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불상과 탑의 특성>



20120165 김 달해





- 목 차 -

Ⅰ. 서론

Ⅱ. 본론

   1. 백제 불교의 특징

   2. 백제의 불상

     1) 상징체계

     2) 형식

       (1) 존상의 형식

       (2) 배치구조

       (3) 재료에 따른 형식

     3)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3. 백제의 탑  

     1) 탑의 구조와 명칭

     2)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

     3) 정림사지 5층 석탑

Ⅲ. 결론

※ 참고문헌




Ⅰ. 서론


 백제는 기원전 18년 마한의 한강 유역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의 결합으로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마한의 속국들을 정복하고 한강 유역으로 그 지배를 넓혀 나갔다. 약 7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오면서 백제는 역사상 혁혁한 업적을 미술과 문화에서 이룩하였다. 백제의 한국 미술의 흐름은 고구려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또한 도읍과 천도에 의거하여 초기 한성시대(B.C.18~A.D.475), 중기 웅진시대 (475~538), 후기 사비시대(538~660)으로 삼분하여 보기도 한다. 백제의 미술문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교를 전해 받은 일이라 하겠다. 백제는 이후 찬란한 불교문화를 일구고 이를 신라와 일본에 전파시킴으로써 동아시아 미술문화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개되어질 백제의 불상과 탑은 먼저 백제의 불교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백제의 불교로 인하여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백제의 불상을 통해 상징체계, 형식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고, 백제의 불상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국보 제293호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또 백제의 탑에 대하여 알아보고 우리나라 국보 5호이며 백제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본론 

 

 1. 백제 불교의 특징

 

 백제는 세 번에 걸쳐서 수도를 이전하였다. 늘 강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 지대를 근간으로 나라가 번영했다. 한강 유역의 광대한 배후지를 가진 한성시대는 한반도의 중심지대로서 풍부한 물산이 산출되어 부강한 나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국력이 신장되어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근초고왕 당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웅진시대 초기에는 간신히 나라를 지탱하는 데 전력했지만 동성왕과 무령왕, 성왕의 전반기까지 백제는 중흥기에 접어들게 된다. 따라서 침류왕때 공인된 불교가 침체기에 있다가 웅진시대에 다시 재건되었다. 성왕때에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게 되면서 부강국으로 급격히 성장하여 문화대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의 불교는 남조와 북조, 그리고 수·당의 영향을 받아 삼론 · 천태 · 화엄 · 열반 등의 사상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백제는 시대에 따라 변천, 발전되었다. 백제 고유의 전통을 잘 가꾸어 당대 최고의 매력적인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고 불교의 전모는 분명히 밝힐 수 없지만 단편적인 사료를 종합·분석하면 백제 불교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먼저, 율학사상이 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륵불광사사적기(彌勒佛光寺事蹟記)』에서 전해지고 있다. 둘째, 열반의 사상도 백제 불교의 중요 근간이 되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살펴보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열반사상을 들여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보았을 때 수준 높은 중국 남조의 열반 사상을 수용한 백제 불교는 불성에 대해 상당한 이해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율학사상과 열반사상 이외에도 법화사상도 백제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백제 불교의 특징은 이보다도 다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그 이상의 사상이 주조를 이루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백제 불교의 성격은 당시 백제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2. 백제의 불상


 1) 상징체계


 백제의 불상들은 구도 배치에서 독특한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에는 2불 1보살이라는 독특한 삼존형식이 있는 반면 서산 마애삼존불의 경우는 본존불과 오른쪽 협시보살은 서있는 입불이지만, 왼쪽 협시보살은 반가사유상을 취한 삼존 형식이다. 또한 정읍 석불입상은 이불병립상이며, 납석제 병립상은 1불 1보살이라는 독특한 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산 사방불 또한 남방 좌불상에 삼면 입상이라는 특유의 사방불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백제 특유의 불상 배치 형식은 6세기 중엽 중국 불상, 특히 북제·주형식의 자유분방한 구도와 연관되지만 세계 유일한 예들이어서 백제 나름대로의 독특한 상징체계라고 말 할 수 있다.

 백제의 불상은 웅진시기 말 사비시기 초기와 6세기 후반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웅진시기 말부터 전체적으로 고졸하고 온화한 경향의 불상이 출현하게 된다. 이는 사비시기에 완성되는 특징으로 ‘백제의 미’가 성공적으로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웅진시기 말부터 6세기 후반부까지의 불상은 형태미를 통해 가장 성공적으로 창조된 형태미를 갖추고 있었으며 양감을 통해 ‘백제의 미’를 돋보이게 하였다. 또한 선의 흐름을 잘 묘사하여 그 미를 더욱 부각시켰다.


2) 불상의 형식


 백제의 불상 조각으로 금동·소조·석조·마애 등 다양한 소재의 불상이 남아 있을뿐더러 불·보상 역시 돈존식 · 이불병존식 · 삼존식 · 사발불식 · 군상식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이한 구도 형식을 보이고 있어 백제의 독자적인 특성을 확립하고 있다.

 

  (1) 존상의 형식

 백제의 불상 조각은 불상·보살상·나한상·신장상·기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불상과 보살상 및 나한상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신장상 등은 아직 백제의 존상의 형식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다.


① 불상

 아직까지 백제의 불상양식의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은 불상을 비교하기에는 매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명문 있는 불상이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상의 종류를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 시대의 불상 명칭을 알 수 있는 것은 수인이 주로 공통인으로 이루어진 불상뿐이다.


② 보살상

 현재 보살상은 삼존상의 협시나 단독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알 수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 그러나 관음보살이나 미륵보살의 경우는 매우 독특한 형식 때문에 어느 정도 판단 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에 대한 예로는 6·7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관음보살상과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다.


 ③ 나한상

 나한상은 불상이나 보살상과 달리 불교 경전의 도상에 얽매이지 않아 여러 모습의 자세와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극도로 생략된 모습이 있는가 하면, 움직임이 크고 해학적인 모습도 있다. 나한상의 지물로는 염주, 발, 동물, 경전, 금강저, 과일 등이 있다. 그러나 나한상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든 간에 상이 갖추어야할 심오한 정신적인 면은 항상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한 미의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2) 배치구조

 

 백제의 불상은 배치 형식에 따라서 독존식, 이불병존식, 삼존식, 사방불식, 군상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김제 판불 이외에는 군상 형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① 독존식

 독존형식의 불상은 불상만 단독으로 봉안되는 형식이다. 이러한 경우 익산 연동리 석불상의 경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불상의 경우를 살펴보면 불상 자체의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확연히 알 수는 없다.


② 이불병존식

 이불병좌상은 중국의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견보탑품」을 도상화한 석가·다고 병좌상이 보편적이다. 백제의 불상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지만 두 불상이 나란히 서있는 정읍 불병립상만 발견되었다. 이 경우에는 1불이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이불병립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③ 삼존식

 고대 불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형식이다. 삼존식의 불상의 경우 본존 불상과 좌우 협시보살이 배치되는 삼존식이 일반식이다. 3불을 배치하는 삼불 형식도 있고 불상 좌우에 보살과 나한 또는 나한 2구가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태안 마애불의 경우를 살펴보면, 2불 1보살이 배치되는 특이한 경우도 있다.


④ 사방불식

 돌 기둥이나 4각형 물체의 각 면에 불상을 새겨 방위불(方位佛)을 상징하는 불상형식을 말한다. 백제의 사방불은 근래에 발견된 예산 석주사방불의 예가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예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사방불의 시원이 되는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⑤ 군상식

 삼존 형식에 나한·신장·재가신자 등 다양한 협시들을 파노라마식으로 배치하는 형식이다. 백제에는 이런 군상식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는데 김제에서 출토된 금동판불은 불·보살·나한 들이 군도식으로 배치되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군상 형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여 정림사에서 출토된 소불상은 불·보살·제자상·공양자상으로 되어 있는데 일종의 군상식으로 배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3) 재료에 따른 형식

 백제의 불상은 그 제작과정에서 재료에 따른 형식으로 구분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는 마애불상, 석불상, 금동불상, 소불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① 마애불상

 마애불은 바위 면에다 돋을새김이나 선새김 등의 기법으로 손쉽게 조성할 수 있어서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석굴 등에 마애 기법을 썼기 때문에 특히 발달하였는데 아잔타 설굴이나 간다라의 바미얀 대불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돈황·운강·용문 석굴에 마애불이 조성되어 화려를 극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안과 서산, 예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마애불상은 중국과 인도의 불교문화와 교류관계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예로써 많이 알려지고 있으며, 중요시되고 있다.


② 석불상

 마애불상보다 기법적으로 더 발달했다고 생각되는 입체적인 조각이 바로 석불상이다. 환조로서 입체적으로 조형했기 때문에 보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종교적인 예배 대상으로서는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더욱 애용하였다. 또한 석불상의 경우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석질에 따라 갖가지 묘미를 더할 수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불상의 재료로 각광 받아왔다.

 인도에서는 아름다운 백대리석과 사암으로 이루어진 불상이 발견되었고, 중국의 경우 견고한 석질과 아름다운 색깔로 이루어진 화강암제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불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백제의 석불은 납석제와 화강암제가 두루 있는 편으로 모두 백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③ 금동불상

 동에다 도금한 불상을 금동불상이라 하는데 옛 불상에서는 금상이라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순금상일 경우도 있지만, 금빛이 나서 금상이라 하는 경우도 있고 금속상을 통틀어 금상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동은 청동기시대부터 애용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교 예술품에까지 동을 사용한 것은 불교가 들어온 372년 이후라 할 수 있다. 백제에도 이 금동불상은 많이 조성되었는데 작은 소상은 상당수 금동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불상은 금동불이 압도적으로 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④ 소불상

 흙을 빚어 만든 불상을 소불상이라 한다. 주로 진흙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진흙 이외에도 석회가 많이 나는 지역에는 석회를 사용하기도 한다. 흙이나 석회에 짚이나 실 또는 천을 넣어 썩힌 후 돌·나무·철 등의 심 즉, 골조위를 덧바르는 건조식 기법과 흙으로 빚은 후 불을 가하는 소성식인 테라코타 기법 등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소불상을 조성했을 것이지만 현재 완전한 것은 정림사지 소조 작품들과 부소산 출토 소불상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전모를 파악하는 부분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국립부여박물관에 남아있는 당시의 단편들을 통해서 백제 소조 조각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3)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907년 구한말에 충청남도 부여읍 규암면에서 금동보살상 2구가 출토되었다. 이 때 대구에 거주하던 이찌다 씨는 일본인 헌병의 손을 거쳐 출토된 2구중 1구를 사게 되었고, 그 후 일제말 당국의 보물을 지정을 피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찌다씨 수장의 금동보살입상은 이 보살상을 일컫는 말이다. 저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이 보살상은 그의 아들이 교토에 살면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보살상은 출토물이지만 금색이 잘 남아있다. 한 장의 원반 위에 서있으나 본래는 그 밑에 안정감 있는 연화대좌1) 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썼으며 머리 위에는 계발이 높이 솟아 있다. 화불을 안치하고 있어 관음상임을 곧 알 수 있다. 화불은 감실형 안에 봉안되었고 그 주연은 꽃문양으로 장식되었으며 좌 · 우면에도 화려하게 꽃문양을 장식하였다. 관대에는 원좌문이 장식되고 곱게 빗은 보발은 이마에서 양쪽으로 갈리어 귀를 돌아 어깨 위까지 길게 흘러 그 끝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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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이름: 국보제293호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70pixel, 세로 622pixel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상호는 원만하며 이마에 백호가 없다. 양쪽 눈썹과 눈 · 코 · 입술 등이 정제되었는데, 눈두덩이가 수북하여 고식을 느끼게 하며 야무지게 다문 입가의 미소가 양쪽 볼에 퍼지고 있다. 목에 삼도의 표현이 없고 귀도 짧은 편이나 웃음 띤 상호의 표정과 어울리어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럽다.

 천의는 양쪽에 걸친 통견2)으로 양쪽 어깨에는 어깨걸치게 모양의 천의자락이 팔굽까지 이르렀고, 가슴 밑으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선으로 의대가 흐르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평행선을 그으며 흘러내린 의문은 오른쪽 옆구리에서 반전하여 오른쪽 동체 위와 하체 측면으로 흘렀는데 마치 교차된 의문들로 보인다. 양쪽 허리부분에서 평행으로 내려진 의문은 무릎 앞에서 교차하였으며 그 밑으로 호형을 그리면서 의문이 유려하게 흘렀다. 동체를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있어 허리 부분은 오른쪽으로, 둔부는 왼쪽으로 틀어져서 유연한 몸매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왼쪽 어깨에서 내려진 천의들도 오른쪽 상체에 무게가 실려졌기 때문에 오른쪽 허리에 치우쳐 교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인은 오른쪽 손을 평행으로 들어 하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왼손은 길게 늘어뜨려 둔부에 대고 손목만을 밖으로 하여 보병을 잡고 있는데 손가락의 표현이 사실적이며 보병의 곡선 등이 유려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금동보살입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보관의 형태와 상호에서 고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양쪽 어깨 부분에 원반형의 화판 · 목걸이와 영락장식 · 교차된 천의 · 보병의 곡선 등 모든 부분에서 백제적인 요소를 너무나 잘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어 있어 만면에 은은히 펴져있고 동체를 오른쪽으로 틀고 있는 점 등은 백제시대의 능숙한 조각솜씨에서 나오는 양식수법이라 하겠다. 동체의 방향에 따라 천의의 교차점 · 의문의 표현 등이 달라진 특색으로 보아 백제조각이 완숙을 이루었던 때로 생각되어 조성연대는 7세기 중반 초기로 추정된다.




3. 백제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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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의 구조 및 명칭

1) 탑의 구조와 명칭


  




 


 











(1) 상륜부

  

 탑신부 위에 위치하는 부분으로, 상륜부는 찰주라는 가느다란 기둥을 세우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보주, 용차, 수연, 보개, 보륜, 앙화, 복발, 노반 등으로 구성된다. 이 상륜부는 전륜성왕을 기리는 의미를 품고 있는데, 전륜성왕(轉輪聖王)은 ‘수레바퀴를 돌리는 돌리는 위대한 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수레바퀴는 진리의 바퀴를 의미하며, 전륜성왕이란 말을 들었던 왕은 인도에서 초기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한 아쇼카 왕이었다. 또 상륜부의 보륜이 네팔이나 티벳 불교의 마니차를 상징한다는 말도 있다.


(2) 탑신부

  

 탑의 중심 부분으로 이곳에 사리함을 보관하는 감실이 설치된다.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신석의 층수에 따라 탑의 층수가 결정된다. 옥개석은 탑신석의 지붕에 해당하는 돌로 기단과 탑신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는 옥개석의 수를 세어보면 탑의 층수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탑은 대개 3,5,7,9 등의 홀수층 탑이 대부분인데, 이는 홀수가 길(吉)한 수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설을 지붕돌, 탑신석을 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3) 기단부

 

 기단부는 탑의 하단 부분으로 지대석과 기단으로 이루어진다. 지대석은 지면에 놓이는 받침돌이고, 기단은 탑신부를 받치는 역할을 하는 단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2층 기단이 만들어졌는데 그 후에는 단층기단이 많이 사용되었다.

기단에는 네 모퉁이와 가운데에 기둥돌을 세우거나 혹은 기둥돌처럼 새긴 부분이 있는데, 이 기둥 같은 부분을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라 부른다. 모퉁이에 있는 기둥돌이 우주이고 중앙에 있는 기둥돌이 탱주이다. 이 우주와 탱주는 탑을 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탑이 목조건물의 형태를 차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조건물에서도 모퉁이 기둥을 우주라 하고 가운데 기둥을 평주라 한다. 즉 목조건물의 평주가 탑의 탱주로 변한 것이다. 또 탑에서 탱주가 2개 이상인 경우는 통일신라 또는 그 이전의 탑이고 탱주가 한 개이거나 없는 경우는 고려 이후의 탑이라 한다.

 


2)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


 우리나라의 석탑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들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는 『삼국유사』에 있는 가야국의 허황후가 배에 싣고 왔다는 금관성의 파사석탑이 가장 오랜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동한시대 건무 24년 갑신년이라 하니 적어도 3세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석탑의 특징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백제에서 유행하던 목탑 형식에 따라 나무를 대신하여 모든 재료를 돌로 깎아 세움으로써 재료는 석재이지만 구조양식은 목탑을 쌓을 때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면 좁고 낮은 단층의 기단 위에 일정한 크기의 돌로 배흘림 기법(몸체의 중간부분이 약간 불룩한 모양)을 사용해 방형(사각)의 탑신기둥을 쌓았고, 옥개석의 낙수면(탑의 지붕처럼 넓적하고 평평한 돌)의 귀퉁이는 버선코처럼 약간 치켜져있다.

 백제 석탑은 삼국통일 이후 신라석탑이 완성되기 까지 기본적인 구성 양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통일 신라 석탑 형식의 정립한 공이 크며,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부여 무량사 5층 석탑 등이 있다.





3) 정림사지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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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944pixel, 세로 2592pixel
사진 찍은 날짜: 2005년 06월 26일 오후 2:28

▲ 정림사지 5층 석탑

 

이 탑은 국보 5호로써 충청남도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다른 백제 절터와는 탑터에서 중문터나 금당터의 거리가 1:1의 비율을 나타내지 않으며, 탑기단의 축기도 상 · 중 · 하 3단의 판축기법으로 다져져 석탑에는 맞지 않는 기법이다. 판축층의 두께는 일정치는 않지만 매층이 약 2~6cm였다 하니 왕궁리 석탑의 축기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이 석탑은 정림사의 당초 창건시의 탑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또 탑 지대석 주위에는 탑구석이 있는데, 지대석의 외변에서 10~20cm 떨어진 지점에 높이 50cm 정도의 장대석을 외부로 면을 맞추어 돌렸다.

 석탑의 기단부는 탑신부에 비하여 매우 낮게 꾸몄는데, 이것은 기단을 2층으로 높게 마련한 통일 신라 석탑과 대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낮은 기단은 목조건축의 기단을 번안한 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익산 미륵사터의 석탑이 목조건물 기단을 그대로 모방한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상징적으로 간소화시킨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탑신부와 옥개부에서도 같다. 괴석으로 고인 기초석 위에 2단으로 된 지대석과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면석과 탱주 및 우주석을 세워 다시 기단갑석을 놓은 것이다. 이 위로 체감폭을 둔 네모기둥과 판석을 세우고 그 상면에 옥개받침 판석을 놓고 다시 외부 모서리가 한번 사절된 옥개 받침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얹은 옥개석은 여러 쪽이 합쳐져 이루어 졌는데 처마선이 날렵하고 모서리를 약간 들어올려 추녀앙곡을 이루었다. 탑의 상륜부는 노반석 일부만 남고 유실되었다. 특히 이 탑은 제1층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이란 제목 하에 비문이 새겨져 있어 일제강점기 때에는 ‘다평백제비탑’ 또는 ‘평제탑’ 이라고 불렸으며 660년에 당의 장수인 소정방이 건립한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이후 1942년 불굴조사 중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와가 출토되어 그 이후로 정림사지 5층석탑 으로 부르게 되었다.


Ⅲ. 결론


 백제의 불상과 탑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백제의 불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때에 들어와 성왕때 공인되면서 백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부문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불교가 공인되면서 불상은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으며, 고구려의 형식이나 중국의 남조의 형식이 전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형식을 꾀하였고, 고구려나 중국 보다 더 섬세하고 우아하게 표현되었다. 백제의 상징체계를 살펴보면서 도읍을 움직이면서 나타난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며 또한 ‘백제의 미’의 창조된 경위를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형식을 통해 백제만의 독특한 형식이 무엇이고, 백제에서 추구하려고 했던 점이 무엇인지 살펴 볼 수 있었다. 그 부분에서는 존상의 형식, 배치구조, 마지막으로 재료에 따른 형식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부분이다.

 백제의 불상중에서는 국보 제 293호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부여에서 출토되어 백제특유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며 얼굴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임으로써 백제 특유의 미양식의 완성인 것 같았다. 불상과 더불어 백제의 탑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목탑 형식에 따라 나무를 대신하여 석재로 구조양식은 목탑을 쌓을 때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그에 따른 백제의 탑의 특성이 잘 드러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특징을 더욱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백제 미술문화의 업적은 문화 발전을 위한 백제 조정의 노력, 전문성을 보장받은 장인들의 연마, 고구려와 양조 문화의 현명한 수용과 활용 등이 결합되어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 참고문헌


안휘준, 『청출어람의 한국미술』, 사회평론, 2010.

안휘준, 『한국의 미술과 문화』, 시공사, 2000.

정영호, 『백제의 불상』, 주류성, 2004.

장경호, 『아름다운 백제 건축』, 주류성 , 2004.



1) 불보살님을 모시는 자리를 연꽃의 모양으로 조각을 하여 연화좌.

2) 불교에서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가사를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