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중원고구려비


20132990 남윤식

20110205 이상효

20110184 김창민


 

- 목 차 -

 

1. 서론

 

2. 장수왕 이전의 시대적 배경

 

3. 장수왕의 남하정책

 

  1) 남하정책 전개

 

  2) 남하정책의 의의

4. 중원고구려비

 

  1) 중원고구려비 해독

 

  2) 중원고구려비의 의의

 

5. 결론

 

 ※ 참고문헌


1. 서론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중원고구려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던 장수왕 시기에 대해서 알아보기 이전에, 장수왕의 남하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밑바탕이 되어준 장수왕 이전 시기의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이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소수림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수림왕은 국내외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장수왕의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일으키게 된다. 위에 언급한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이 있었기에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의 남하정책은 한순간에 이룩한 업적이 아닌 내실이 다져지고 그 다져진 결실로 인해서 실현 가능했던 정책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고 가야 한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수도를 평양으로 이전하고, 본격적인 남하정책이 추진된 상황에 대해서 알아본 후 중원고구려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 장수왕 이전의 시대적 배경

  고국원왕 당시 전연 왕 모용황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 당하고,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이 끌려가고, 왕의 어머니는 13년 동안 인질로 잡히고 남녀 5만여 명이 끌려가는 등 수모를 겪다가, 고국원왕 41년(371) 백제의 근초고왕 군이 고구려를 공격해 오자 고국원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다 평양성 부근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고국원왕 때의 전연이나 백제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 발전상 여러 가지 문제점이 종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권은 강화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는 정비하지 못해 전연이나 백제가 팽창하는 등 외부의 정세 변화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국내의 정치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아들이자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은 재위 2년(372)에 전진에서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설립하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즉 전연이 370년에 멸망한 뒤 전진은 요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팽창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고구려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소수림왕은 우선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토 확장과정에서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삼국 시대의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수림왕이 불교 공인과 함께 태학을 설립하였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즉 사상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인재를 양성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태학을 설립한 것이다. 태학에서는 주로 유학과 관련된 과목을 가르쳤는데, 이는 충효사상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태학은 귀족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설립하는 한편 재위 3년(373)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당시까지 고구려에는 건국 이래 사용한 관습법이 통용되었다. 관습법은 소박한 형태였기 때문에 건국한 지 400년이 넘는 국가로서는 좀 더 효율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근간인 율령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율령은 중국에서 성립되었다. 율은 형사법에 관련된 것인 반면, 령은 민법적인 성격으로 행정법이나 소송 등에 관한 규정이 담겨 있다. 당시 고구려가 근간으로 삼은 율령은 진의 태시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비록 이웃 나라에서 선진적인 불교나 율령을 받아들였지만, 고구려 특유의 문화를 가미해 발전시켰다. 국가마다 정치 · 문화적인 배경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율령을 반포했다는 사실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것의 일환으로, 고구려의 공법 체계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율령의 반포와 더불어 공복을 제정했는데 이는 관료 제도를 정비했음을 뜻한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에 의하면 소수림왕은 즉위하자마자 체제 정비에 돌입해 재위 5년경에 이르면 국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정치 체제를 정비한 후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서쪽의 전진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했기 때문에 우선 부왕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급팽창하던 백제를 견제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5년(375) 백제의 수곡성(오늘날의 황해도 신계)을 침공 하는 한편, 이듬해(376) 연이어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이에 백제 근구수왕이 377년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등 공방전이 벌어졌다. 소수림왕 때의 군사 활동이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 정치를 안정시킴으로서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도 가능했다.

 소수림왕은 재위 14년(384)에 사망하였으나 후사가 없으므로, 왕위는 그의 동생인 고국양왕이 이어받게 되었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 때의 국가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북으로는 후연과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 내물왕으로 하여금 실성을 인질로 보내게 하였고, 또 불교신앙의 확대를 꾀하였으며, 국사, 즉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실은 당시의 고구려 세력권의 확대나 불교이념의 보편화 및 왕실시조신앙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제사체계 정비 등의 사상정책을 전하는 주목할 만한 기사이다.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그의 아들인, 태자였던 담덕 즉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 때 확립된 체제정비에 힘입어 왕권이 강화된 상황에서 대외정복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집권력의 강화는 영역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개토대왕 때 북으로는 요동 및 북부여를 정벌, 남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여 한강이북을 차지하였다. 또 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하였는데 연호는 ‘영락’ 이였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했다는 것은 밖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399년, 신라에 왜구가 출몰하여 신라의 내물왕이 원조를 청하여 고구려군 5만 여명을 파병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 주도의 전기가야연맹의 해체가 이루어 졌다. 이렇듯 고구려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놓여있을 때 소수림왕이 국내외를 안정시키는 정치를 펼치면서 국력을 강화시켰고 이러한 국력을 기반으로 광개토대왕은 광활한 영토를 정복하였고, 이러한 바탕에 장수왕이 즉위를 한 것이다.


3. 장수왕의 남하정책


1) 남하정책 전개

 412년, 광개토대왕 사후 뒤를 이어 고구려 제 20대 왕으로 제위에 올랐다. 장수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북방정책을 계승한 후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고, 중국의 남 · 북조와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고, 유연 등 새외 민족과도 교류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이렇듯 배후를 튼튼히 한 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감행하자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이 나제동맹(433~533)을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파견하여 백제의 허실을 탐지하는 한편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고 나서, 475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였고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480년, 말갈의 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를 공략하여 고명성 등 7성을 함락시키면서,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해 아산만 ·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곳까지 영역을 넓히게 된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호태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북방정책을 계승 하다가 남진정책을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있었다. 『위서』에는 “평양 천도 후 대신과 유력 귀족들을 무수히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평양 천도는 국내성에 뿌리 깊은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고려의 평양천도, 조선의 한양 천도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영토가 넓어지자 다시 안으로 체제를 정비할 필요성 또한 있었다. 결과적으로 평양천도는 남진정책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국토를 체계적으로 관리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평양의 경제력을 흡수 할 수 있었고, 국내성귀족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 삼국의 세력다툼의 주도권을 차지 할 수 있었던 이점이 있었다.


2) 남하정책의 의의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평양천도로 인해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삼국 항쟁을 고구려가 주도하게 되었으며,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인 것에는 고구려왕실이 백제왕실에게 빚을 갚은 것이 된 셈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평양성에서 죽임을 당하였었는데(371년), 이는 고구려왕들에게는 치욕적 이였을 것이다. 약 100년이 지난 475년에 장수왕에 의해서 그때의 치욕을 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세대에서는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수도가 망할 때 까지 평양성 이였다. 평양성이면 한반도 내에 있는 땅이기 때문에, 고구려역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하는 동북공정의 억지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4. 중원고구려비

지정종목

국보

지정번호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년 3월 18일

소 재 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

시    대

고구려

종류/분류

비석

크    기

높이 203cm, 폭 55cm


 중원고구려비는 1979년 2월 25일 예성동호회에서 찾아내어 1978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정영호 교수팀)에 의하여 확인된 화강암재의 4면비로 글자의 모양은 예서체이며 모양은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으로 한강이북 지역까지 진출했다고 알고 있었던 고구려 영토의 경계가 충주지역까지 진출 했었다는 것을 증명 하였다.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개척한 후에 세운 기념비이다. 시기는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비문을 판독한 결과, 이 시기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금석문이다. 중원고구려비는 충주에서 발견 되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충주는 고구려 때 국원성 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국원성은 고구려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남진기지였다. 국원성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으로 장미산성을 꼽고 있다. 장미산성은 충주지역 방위에 전략적 요충지다.

 장미산성 일대에서는 삼국시대 각종 토기와 기와조각을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장미산성에서 불과 4킬로미터 떨어진 평야지대, 충주 탑평리 중앙탑 일대다. 중앙탑 주변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토기와 기와는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와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 기와인 ‘탑평리 기와’를 비롯해서 고구려와 신라, 고구려와 백제의 양식이 혼합된 기와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와는 색상이나 모양이 고구려 기와와 거의 같으나 백제적인 영향을 받아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중앙탑에서 출토된 이 기와는, 비록 중앙탑이 통일 신라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정착했다는 증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중앙탑 자리가 고구려 국원성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원성은 장미산성을 방위 산성으로 하고, 평지에 중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예로서 국원성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름인 국내성과 같은 동급의  성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성 이라고 할 때 국이라는 글자는 나라란 뜻이 아니고 성의 뜻이다. 내라는 말은 고구려 말에서 도자기를 가리키는 나, 양으로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국내성은 서울이라는 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서 국원성이라는 사명도 같은 것이다, 들 원 자를 썼는데 원자는 내, 나, 양이라는 고구려에서 토사를 번역해 놓은 곳이기 때문에 국원성은 곧 국내성과 같은 등급의 성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국원성 지역을 수도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원성에 고구려는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이 바로 중원고구려비인 것이다.

 또한 비문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가 자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고 주변 국가나 종족을 조공국과 같이 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왕의 신표인 부절을 가져온 고구려 사신에게 예를 갖추는 대목 역시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에는 하부, 전부대사자, 전부대형, 수사, 주부, 발사자 같은 고구려의 관직명도 등장한다.


1) 중원고구려비 해독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며 모양은 사각 석주형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한 형태이며, 오랜 시간 빨래판 등으로 쓰이는 등 관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문의 마멸이 심하다.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으로 5세기 고구려에 대해 신라가 종속적 관계였으며, 신라영토 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사실이 증명 되었다.

<전면부>


五月中高麗大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오월중고려대왕상왕공□신라매금세세위원여형여제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桓

상하상화수천동래지매금기태자공전부대사자다환


奴主簿道德□□□安□□去□□到至 營□太子共□

노주부도덕□□□안□□거□□도지 영□태자공□


尙□上共看節賜太翟鄒□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

상□상공간절사태적추□식□□사매금지의복건립처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용자사지수자절□□노객인□교제위사상하의복교동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이매금답환래절교사매금토내제중인□□□□왕국토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 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대위제위상하의복겸수교 영지십이월입삼일갑인동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 桓奴主簿□

이매금상하지우벌성교래전부대사자다 환노주부□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경□모인삼백신라토내당주하부발위사자보노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노□□□□개로공□모인신라토내중인배동□□

<전면부 해설>

 5월에 고려대왕상왕공과 신라 매금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 기 태자 공…상…상공간노 주부 도덕'등이 …로 가서 궤영에 이르렀다. '태자 공…상…상공간' 명령하여 태적추를 내리고 … 매금의 의복을 내리고 '겅립처 용자사지 수자 … 노객인 … 제위'에게 교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를 내렸다. 동이 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토내의 제중인에게 절교사를 내렸다. 태자 공이 고구려 국토내의 대위 · 제위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의 상하가 우벌성에 와서 교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 당주 '하부 발위사자 보노 …'와 개로가 공히 신라 영토내의 주민을 모아서 …로 움직였다.

<좌측면부>


□□□中□□□□城不□□村舍□□□□□□□沙□

□□□중□□□□성불□□촌사□□□□□□□사□


□□□□□□□□班功□□□□□□□□節人□□□

□□□□□□□□반공□□□□□□□□절인□□□


□□□□□□辛酉年□□□十□□□□□太王國土□

□□□□□□신유년□□□십□□□□□태왕국토□


□□□□□□□□□□□□□□□□□□□□□□□

□□□□□□□□□□□□□□□□□□□□□□□


□□□□□□□□□上有□□酉□□□□東夷寐錦土

□□□□□□□□□상유□□유□□□□동이매금토


□□□□□□方□桓□沙□斯色□□古鄒加共軍至于

□□□□□□방□환□사□사색□□고추가공군지우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벌성□□□고모루성수사하부대형야□


<좌측면부 해설>

'… 중 … 성불 … 촌사 … 사공 … 절인 … 신유년 … 십 … 태왕국토 … 상유 … 유 … 동이' 매금의 영토 '… 방 … 환□사□사색 … 고추가' 공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 하부 대형 야□’


<우측면부>


□公□□□□衆殘□□□□□□□□□不□□使□□□壬子□□伐□□□□□□□□□□□□□□

□공□□□□중잔□□□□□□□□□불□□사□□□임자□□벌□□□□□□□□□□□□□□


□□□

□□□


2) 중원고구려비의 의의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중국 집안현에 있던 광개토대왕비가 유일한 고구려의 비석 이였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발견된 최초이자,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삼국사기를 통해 5세기,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 입장관계 이였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로 칭찬하면서 종주국으로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것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나타나있는,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라는 부분이 있었지만 자료의 신빙성 문제가 있었는데, 중원고구려비에 이 같은 직명이 있어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신라토내당주하부발위편자보노’ ‘고의루성수사하부대형야’가 확인됨으로써 고구려인의 인명표기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중원고구려비에 적혀진 관등명 등을 통해서 관등조직에 대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5. 결론

 지금까지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중원고구려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할 수 있었던, 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소수림왕 때의 국내정치제도의 정비와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으로 국내외로 강력한 기반과 왕권을 가지고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밑바탕이 되어준 이러한 왕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장수왕의 평양천도에 앞서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북방정책을 펼치다가 중국의 남북조와의 외교관계로 중국을 견제한 뒤에 배후를 튼튼히 하고 평양천도를 감행 하였다. 평양천도로 인하여 장수왕은 넓어진 영토를 체계적으로 관리 할 수 있었으며, 평양의 경제력을 흡수 할 수 있었고, 국내성귀족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 시켰으며, 삼국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한강이북이 아닌 충주지역까지 진출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빨래판으로 쓰이던 석판 하나가 국보로 둔갑되는 것을 보니, 물건의 가치를 모를 때에는, 그저 평범한 물건이지만 그 물건의 가치를 알게 되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참고문헌

정호일, 박찬영,『한국사를 보다 1』, 리베르스쿨, 2011.

KBS 역사스페셜,『HD 역사스페셜 1』, 효형출판, 2006.

조법종,『이야기 한국고대사 , 청아출판사, 2007.

윤여동,『아주 특별한 고구려사』, 여민락, 2004.

박영규,『고구려사 이야기 2』, 주니어김영사, 2006.

고구려연구회,『중원고구려비연구』, 학연문화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