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천도의 정치적 배경


사학과 20120183 방성준


목차

 

1.서론

 

2.본론

 1)백제의 한성도읍기

  (1)건국초기의 한성

  (2)백제전성시의 한성

  (3)한성 백제의 집권세력

  (4)개로왕의 집권과 고구려와의 관계

  (5)고구려의 침공과 한성함락

 

 2)백제의 웅진도읍기

  (1) 문주왕의 즉위

  (2)문주왕의 웅진천도

 

 3)백제의 사비도읍기

  (1)사비천도의 배경

  (2)웅진시기의 정치상황

  (3)동성왕대의 사비천도계획

  (4)성왕의 사비천도

  (5)사비천도의 목적

 

3.결론

 

※ 참고자료

 






1. 서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시대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영토를 잡고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해온 역사다. 삼국은 건국과 발전에 따라 국왕이 거주하는 수도(首都)를 옮기면서 자국(自國)의 영토를 확장했다.

 수도는 국가의 정치·경제·문화 등이 중심이 되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이러한 중요한 성격의 수도를 옮기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인 것이다. 그래서 수도를 옮기는 일(遷都)은 나라의 중대한 변화를 꾀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시행된 일이었다.

 천도(遷都)를 하는 요인은 크게 대외적인 요인과 대내적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대외적인 요인으로는 적(敵)의 침입에 의해 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내적인 요인으로는 정치세력간의 갈등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1) .

 이러한 의미로서 천도는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다. 우리의 고대사에서 백제는 이러한 의미로서 천도를 한 국가이다. 백제사의 전개과정은 대게 수도의 이동을 중심으로 하여 한성도읍기, 웅진도읍기, 사비도읍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고대사회에서의 수도는 단순히 행정의 중심지가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점을 중시하여 나온 것이다.

 백제는 초기에 십제(十濟)2)로 마한(馬韓)의 연맹국가로 건국되었다. 이후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目支國, 기록에 따르면 월지국(月支國)이라고도 함3))을 정복하고 마한 땅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중앙집권을 완성했다. 이후 서기 475년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웅진(雄鎭)(현 공주)으로 천도를 하였다. 하지만 웅진 시대는 얼마 가지 않아 백제는 사비(泗沘)(현 부여)로 천도한다. 이는 당시 성왕의 의지로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백제의 제 2의 도약을 위한 의도적인 천도였다.

 백제의 역사에서 천도가 갖는 의미는 백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일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백제는 왜 천도를 했을까?”에 대한 물음을 당대의 국내 정치상황과 국제 정치상황이 백제의 천도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본론

 1) 백제의 한성도읍기

  (1) 건국 초기의 한성

 백제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시조(始祖) 온조는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주몽의 아들로 나온다. 그는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결혼한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남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 온조집단이 최초로 정착한 곳은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4)이었다. 건국 후 온조집단은 부여씨를 칭하고 부여족의 시조인 종명을 시조묘에 모셨다.

 한편 이 시기에 미추홀5) 지역에는 비류집단이 이동해 와서 나라를 세웠다. 『동사강목』에서는 비류가 세운 나라를 미추홀국이라 하였다. 시조 비류는 해부루6)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7) 의 아들로 나오므로 그의 성은 해씨라 할 수 있다.

 이후 십제국은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시조건국설화에 시조 온조와 시조 비류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두 세력이 연맹을 맺은 것은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비류집단이 연맹초기에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한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건국 설화에는 비류가 자리를 잡은 미추홀은 땅은 습하고 물은 짠 반면에 온조집단이 자리를 잡은 위례지역은 인민이 평안하였다고 하며 또 비류가 죽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모두 온조에게 귀부하였다고 한다. 이는 온조가 서울지역의 경제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비류집단을 압도하여 맹주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지역연맹체의 맹주가 된 십제는 영역이 넓어지고 인구도 많아지자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리고 낙랑과 말갈의 침약을 막고 내부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8)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하남 위례성은 높은 산과 강이 둘러싸고 평야가 남쪽으로 전개되어 있어 수도로서 매우 적합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시기는 초고왕대로 보인다.

 하지만 온조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는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는 마한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연맹체의 맹주는 직산·천안 일대를 기반으로 한 목지국이었다. 온조는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십제를 세울 당시 목지국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양받았기 때문에 맹주국에 대해 일정한 예의(禮義)를 차렸다. 그러나 백제는 미추홀 세력을 통합하고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한층 강력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백제는 영역의 확대로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계도 보다 튼튼히 하기 위해 풍납토성(風納土城)9)과 몽촌토성(夢村土城)10)을 축조하여 수도를 확대하였다.  

 

  (2) 백제 전성기의 한성

 백제는 A.D. 1세기 중엽에는 마한을 공격하고,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234-286) 때에는 위(魏)지배하의 낙랑군과 대방군 그리고 말갈족을 북으로 밀어내면서 영토를 넓히고,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즉, 중앙에는 6개의 좌평(佐平 260)11)을 두어 업무를 분장시키고, 16품의 관등제(官等制)와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지방 족장들을 차등있게 중앙관료로 흡수 하면서 정비된 고대 왕국의 모습을 갖추었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백제는 마한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백제라는 국호로 중국과 교섭하였다. 그 시기는 비류왕(比流王)대이다. 비류왕은 북한산성에서 반한을 일으킨 서제(庶弟) 우복(優福)의 난12)을 평정하여 대항 세력을 제거하고 진씨13) 출신의 여자를 아들 근초고의 부인으로 삼아 지배기반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거대한 벽골지를 축조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모하였다.

 고이왕때 다져진 국가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대대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추진한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우선 남쪽으로는 천안지역에서 익산지방으로 옮긴듯한 마한의 잔여세력14)을 멸하고 전라남도 해안까지 확보했으며 가야의 7국15)을 병합했다. 이때 가야정복을 담당한 백제장군은 목라근자(木羅斤資)였는데, 그 후손이 왜(倭)로 건너갔기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마치 왜가 가야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한 것처럼 왜곡했다.16)

 다시 백제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371)17). 그리하여 백제의 영토를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경상남도, 강원, 황해도의 일부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한성의 한강을 통해서 서쪽의 중국의 동진(東晋)남으로는 왜(倭)와 무역활동을 전개하면서 강력한 상업왕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3) 한성백제의 집권세력

 근초고왕(近肖古王)이후부터 백제의 왕실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후 아신왕(阿莘王)대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진씨 가문은 왕비를 배출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대에는 조정좌평 진정(眞淨)이, 근구수왕(近仇首王)대에는 내신좌평 진고도(眞高道)가, 진사왕(辰斯王)대에는 달솔 진가모(眞可謨)가, 아신왕(阿莘王)대에는 좌장 진무(眞武)가 각각 중요한 활약을 하였다. 이리하여 정치운영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아신왕 사후 전지왕이 즉위하면서 집권세력에 변화가 일어났다. 아신왕이 14년(405)에 죽자 지배세력들은 태자 전지파와 막내 설례파로 나뉘어졌다. 해씨세력은 태자 전지를 지지하였고 진씨세력은 혈례를 지지하였다. 이 싸움에서 해씨세력이 승리하여 전지가 왕위에 올랐고 진씨세력은 정치일선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전지왕 즉위 후 해수가 내법좌평에, 해구가 병관좌평에 임명되는 등 해씨가 실세귀족이 되었다. 구이신왕(久爾辛王)대에는 가야세력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木滿致)가 王母와 결탁하여 전횡을 하다가 제거되었다. 비유왕(毘有王)대에는 여신(餘信)이 죽자 해수(解須)가 상좌평이 된 것에서 보듯이 해씨세력이 다시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고국원왕의 전사(戰死) 후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치세와 이후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백제를 공격했다18). 그러나 5세기 전반기에 와서 전지왕을 옹립한 공로로 집권한 해씨세력은 세력 교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고구려와의 오랜 대결에 시달려온 민생의 안정을 위해 무리한 군사행동은 자제하였다. 고구려 장수왕도 평양천도를 추진하면서 정복활동을 일시 중지하였다. 이 결과 두 나라 사이에는 일정기간 군사적 충돌이 없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4) 개로왕의 집권과 고구려와의 관계

 비유왕(毘有王, ?~455, 재위427~455)이 죽은 후 개로왕(蓋鹵王, ?~475, 재위 455~475)19)이 장자로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개로왕 초기에는 실권귀족들이 정치운영권을 장악하는 등 통치의 어려움이 많았다. 개로왕 초기 통치의 어려움은 그의 부왕(父王)인 비유왕대에 집권세력인 해씨세력과 관련이 있다. 비유왕은 해씨들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래서 정치의 실권은 해씨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왕과 집권세력간의 갈등으로 결국 비유왕이 죽었음을 『삼국사기』에서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20) 이러한 권력의 무게가 왕이 아닌 실권귀족들에게 넘어간 이후 개로왕이 즉위 한 후에도 정권은 실권귀족들이 잡고 있었다.

 개로왕은 권력의 무게가 실권귀족들에게 치우친 것에 대해서 정변을 꾀했다. 하지만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권력을 찾아온 것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개로왕이 정변이후에 국정을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는 다른 정치세력을 등용시켰다는 것을 입증할 사료가 있다. 개로왕 4년, 송(宋)에 관작의 제수를 요청했던 표문이 그것이다.21)


경(慶)(개로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누대에 걸쳐 은혜를 입고 문주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짓런하여 높은 지위

에 오르는 것이 마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 제수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으로 삼고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과 행정로장군 여훈를 함께 정로장군으로

행보국장군 여도와 여예를 함께 보국장군으로 행룡양장군 목금과 여작를 함께

용양장군으로 행녕삭장군 여류과 미귀를 함께 영삭장군으로

행건무장군 우서과 여루를 함께 건무장군으로 삼았다.22)


 표문은 11명의 인물에 대하여 관작을 요청한 것으로 이중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征虜將軍左賢王餘昆)과 보국장군 여도(輔國將軍餘都)는 각각 곤지(昆支)와 문주왕으로 개로왕의 친족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3명은 타성귀족으로 목씨(木氏)를 제외한 2명은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성씨이다.

 이 표문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비유왕 대의 중심세력이었던 해씨(解氏), 해씨와 더불어 한성기의 대표적인 세력인 진씨(眞氏) 등이 확인되지 않는 반면 대다수가 왕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표문을 통해 개로왕 초기의 정변으로 기존의 집권세력이 배제되고 왕족중심으로 정국이 새롭게 재편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왕권으로 권력을 집중시킨 개로왕은 이전에 평화적이었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바꾸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것은『위서』백제전에 수록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나타나있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선대의 시대에는 옛 우의를 돈독히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고국원왕)이 이웃과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멋대로 짓밞았다. 신의 할아버지 수(근구수왕)는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처럼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쇠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풍씨(북연)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무리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원한을 맺고 병화가 이어진지 30여년이 되어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게 되었다. 만약 폐하의 인자하심과 긍률이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보내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시오.23)



백제가 보낸 조서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와 고구려는 그 근원이 부여(夫餘)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양국의 사이는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낙랑군을 313년24), 대방군을 314년25) 멸망시키면서부터 양국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백제의 책계왕(責稽王)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대방군을 구해준 것으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있었다26). 하지만 이는 직접적인 충돌은 아니었다.

 그러나 4세기 중반으로 갈수록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려했다. 이에 대해 전연(前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 결과 고구려는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이 도굴되고 왕모(王母)가 포로로 잡혀갔다.27) 이에 따라서 고구려의 진출 방향은 요동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백제와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무력충돌은 369년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치양(雉壤)을 공격하였다가 패배하였고28) 2년 뒤인 371년에도 백제를 공격해 왔지만 패하(浿河)에서 역시 격퇴되고 말았다.29)

 고구려의 공격이 잦아지자 백제 근초고왕은 371년 겨울에 친히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선봉에 섰던 태자 근구수(近仇須)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의 대승을 거두었다.30) 이후 고구려는 3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수곡성을 빼앗고31), 376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였지만 백제 근구수왕도 377년에 친히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였다.32) 이와 같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갈등은 개로왕이 즉위한 뒤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왕권 초기부터 정국의 혼란과 집권세력의 득세로 개로왕의 왕권은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로왕은 정변을 통해서 정권을 되찾고 왕권을 중심의 정치운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개로왕은 관미성(關彌城)을 고구려로부터 찾아온다(469). 이는 아신왕 이래 백제의 숙원사업이었다.33) 국가의 숙원사업을 성공하면서 개로왕은 국내정치와 국제관계에서 모두 이득을 취했다.


(5) 고구려의 침공과 한성함락


 개로왕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에 고구려를 압도했던 백제의 전성기를 회복하고 강력한 전제왕권을 시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국가사업을 추진한다.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궁실을 축조와 성곽을 수리하는 등의 대외적인 침입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토목사업은 백성들에게는 가혹하였고, 민심(民心)은 피폐해 졌으며 결국 민심이 이반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립관계에 대해서 외교적으로 북위(北魏)와 교류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백제는 북위로부터 군사를 원조 받기 위해 국서를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고구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백제가 북위와 군사적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부담일 것이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는 그 전에 백제에 대해 공격하기 위해 백제 내부의 동향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승려 도림(道琳)에게 백제의 첩자로서 백제를 정탐하는 임무를 맡긴다. 도림은 백제에 들어갈 때 고구려에서 죄를 면하기 위해 망명한 것처럼 위장을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개로왕은 도림이 승려라는 사실로 그에 대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또한 도림은 개로왕이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 토목공사를 유도했다.

 도림의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해 개로왕은 별 다른 의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왕이 “옳다. 내 그렇게 할 것이다.”하고는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성 안에는 궁실과 누각과 대사를 장려하게 하였다. 또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장례지내고 강을 따라 제방을 세웠는데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에 이르렀다.34)


이처럼 개로왕이 추진한 토목공사는 대규모의 것이고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대규모의 사업을 짧은 시간에 진행하려다 보니 재정은 부족하고 민심또힌 피폐해 졌다고 할 수 있다.

 도림의 계획대로 대규모의 공사로 인해 백제의 국력이 약해졌다. 이를 백제공격의 기회로 본 도림은 고구려로 가 장수왕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공격을 단행한다.

 이 시기 백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라 전체가 대규모의 토목사업으로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35)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북성인 풍납토성과 남성인 몽촌토성을 사수하지 못했다. 개로왕은 아차산에서 저항을 하다가 아차산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2) 백제의 웅진도읍기

  (1) 문주왕의 즉위


 개로왕이후 백제는 문주왕이 그 왕위를 이어 받는다. 그런데 문주왕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36),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온다.37) 그러나 개로왕이 즉위하자 문주가 상좌평(上佐平)이 되어 보좌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한성이 고구려에게 의해 포위되었을 때 개로왕은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가서 원병을 청해 오도록 하였다. 문주가 원병을 거느리고 한성에 도달하였을 때 이미 한성은 함락되고 왕과 왕비와 왕자들 역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왕위 계승의 적임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문주는 1만의 신라군은 기반으로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의 보좌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에게 가장 큰 과제는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주왕은 전란 중에 갑자기 왕이 된 자로서 명분과 지지기반이 미약했다. 또한 문주왕은 개로왕 대에 상좌평에 이르는 등 개로왕 정권의 핵심이었기에 고구려와의 전투 참패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약해진 왕권으로 새롭게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 세력은 백제의 웅진 천도에 관여 했을 것이다.


(2) 문주왕의 웅진 천도

  한성이 포위되었을 때 개로왕이 문주에게 고구려의 침공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했다.38)다. 이때 개로왕이 침공 이전부터 상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던 고구려에 의해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르며, 한성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일지 모른다는 백제의 현실적인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문주에게 백제의 사직을 유지하기를 희망하였으며, 이에 그로 하여금 남행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새로운 도읍지를 선정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또한 단순히 남쪽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남쪽의 어느 특정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 것에 대한 답은 아마도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함이 가장 클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읍지는 일차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웅진은 군사적으로 요지여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39) 따라서 문주왕은 웅진을 새 도읍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문주왕과 해씨 세력, 진씨 세력에게는 향후 국정운영을 위하여 어느 특정 지방 세력의 근거지가 아닌 공지를 원했다. 문주왕과 중앙 세력들은 천도 이후 또 다른 지방 세력들이 부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천안, 논산, 청주, 부여 등 한성을 주변의 지방 보다는 유력한 지방 세력이 없는 웅진지역이 천도지로 적합했을 것이다.

  개로왕대 웅진지역이 근초고왕대에 이어 다시 군사적인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은 개로왕의 남방경영과 관련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로왕이 남방경영을 왜, 어떻게 추구하였는지는 자세하지 밝힐 수 없다. 그러나 전제왕권의 확립에 따른 지방통치체제의 재편 역시 필요하였을 것이며, 고구려와의 대립을 앞두고 새로운 국력의 재결집을 필요로 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좌우현왕제의 실시를 통해서 고구려의 남침을 막아보고자 하였다. 좌현왕은 후방에서 우현왕은 전방에서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통치력이 크게 미치지 않은 지방을 조직화하면서 해당 지역의 세력가들을 중앙정부의 통제에 묶어두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천도 이래 진행되어 오던 고구려의 공세를 막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로왕이 추구하였던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위해서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한편 개로왕대 비록 백제가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특히 삼년산성의 축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라 역시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에 대한 대비도 마련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성백제 말기에 이르러 웅진지역은 한강 이남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거점으로 새롭게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하겠다.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고구려의 침공을 받았을 때 웅진지역은 한성을 벗어날 때 그 다음 수도로 부상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와의 충돌로 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가장 대표적인 귀족세력의 가문이었으며, 자신들의 세력기반이기도 하였던 목씨 세력의 영향력에 있던 웅진지역을 바탕으로 백제 왕실은 왕권을 새롭게 확립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3) 백제의 사비 도읍기

 (1) 사비 천도의 배경

 

  웅진은 비록 방어하기에는 좋으나 지역이 좁아 수도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성왕은 무령왕대에 다져진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토대로 사비천도를 추진하였다. 사비지역에 대한 관심은 동성왕대부터 있었지만 천도는 성왕대에 이루어졌다. 성왕이 재위 16년인 538년에 단행한 사비 천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봄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했다.40)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웅진은 방어 거점으로서는 적합하다. 즉 웅진의 북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막혀있고 금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뻗어 있고, 서쪽에는 서해가 가로놓여 있으며, 남쪽으로는 호남평야를 끼고 있다. 금강을 이용한 천연적인 방어선과 해운 교동은 피난 수도로서의 지리적인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웅진은 그다지 매력적인 수도는 아니었다. 공산성을 기준으로 할 때 웅진은 주위가 거의 산과 구릉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에 가용 면적이 협소했다. 그래서 도성으로서의 공간구성에 좋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천도의 요인으로는 웅진 일원에 대한 금강의 범람을 꼽고 있다.41) 그렇지만 사비 천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금강의 범람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한성 시기에도 강의 범람으로 민가의 유실과 피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개로왕은 제방을 축조하여 한강의 범람으로부터 피해를 막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비 천도의 다른 배경으로 웅진 도읍기의 정치상황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2) 웅진시기의 정치 상황

 웅진시기 백제 정국불안의 원인인 된 것은 왕위계승 문제였다, 즉 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전사하고 문주왕이 왕위를 이은 것이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를 하고 나서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42) 문주왕에 이어 13세의 삼근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러나 어린 삼근왕은 3년 만에 사망함에 따라 왕권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다. 결국 곤지계의 동성왕이 왜(倭)에서 귀국하여 즉위했다. 동성왕은 곤지의 적자(嫡子)는 아니 였을 뿐 아니라 무녕왕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러한 동성왕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지방 세력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동성왕은 가림 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43). 웅진도읍기에 문주왕과 동성왕 등 2명의 왕이 정변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동성왕의 피살 후 혼란을 수습하고, 무녕왕이 즉위하였다. 이후 무녕왕의 후손들이 백제 말기까지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녕왕의 입장에서 볼 때 음모와 내란의 분위기인 웅진 땅에서 벗어나 왕권과 국정에 대한 일대 쇄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3) 동성왕대의 사비천도계획

  사비천도의 진행과정을 논의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시기는 동성왕대이다. 동성왕대 사비천도가 계획되고 준비되었으며, 또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사비천도와 관련해서 크게 동성왕대가 주목된 것은 동성왕의 사비전렵기사와 관련해서였다. 동성왕대 사비가 전렵의 주대상지였고 왕이 빈번히 출행하였다는 것은 왕실의 사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며, 이것은 사비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이때 사비천도를 기도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44) 이러한 사실은 백가의 동성왕 시해 동기가 사비천도에 대한 반대였다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한편 동성왕대의 사비천도 계획설은 고고학 연구자에 의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우두성을 부소산성에 비정하여 그 초축 연대를 동성왕 8년(486)으로 보았다. 이후 나성 축조에 착수하여 동성왕 23년(501)에 그것을 마무리하였으며, 가림성 축조도 사비천도 계획의 일환으로 준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무렵 사비로 천도할 준비가 거의 완료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45) 이에 동성왕대는 사비천도가 계획되었고, 뿐만 아니라 일단 시도되었지만, 백가의 동성왕 시해로 인해  좌절된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 결과 사비천도는 그 후 40여년 이후에야 가능하였다고 한다.46)

  그러나 이와 달리 동성왕대의 사비 천도설을 비판하는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부분의 비판은 고고학적 설명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동성왕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부소산성이나 나성 등의 축성이 시작되었거나,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성왕이 왕도인 웅진을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성왕대까지는 오히려 천도할 계획이 없었음을 반영한다고 말한다.47) 그리고 여기에는 현재 대부분의 의견이 부소산성과 나성 축조시기를 동성왕대가 아니라 성왕대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도 참고가 될 것이다.

  사료에 대한 검토를 통한 비판은 우선 백가의 움직임 역시 사비천도에 대한 반대로 직접 연결시키기 어렵다는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48) 그러나 이것은 동성왕대의 사비천도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비판은 아니었다. 보다 본격적인 비판은 전렵기사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문제제기로 나타났다. 전렵기사를 천도계획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전렵이 사비일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도인 웅진의 사방 외곽지역에서 실시된 것을 볼 때 천도 보다는 군사권의 통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동성왕 말년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전렵을 통해서 전렵지의 지방관과 그 관할 부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면서 수도외곽에 대한 안정적 지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동성왕대는 천도가 논의될 여건이 되지 못하며, 왕권이 강화된 무령왕대에 가서야 가능하였다고 한다.49)

 동성왕대 사비지역이 새롭게 부각된 것은 사비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지고 있듯이 사비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은 사씨이다.50) 이때 사씨의 세력근거지로 부여 은산 혹은 임천 성흥산성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51) 그러나 부여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결과를 바탕으로 웅진과 마찬가지로 부여 역시 토착세력의 존재가 확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씨세력의 근거지로 대전 유성구를 새롭게 상정하는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 사비천도를 사비지역의 토착세력과 결부시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성을 근거지로 하는 사씨세력들이 왜 다른 지역인 사비지역으로 천도하는데 전폭적으로 협조하였을까는 더욱 의문이다.

  그리고 웅진천도의 경우처럼 재지세력의 문제를 천도지에서 상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천도지는 미개발지라는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보다는 오히려 그 지역을 어떠한 토착세력이 관할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비지역에서의 전렵을 통해 동성왕이 그 곳의 지방관과 관할부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이 지역에서의 정치세력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웅진시대 사씨세력이 꾸준히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씨세력이 천도를 주도한 결과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견해를 따라 사씨세력을 사비일대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의 세력가로 이해하는 것은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52)

  이러한 사비지역이 백제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초고왕대 가야평정과 관련해서인데, 아신왕대 달솔출신의 사두가 좌장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실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사비지역과 사씨 세력의 동향은 자세히 살필 수 없다. 그렇지만 5세기 전반대로 비정되는 사비 인근의 분강 ․ 저석리에서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백제 중앙정부의 웅진지역 경영에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웅진지역이 중요시되면서 사비지역으로까지 계속적으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한성시대 말 이래 웅진지역의 변화와 사비지역으로의 진출이 서로 맞물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대의 사비천도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는 의견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즉 동성왕대에 천도를 위한 축성이 시작되었다거나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당시의 백제는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천도를 단행할 만큼의 정치기반이 미약했다.


(4) 성왕의 사비천도

 그렇다면 언제부터 천도에 적합한 여건이 조성되었을까? 이에 대해 천도를 하려면 민심의 수습과 지지기반의 마련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무녕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민심 귀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53) 무녕왕은 군사력을 키워 백제의 영역확장과 중국대륙과 왜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성왕은 무녕왕대의 다져놓은 내실을 바탕으로 사비천도를 단행한다. 그렇다면 왜 천도지를 사비지역으로 정했을까?

 첫째는 지리적인 여건이다. 사비는 현재 부여지역으로 백마강이 북으로부터 서쪽까지 휘감겨져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계룡산과 대둔산으로 이어져 있는 산맥이 자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향해 흐르고 있는 금강을 통하여 중국이나 일본을 왕래할 수 있는 수로 교통상의 요지로 알려져 왔다. 남으로는 곡창 지대인 호남평야를 접하고 있어서 왕권강화와 대외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웅진으로 천도 했던 것과 같은 이유이다. 둘째로 송국리문화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부여 지방은 청동기시대이래로 오랜 문화적 전통과 역사성을 가진 곳이었다. 부여 지역이 청동기시대 이래로 주요 농경생활 지역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웅진에 비해 사비는 경제 활동에 유리한 지역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밖에 사비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외각에 축성을 통해서 얼마든지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이점이 존재했다.

 이 밖에도 성왕의 사비 천도를 적극 유치함으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려는 세력의 역할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성왕과 지지 세력으로 총칭되는 정치세력에 의해 이루어지 업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씨(沙氏)세력이 사비천도를 적극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사씨 세력이 지역적지반이 부여 지방이기 때문이다. 「사택지적비」를 통해서 부여 지방이 사씨의 세력 기반임을 알 수 있다. 사비 천도 이후 사씨들은 상좌평이나 대좌평과 같은 주요관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정치적 비중이 높은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5) 사비천도의 목적

  사비라는 도시 자체가 갖는 경제적인 이유이다. 웅진 천도로 이어져 온 국가의 중심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호남평야의 농업생산력을 장악하기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무녕왕대 이래로 추진해온 농업생산력 중진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사비는 웅진 보다 서해와 가까운 금강 하류에 있는 만큼이나 중국이나 왜 와의 관계가 한층 긴밀해지는 상황에서 외부 세계와 활발한 접촉이 가능한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웅진 지역의 지리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그 지역의 토착세력들로부터 탈피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유학의 정치와 불교에 의한 이상국가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공간적인 조건54)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성(현)을 두는 5방-37군-200성으로 이루어진 지방통치조직을 새로이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지방통치조직의 수는 크게 늘어나고 또 체계성을 갖추게 되었다. 지방통치조직의 편제 기준은 토지와 호구의 다과였다. 이로써 재지세력들의 영향력은 그만큼 약화되고 중앙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은 보다 강화를 위해서였다.


 

3. 결론

 백제 역사의 전개과정을 볼 때 특징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수도를 빈번히 옮겼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면 백제는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겼다. 그 후 일시적으로 한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하남위례성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하남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겼고, 538년에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는 정치와 행정과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므로 수도의 이동이 가지는 상징성과 변화의 역동성은 크다. 여기에는 중심지의 변동에서부터 지배세력의 재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가 수반된다. 따라서 빈번히 수도를 옮긴 백제사는 그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백제의 수도가 오늘날 서울에 있을 당시 금강유역의 충청도 지역은 지방의 하나였다. 그러나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개로왕을 붙잡아 죽이고 왕도 한성을 함락시키자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황급히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63년 뒤인 538년에 성왕은 사비로 다시 천도하였다. 새로이 백제의 수도가 된 웅진과 사비는 모두 금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리하여 금강 유역권은 이제 백제의 수도권이 되었다.

  금강유역권이 새로이 수도권이 되면서 이 지역에 기반을 가진 세력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사씨, 연씨, 백씨 등이 대표적인 가문이다. 백제 왕도가 서울에 있을 때 백제의 지배세력은 대다수가 한강 유역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었다. 왕족 부여씨를 비롯하여 진씨, 해씨, 목씨 등이 그 대표적인 가문이다. 그러나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의 천도하면서 한강 유역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에 따라 한강 유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은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도가 웅진으로 옮겨지게 되자 백제 왕실은 금강 유역권에 기반을 둔 세력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제 금강유역권의 세력들은 백제왕실을 떠받치는 가장 핵심적인 세력이 되었다.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백제는 한강 유역을 비롯하여 경기도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그만큼 영토가 줄어든 것이다. 영토의 축소는 경작지의 축소와 인구의 축소를 가져 왔으며 그에 따라 백제의 경제 기반은 그만큼 허약하게 하였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야 하였다. 이를 위해 백제는 510년 명령을 내려 저수지를 완비하게 하고 또 농토를 떠나 놀고먹는 자들을 귀농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는 곧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처로 금강 유역권이 적극적으로 개발되었다.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의 개발은 수리시설의 정비로 나타났다. 무령왕은 전국에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리시설의 정비는 경작 면적을 크게 늘어나게 하였고 그에 따라 농업생산력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는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민들의 삶도 좋아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은 경제적으로도 백제 왕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지역이 되었다. 특히 금강유역권의 적극적인 개발은 인구의 증가와 자연촌의 성장을 가져왔다.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종래의 22담로제를 5방-37군-200성제로 재편제한 것도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의 개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백제는 국내외적 상황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국가를 재정비했다. 그러나 백제의 이러한 노력은 신라와 당의 나당(羅唐)연합에 의해 660년 6월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이것은 백제의 나당연합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각지에 분산되어있어 힘의 결집이 부족하였다. 이것은 잦은 천도과정에서 국력이 한 곳에 응집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백제의 흥망의 역사는 천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고 검토하면서 백제의 천도의 정치적인 원인에 대한 나름의 논리를 폈다. 그 과정에서 다소 억지스럽고 비약과 비문이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천도와 같은 국가의 중대사가 단순히 국왕의 의지로 진행된다기보다는 국내적 국제적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 참고문헌


사료

『삼국사기(三國史記)』

『송서(宋書)』

『위서(魏書)』

『일본서기(日本書紀)』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단행본

한영우, 『다시찾은 우리역사』, 경세원, 2007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박현숙, 『백제의 중앙과 지방』, 주류성, 2005


논문

김수태,  「백제의 천도」,『한국고대사연구』36, 한국고대사학회

김영관,  「百濟의 熊津遷都 背景과 漢城經營」,『충북사학』11.12, 2000

노중국, , 「百濟 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서울대

학교. 1978

문안식, 「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개로왕의 전제왕권 지향과 좌절을 중심으로」,『사학연구』78, 한국사학회, 2005

박현숙, 「웅진천도와 웅진성」,『백제문화』30,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01

이기백, 「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백제연구』9,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8

정재윤,「文周․三斤王代 解氏 勢力의 動向과 昆支系의 등장」,『사학연구』60, 한국사학회. 2000



    



 


 

 

 


1) 김영하, 2004, 「古代 遷都의 역사적 의미」,『한국고대사연구』36, 한국 고대사 연구회.

2)『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국의 명칭은 처음에 10명의 신하가 도와주었다고 하여 십제(十濟)라고 했다.

3)『삼국지』위지 동이전 마한

4) 북한산 동편, 세검정, 중랑천 일대로 비견된다.

5) 인천광역시 문학산 인근지역, 삼국사기에는 매소홀(買召忽)로 기록되어 있다.

6) 해부루(解夫婁, ? ~60년)는 부여의 왕이다. 해모수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7) 졸본(卒本)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여 비류·온조 형제를 얻었다고 한다.

8)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쌓은 백제시대의 쌓은 몽촌토성(夢村土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유물과 집자리가 발견되어 하남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경기도 하남시에도 이성산성(二聖山城)을 비롯한 큰 건물지가 발견되어 또 하나의 유력한 위례성 후보지로 꼽히고 있으나 아직은 발굴이 완료되지 않아서 결론을 내기 힘들다.

9) 서울 송파구에 위치, 현재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가 약 2.7km가 남아있지만, 선문대학교 고고학과 이형구 교수가 측량한 결과, 풍납토성은 본래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으로, 현존하는 토성 중 대한민국에서 최대 규모. 개별적으로는 북성(北城)이라고 한다.

10)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 둘레는 약 2.7km이며, 높이는 6~7m이다. 풍납토성과 구별 하기 위해 남성(南城)이라고 한다.

11) 관직 및 관료 체제에는 정무(政務)의 분담과 문무관의 분화가 나타나고 있어, 중국의 관제를 수용한 것을 보여준다.

12) 『三國史記』 卷第 ,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九月内臣佐平 優福 㨿北漢城叛王發兵討之

13) 목지국을 병합한 고이왕이 주변국을 통합하기 위해 5부를 편제함. 이때 5부의 북부(예성강)지역의 세력.

14) 영산강유역에 위치한 신미다례(신미국)

15)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안라(安羅), 다라(多羅), 가라(加羅) 등

16) 김현국, 2002,『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 비평사

17)『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侵髙句麗攻平壤城  麗王 斯由 力戰拒之中流矢死王引軍退

18) 광개토대왕비문 ,1면 9행,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19) 일명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하며, 20대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며, 22대 문주왕(文周王)의 아버지다.

20)『三國史記』, 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二十九年 秋九月 黑龍見漢江須チ臾雲霧晦冥飛去 王薨

21) 최욱진 , 2012,「백제의 웅진천도배경과 천도지 선정」,『백산학보』 제 94호

22)『宋書』 百濟條 二年 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 王 餘紀 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 餘紀 爲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 餘昆·行征虜將軍 餘暈 並爲征虜將軍. 以行寧朔將軍 餘流·麋貴 並爲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 于西·餘婁 並爲建武將軍.




23)『魏書』 卷100 列傳 第88,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隣好, 親率士衆, 陵踐臣境. 臣祖須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陵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不敢自有.

24)『三國史記』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二十年王襲 樂浪 滅之.

25)『三國史記』卷第十七 髙句麗本紀 第五, 秋九月南侵 帶方郡.

26)『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髙句麗伐 帶方 帶方 請救於我先是王娶帶方王女 寳菓 爲夫人故曰帶方我舅甥之國不可不副其請遂出師救之髙句麗怨王慮其侵冦修阿旦城虵 城備之.

27)『三國史記』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皝 從之發 羙川王 廟 載其尸収其府庫累世之寶虜男女五萬餘口燒其宫室毀丸都城而還.

28)『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髙句麗王 斯由 帥歩騎二萬來屯 雉壤 分兵侵奪民戸王遣太子以兵徑至 雉壤 急擊破之獲五千餘級其虜獲分賜將士. 

29)『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髙句麗舉兵來 王聞之伏兵 於 浿河 上俟其至急擊之髙句麗兵敗北



 

30)『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侵髙句麗攻平壤城 麗王 斯由 力戰拒之中流矢死王引軍退. 

31)『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三十年秋七月髙句麗來攻北鄙水谷城䧟之王遣將拒之不克王又將大舉兵報之以年荒不果. 

32)『三國史記』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三年冬十月王將兵三萬侵髙句麗平壤城. 

33)『三國史記』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Z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34)『三國史記』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王曰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シ於其內作宮樓閣臺榭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沿河樹堰 自虵城之東 至崇山之北

35)『三國史記』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f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36)『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文周王 或作汶洲 蓋鹵王之子也.

37)『日本書紀』 卷第十四 大泊瀨幼武天皇 雄略天皇, 汶洲王蓋鹵王母弟也

38)『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文周王 或作 汶洲 蓋鹵王 之子也初 毗有王 薨 蓋鹵 嗣位 文周 輔之位至上佐平 蓋鹵 在位二十一年髙句麗來侵圍 漢城 蓋鹵 嬰城自固使 文周 求救於新羅得兵一萬迴麗兵雖退城破王死遂即位性柔不斷而亦愛民百姓愛之.

39)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이루어진 자연환경과 강의 남안 구릉지에 위치했다는 도성사적 입장이 있다.

40)『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十六年春移都於 泗沘 國號 南扶餘. 

41)『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十三年夏六月 熊川 水漲漂沒王都二百餘家.


42)『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九月王出獵宿於外 解仇 使盗害之遂薨 

43)『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十一月獵於 熊川 北原又田於 泗沘 西原阻大雪宿於 馬浦村 初王以 苩加 鎮加林城 加 不欲徃辝 以疾王不許是以怨王至是使人刺王至十二月乃薨謚曰 東城王. 

44) 노중국, 「백제왕실의 남천과 지배세력의 변천」,『한국사론』4, 1978, p.94 및 p.97. 그러나 『백제정치사연구』, p.166에서는 천도를 기도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사비지역에서의 빈번한 전렵은 전렵지로서의 기능 외에 전렵과정을 통해 본 사비의 지리적 호조건이 보다 부각되었을 것이며 그 호조건 때문에 사비가 천도지로서 선정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즉 동성왕대 천도지로서 사비가 선정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45) 심정보,「백제 사비도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2000.

46) 김주성,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연구』, pp.28~29. 이밖에 유원재, 앞의 책, pp.159~166 및 정재윤, 앞의 글, pp.105~110도 같은 입장이다.

47) 이남석, 심정보의 앞의 글에 대한 토론문 및 서정석, 『백제의 성곽』, 2002, pp.128~129.

48) 정재윤, 앞의 글, p.114. 따라서 사비천도를 둘러싼 정치세력 상호간의 갈등은 그동안 지나치게 강조된 것이 아닐까 한다.

49) 이도학, 「백제 사비천도의 재검토」, pp.31~39.

50) 노중국, 앞의 글, pp.95~101 및 『백제정치사연구』, p.166.

51) 여기에 대한 논의는 유원재, 앞의 책, pp.34~35을 참고할 것.

52) 이홍직은 사비가 사씨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이홍직, 「백제 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1971, p.339. 서정석은 사법명이 받은 ‘행정로장군 매라왕’을 궁남지 출토 목간에 보이는 매라성에 연결시켜 부여에 가까운 매라가 사씨의 근거지임을 말하고 있다(앞의 책, P.118). 한편 정재윤은 사비천도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주도한 세력이 다르다고 하면서 연씨를 새롭게 상정하고 있다. 본래 연씨의 세력기반이 웅진 이북이었는데, 해구의 반란 이후 사비지역으로 사민된 세력으로 이해하고 있으나(앞의 글, pp.106~107) 따르지 않는다.

53)『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之第三子也身長八尺眉目如畫仁慈寬厚民心歸附 牟大 在位二十三年薨即位.

54) 사비 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중앙통치제도를 재정비하였다. 16관등제를 정비하여 귀족들의 상하 질서를 분명히 하였고, 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12부와 서정을 담당하는 10부로 이루어진 22부를 두었다. 수도는 5부-5항제로 편제하고, 각 부에는 500명의 군사를 두어 왕궁 호위와 왕도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성왕은 인도에서 율장을 갖고 돌아온 겸익으로 하여금 범어 율장을 번역하게 하여 신율을 만듦으로써 불교교단도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