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20100227 이병찬

20110186 김희권

 

 

- 목 차 -

 

1.서론

 

2.다산 정약용의 생애

 

1) 생애

(1) 1기 성장수학기(1~21)

(2) 2기 출사기(22~39)

(3) 3기 유배기(40~57)

(4) 4기 쇠퇴기(58~ 75)

2) 유배 당시의 사회적 배경

3) 다산의 저술활동

 

3.다산 정약용의 사상

1) 사회사상

2) 정치사상

3) 다산의 교육사상

4) 자연과학사상

5) 여전론

 

4.결론

 

5.참고문헌

 

 

1. 서론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 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다산 정약용의 생애

 

1) 생애

다산 정약용은 1762(영조 38) 6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소천 (오늘날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또는 송보이고 호는 사암, 다산, 열수옹 등이고 당호는 여유당이다.

다산 정약용은 영정조 시대로 신학의 바람이 고비를 이루던 때였다.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시대다. 다산은 8대가 옥당 출신인 명문가이며 부친은 진주목사를 지냈다. 외가는 윤선도의 후예로 윤두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이승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그의 매부였다. 그래서 훗날 천주교와 인연을 맺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1) 1기 성장수학기(1~21)

다산 정약용은 4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는 역법, 산수에 통달하였으며, 오언한시인 小山蔽大山遠近地不同이라는 시를 지었다. 9세에는 자기의 시문을 모아 <삼미자집>을 만들어 학문의 자질이 있음을 보였다. 부친이 영조의 부름을 받아 호조좌랑에 오르자 부친의 유고를 보고 학문의 현실적인 면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다산은 유교의 가르침을 현실적 측면에서 재검토하고 실학, 서학 등의 방법론을 통하여 그 시대 조선 사회가 필요한 사상의 토대를 확립할 수 있었다.

 

(2) 2기 출사기(22~39)

22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든다. 세자책봉 경축으로 열린 증광감시(增廣監試)의 경시초시(經義初試)에 합격하여 정조와이 만남이 이루어진다. 중용에 관한 질문에서 소신을 지켜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26세부터 4~5년간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벽을 통해 천주학과 서양의 근대 문물, 즉 천문학, 수학, 지리, 망원경등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 협소한 세계관을 탈피하고 유학을 자주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첫걸음이 된다.

28세에 대과에 합격 7품 벼슬인 희릉직장을 시발점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29세에는 공서파의 지탄을 받아 충청도 해미로 귀양 갔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이유는 천주교를 신봉하던 남인 사이의 알력에서 일어난 것이다. 30세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지평이 되었다. 31세에는 진주목사로 있던 부친이 별세하자 관직 사퇴, 마연에서 시묘를 지냈다. 그때 정조의 명을 받고 화성 축조를 위해 기중기를 만들었다.

33세 상복을 벗고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 이후 암행어사가 되는데 경기도 일대의 농민촌인 적성현, 마전군, 연천현, 삭녕군의 궁핍한 생활과 부패한 지방행정은 다산에게 개혁의 의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비행 척결의 대상으로 올린 서용보는 평생을 다산을 질시하고 모살하고자 한다. 39세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모함을 받아 사직 향리로 돌아왔다. 그동안 천주교와 절연하는 소도 올리고 다섯째 아들이 죽는 슬픔도 겪었다.

 

(3) 3기 유배기(40~57)

다산은 탐관오리를 단죄하고 국정쇄신에 노력하던 관리로서의 치적은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붕어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신유사옥으로 다산은 투옥되었고 약종은 사형당하고 약정은 흑산도에, 다산은 강진에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18년간 와성한 저술활동을 하여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 하고 경학에 몰두하여 실학적 입장에서 방대한 유교경전을 고증하고 합리적 해석을 해서 경집 232, 분집 260여 권을 저술했다. 다산으로서는 불행하지만 우리로서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4) 4기 쇠퇴기(58~ 75)

이태순의 상소에 의하여 순조 18년인 58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저술한 흠흠신서목민심서에 수록된 형전의 논리를 심화시킨 것으로서 관원들의 부정. 협잡, 숭탈상태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때에도 서용보와의 악연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다양한 분야와 방대한 저술활동을 한 다산은 75세에 고향인 마현에서 1836222일 진시에 세상을 떠났다. 8대 옥당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정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친인척의 천주교 입문과 벽파와 시파의 대립, 서용보의 시샘으로 11년간의 짧은 벼슬길은 끝나고 18년의 유배생활에세도 좌절하지않고 학문에 힘써 목민심서와 형벌에 대한 세세한 판단을 한흠흠신서, 그리고 경세유표와 많은 경학을 해석하였다.

 

2) 유배 당시의 사회적 배경

18년간의 유배기간 동안 다산의 삶은 서민들 생활 속에 있었다. 유배기간동안에 경험한 서민들의 삶이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였으며 다산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서민들의 심리상태를 불안정하게 하였다. 이에 서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집권층들의 성리학에 예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였다. 예를 기반으로 신분 질서의 유지. 동족 집단의 결속, 사부장적 폐쇄성의 강화, 양반층의 옹호, 그에 도전하는 민중저항에 압제를 가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지배질서를 공고히 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주자학이 신성 불가침 영역으로 조선의 정치사상과 경제사상의 통치철학이 되었으며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곧 반역으로 규정되었고 절대적으로 신봉해야 하는 하나의 종교였다.

다산이 태학생으로 있던 정조 9(1785) , 형조의 금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중인 김범우의 집으로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금리들은 그곳을 노름 현장으로 생각하고 급습하였다. 집안에서는 이상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양반 한 명이 중앙에 앉아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벽이었다. 중인 집에 있는 양반은 이벽뿐이 아니었다. 이승훈과 권일신권상학 부자, 그리고 정약전정약종 형제도 있었다. 금리들은 현장에서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은 압수에 형조에 바쳤다. 이른바 을사추조 적발사건이었다.

위의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산의 친인척 종교문제로 얽혀 있어, 훗날 다산의 인생에 크나큰 장애물이 된다. 다산은 종교문제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배까지 가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국토는 피폐해지고 집권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당쟁을 일삼는 등 정국은 거대한 혼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토지에 대한 의존도가 심했던 당시에는 전세제의 문란과 집권층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욕이 심했다. 이런 문제들은 국가의 조세수입의 감소와 서민 생활 변화로 이어졌다. 서민 생활 중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증대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생산력의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적인 수리사업을 실시함으로 이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경제적인 발달과 함께 조선 후기 사회는 신분제의 동요가 왔다. 부를 축적한 상민이나 노비의 신분이 상승하고 지위가 향상되었다. 또 족보의 매매로 인해 신분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사회 전받에 걸친 변화 가운데서도 집권층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앙정부는 조세수입을 높이기 급급했고 관리들은 그것을 농민에게 부과하여 공물과 요역 부담을 높여갔다.

조선후기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의 모습은 첫 번째로 조정의 서민에 대한 통제력 약화, 두 번째로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세 번째는 사회제도의 붕괴로 변화의 소용돌이, 네 번째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몰락하는 지주의 발생과 중인 계급의 발전,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힘없는 서민에 대한 조세 부담의 가중과 이에 저항하는 서민들이 모습 등이다.

다산이 활동했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사회제도는 모순과 불합리성으로 점철된다. 사회제도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개혁안이 등장하였으나,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3) 다산의 저술활동

다산의 학문적 성과는 어쩌면 백과사전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산의 저술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저술을 편의상 경학, 경세학, 잡학으로 나누기도 한다. 경학에서는 육경사서를 기초로 해서 철학, 종교. 윤리 등이 포함되고 경세학에서는 일표이서를 중심으로 한 정치, 경제, 윤리, 지리, 과학, 등이며, 잡학에서는 언어, 의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적 연구가 분류된다.

다산의 전집 목록인열수전서총록에 의하면, 그가 쓴 방대한 양의 저서와 작품들을 묶은 전집은 원래 182508권이었다. 508권이라는 저서에 대하여 자기가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 의하면, 경집 232,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이 되고 여기에 빠진민보의(民堡議)3,풍수집의(風水集議)3,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3권을 합하면 모두 508권이 된다

그러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여유당전서1938년 경에 그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한 것으로 7153권으로 구성되었다.

다산이 무릇 책 한 권을 저술할 때에는 먼저 저술할 책의 자료를 수집하여 서로 비교하고, 참고하고 정리하여 정밀하게 따졌다. 편집능력과 지식경영에 있어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다산은 뛰어난 편집능력으로 40세에서 57세까지 18년간의 유배 기간 중에도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유배기간의 저술활동은 여유당집(與猶堂集)(奎章閣本)에 잘 나타난다.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집(與猶堂集)에 의하면 다산은 18년간의 유배기간 동안 234에 해당하는 537의 시를 남겼다.

다산은 조선왕조가 병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삼정의 문란 때문이라고 했다. 백성들 밑에 목민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 위에 목민관들이 군림하였기 때문에 병든 사회라고 했다. 다산은 귀양이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고난에 찬 삶을 살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병든 조선을 치유하고자 목민심서(48)을 집필하였다.

다산의 편집능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목민심서이다.목민심서는 다산의 경험을 토대로 25사와 역대 문집들의 자료에서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위해 알아야 할 것과 그것과 관련된 예들을 가려 뽑고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역대 문집에서 가려 뽑은 내용의 양이 방대하다. 전체 목차는 부임에서 이임까지 12항목으로 단계를 나누어 정리하였다. 물론 이 방대한 작업을 다산 혼자 한 것이 아니다. 강진의 제자들이 동참했다. 제자들은 역할을 나누어 기초자료를 선별하고 분류했다. 다산의 작업의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한 기획자이면서 편집자였다.

다산은 의학분야에도 관심을 두었으며, 저술된 책이 바로마과회통을 언급할 수 있다. 다산에게는 슬하에 63녀가 있었으나 그 중에 42녀를 대부분 마마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다산은 이 아픔을 담아 모두 63종의 의서에서 천연두에 관련된 내용만 선별하여 예방과 치료의 방법을 마과회통에 내용별로 정리하였고, 편집방식은 목민심서와 마찬가지였다. 병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식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이 행간에서 묻어나오는데, 이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다른 부모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숭고한 마음까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제도의 폐단을 시정할 수 있는 의견 및 개혁안들을 묶은경세유표, 살인관계 등과 같은 재판문제를 서술한흠흠신서, 우리나라의 주요 강과 그 지역에 대한 역사적 유래와 변천과정을 고증하고 저술한 지리서인아방강역고대동수경등 다산의 다른 저서도 모두 기존 자료들을 선별하고 재배열한 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편집한 것이다.

 

3. 다산 정약용의 사상

다산은 성리학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백성중심에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민본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당시 민초의 참혹한 현실을 이해하고, 치자와 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며, 서로 간의 책임과 의무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은 탕론, 목민심서, 흠흠신서등의 주요 저서와도 연관이 되어 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술을 적극 개발하고, 외국의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시도하는 한편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지기를 바랐다.

다산은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각종 해체 현상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방향을 모색하였다.

반면에 개혁안을 자신이 직접 추진할 수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은 그의 개혁안에 현장성의 결여라는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 개혁의 목표와 개혁된 사회상에 대해서는 뚜렷이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했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에 대한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1) 사회사상

정약용이 활동하던 시대는 우리나라 봉건사회 발전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 봉건제도의 붕괴를 특징짓는 사회였기 때문에 경제적 모순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배 계급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었다.

정약용의 사회 개혁 사상은 그의 사회역사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의 사회 역사관에서는 고대사회를 이상화하고, 이를 빌어 군주제에 반대하고 민주정치를 제창하였다. 그는 고대사회가 이상 사회로 발전한 이후 왕도 예치의 사회를 거쳐 패도 법제의 사회로 변하였으며, 이상적인 정치가 파괴되어 원래 백성을 위한 것이던 국가와 법이 통치자의 압제와 백성수탈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고대의 이상사회를 무기로 하여 봉건적 전제 통치를 부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였다. 그의 민주 민권 정치적 사회 개혁 사상은 그가 지은 원목(통치론), 「湯論」(역성혁명론) 두 편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원목에서 그는 군주제도를 부정하고 그것을 민협의회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실학자들에게는 없었던 독창적인 견해로서 뒷날 한국정치사상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다산은 백성생활의 수요와 백성 스스로의 선택과 약속으로 통치자가 탄생되었다고 설명하고, 이에 근거하여 왕권신수설에 반대하는 한편 민주제도의 원칙을 확인하였다. 그는 사회의 법도 백성의 자유의지와 직접적인 이익에 기초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보기에 도덕규범은 정치와 국가제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 천자는 하늘이 내린 존재가 아니라 백성에 의해 추대된 존재이기 때문에, 백성이 그의 행동에 찬성하지 않으면 천자를 다시 뽑을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군주제를 민협의회로 대체하고자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의 조건하에서는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평등권에 대한 백성의 요구를 반영하고 상공업자들의 평등권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유구한 봉건 전제제도의 지주인 왕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반봉건적, 민주주의적 계몽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정치사상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통치 체제는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그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다산은 그가 처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많은 혁명적인 이론들을 제기하였다.

물론 이러한 그의 제안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지식 대중들의 생각을 그가 집대성한 것이며, 또한 그 당시 사회의 전도와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제반 이론들은 조선왕조 후기에 생존했던 어떤 사람의 주장보다도 진일보한 것이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정약용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중을 본위로 한다는 민본사상 내지는 민중을 위한다는 위민의식에 그들 주장이 기초를 두고 있다. 다산은 민본의식 내지는 위민의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을 본위로 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부여해 주어야 하고, 또 민중들의 권리를 용인해 주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다산 자신이 비록 완전한 자유 민권 사상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에게서는 근대적 민권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3) 다산의 교육사상

다산은 오학론과 불가독설이라는 저작에서 당시의 교육풍토를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실용실증실리라는 그의 기본 사상에 입각하여 당시의 교육실태가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이를 통해 실학사상에 기초한 교육의 성격을 구명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교육사상에는 오학론과 불가독설을 비판하였다.

오학론은 성리학훈고학문장학과거학술수학에 대해 논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다산은 오학이 번창하자 주공공자의 도는 잡초가 무성하듯 거칠어지기만 한데 장차 누가 능히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성리학은 본연의 임무인 도를 알고 자기를 인식하며, 실천해야 할 도의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 않았으며, 훈고학은 그 본연의 임무인 경전의 정의를 밝혀 도와 교의 본지에 통달하게 한다는 일에 불충실했다. 다산 자신이 성리학훈고학문장학의 대가였음에도 이 삼학을 통렬히 비판했던 것은 퇴폐한 이들 학문연구에 대한 비판이지 이들의 본질마저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불가독설은 전통적인 유학교육에서 사용하던 천자문사략통감절요를 읽혀서는 안된다는 이론이다. 천자문은 한자 교육을 위한 학습서이고 사략은 중국의 역사책을 초록한 것이다. 통감절요는 강용의 편저이다. 위와 같은 책은 학습하는데 비효과적이며 우리나라의 교육이 융성하려면 이것들을 없애야 한다고 다산은 주장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다산은 학문의 실용성과 실증성, 사회개혁에 관심을 두어 오학론과 불가독설을 내놓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성리학의 일강삼목설을 부정하고 명명덕, 친민 지어지선을 모두 효제자로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명덕 역시 효제자로 규정하고 효제자의 실천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효제는 유교교육의 이념이며, 행위의 지침이다. 이는 효제를 인을 실천하는 근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여기에다 자를 첨가하여 효제자를 교육목표로 설정하였다.

효는 부모와 임금을 섬기게 하고, 제는 어른을 섬기게 하고, 자는 대중을 부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제는 재하자가 재상자에게 드리는 윤리이고, 자는 재상자가 재하자에게 베푸는 덕이다. 이 세 가지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근본으로 삼아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종래에는 재하자의 윤리만 강조되고 재상자의 윤리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 결과 교육에서는 효제만이 강조되었다.

자를 효제와 동격으로 설정한 것은 다산의 독특한 견해이다. 자를 제시했던 이유는 재상자는 재하자로부터 효제를 수용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와 대등한 노력을 재하자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위민의식 때문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오교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수직적인 관계로만 파악하려는 것을 지향하고 상호관계 내지는 대대관계로 파악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효제자는 오교를 총괄한 것이며 명덕이요 친민이 된다. 효는 자효이고, 제는 형우제공이고, 자는 부의모자이다 라고 하고 있어 효는 상향적인 것이고, 제는상호적인 것이고, 자는 하향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재상자나 재하자가 동등한 윤리관계를 가져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재상자가 자해야만 재하자가 효할 수 있다는 논리로 자 없이는 효가 성립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다산은 조선왕조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의 목표로 효자를 제시하는 한편 이상적 교육인간상으로는 효를 실천할 수 있는 수기치인의 목자를 제시하고 있다.

 

4) 자연과학사상

다산의 자연 과학 사상은 그가 이미 16세 때 성호 이익(1682-1764)의 저서를 탐독하고 그의 선진적인 실학사상 체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로부터 공고히 되어 갔다. 이익은 자연 과학 분야에서도 훌륭한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자연 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따라서 다산은 자기의 일생을 통하여 이익을 자기의 선생으로 모시면서 항상 존경하였으며 그의 제자들과 자주 접촉하여 이익의 사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익에 대한 다산의 태도는 그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형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있는 다음의 구절을 통하여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능히 천지의 큼과 일월의 밝음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의 힘입니다.. 또한 다산은 이덕무(1741-1793), 박제가(1750-1805) 등의 기타 실학파 학자들과도 널리 접촉하였으며 연암 박지원(1738-1805)열하일기를 애독하였다.

다산의 자연 과학 사상은 실학파의 다른 학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적 우주관에 확고히 입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천문, 기상, 지리, 물리, 화학적 및 생물학적 현상 등의 각양 각이한 자연 현상에 대하여 항상 관심 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변화 발전하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구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우선 매개 자연 현상의 물질적 토대를 찾은 후에 그 이치를 밝히었으며 자기의 이론을 확증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들을 경주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다한 창의안을 제기하였다.

이와 함께 다산은 온갖 비과학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을 반대하였으며 특히 각종 종교와 미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우주와 과학 및 기술에 대한 정 다산의 올바른 입장과 주장은 그의 진보적, 유물론적 세계관 형성의 기초로 되었으며 당시의 전제(田制), 세제(稅制), 신분제도 및 기타의 불합리성을 비판하여 그것을 개혁한 데 대한 의견들을 대담하게 주장하는 토대로도 되었다.

 

5) 여전론

여전론은 다산이 주장한 토지제도 개혁안이다. 다산은 고대 중국의 정전법이나 선배 실학자들이 주장한 한전제·균전제 등의 토지개혁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전제개혁안으로 여전론을 제의하였다.

여는 산곡과 천원 등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해 경계로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된 지역을 일여로 한다. 일여는 주제에서 25가였으나 그 명칭만 빌리고 대략 30가구 내외로 하는 단위의 일종인데 가구수를 반드시 일정할 필요는 없었다. 여섯을 합쳐서 이라 하고, 이 다섯을 합쳐서 방, 방 다섯을 합쳐서 읍이라 한다.

여에는 여장이라는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의 엄한 지휘를 받는다. 한 여의 토지는 당해 여의 여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자치적인 공동농장으로 땅주인에 구별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에만 따른다. 여장의 권력은 절대적이어서, 군대의 필수적 요건인 엄격한 기율과 통솔 체제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밖에 필요한 군사 기술과 지식은 훈련을 통해서 보완한다면 이상적인 병농일치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 농민의 자유로운 이전의 보장을 주장하고, 그렇게 되면 10년 내에 인구의 분포 상태가 평균화될 것이다. 또한, 이것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면 모든 농민들은 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확의 배당은 농민 개개인의 노력에 따르기 때문에 부의 측정 기준은 토지소유의 다소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된다. 따라서, 농민들이 노력을 더하게 되면 토지의 이용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자산이 풍족해진다. 백성들의 자산이 풍족해지면 풍속이 순박하고 후해지며 효제의 윤리 도덕이 확립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여전제는 첫째로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하며(耕者有田), 둘째로 토지 소유는 공유(共有)로 하여 사유 토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土地共有). 셋째로 토지의 경작은 공동으로 하며(共同耕作), 넷째로 생산 곡물은 공동으로 수확하며(共同收穫), 다섯째로 수확 곡물은 노동량에 따라서 분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여전제는 단순한 전제개혁론이라기보다 다분히 공상적·농민적 사회주의사상을 내포하는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정약용의 개혁사상의 총체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4. 결론

이상으로 다산 정약용의 생애,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당시 정치적, 사상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고 또 그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가 저술한 저서와 그의 사상까지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봉건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그를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자 조선 후기 사회가 배출한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문제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혁안은 정조와 같은 성군(聖君)이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왕도정치의 실현에는 창의적이고 강직한 신하의 보필이 필요하며, 아마도 자신이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는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그 방대한 개혁사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개혁안이 묵살되거나 좌절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몰락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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