로 간행하는 추세로 점차적으로 바뀌어갔다. 그 후 1880년 외국에서 현대 연활자 인쇄가 들어옴에 따라서 전통적 목활자 인쇄는 지방으로 밀려나가게 되고 모든 주력 인쇄는 연활자 인쇄가 맡게 되었다.

 그러면 왜 19세기에는 목활자 인쇄가 성행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서 조선 사회의 하나의 특징이었던 족보 간행이 30년마다 다시 만들어지기에 한 번 사용하고 개정이 불가능한 목판본으로 하는 것보다 활자의 추가로 수정이 가능한 목활자가 더 적합하여 사용하였다고 유추하고 있다.


 ② 영남지방 목활자

 인조반정 이후부터 서인이 정권을 잡아 기호지방 사림들이 조정에 많이 등용됨에 따라 영남의 사대부들은 숙종 년 간 등 잠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계에서 소외되었다. 따라서 관직을 통해서 인정받기보다는 재야의 학자로서 학문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였는데, 중종 38(1543년)의 백운동서원을 시발점으로 서원이 활발하게 건립되면서 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학문이 진작되었다.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저술과 출판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영남지방에서 목활자로 인쇄된 서적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나타나기는 하지만 대중화 된 것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시기였으며, 1970년대 초반까지 이용되었던 전통적 인쇄수단이었다.

 총 506권의 목활자 본 중 272권이 문집, 156권이 족보, 39권이 전기로 되어있는데, 이를 말미암아 개인의 학문적·문학적 연구를 담아내거나,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담거나, 혈통을 증명하는데 인쇄술이 쓰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문집부터 차례대로 어떤 쓰임을 가졌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문집은 한 개인의 저작물이지만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한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는 어찌 보면 맞지 않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이때의 조상숭배와 문벌중시의 사회에서 이 문집은 조상을 중심으로 주변 일가나 일족에게 사회적 인정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문집은 자가 선양의 증표이기 때문에 사회적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인정이 있지 않으면 문집의 출간 자체가 막히는 것이고, 또한 출간 후에도 배포가 불가능 해 지는 것이다.

 이렇게 위와 같이 향촌에 위치하는 양반들은 문중과 동성 촌을 이루고 향청과 향교 또는 서원에 출입하면서 집단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위와 같은 행위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족보는 어떤 연유에서 인쇄되었는지 또한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가 유지되면서 유교사상이 점차적으로 퍼짐에 따라서 종법제도와 친족체도의 수용과 함께 종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친목 활동을 활발히 하며, 내부의 질서를 통제하기 위해 족보 편찬이 시작되었다. 여러 족보의 서문을 확인 해 보면 조선시대 양반들의 족보 편찬 목적은 기본 유교윤리의 수호와 풍속의 진작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더욱이 신분을 증명 해 주기에 17세기 이후로 넘어가게 되면서 양반 가문이나 신흥 세력 따로 나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와 혈족을 새로 규합하고 정리하겠다는 의도가 합쳐서 강력한 족보 편찬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 때 족보 간행에는 목판보다 목활자본이 훨씬 더 사용이 용이하였는데, 위에서 언급 하였듯이 거의 30년마다 개수하며, 한정된 부수만을 필요로 하는 족보의 성격상 목활자로 인출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으며, 민간에서 출판하는 문집은 목판으로 인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족보 간행에는 목활자가 꾸준히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위와 같은 목활자 본들은 주로 언제 인쇄되었을까? 이를 나열하면 20세기에 들어오고 나서 약 80%인 405종이 인쇄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를 이용해 족보가 공적 문서의 성격을 상실함에 따라 경제적인 여건만 구비된 경우 새롭게 자신의 일가를 가지고 싶었던 여러 사람들의 내면이 대변된 것으로 보고 있다.


 ③ 목활자의 재질

 위와 같이 조정에서보다 민간에서 많이 제작되었던 목활자는 필연적으로 정부 주도로 제공하는 재료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조선후기 민수용 일부 목활자 183점을 대상으로 그 재료를 분석해 과연 실제로 사용된 재료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과 가까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목활자의 재료로 사용된 목재들은 아래와 같다.

 1. 회양목, 충청북도와 강원도·황해도로 이어지는 석회암지대에 주로 자란다. 인장 및 목활자의 재료로 최적의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라는 속도도 느리고 크게 자라는 편이 아니라 많은 양을 쓰는 데는 문제가 있다.

 2. 돌배나무, 본래 자라는 지역은 약간 추운 지역이나 전국에 걸쳐 흔히 보인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새긴 나무의 상당수가 돌배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3. 감나무, 약 3~4천 년 전부터 화석 층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4. 박달나무, 홍두깨나 절굿공이 같은 단단한 목재가 필요한 경우에 사용하였으며, 한반도 전역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5. 단풍나무, 단풍이 지는 모든 나무를 포함하며, 재질이 균일하여 사용된다.

 6. 모과나무,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나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보면 대접한 기록이 있으므로 고려 이전에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단단하나 크게 자라지 않으며 생산량이 적어 사용 예는 흔하지 않다고 한다.

 7. 산 벚나무, 한반도 전역에서 잘 발견되며, 야산이나 계곡에서도 자주 보이는 종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만든 나무의 대부분이 산 벚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피나무나 사철나무가 사용된 경우도 있으나, 너무 약하거나 너무 치밀하여 목활자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일시적인 대용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와 같이 대부분 근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목재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회양목의 경우는 약간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회양목은 예로부터 중요하게 다루어 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백년을 자라도 지름이 10cm 남짓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굉장히 불편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로 말미암아 인쇄용도로 지정하여 지속적으로 관리 해 왔던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3) 금속활자 인쇄술


 ① 금속활자의 개요

 고려 전기에는 불교와 유교 두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문물제도가 잘 정비되었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차례의 내란으로 궁궐이 불타고 여러 전각에 소장했던 장서들이 모조리 손실되었으며 무신이 정치를 장악하여 인쇄술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무신 정치가 안정기로 접어들자 책의 수요가 점차적으로 늘어나 필요한 많은 책들을 종래와 같이 목판으로 인쇄 해 내는 것이 어려워졌으며, 중국과 비교하여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특성상 책의 부수는 적으면서도 여러 주제에 걸쳐 고루 찍어 내야한다는 문제점 또한 안고 있었다. 그 결과 고안해 낸 것이 쇠붙이로 활자를 만들어내어 그 활자를 간직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필요한 책을 고루 찍어내어 이용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는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 시도된 바가 있는 것으로 보이나 결론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실용화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중국에서의 시도와 고려에서의 시도를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에서의 시도는 약 4회에 걸쳐 기원설이 존재 한다.

 첫째는 5대 10국시기에 동활자 인쇄술이 사용되었다는 기원설이다. 원대의 기록에서 새김이 좋다고 칭송되는 23종의 판본을 비교하여 보았을 때 후진(後晋)의 동판이 좋았다고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 이 경우 동판의 의미가 모호하며 동활자를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둘째는 송 대에 동활자 인쇄술이 사용되었다는 기원설인데, 송 대에 동자(銅字)로 각본(刻本)하였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동판의 의미가 모호하여 확실하지 않다.

 셋째는 원 대에 석활자(錫活字) 혹은 동활자 인쇄술이 사용되었다는 기원설이다. 동활자 인쇄술은 원대 초기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왕정(王禎)의 기록을 보면 원 초기에 석활자가 출현하였으나 실용으로 발전하지는 못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석활자는 사용되었으나 실용화 되지 못한 것이고, 동활자는 동판의 의미가 모호하여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넷째는 명대에 연활자(鉛活字) 혹은 동활자 인쇄술이 사용되었다는 기원설이다. 중국에서의 연활자 인쇄술은 명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을 통해 납과 구리를 섞어 활자를 만들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편리하였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그와 더불어 동활자의 경우에도 기록이 남아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활자가 아닌 석활자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위와 같은 기원설을 통해 대략적으로 중국에서는 명대 성화 연간(1465~1487) 무렵부터 시작되어 실용화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고려에서 처음 발명된 것으로 보고 있는 금속활자는 과연 어느 시기에 발명되었을까? 여기에도 마찬가지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는 문종(文宗)시기 개발되었다는 설인데, 문장의 잘못을 바로잡아 고친다는 뜻에서 사용된 연참(鉛槧)이라는 단어를 임의적으로 인쇄술과 연결시켜 해석하여 생겨난 오류로 보고 있다.

 둘째는 숙종(肅宗)시기 개발되었다는 설인데, 숙종 7(1102)년 엽전을 주조하여 신하들과 양반, 군인들에게 내려준 바가 있었는데 그 구성 성분이 활자와 비슷하다고 생각 하여 잘못 추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활자는 활자판 짜는 방법, 쇠붙이에 묻는 먹물을 개발하는 것, 정교하게 밀어 넣는 방법 이렇게 3가지가 갖추어져야 활용되는 것으로써, 엽전 주조 그 자체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셋째는 12세기 중기에 개발되었다는 설이다. 이 설은 15세기 전반기 활자본인 「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에 찍힌 인 중 하나를 잘못 해석하여 그가 1124년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휘종(徽宗)에게 예성강도(禮成江圖)를 바친 인물이라고 해석하여 추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1230년대 이전 기원설, 충렬왕 23(1297년) 기원설 등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고려시대 말기에는 이미 금속활자가 실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러한 결과로 공양왕 4(1392년)에는 금속활자에 관련된 서적원(書籍院)이 설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1430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보석세공과 유리를 만드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금속활자와 관련된 초기 실험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연활자로 인쇄된 서적이 처음 발견되는 것은 1450년 이후로 보인다.


 ② 고려시대 금속활자

 한민족은 13세기 초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실용화 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실물로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복(㠅)활자 한 개가 보존되어 있고, 왕궁에서 출토된 전(顚)활자는 북한의 개성박물관에 존재한다. 이 활자들은 무슨 용도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금속활자의 실증적 자료로써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에서 처음 창안된 것이라 활자의 주조에 있어서는 활자의 크기나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획이 나타나지 않아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과 실물을 통해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증도가(證道歌)」자, 증도가자는「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인쇄할 때 쓰인 활자이며, 본 책은 현각이 지은 원본에 송나라의 남명선사 법천이 좀 더 구체적으로 뜻을 밝힌 책이다. 초판본은 송에서 만들어졌으나 그 후 도입되어 고려의 금속활자를 활용해 유통되었으나, 지금은 금속활자도 금속활자 인본도 전래되지 않아서 제대로 추정할 수 없으나 다른 곳에 기록이 남아있어 시기를 짐작할 뿐이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1234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로 옮긴 다음 1239년 9월에 주자 본을 바탕으로 인쇄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로 인쇄가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로 보고 있다. 목판본을 바탕으로 본 특징적인 점으로는 1) 글자의 크기나 모양이 비교적 가지런하며, 2) 본문의 행렬이 바르지 않고 좌우로 비뚤어 진 점, 3) 책장마다 한 글자가 유달리 기울어진 점, 4) 위 글자의 아래 획과 아래 글자의 위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이 없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2.「상정예문(詳定禮文)」자, 이 자를 바탕으로 「상정예문」을 인쇄하였다, 「상정예문」은 인종(仁宗) 때 50권으로 편찬한 고려의 서적이나 그 실물은 현존하지 않고 있다. 이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훼손 된 것이 있어 2부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강화도로 천도 할 때 1부는 가져오지 못 하고 1부만 남아 다행으로 여기다가 개량 후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행 년대가 확실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고종 21(1234년)에서 고종28(1241년)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 경우 금속활자나 금속활자 인본이 전해지는 것이 없어 활자의 크기나 자수 등은 알 수 없다.

 3. 흥덕사자(興德寺字),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과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을 인쇄한 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알려져 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직지심체요절」은 2권 2책본 으로 이루어진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인쇄본이다. 백운화상이 여러 법문과 게송(揭頌)을 뽑아 만든 것을 그 제자들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첫 장이 결락된 총 38장의 하권 1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이다. 권말의 기록을 통해 우왕 3(1377년) 7월에 흥덕사에서 강행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재래식 방법을 사용해 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나 모양이 고르지 않고 조잡하며 중앙관청의 인쇄기능이 마비되었던 당시에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출하여 고려 금속활자 인쇄술의 명맥을 이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현재는 2001년 9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자비도량참법집해」는 복각된 것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간행연도를 짐작할 수는 없으나 본서는 흥덕사에서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③ 여말선초 인쇄기관

 1. 서적점(書籍店), 충렬왕 6(1280년) 5월에 왕이 지시하였다는 기록, 충렬왕 34(1308년) 서적점을 다른 곳과 병합하였다는 기록, 서적점은 문종 때에 제정되었다가 충렬왕 때 병합되었다가 공양왕 3(1391년)에 폐지되었다는 기록 등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활자 인쇄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서적포(書籍鋪), 숙종 6(1101년) 3월 서적의 판본이 아무렇게 쌓여 훼손되니 서적포를 설치하여 관리하라는 기록과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1권에 서적포에 대한 기록이 있다.

 3. 서적원(書籍院), 공양왕 4(1392년) 서적원을 설치하고 서적을 인출할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4. 주자소(鑄字所), 고려 말의 서적원은 조선 초에 들어와서도 계승되는데, 그것이 태종 3(1403년) 2월 행정기구의 개혁과 관제 정비에 필요한 서적의 인출과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주자소이다. 이 주자소는 조선시대 전반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거점이 되게 된다.


 ④ 조선 초기 금속활자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이전에 고려시대에서 가지고 있던 인쇄기술을 계승해 진행하려는 행보가 보인다. 태조 원년(1392) 7월 서적원에서 인출을 하게 함과 더불어 여러 관직을 자리에 앉혀 도서와 문적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고 이것은 조선왕조 도서문화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인다. 이 시기의 간행본을 차례대로 살펴보자면 태조 4(1395년) 「대명률직해」목활 자본 인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 목판본 간행, 다시금 「개국원종공신녹권」을 목활자 본으로 간행하는 등 여러 간행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목판은 많은 부수를 위해 사용하고, 목활자는 적은 부수를 간편하게 찍어내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시기(1367 ~ 1422)에는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개발이 있었다. 태종 3(1403년) 주자소를 설치하고 인쇄사업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잘 살펴보면 중국의 도서를 가져오기 힘들 뿐만 아니라 판각한 도서가 이지러지고 결손 되기 쉬워 새로운 동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계미자의 확실한 자수는 의문이나 약 10만여 자 정도인 것으로 보이고 있다.

 세종 시기(1397 ~ 1450)에는 세종 2(1420년) 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개발이 있었는데, 이전보다 약간의 개량이 있어 인쇄 능률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세종 16(1434년)에는 동활자인 초주 갑인자(甲寅字)가 발명되었는데, 이 자는 이전과 달리 활자 자체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들고, 또한 인판 역시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밀랍을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로 빈틈을 메워 조립식으로 판을 짜서 인쇄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또한 인쇄 능률이 크게 향상되어 금속활자 인쇄술이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갑인자는 글자가 바르고 정교해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세종 18(1436년) 연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개발되었는데, 이 이유는 이전의 자가 조밀하여 세종의 시력을 감안하여 대자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동국정운자(東國正韻字) 등의 목활자도 동시기에 존재하였다.

 그 후 갑인자는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개주가 이루어지는데, 재주는 선조시기 이루어 졌으나 선조 6(1573년)과 선조 13(1580년)의 양설이 있어 재주 갑인자로 부르고 있다. 세 번째의 갑인자는 광해군 10(1618년)에 완성시킨 무오자(戊午字)이며, 네 번째의 갑인자는 현종 9(1668)년에 수어청(守禦廳)에서 개주한 무신자(戊申字)이다. 다섯 번째의 갑인자는 영조 48(1772년)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15만 자를 개주하도록 한 임진자(壬辰字)이며, 마지막 갑인자는 정조 원년(1777년) 평안 감사 서명응에게 명하여 15만 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쓰다가 철종 8(1857년) 소실된 정유자(丁酉字)이다.

 다시 세종시기로 돌아가 1447년 무렵에 인출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보면 한글이 고딕체의 활자로 정교하게 찍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초주 갑인자와 병용되고 있는 것에서 말미암아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자라고 일컫거나 월인석보자라고 부르곤 한다.

 세조 원년(1455)에는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동활자인 을해자(乙亥字)가 만들어졌으며, 세조 3(1457년)에는 왕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금강경」및 다른 사경을 책으로 꾸미는 한 편 「금강경」의 대자를 친히 필사해 글자본으로 삼고 동활자인 정축자(丁丑字)를 만들었다. 세조 4(1458년)에는 큰 자와 특소자의 동활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무인자(戊寅字)라고 부른다. 세조 11(1465년)에는 정난종의 글씨를 바탕으로 큰 자, 중간 자, 작은 자의 동활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을유자(乙酉字)라 한다.

 이후 성종 시기(1457 ~ 1494)에는 이전과 달리 중국 간본의 글자를 자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글자체가 일변하게 된다. 성종 15(1484년)에는 동활자인 갑진자(甲辰字)가 개발되고 그 수가 약 30만 자인데다가 많이 사용되어 인본이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다. 성종 24(1493년)에도 명판본인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바탕으로 동활자인 계축자(癸丑字)를 개발하며, 갑진자와 같이 균형이 잡혀 있으나 그보다 크고 굵으며 세련미가 좀 떨어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이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는 고려에서 명맥을 이어져 온 상태를 계승해 발전시켜 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국가 주도 아래에서 전문적으로 발전시켜 굉장히 기술 집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3.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반도에서의 인쇄는 중국이 개발한 목판인쇄술을 바탕으로 전래받아 금속활자 인쇄술에서 그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은 금속활자라는 것이 오히려 중국에 비해 가지는 단점에서 출발해서 더욱 뛰어난 개선점을 가져왔다는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중국에서 일어났던 여러 시도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용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중간 시기의 외세의 침략을 겪으면서 많은 목판 혹은 목활자가 소실된 것이 많은 반면에 그 기간을 잘 이겨내고 흥덕사 등 민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한 것 또한 놀라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전쟁 도중 재조대장경이 편찬되거나 강화도에서도 그것이 유지되는 등 고려 사회 내부의 중요 인물들이 인쇄술에 대한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한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조선 초기의 놀라운 문화 발전의 공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과 동시에 이루어 진 조선 시대의 민간에서의 목판 혹은 목활자 인쇄는 그들만의 사회를 구성 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므로 그것에 대해서도 탐구 해 보아야겠다.

 이처럼 기록의 일부분을 만들어 나간 인쇄술의 한 단면을 이렇게나마 잠시 살펴보게 되어 영광이었다.


4.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활자명

주조연대

자본

재료

즉위기년

간지

계미자(癸未字)

태종 3(1403)

계미

좌씨전 등

구리

경자자(庚子字)

세종 2(1420)

경자

원판본

구리

초주갑인자(甲寅字)

병용한글자

세종 16(1434)

갑인

논어 등

구리

세종 29(1447)

정묘

고딕인서체

구리

병진자(丙辰字)

세종 18(1436)

병진

진양대군 글씨

경오자(庚午字)

문종 원년(1450)

경오

안평대군 글씨

구리

을해자(乙亥字)

병용한글자

세조 원년(1455)

을해

강희안 글씨

구리

세조 7(1461)

신사

 

구리

정축자(丁丑字)

세조 3(1457)

정축

세조 친서 등

구리

무인자(戊寅字)

세조 4(1458)

무인

세조 친서?

구리

을유자(乙酉字)

세조 11(1465)

을유

정난종 글씨

구리

을유 한글자

갑진자(甲辰字)

성종 15(1484)

갑진

열녀전 등

구리

계축자(癸丑字)

성종 24(1493)

계축

자치통감강목 등

구리

병자자(丙子字)

중종 11

중종 14

병자

기묘

자치통감 등

구리

인력자

16세기

 

필서체

무쇠

경진자(庚辰字)

선조 13(1580)

 

갑인자

구리

을해자(乙亥字)체

경서자

경서한글자

선조 20(1587경)

 

을해자체

구리

무오자(戊午字)

광해 10(1618)

무오

갑인자

구리

무신자(戊申字)

현종 9(1668)

무신

갑인자

구리

병진(丙辰)왜언자

숙종 2(1676)

병진

 

구리

낙동계자

현종 14(1673경)

계축

 

구리

현종실록자

숙종 3(1677)

정사

 

구리

초주한구자

숙종 초(1677경)

 

한구의 글씨

구리

전기 교서관 인서체자

숙종 초(1684이전)

 

명조인서체

무쇠

원종자

숙종 19(1693)

계유

원종 글씨

구리

원종한글자

숙종자

숙종 19(1693)

계유

숙종어필

구리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

경종 초(1723이전)

 

명조인서체

무쇠

율곡전서자

영조 25(1749)

기사

강희자전자체 등

무쇠

임진자(壬辰字)

영조 48(1772)

임진

갑인자본 심경 등

구리

정유자(丁酉字)

정조 1(1777)

정유

갑인자

구리

재주한구자

정조 6(1782)

임인

한구자

구리

초주정리자

정조 19(1795)

을묘

생생자체

구리

정리자체 철활자

1800 이전

 

정리자체

무쇠

전사자

순조 16(1816)

병자

전사자체

구리

병용한글자

구리

필서체 철활자

1800초

 

필서체

무쇠

재주정리자

철종 9(1858)

무오

초주정리자

구리

병용한글자

구리

삼주한구자

철종 9(1858)

무오

한구자

구리

신연활자 병용한글자

고종 20(1883경)

계미

인서체



※ 참고문헌

유탁일 외,『한국 고활자 학술회의』, 청주고인쇄박물관, 2002.

천혜봉,『고인쇄』, 대원사, 1989.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한국현대문화사대계 3권』, 1977.

유창준,『한국 인쇄 문화사』, 지학사, 2014.

전상운,『한국과학사』, 사이언스북스,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