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일제의 만행


사학과 20110174 김명달


 

Ⅰ. 序論

 

Ⅱ. 本論

 

1. 3.1운동

  ◉ 3.1 운동의 평가

 

2. 일제 강점기

  1) 헌병경찰통치시기

  2) 민족분열통치시기

  3) 민족 말살 통치시기 

 

  2-1) 일제의 만행

  (1) 731부대

  (2)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3) 정신대문제

   ①피해자들의 입장

   ②오늘날 일본국의 입장

   ③배상 문제

 

3. 현재 독일과 일본의 역사반성

  1) 나치 독일에 대한 입장

  2) 빌리브란트

  3) 역사교과서 수정을 통한 독일과 폴란드의 자세, 그리고 한일관계

 

Ⅲ. 結論

 



Ⅰ. 序論


 개항(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사회는 새로운 시련을 맞았다. 사회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열강간의 각축은 날로 치열해져 갔다. 이에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시급히 사회를 개혁하여 근대화를 도모하였고, 개화운동, 동학 농민운동, 의병운동은 그러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대표적인 민족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강압적인 일제의 식민 통치에 시달렸지만,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 정신이 이어져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3.1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 동포 사회까지 확대되었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이후 급변한 국제 정세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는 우리 민족 독립정신의 발로였으며, 또한 이후 민족 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3.1운동의 결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이는 국내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화주의를 채택하고, 삼권분립의 원칙에 기초한 헌법을 공포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임시정부는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자금과 인력부족으로 점차 침체되었고, 이에 임시정부의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인 테러 투쟁일 벌임으로써, 임시정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중 이봉창의거와 윤봉길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어 조선 독립운동의 의기를 드높였다.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에 냉담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원조가 잇달아,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바탕이 되었다.


 본문의 1장에서는 3.1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봄으로 그 의의에 대한 평가를 해 볼 것 이다. 2장에서는 일제시기를 대표적인 3시기로 구별하여 각각 간략하게 살펴본 뒤, 그들의 대표적인 만행에 대한 사례를 몇 가지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만행과 다를바 없는 그들의 역사인식 부재에 따른 현재의 태도에 대하여 비판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독일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 정책을 실시하여 유럽에서 어떤 위치와 평가를 받고 있는지 까지 알아보고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本論


1. 3.1운동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한반도와 세계 각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삼일 만세운동, 기미독립운동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원인이고 헌법에도 계승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제합병 당한 후, 조선은 앞서 기술한 일본의 무단통치에 의해 교사들까지 군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였고, 현병이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헌병경찰제도로 일체의 집회와 단체운동을 엄금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지주와 소작농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는 등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여기에 1918년 일본에서 쌀 폭동이 터지면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반출하였고, 농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 부두를 중심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의 사정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1) 특히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단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회의에 영어가 능통한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소식이었다. 그런 와중인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하면서 민심은 극도로 격앙되었다. 세간에는 이완용이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일 분위기는 더욱 고양되었다. 1918년에는 만주에서 대종교 인사를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학생들의 주도로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 YMCA 강당에서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미 천도교에서는 오래전부터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민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는 처음에는 구 대한제국의 정치인들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이들이 소극적이자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로 방향을 전환했다. 기독교에서는 관서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제에 의해 일제 검거된 소위 105인 사건 등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된 가운데 관서지방의 대표적 기독교 지도자였던 이승훈이 천도교측과 접촉하여 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가운데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불교 또한 한용운을 중심으로 반일의 분위기가 있었고 최린이 한용운과 접촉하여 불교와의 연대도 성사되었다. 그러나 한용운이 추진한 유림(儒林)과의 연대는 무산되었다. 천도교에서는 당초 일본 정부에 조선 독립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생각했지만 최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독립 선언서를 만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최남선이 초안을 잡게 되고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2월 11일에 기초가 완성된 독립 선언서는 2월 20일부터 천도교측 인사인 이종일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를 시작하여 2월 27일까지 3만 5천여부를 인쇄했다. 다른 한편으로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잡히게 되어,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33인중 23명이 모여 회합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할 경우 자칫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여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중 29명(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제외)이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열고 있다고 연락하게 했고, 전화를 받고 일본 경찰 80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쳤다.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 후에 이들은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2) 한편, 탑골공원에선 민족대표들의 갑작스런 시위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학생그룹에서 강기덕을 보내 민족대표들에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내 2시 30분, 학생그룹이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혹은 고종의 국장을 보기위해 상경한 일반 민중들이 가세하여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어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한편은 보신각을 거쳐 숭례문 쪽으로 향했고 다른 한편은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다시 종로로 향하자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가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오후 6시에 자진해산했다. 3월 2일이 되자 총독부는 전 병력을 동원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연행했는데 이날 하루에만도 무려 1만여명이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다음날인 3월 2일에는 이북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었다. 3월부터 4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천회의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고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여 각처에서 학살사태가 속출하였다.3)


  ◉ 3.1 운동의 평가


 3.1 운동은 3월 초부터 일제의 과잉 진압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일본 헌병 등을 두들겨 패거나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식의 폭력 시위 양산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으며, 후기 만세 운동은 직접적인 불만이 많았던 농민과 노동자에게까지 확산되어 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폭력적 양상이 더욱 심해졌다. 사실 침략자인 일제가 독립운동을 총검으로 탄압하는데 무력으로 반발하는 사태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지금껏 3.1 운동이 '평화적 시위'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명분을 위해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인원은 약 200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집계는 이와는 다른데 106만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두 서술 모두 과장되었다는 양비론(兩非論)이 주류이나, 일본이 학살사건들을 은폐하려한 당시의 정황을 감안한다면 박은식의 저술이 조금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또한 3.1 운동은 최초의 시민주도 운동으로 불릴 만한데, 이전과는 달리 어떤 특정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스스로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감을 느끼고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초기의 (운동의 시작에 한해서)비폭력투쟁을 넘어서 적극적 저항으로 나아가는 것도 민중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33인들 중에서 한용운을 비롯한 소수를 제외한 이들의 투옥 기간이 5년 미만이었던 것에 비해서, 후기 시위 주동인물들은 10 ~ 15년이 넘는 장기형을 선고받게 되는 것에서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3.1 운동은 비록 일본의 폭력적인 학살로 막을 내렸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한층 자만해있던 일본은 초기의 평화적 시위대에게 학살을 가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폭로되어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일본 내부에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 조선 식민통치의 기조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3.1 운동이 알려지자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의 5.4운동에 당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4)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대만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의 산발적 저항이라는 형태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비폭력만세저항운동의 문제라는 것은 후기 농민과 학생층이 주도하는 과정에서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서 말 그대로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에 3.1 운동이 전국에서 2개월 정도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일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층이 각개격파 당한 덕분에, 일제의 통치방침 변경도 계기가 되었지만 3.1 운동을 전후로 국내의 저항운동은 침체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저항노선은 무장투쟁(독립군, 또는 의열단)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계는 독립운동세력의 반성을 불러왔고, 단결을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 임시정부가 곳곳에 설립되었으나 몇 개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고, 3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였다.

 또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민중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된 것도 3.1 운동이 계기가 된다. 이전 지식인들에게 민중은 말 그대로 교화의 대상이지 독립운동의 동반자적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이전시기 영웅 혹은 초인의 출현을 기대하거나, 병합 이후에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지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에는 그에 따른 시각이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활동이 적극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였다.

 무엇보다 3.1 운동은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일본이 승전국이므로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대해 반발한다는 조선민족의 합의가 이루어진 사건으로 민중의 합의에 의한 정부 수립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3.1 운동 정신을 계승하였다는 문구가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는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주권을 잃은 시기이다. 원 간섭기에도 주권을 잃지 않았던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타국에 모든 주권을 박탈당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명칭으로는 일제 시대(日帝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본 통치 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日政時代), 일본 식민지 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 시대(倭政時代), 대일본 전쟁기(對日本戰爭期),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일제 침략기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5)

 일제 강점기의 세분화를 위하여 시기를 구분할 때, 대체로 무단통치시기-문화통치시기-민족말살정책기의 3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나,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기준으로 세 번째 시기(민족말살정책기)를 둘로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일제에 대한 인상은 주로 마지막 시기인 민족말살정책기의 것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본 내용의 진행도 일반적인 3시기구분법으로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1) 헌병경찰통치시기(무단 통치 시기, 1910~1919)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로부터 하세가와 요시미치,사이토 마코토 부임 전까지의 시대이다.

 치안을 경찰이 아닌 헌병이 담당하였으며, 식민지 경영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여러모로 문제점이 노출된 시기였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6)가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고,7) 이로 인해 촉발된 3.1 운동이 격화되고, 일본 내적으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8)적인 기풍이 확산되면서, 무단 통치 시기는 막을 내린다.


 최근 이 시기 초반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성질을 두고 경제사학계와 사학계 사이에  논쟁이 오갔으나, 사학계에선 아직 수량통계적인 연구를 할 만한 역량을 가진 학자가 없어서 경제사학계의 논의를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2) 민족분열통치시기(문화 통치 시기, 1919~1931)


 문화통치를 표방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시대이다.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 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이 사용되었다.

 대외적으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의 거듭된 호황으로 인해 조선의 외적인 지표가 상승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30년대 이후에는 만주국 건립에 따른 특수로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하다. 전체 일제 강점기 역사를 통해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외적인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이기 때문에,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시기이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치안을 경찰이 담당하게 되면서 경찰의 수와 경찰서, 경찰 예산을 이전 무단 통치시기보다 약 3배 이상 증가시켰다.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소위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양성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빚게 하였다.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민족 분열 정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생각보다 많은 사상의 자유를 누렸다. 한반도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9) 이 당시에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한반도의 해방에 기여를 하였다.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3) 민족 말살 통치시기 (1931~1945)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된 시기로서, 저질 제국주의자 일제에 의해 조선민중의 피해가 극으로 치닫던 시기이다. 특히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그에 연달은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전쟁이 한창에 이르러 전력이 부족해지니 일제는 외지를 완전히 내지와 통합하여 크기라도 불려보려고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을 수행하였는데,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10)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살펴보면, 미국에서는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싸우면서도 물자가 남아 버리는 상황인데 반해, 일본에선 고철도 없어 조선에 부설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조선민중의 밥숫가락까지 빼앗아가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이것도 모자라 징이나 꽹과리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는 물론 심지어는 분뇨(糞尿)를 담는 요강까지 빼앗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시기는 암흑기 그 자체로 일제가 모든 분야에 그야말로 ‘발악’을 하였던 때로, 일제강점기 가운데 가장 최악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즈음에 이르면 강점 초창기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 장성한 젊은이가 되었을 시기이며, 실질적으로 내지인(일본인)과 외지인(한국인)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조직적인 민족투쟁은 사라졌다. 때문에 사실상 조금만 더 지났으면 정말 민족이 말살될 단계까지도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1944년 일제가 패망할 무렵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강제 징병 및 징집이 실시되고 이루어지는데, 필리핀 전선 등 강제로 끌려간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결국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에 의해서야 일본 제국은 8월 15일에 연합군측에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였고,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면서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식민지배는 8.15광복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2-1) 일제의 만행


 (1) 731부대


 일본제국 소속 군부대이다. 활동지역은 현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으로, 1932년에 설립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생화학무기 개발을 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잔혹한 생체실험을 행했으며, 생체 실험의 대상은 '마루타(통나무)'라고 불렸다. 희생자 중에서는 중국인이 가장 많았지만, 만주에 거주하던 한국인과 러시아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731부대는 일본군의 유일한 생체실험부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731, 100부대를 포함한 관동군 관할의 방역급수대 내지 방역부대들의 상당수는 사실 731부대와 같은 생화학전 실험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시이 시로가 처음 사령관으로 부임한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731부대, 즉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평범한 방역 및 급수 전문 부대였다. 사실 일본군의 방역급수부 자체가 다른 지역에 설치된 모든 방역급수부를 포함해서 생물학 및 화학전 연구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전장이 전장이라 현장에 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쪽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곳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본격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이 확인된 거의 유일한 방역급수부였다. 실전 테스트 임무를 받은 방역급수부는 몇 곳 더 있으나 실질적으로 개발 및 야외임상실험(즉 실전 테스트) 이전 기초 실험장으로 활용된 곳은 이곳 뿐이다.


 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아있는 실험체에 탄저균, 천연두균 등의 바이러스균을 주사하여 결과를 지켜보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심지어 동물의 내장과 교체하는 실험도 하였다. 그리고 포로의 대량 처분에 독극물을 쓰면 돈이 들기에 어떻게 빠르게 대량학살을 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사람을 진공에 집어넣어 죽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떨 때는 마취를 하지 않고 실험을 했으며 총기 관통력 테스트를 한다고 산 사람한테 총을 쏘는가 하면 저온에서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한다고 멀쩡한 사람을 몸의 일부만 얼리면서 실험하는 등 인간이 차마 인간한테 할 수 없는 모든 짓을 거의 다 시도했다.


 덧붙여, 사람을 통째로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는 행위도 했다는데 여기서 얻은 결론은 '인간의 70%가 물이다.' 라는 것이었다고 한다.(이 결과물이 이들이 자행한 행적 중 유일하게 인정받는 것이다) 731 부대에 의해 실험당한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단 1명도 없다. 당연하겠지만 실험 자체가 생존할 확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진짜로 죽을 때까지 실험하는 일도 흔했다. 물론 이 실험을 주도한 자들도 이게 만행이라는 것은 알았는지, 태평양 전쟁 말기에 만주에 8월의 폭풍 작전를 개시해서 진격한 소련군에게 발각나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남아있는 실험 대상자와 관련 시설을 모두 제거한 후, 실험 결과를 적은 문서 따위만 휴대한 채 성공적으로 일본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여기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2011년 10월 16일 731부대 관련 극비 문서가 발견되어 추후 반응이 기대된다. 이 문서에는 중국 도시에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살포한 기록이 있는데, 살포한 날짜와 벼룩의 양, 1,2차 감염자 수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731부대 존재 부정론자들에겐 피할수 없는 증거가 되리라 보고있다.11) 그리고 이들의 악행은 전쟁 중 식민지인들에게 그치지 않고, 평범한 전후 일본인들에게까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을 경악시킨 희대의 집단살인사건인 제국은행 사건은 731부대, 또는 731부대와 같은 성격의 부대인 100부대의 관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적어도 당시 사용된 독극물 만큼은 거의 확실히 731부대로부터 흘러나온 물건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2)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1923년 도쿄 일원의 관동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시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는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리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게 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12)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13)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그들을 끄집어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경찰은 학살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 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던 것이었다.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체제 전반의 혼란 가능성까지 엿보이게 되면서 뒤늦게 경찰과 군부가 학살 저지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기구는 전혀 없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6,000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극에 휘말려 피살당한 것으로 집계되는 상황이다.


 초기부터 수천 명 단위 학살 소문이 돌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6,000명 희생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의 착오라고 주장하고, 실 희생자는 조선인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태 수습 이후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이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었는데, 적어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가볍게 뛰어넘기(약 900명) 때문이었다. 일본 학자들은 최소 2,000명 이상의 희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53년도에 한국정부가 피해 청구 목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희생자 명단이 발굴되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당초 일본 정부가 주장한 300명 미만에 근접한 290명의 피해자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즉 일단 한일 양국 정부에 의해 인정된 피해자 인원은 300명 이하다.


 2013년 11월 24일,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실제 피살자는 198명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나머지는 3·1 운동 관계자나 독립운동 참가자, 강제동원된 사람들의 오기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살해된 사람들이 '쇠갈퀴'나 '곡괭이'로 살해되었으며, 일본 헌병이 개입한 경우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3) 정신대문제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이며,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Army Sex Slaves)라고 표현했다. 순화하여 쓰자는 명칭 중에 강제징용녀(强制徵用女) 또는 강제성징용녀(强制性徵用女)가 있으나 아직까지 널리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정신대로 징집된 여성들 일부가 전쟁말기에 위안부로 뽑혀나갔으나 정신대와 위안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14) 또한 한국에서 제작된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나 뉴스에 한국인 피해자들만 소개되어서 한국에만 있다고 아는 경우도 많은데, 이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여성들도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니 결론은 일본과 관련이 있는 나라의 여성들은 대부분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종과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이 문제는 근대 전쟁사의 심각한 인권 유린 사례 중 하나인데, 다른 나라의 강간이나 성노예 사례 등은 최소한 전쟁 지도부의 윤리관에는 반(反)하며, 군법으로도 금지된 행위들인 반면에 일본에서는 지도부에 의해 권장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서 많은 군대가 현지 윤락 업소와의 협력 체제를 통해 위안소를 운영해 온 것은 사실이나, 일본은 그것도 모자라 사실상 유일하게 군 당국에서 위안부를 본국 및 그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직접 조달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영내 또는 주둔지로부터 도보로 이동 가능한 가까운 구역에 설치된 위안소에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로, 혹은 속여서 끌고 가 병사들을 상대로 강제적인 성노리개로 삼았는데, 이를 자기들 용어로는 '위안부'라고 불렀다. 위안부란 말도 실제로는 완곡어법에 불과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노예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중 대다수, 적어도 상당수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납치당했거나 혹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라고 속아서 지원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성노예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사기 피해 예방, 다단계 피해 예방 같은 개념이 없었던 시대였으니 잔혹한 곳으로 끌려가는 아픈 일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강제연행 및 사기를 통한 인신매매 사실은 모두 확인되었으며, 비율상으로는 일단 사기가 더 많았다. 여기에 처음부터 위안부로 갈 것임을 명시하고 모집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모집한 일본인 윤락녀였다. 그 외의 식민지 및 점령지에서의 모집은 양상이 매우 복잡한데, 처음부터 직업 윤락녀를 대상으로 모집하는 경우에도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밝히지 않은 사례도 제법 있고, 윤락녀를 모집한다는 것 자체를 숨긴 사례도 많다. 또한 당시 사창이 합법이었던 일본의 체제상 윤락녀 모집에는 민간인 매춘업자가 개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정부 책임을 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본 정권의 주류이다. 그러나 증거를 살펴보면 모집 과정에서 정부기관 및 군 당국의 직접적인 협력이 노출된 사례가 상당히 많았고, 군이나 정부기관이 직접 민간인을 납치 또는 강제 징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군도나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 학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막장 일본군의 수준에 맞게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던 듯하다. 게다가 그런 납치나 성적 학대로 끝난 것도 아니어서, 심지어는 해당 지역의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할 때 '일본군의 비밀 누설 방지' 혹은 '황군의 망신거리를 살려두면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같이 죽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이를 옥쇄 정책이라고 한다.

   ① 피해자들의 입장


 성노예 피해자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일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15)이란 잘못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억울한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에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자 그동안의 고통을 받아온 할머니들은 직접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거나 일본의 만행에 대한 증언을 하였으며 우리나라 정부는 1991년 9월 '정신대 실태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 일본에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② 오늘날 일본국의 입장


 공식적인 입장은 위안부 문제를 사죄하는 쪽이다. 1994년 8월 31일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사과, 민주당, 일본 사회민주당, 일본 공산당 등의 정당에선 이 발언과 입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적 입장에 모순되는, 주로 자민당 계열 우익 정치인들의 언행 역시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2000년에 모리 요시로 총리의 경우 "종군위안부는 지어낸 얘기"라는 발언을 했으며, 2007년 아베 신조 총리가 “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 사실이 없다."라는 발언을 한 데다 2012년과 2013년 하시모토 토오루 등의 정치인 또한 그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망언을 터뜨리기도 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위의 중국과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밝혔지만, 한국과 이해관계가 직결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고노 담화는 수정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③ 배상 문제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어쩌면 몇몇 국가에선 현재까지도, 일본과 한국을 포함해 위안부 문제에 연관된 아시아의 정권 대부분이 독재나 어려운 경제 상황 등의 이유로 인권을 등한시해서 국민들의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먼저 보자면, 일본 측은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위안부를 포함한 징용자의 배상 문제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 당시 맺어진 당 협정에 의해, 일본이 한국에 무상원조 그 외에 차관도입 등을 했기 때문. 이 때의 보상 금액은 5억 달러. 당시 일본 국고의 1/3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배상이 이뤄졌으니 끝이라는 일본 측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이나, 그 주장이 비판 받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배상이 이뤄진 건 사실이긴 한데, 정작 그 돈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문제이다. 다만 그 돈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건 일본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한국 정부가 일본에게 받은 자금을 피해자 배상에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가야 할 돈을 가로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부분은 일본을 비판할 게 아니라 당시 한국 정부를 비판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비판 이유가 현재 세계 각국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바로 세계적인 변화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인권 문제'이다.


그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한국 측의 입장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고노 담화 등이 발표된 1990년대만 해도 일본 측 입장에 동조하여 일본 측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을 1993년부터 제정, 운용하였다. 하지만 점차 민주화가 이뤄지고, 독재정권 당시보다 인권 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어 가던 2005년, 한국 측은 한일기본조약의 외교문서를 전격 공개하면서 입장을 바꾸었다. 당 협정에는 위안부 문제를 포함하여, 한국인 원폭 피해자 같이 추가적인 피해배상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 근거로 위안부 문제 같은 인권 문제가 대두될 수 있던 건 협정 당시로부터 20년 정도 후의 일이며, 현재 양국에서 공개된 문서에는 그런 특수한 징용자에 관해 제대로 고려가 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해 한국 측의 입장이 변한 것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권 문제를 움직이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한국 측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당시 한국 정부가 모든 청구권 문제를 해결 시켰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과 그로 인한 배상 책임은 부정하면서 일본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은 인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책임 회피를 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덧붙여,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법적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소위 '시모노세키 소송'이라 불리는 사건이 문제 해결을 위한 대표적인 사법적 노력의 하나였다. 1998년 4월 일본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의 위안부 재판에서 입법부작위에 의한 배상을 인정받아 위안부 피해자들이 승소하였다. 하지만 2심에서 "법 제정은 입법부의 재량적 판단에 맡겨진다"며 바로 판결이 뒤집혔고, 2003년엔 3심인 일본 대법원에서도 2심의 판단을 인정하며 사건이 기각당해 원고 측이 패소했다. 이 탓에 반발이 일어, 한국의 일부 국회의원들은 성명서로 해당 판결을 규탄하기도 했다. '시모노세키 소송'의 최종심 이후 나온 2004년도의 판결에서도, 일본 최고재판소는 "군대위안부 관계의 상고인들이 입은 손실은 헌법의 시행 전의 행위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헌법 29조 3항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는 식으로 해석을 내린다. 단순한 사법적 해석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과거 정권과의 연속성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책임 회피라는,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에 명시된 인권 문제를 등한시했다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한다.


 2011년 8월 30일 한국의 헌법재판소 판례는 해석상 문제가 생긴 상태를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현실을 국가의 행정 부작위가 위헌적으로 이뤄지는 상태로 봤다. 해당 판례의 인용보충의견을 요약하자면, 한일기본조약 탓에 생긴 외교적 문제를 해결할 의무가 국가에 있는 건 당연한 것이거니와, 당 문제가 단시일 내에 해결되기 어려운 만큼, 피해자에게 한국 정부가 일단 보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한다. 외교적 노력의 부작위에 관해선 사법적 판단이 어려운 부분임에도 다수의견이나 인용보충의견이 부작위를 위헌이라 판단을 내린 이유는 위안부 문제 피해자들의 연세를 감안했기 때문이다. 즉,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직접적 당사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것. 이에 따라 외교통상부는 일본에게 양자협의를 공식 제안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여전히 "이미 끝난 일"이라며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



 3. 현재 독일과 일본의 역사반성


  1) 나치 독일에 대한 입장


 두 차례 대전과 분단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안았음에도 과거에 대한 반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변국의 신뢰를 회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등 매우 교훈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줘서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다만,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현재 최강국인 미국을 주름잡고 있는 유대인과 여전히 강대국인 이웃 국가에게 밉보지 않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례로 독일이 과거 식민지로 삼았던 탄자니아,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저지른 학살, 인권탄압 등에 독일 정부는 현재까지 사과나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독일인들조차도 나치에 대해서 긍정적이진 않더라도 적어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은 듯하다. 예로 들어 1995년부터 1999년까지 국방군이 동부전선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다루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는 국방군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참전용사로부터 거센 항의는 물론, 테러까지 행해졌다.

 그러나 설사 그럴지라도, 분명한 것은 나치나 히틀러 우호 발언뿐만 아니라 나치 휘장, 하켄크로이츠를 공중(公衆)에 내비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 역시 법에 위반된다. 이는 외국인에게도 예외는 없어서 나치 등을 소재로 삼아 독일을 비하하면 독일 법에 저촉된다. 한국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서도 독일 여행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때문에 이 사항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이러다보니 몇몇 독일인들은 독일이 애국심을 가지면 좋게 끝난 적이 없다며 국가의 상징들을 혐오하기도 한다.


 독일은 2차 대전의 과오 때문에 역사적, 실질적으로 독일 땅이었던 동프로이센도 모조리 포기해야 했다. 이는 소련과 폴란드가 통일 독일을 국가로 승인하는 전제조건으로 영토포기를 내세웠기 때문인데, 그 정도로 주변 국가들이 독일을 단죄하는 데 강경한 태도를 보였기도 하지만 영토까지 포기하는 피해도 감수하면서 죄값을 치루려 했다는 점은 분명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일 내 곳곳에 박물관을 만들어서 어린이들이나 관광객들에게 과거의 조상들의 만행에 대한 반성적 태도의 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다. 단 의외로 전 국방군의 장례식 같은 행사는 생각보다 거창하고, 그 시절의 전투 등 일부 업적은 나치 혐의로 비난받는 일이 있더라도 기념하는 것도 있다.

 

   2) 빌리브란트


 빌리브란트(Willy Brandt, 1913.12.18.-1992.10.8)는 독일연방공화국(당시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이다. 본명은 헤르베르트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


 1969년 독일 수상으로 취임하며 '동방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는 동구권 공산권 국가, 소련과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커다란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추념비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사실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반공 국가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나치에 의한 피해가 상당했던데다 특히 과거 독일과의 영토분쟁이 여전한 쟁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란트가 추념비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 폴란드 수상이 브란트에게 감사의 말을 할 정도였고, 일설에 의하면,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는데도 꿇지 않는 독일 국민들을 대신하여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을 꿇었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브란트는 독일 보수파, 그리고 일부 국민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이유인 즉, 자기 멋대로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비난 세력이 더욱 많아지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반발이 거세졌지만, 그를 지지하는 국민의 성원이 그의 원동력이 되었다.



3) 역사교과서 수정을 통한 독일과 폴란드의 자세, 그리고 한일관계


 독일과 폴란드는 역사교과서를 상호 협의 하에 공동으로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이는 일방적 시정요구보다 쌍무적 협의를 통한 상호 교과서 개선이라는 발상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교과서 왜곡문제의 시정이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우리측 전문가가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분석하여 우리 역사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기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찾아내고 일방적으로 그것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 할 수 없을 것이다. 쌍무적 협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획일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길러주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자성적이고 다중 관점적 시각을 길러주는 수단으로서 인식하는 사고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또한 국정교과서 제도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역사교육의 미개국가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러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역사왜곡을 주장한다 해도 그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근래에 한국현대사 교과서를 검인정으로 바꾼 것은 올바른 결정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국정교과서로 묶여있는 국사교과서도 조속히 검인정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일본 측 역사교과서의 왜곡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교과서의 역사서술에도 민족주의적 편견이나 역사적 사실 분석에서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의 시정 문제뿐만 아니라 외국 교과서의 한국관련 서술에 대한 시정을 통해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목표도 쌍무적 협의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Ⅲ. 結論


 지금까지 일제의치하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3.1 독립운동의 전개과정과 그에 따른 일제의 통치체제의 변화에 따른 그들의 만행을 살펴보았다. 또한 현재 한일 상호간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정신대 또는 위안부(성노예) 문제에 대한 현 주소와 독일의 사례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역사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안해 보았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시기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 직접적으로 겪은 피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자칫 감정적인 태도로 인해 역사를 매우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할 우려가 있다. 물론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도 배제할 수 없는 요소임에는 부정할 수 없으나, 평가는 이성적 태도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허나 현실은 우리가 일제식민지시기에 대한 시대적 평가를 내릴 때, 역사의 피해자 입장에서 그 원인을 외부로 돌려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사뭇 강한 편이다. 물론 그 시각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역사의 주체는 내부에 존재하는 바로 ‘우리자신’이다. 비록 실패한 역사일지라도 그것을 ‘나의 것’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성찰하여 반성적 태도를 견지하고,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통한 역사의 정립을 통해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서울, (주)창비, 2008

국사편찬위원회, 『국 사 (하)』, 서울, 교육부, 1998

김한종 외, 『한국 근,현대사』, 서울, 금성출판사, 2003

신용하, 『3.1運動과 獨立運動의 社會史』,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정진성, 『일본군성노예제』,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강의』, 경기도 파주, 도서출판 한울, 2013

한운석, 『하나의 민족, 두 개의 과거』, 서울, 신서원, 2003


1) 그렇지만 윌슨을 비롯한 승전국은 패전국의 식민지에게 독립 의사를 강화시켜 패전국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었을 뿐, 승전국의 식민지는 제외시켰다.

2)  민족대표 33인이 한용운을 제외하고 전부 친일로 돌아섰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변절자는 최린 등 3명이며 33인이 체포되고 3.1 운동을 뒤에서 주도한 15인중 변절자는 최남선 뿐이다. 하지만 애초에 한용운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친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과정 자체가, 이후의 항일행적이 뚜렷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손병희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은 적극적 친일과 소극적 방관의 중간을 오고간 흔적도 발견된다.

3) 대표적 사건이 제암리 학살사건

4)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조선에 대한 일반 민중의 인식이 대단히 많이 달라졌다. 운동 이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능력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냉소했지만 운동 이후 자신들이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지 못함을 반성하고 항외세 및 항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5) 현재 일본에서는 한국병합(韓合), 일한합방(日韓合邦) 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6) 각 민족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한 집단적 권리를 뜻한다.

7) 하지만 정작 윌슨 대통령의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 승전국의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을 의도였다.

8) 일본에서 1910년대 부터 20년대 사이에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사조, 운동들을 일컫는 명칭. 대체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부터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진 1925년까지를 일컫는다.


9) 오히려 냉전 때에는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세계 여행이 통제되었고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었다.

10)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 때(1940년) 물자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

11) 2002년 8월 도쿄의 지방 법원은 처음으로 제731부대의 존재와 범죄사실 일부를 인정하였다.

12) 자경단(自警團) : 지역 주민들이 도난이나 화재 따위의 재난에 대비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조직한 민간단체.

13)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十五円五十銭(십오원오십전) (じゅうごえんごじゅっせん)이나「大根」(だいこん)등의 단어.

14)'정신대'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신대는 여성들을 모집해 공장에 노동력으로 보내는 것이다. 다만, 정신대 역시 아동노동이므로 심각한 가혹행위이며, 정신대로 간다고 속여서 위안부로 끌고간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미 정신대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례도 존재했다. 참고로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한다. 성노예 여성들 중 상당수는 약취유인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인데, ‘종군’이라는 단어는 그런 실상과는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갔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학술적으로 표현할 때 당대의 명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런 상황이 아닐 경우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있다.


15) 화냥년(환향년)의 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