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실학사상의 특징과 의의

- 반계 유형원 선생을 중심으로 -

 

20100247 장순하

20125003 유희섭

20132988 김효준

 

- 목 차 -

 

1. 서론

 

2. 본론

1) 호남지역의 실학사상

(1) 호남지역 실학사상의 배경

(2) 호남지역 실학사상의 특징

(3) 호남지역 실학사상의 의의

2) 반계 유형원

(1) 반계 유형원의 생애

(2) 반계 유형원의 사상적 배경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반계의 사상적 배경

(3) 반계 유형원의 교육이념

학교제도 비판

학교제도의 개선방안

과거제도 비판

과거제도의 개선방안

(4) 반계 유형원이 주장한 토지제도

토지 제도론

경제적 분업론

사회관

(5)민본주의

 

3. 결론

 

참고문헌

 

 

1. 서론

호남지역의 실학사상은 이곳으로 은거하러온 재야 지식인층들, 혹은 귀향 온 중앙관리들이나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립하였다.

호남지역은 산이 적고 평야가 많아 논농사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 때문에 쌀 생산량이 높고 그에 따라 수탈당하는 양도 많았다. 그만큼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다. 이러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보며 이곳에 있던 재야 지식인들은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위해 백성들을 위한 사상과 제도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호남지역으로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중앙 관리들의 부패를 지적하며 성리학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호남지역의 실학사상과 그 의의와 호남지역의 실학자 중에서 반계 유형원 선생에 대해서 조사했다.

 

2. 본론

 

1) 호남지역의 실학사상

 

(1) 호남지역 실학사상의 배경

호남지역은 산이 적고 김제 평야나 호남평야 등 넓은 평야가 많고 저수 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논농사에 유리하였고, 따라서 쌀 생산량이 다른 지역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방 수령들에 의한 수탈이 많았고, 백성들은 풍부한 쌀 생산량의 수혜를 받지 못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갔다. 이때 호남지역에 있었던 지식인층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당시 호남지역에 있었던 지식인층은 총 세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우선 호남지역 출신의 지식인들 위백규(魏伯珪), 하백원(河百源), 양득중(梁得中), 강필리(姜必履)등이 있으며, 다음으로 호남지역으로 은거하러 온 재야 지식으로는 후술할 반계 유형원 선생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호남지역으로 유배 온 중앙 관리로는 유명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이 있다. 정약용 선생은 정조시기 중앙에서 중용되었으나 정조 사후 천주교 탄압 천주교도로 몰려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 보내지게 되었다. 그는 유배 생활 당시 토지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며, 그는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여전론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는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갖지 못하게 하여 농민들에게 경제적 평등을 이룰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2) 호남지역 실학사상의 특징

이러한 특수한 이유로 호남지역실학은 타 지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게 된다. 우선 첫째로 호남지역의 실학은 토지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이를 개혁하여 올바른 토지제도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주장한 제도로는 균전제, 여전론, 정전론 등이 있는데, 균전제의 경우에는 후술하는 유형원 선생이 주장한 토지제도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든 토지를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의 재산으로 만들고서 사농공상으로 분류된 사민(四民)들 중에 가장 필요로 하는 순으로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사농공상에서 가장 토지를 필요로 하는 계층은 노력자(勞力者) 즉 농민이다. 그들은 농사를 지어야만 생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양반계층의 경우에는 노심자(勞心者)로 구분하여 토지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양반 계층이 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여전론은 다산 정약용이 주장하였는데 균전제와 같이 우선 사유재산인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의 소유로 하고 이를 공동경작, 공동생산, 공동분배 즉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토지제도를 주장하였으며, 이 역시 백성들의 토지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된 방안이다. 정전론의 경우에는 고대 주()에서 실시되어 졌다고 하는 제도로 이를 주장한 학자들은 유교적 이상국인 주나라를 따라 가면 자연스럽게 사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보았던 복고주의적인 학자들이 제시한 이론이다. 정전론 역시 위의 두 토지제도와 같게 우선 모든 토지를 국가의 토지로 하고 그 후 토지를 900무의 토지를 9등분하여 8가구에게 각각 100무씩을 분배 하고서 나머지 100무는 공동으로 경작하여 세금으로 납세를 하는 방식이다.

둘째로는 호남지역의 실학자들 모두 백성을 우선시 했다는 점이다. 이는 위의 토지제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양반을 중시하기보다는 백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양반이 지닌 모든 토지의 몰수를 주장하면서도 그렇게 몰수한 토지를 토지가 부족한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지급해 주자는 주장에서 알 수 있으며,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보고서 민본주의적 정책을 많이 주장하였다. 백성은 하늘이 내린 천민(天民)이라고 하였고 임금이 가장 첫째로 행해야 하는 것은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화 시키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왕도정치를 지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로는 교육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현재의 교육의 모순점을 비판하면서도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교육제도의 모순점의 경우에는 우선 당시 학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당시에는 공부는 양반 자제들이 신분 되물림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양민들은 교육에서 한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실학자들은 양민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렇기 위해서 학교제도의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학교 제도의 모순점과 개선안의 경우에는 후술할 반계 유형원 선생이 주장하였던 것들을 예시로 설명할 것이다. 학교제도 뿐 아니라 과거제도의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서 개혁안을 제시했다. 과거 역시 교육과 마찬가지로 양반층에게만 국한되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물론 양민도 응시가 가능하다고 명시는 되어있으나 실제로 양민이 과거 시험을 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양민들은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농사를 지어야 했지 공부를 하면서 먹고 살수는 없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런 점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호남지역의 실학은 중농적이면서도 개혁에 초점을 둔 급직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3) 호남지역 실학사상의 의의

호남지역의 실학자은 당시 고달픈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백성을 위한 개혁안들을 제시하였고, 백성들과 교화를 통해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던 근대지향적인 사회사상이었다. 실학은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경직성과 관념성을 비판하고, 조선이 맞이하고 있었던 사회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형식과 명분에서 벗어나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비판적이고 실증적 논리로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려고 함으로써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학풍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인식의 폭을 넓혔다.

이러한 실학의 사상적 특성은 주자학에서 양명학을 거쳐 고증학으로 이어지는 중국 유학의 일번적인 발전 경향과도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다. 하지만 조선의 실학은 발전 과정에서 기일원론(氣一元論)에 기초한 독특한 철학적 사유의 발전을 이루기도 하였다. 특히 정양용, 최한기 등은 성리학의 성선설을 비판하며 윤리의 사회성을 강조하였고, ()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이선기후(理先氣後)의 논리에 맞서 기()를 중심으로 한 이재기중(理在氣中)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학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인식을 발전시켰으나, 몰락 지식인들의 개혁론으로 국가의 현실 정책에 반영되는 데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실학자들의 사회개혁안은 대부분 봉건체제의 안정적인 존속과 유지를 위한 것이어서 전통적인 성리학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사상은 개항기 시기에 개화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2) 반계 유형원

 

(1) 반계 유형원의 생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양대 난을 겪은지 20여 년 후인 광해군(光海君) 1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관()은 문화(文化), ()는 덕부(德夫), ()는 반계(磻溪)이다. 반계는 2세에 부친을 잃었고, 23세에 조모를, 27세에 모친을, 30세에 조부를 연달아 여의고 관계(官界)에 뜻을 잃어 그 복상(服喪)을 마친 32세 되던 효종(孝宗) 4년에 전라도 부안(扶安) 우반동(愚磻洞)(지금의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은거하였다. 그 후 현종(顯宗) 14(1673)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여 년 간을 부안에서 머무르면서 고금(古今)의 전적(典籍)을 쌓아놓고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隧錄) 26()은 이 동안의 농촌생활 경험을 토대로 유형원 선생이 저술한 것이다. 그는 조부(祖父)의 명으로 단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지만 관직에는 뜻이 없었다. 그가 관직에 대해 거부한 이유는 과거의 제도적인 폐단에 대한 회의와 권력층에 밀려난 신분에 대한 불안 때문인 것 같다.

반계 유형원 선생은 전형적인 사대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렇기에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 5세에 취학하였으며, 7세에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 기주(冀州)를 읽다가 깨달은 바 있었다 하니 그의 조숙함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듯 그의 전통적인 세계는 반계수록 도처에 잘 나타나 있다. 학교의 학규중(學規中)에 문묘(文廟)를 중요시 하였다던가 가묘제사(家廟祭祀)에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의지해 의례를 준수했다는 사실로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또 신흥세력 청()에게 밀려 화남으로 망명했던 명()이 드디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는 숭명사상의 모습에서도 그의 제약된 전통의 세계가 나타난다.

반계 선생에게는 스승이 두 분 계시는데 한 분은 그의 외숙이며 뒤에 감사가 된 이원진으로, 그는 성호 이익의 당숙으로 하멜의 표류 사건 때 제주목사로 있다가 후에 감사를 지냇다. 또 한 분은 그의 고모부로 후에 이조판서에 이른 김세렴으로 그는 청과의 외교에 능했으며 동명집의 저자이다. 이 두분의 스승으로부터 반계 선생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먼저 접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김세렴은 함경감사에서 평안감사로 전임되는 전후 즉 반계가 22세쯤에 반계로 하여금 관북과 관서를 여행할 기회를 주어 북변에 대한 산지식을 얻게 해주었다.

반계가 저술은 반계수록(磻溪隧錄), 이기총론(理氣總論), 논학물리(論學物理), 주자찬요(朱子纂要), 경설문답(經說問答), 기행목록(紀行目錄), 속강목의보(續綱目疑補), 동사강목조례여지지(東史綱目條例輿地志), 정음제남(正音提南), 역사동국고(歷史東國攷), 동국문초(東國文抄), 기효신서절요(紀效新書節要), 서설서법(書設書法), 참동계초(參同契抄), 군현제(郡縣制), 무경(武經), 사서초(四書抄), 지리군서(地理郡書) 등이 있으나 현재에는 반계수록만이 남아있다.

 

(2) 반계 유형원의 사상적 배경

 

당시의 시대적 상황

조선 초에 태조 즉위 선언에서 토지제도는 전 왕조의 제도대로 한다고 하여 고려 말에 제정되어 공포되었던 과전법(科田法)은 새 왕조 토지제도의 기본이 되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말 80만결(萬結)에서 세종조에는 160만결(萬結)이 늘어나 재정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 전쟁은 조선에 치명상을 안겨 주었고, 전쟁 중 토지소유관계는 더욱 혼란되고 대규모의 은결(隱結)이 공공연히 묵인되고 있었다. 전쟁 전 백칠십만결이 되던 토지가 전쟁 후 20여년이 지난 인조 13년에는 전쟁 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토지제도의 문한이 극심하였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역에서도 양반이라고 칭하면서 신역(身役)을 도피하고 농민만이 전담하였다. 환곡(還穀)제도는 농민수탈의 고리대(高利貸)로 변하여 연70만석이나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연수확고가 줄어들자 국가는 삼수미(三手米), 결전(結錢) 등 새로운 세목(稅目)으로 징수를 강행하여 농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 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질병의 유행으로 일반 백성의 생활은 초(), (), (), ()로 연명하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도 국력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거듭하였으나 어떤 획기적인 처방이 필요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한 때였다. 이 대에 새로운 사상으로 나타난 것이 실학이었다. 이 시대야말로 정신 내지 지도이념에 대한 자기성찰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다. 반계는 이러한 시대에 나타나 실학을 비교적 명확한 형태로 구성하여 근대 지향적으로 이끌어 나간 선구자였다. 일찍이 위대한 경륜가(經綸家) 이이를 비롯하여 임진왜란의 위기를 극복케 한 유성룡, 중국의 경제정책의 수입을 강조한 조헌 대동법(大同法)의 주창자(主唱者) 김육 등 많은 정치 사상가들도 있었지만 반계는 이들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가 문란한 현상을 목격한 반계는 혼탁한 세파에 합류하기를 싫어하며 벼슬의 길을 단념하고 송죽림(松竹林)에 묻혀 국가사회상을 피부로 느껴 개혁사상을 내놓을 것을 결심하고 반계수록(磻溪隧錄)과 같은 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반계의 시대는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학문 자유의 박탈 속에서 학문의 기아(飢餓)현상과 더불어 새로운 지식욕이 나타났으며, 학문의 규모는 갈수록 부풀어 가는 시대였다.

 

반계의 사상적 배경

반계의 교육사상을 형성해 주었던 철학적 근거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사상적 배경을 고찰해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반계를 지도한 스승이 외숙인 이원진과 고모부인 김세렴이었지만 반계에게 사상을 전달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어 직접 알 수는 없으나 수록에서 반계가 친우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학문을 논하였다. 우리의 조사에 의하면 반계가 학문에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반계 선생은 율곡 이이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반계는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서 그 근본을 배양하고 다음에 대학(大學)을 읽어서 그 규모를 정하고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근사록(近思錄), 육경(六經)을 읽고 거기에서 사기와 선현의 성리(性理)의 글을 읽어서 정밀하고 고금의 여러 나라를 얻고 잃고 함을 거울로 삼는다고 하였다. 교육 과정면에서 율곡과 반계의 공통성을 찾아 볼 수 있어 율곡의 교육사상이 반계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율곡과 같이 학문하기에 먼저 입지를 내세웠으며 실천하고 노력하는 데 전력을 다하면 도는 바로 눈앞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3) 반계 유형원의 교육이념

 

학교제도 비판

반계 유형원 선생이 교육제도 개혁을 구상하게 된 원인을 무엇인지 알아보면 우선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의 교육제도는 첫째, 국가가 직접 설립 유지 경영하고 있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고, 둘째로는 지방관청이 그 경영책임을 맡고 있던 향교(鄕校)가 있었으며, 셋째로는 개인에 의해 운영되던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이와 같은 교육기관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전후해서 크게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초에는 관학(官學)이 국가의 집중적인 지원에 따라 크게 육성되었던 반면, 조선중기 이후에는 관학의 몰락과 함께 사학(私學)이 점차 번성하게 된다. 이것은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형성에 따른 당파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계는 조선시대의 학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편을 주장했다. 반계는 당시 학제의 학풍이 지나치게 문예중심의 경향을 띠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과거제도에 집착된 관리등용에만 치중하여 도에(陶藝)와 학술에 능통한 관리를 양성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기존 학제의 특징과 문제점을 진단하는 것은 반계의 새로운 학제에 대한 개혁의 준거를 제시할 수 있겠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은 국립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최고행정관청이던 의정부(議政府) 산하의 예조(禮曹)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고, 국왕이 양사비(養士費)라는 명목 아래 하사하는 전토, 노비, 미포, 시장(柴場: 땔나무), 금전, 및 서적으로서 운영되었으며, 교직원 또한 관리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향교에 있어서는 그 재정적 기초가 주로 국가에서의 하사한 재산에 의해서였고, 서원(書院)에 있어서도 전토의 면세와 같은 특전이 있어 교육은 장려되었다.

한편 학교 운영을 위한 법령과 법칙을 제정 실시 하였는바, 조선 초기에 제정한 학령은 주로 학생 수업에 관한 법칙으로서, 성균관 수학(修學)의 매일 행사와 독서, 제술강경(製述剛勁), 성적 및 학생의 언행에 과한 상항이 들어 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태학(太學), 사학(四學) 및 향교에 대한 제도가 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본 법규 외에 사목(事目), 절목(節目), 학규(學規), 모범(模範), 규제(規制) 및 학제(學制) 등 학사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 바 우선 각 급 학교별로 그 실태와 비판점은 아래와 같다.

 

-1 성균관(成均館)

당시의 성균관은 학문의 수업에만 주력한 것이 아닌 그 교육 목적이 인재를 길러 백성을 다스릴 국가의 관리를 만들고 동시에 유교가 요구하는 선현을 따르는 선비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엽 이후에는 사색당쟁(四色黨爭)이 유생 간에 치열해짐에 따라 성균관 유생들에게 까지 이러한 폐풍이 반영되어 예전의 강직한 모습은 점차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2 사학(四學)

사학의 체제는 법규에 의하여 갖추어져 있어, 성균관,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 관원으로 하여금 감독을 받게 하였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조선중엽 이후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조선말기에 와서는 수학태도가 해이해지고 학풍이 타락하여 왕 자신이 조()를 내려 그 폐풍을 경계하기에 이르게 된다.

 

-3향교(鄕校)

향교 역시 사학과 같이 임진왜란 이외의 대소 병화와 명종조시기 즉,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던 서원(書院)에 밀려나게 되었고, 향촌내 자체적인 폐단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향교가 쇠퇴한 중요한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의 잦은 병화와 재건할 재력이 부족했으며 서원의 번창으로 그 기능이 위축되었고, 또한 향교 자체 내의 폐단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 때 이후 향교는 유생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잃고 다만 선현을 모시는 문묘(文廟) 제향(祭享)의 기능만을 지닌 채 겨우 그 명맥을 갑오개혁(甲午改革) 후까지 유지하게 하였다.

 

-4 서원(書院)

서원은 남설의 폐가 생겨 숙종때에 와서는 각 읍마다 원사(院祠)가 없는 곳이 없어 한 길에 250을 헤아리는 수까지 난립을 보았다. 서원 소유의 토지가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기회로 하여 그 수입을 무위도식과 주식의 재원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피하는 은거지가 되었고, 유생은 거의 향교를 떠나 서원으로 운집하여 강학수도(講學修道)를 하는 자가 거의 없었으며, 중앙정부의 붕당과 직결하여 조정을 비의(誹議)하고 서민을 괴롭히는 폐해까지 나타났다. 그리하여 숙종이후 사건(私健)의 원사를 철폐시켰으나 정조때에는 원사의 수 합계가 약 650명이 존재하였다.

원사에 대한 처분은 행정상의 일대 난문제로 최근까지 내려왔으나 다행히도 고종때 집정(執政)한 대원군의 수완으로 해결을 보게 되었다.

 

-5 서당(書堂)

봉건제도 하에서의 관존민비사상으로 인해 조선 말기에는 서당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빈약해지고 실질이 저하되어 학풍이 쇠퇴하여졌다. 국가에서는 소수의 인재 양성을 위해 중등과 고등교육기관에만 힘을 기울이고 서당은 전적으로 민간에 방임하여 두었는데, 이것은 국민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삼고 있는 근대국민국가의 정책에 비하면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으로 봉선사회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학교제도의 개선방안

반계는 학교의 효율적인 운영을 제약하고 있는 여러 불합리한 요인들은 과감히 제거하면서 학교제도의 개혁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1 학규(學規)

먼저 스스로의 몸을 닦는 요목을 내세워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좋은 일을 하고 자신의 단점을 고쳐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익보다 정의로움과 도리를 우선으로 가르치고 있다. 사물을 접하는데 있어 자기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맛 것이며, 일이 순리대로 잘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라고 이르고 있다. 성현의 가르치는 학문의 천언(千言) 만어(滿語) 모두 경()과 전()에 갖추어 있어 지극한 말이 아님이 없으므로, 이것이 그 큰 법이고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학문에 임하는 사람이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배울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평상시에는 마땅히 각각 재실에 고요히 앉아서 글을 읽기에 정신을 오로지하고, 의혹한 곳이나 어려운 곳을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는 일이 아니면, 함부로 다른 재실에 넘어가서 피차에 쓸데없는 공담으로 공부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반계는 필기구를 정리하는 습관과 면학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으며, 글씨는 정자로 쓰게 하고 낙서는 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사소한 학교의 생활지도면까지 세세히 지적하여 정신을 통일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2 신학제 구상

반계의 학교제도에 대한 새로운 구상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은 각 학교들이 초등, 중등, 고등의 계열화된 형태로 개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계는 새로운 학제 구상에 있어서 일관성과 단계별로 통일형을 전제한 복선형 학제가 아닌 단선형 교육제도와 취지를 같이 하는 학제를 제시하였다.

반계가 제시한 학교제도 개혁의 각 급 학교는 아래와 같다.

태학(太學), 중학(中學), 사학(四學), 영학(營學), 읍학(邑學)의 형식이다.

 

-3 입학과 진학

반계의 학교제도 개혁안에서 학생의 입학에 관한 규정을 살펴보면, 입학자격에 있어서는 사대부의 자제로서 계속 배우고자 하는 자는 15세가 되었거나, 일반 백성 중에서 제주가 우수한 자로서 15세 이상이 되면 일정한 고사를 실시한 연후에 사학, 읍학에 진학시킨다. 선발고사를 서울에서는 사학의 교관이 담당하고, 외방(外方)에서는 수령과 교관이 담당하는데, 학생의 결원에 따라 매년 춘추 2회에 걸쳐 입학절차를 밟도록 한다.

이에 대한 유의사항을 알아보면, 첫째로는 지방 향학(鄕學)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방식은 수령과 교관이 당사자의 덕행과 실력을 고사해서 어질고 뛰어난 자를 식별, 천거하는데 향당(鄕黨)과 학교의 중의에 따라 신중하게 관찰해서 결정한다. 그 기준은 반드시 행실이 향리에 나타나고, 학문과 경술(經術)에 밝고, 재능이 일을 맡길만한 자로 하며, 먼저 여러 사람의 공론 위에, 학교책임자들의 판별에 위임해야 한다.

둘째로는 중학, 영학에의 천거도 학생의 덕행실력을 살펴 명백히 쓰고, 규정되 양식에 의거 천거장을 읍학은 영학으로, 사학은 중학으로 상신한다. 각급 학교의 학생정원수는 중앙과 지방, 혹은 지방과 지방 사이의 차별을 두지 않고 지역의 호구수에 ㄸㆍ라 조정했다. 다음은 반계가 규정한 각 학교의 정원수이다.

 

-4 교관정책

반계의 교관정책은, 첫째로 교관의 경제적인 대우에 관한 것이었다. 교사의 우대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다. 즉 교관들에게 일정한 녹봉을 지급함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여 교육에 전념하도록 하자는 껏이었다. 이는 종전의 관념적, 명분적, 장학론을 극복한 구체적인 양출위입(量出爲入)이라는 무계획 재정의 허구적 구상이 아니라, 구체적 수입을 토대로 한 교육재정의 확보와 계획적 지출에서 출발되야 한다는 뚜렷한 교육재정 운영의 한 측면을 엿보게 된다.

둘째로 교관의 예우에 관한 측면이다. 반계는 지방의 관리들이 학문의 발전에 힘써야 한다는 면도 있지만 교관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함으로써, 사회적인 예우를 하여 교육자들의 위상을 높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로 교관의 자질 및 지위에 관한 측면이다. 교관은 덕행과 학업을 겸비하여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교관의 자질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교수들의 지위와 수령들의 지위간의 차이를 좁힘으로써 역시 향교의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넷째로 교간들의 생활안정과 인사문제에 관한 측면이다. 당시 교관들의 입지에 부임할 때에는 혼자 가는 경우가 많아 생활의 불안정으로 교육에 전념하지 못하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반계는 가족과 더불어 거주케 해서 교관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함으로써 교육에 더욱 충실하도록 하였다. 반계가 과거 합격을 지량하는 교육이 아닌 성리학적, 도덕적 인격을 갖춘 사람을 양성하는데 교육목표를 설정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로 교관들의 학교 운영에 관한 측면이다. 반계는 교관 이외에도 훌륭한 인물들을 초빙하여 유생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였다. 또한 관광법을 제정하여 일반 사람들도 학교를 관람하게 하여 풍속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과거제도 비판

조선시대 과거에는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의 네 종류가 있었다. 이러한 과거는 3년에 한번 자(), (), (), 유년(酉年)에 정기적으로 열린 시험으로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밖에 수시로 열린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초기에 설정한 취지와 다르게 시험기강의 해이와 관료 정원을 무시한 과다한 선발로 인해 과거의 본래 목적이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 글짓기와 잔재주로서 사장(詞章)만을 보았기에 임관된 뒤에 실무는 소리(小吏)에게 맡기는 폐단이 생기는 점을 반계수록에서 지적 하였다.

 

과거제도의 개선방안

 

-1 공거제(貢擧制)의 도입

반계 선생의 공거제란 과거제도의 인재등용방식에 대한 새로운 개혁의 구상이며 그 구상은 다음과 같다. 하급학교 학생중 우수한 학생을 천거하여 상급학교에 보내고, 그 상급학교에서 또 천거해 그의 상급학교인 태학에 보내어 국가의 고급관원을 양성하는 제도이니 교선지제는 이것을 이상으로 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예기(禮記)의 제도를 모방한 인재등용방식이다. 반계는 학교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향상, 방상에서부터 최고학부인 태학에 이르기까지 계열화, 체계화하여 상급학교의 진학, 관리등용 등을 연대 보증하여 천거하도록 했다.

반계 선생이 구상한 인재의 추천과 관리등용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향교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방식은 중앙에서는 사학의 교관의 장과 이관, 외방에서는 수령과 교관이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사하여 어진이와 능한이를 가린다.

덕행이 있는 자를 현()이라 하고 도예가 있는자를 능()이라 한다.

또 반계 선생은 공거제의 천거 단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덕행, 도예의 실력을 논하고 명백히 기술하여 양식에 의하여 천거장을 만들며 중앙의 사학은 중학에 올리고 각주현학(各州縣學)은 영학에 올린다.

 

-2 천거자의 검토

매년 가을에 태학의 책임자들이 태학 재학생의 덕행과 실력을 고사하여 현자, 능자를 가려서 조정에 천거하며, 조정에 추천된 자는 왕이 대신에게 명령해서 공향(公鄕), 대관(臺官), 시종(侍從)의 관원들과 더불어 대청 안에서 강독함을 고사해서 진사원(進士院)에 추천되면 당직을 시켜 왕의 소대(召對)에 응하게 하여 그 실력을 자세히 살펴보아 만약 학업이 밝지 못하고 행실이 올바로 닦이지 못해서 재능이 쓰일 수 없는 자는 벌하여 물리치고 태학의 책임자를 처벌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령과 교관이 천거하는 것을 아니한 자는 여죄로 파면시키고, 만약 온 고을에 인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학교가 흥성하지 못함이니, 그러한 수령과 교관의 성적은 모두 중, 상등 이상의 평점을 매기지 못하며 만약 뛰어난 인재가 있는 것을 가리워 버린 경우는 달리 폐현(蔽賢)한 죄로서 처벌토록 하였다. 또한 사람을 그릇 천거한 자는 그 벼슬을 파면시키고 그 사사로운 뜻을 쫒아서 일부러 옳지 못한 자를 천거한 자는 나라를 기만한 죄로서 다스리도록 하게하였다.


-3 공거제의 성격과 특징

공거제에 나타난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선 공거제는 인재등용의 기반이 학교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인재의 양성과 선발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과업을 통한 인재의 선발보다는 수학에 의한 인재의 양성이 공거제에서 더욱 중요시 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각 지방의 공정한 대우와 이군비례에 의한 이재선발을 의도하고 있다. 사실 조선시대 과거의 합격자는 주로 서울과 몇몇 지방출신이 대부분이며 특정 지방 인물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관료 진출의 길이 막혀 있었다. 또한 정기 시험인 식년시보다 더욱 빈번하게 시행되는 부정기 시험은 당시의 여러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중앙의 선비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셋째로 공거제는 인재선발에 있어서 책임소재를 명백히 하고 있다. 공거제에서는 천거한 자가 피천자를 보증하여 연대책임을 지우도록 하여 제도시행에서 파생될 수 있는 부정을 최소화 하려고 하였다.

넷째로 공거제는 인재선발에 있어서 능력과 개방주의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계는 공정성을 보장하는 학교 교육을 통하여 양성되는 인재를 중심으로 인재가 등용되어야 하고 음서(蔭敍)제도나 서경제도와 같은 귀속성을 준거로 하는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다고 주장 한다.

반계 선생이 주장하는 공거제의 특징은 다음의 세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공거제는 과거제보다 오랜 기간을 두고 선발한다는 점에서 요행이 적다는 것이다. 반계는 공거제에 따른 관리용의 주된 방식을 각 학교마다의 계속적인 평가와 공론에 따른 천거를 들고 있다.

둘째로 공거제는 무엇보다도 연대 책임이 중요시되므로 설혹 부정이 있다 하여도 과거제보다는 훨씬 좋은 제도이다. 반계는 과거제의 고시관에 대한 사사로움과 응시자의 요행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지적하였다.

셋째로 공거제에 따른 관리 임용에 있어 신분 타파의 의지이다. 물론 사학과 읍학에서 지적했듯이 반계는 특수 계층의대한 학교 입학에 제한을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과 관직의 기회는 신분에 따른 법제적 차별뿐만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도 큰 이유가 있었다.

 

-4 공거제의 한계

공거제의 한계는 첫째로 조선사회의 개혁의지와 저력에 대한 한계이다. 당시의 사회는 양대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되었다. 또한 당쟁으로 사회는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 극심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공거제와 같은 새로운 구상은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반계의 학제개혁에서 각 학제가 계열화된 것은 형식에 있어서 근대적 학제를 반영한 것이라 하여도 교육과정의 세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 근대적 학제라 함은 상호 계열화된 학제의 구성과 국가지원 내지는 국가 통제의 교육이다. 반계는 방상과 향상에서부터 태학까지 학제를 계열화시킴으로서 학제에 대한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고, 철저한 국가 지원 내지는 국가통제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형식의 계열화에 따른 교육과정의 세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셋째로 꼭 학교에서의 수학이 관리 등용에만 한정되어 그것만이 출세의 지표가 되었는지 아쉬움이 있다. 학문이 학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치인의 학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는 것이 한계라 할 것이다.

 

(4) 반계 유형원이 주장한 토지제도

반계 선생의 토지 제도론은 당시의 토지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입각하고 있다. 즉 당시 조선조 정치 체제가 지향하였던 유교적 도적국가를 반계 선생 자신도 이념적으로는 긍정하고 있었으나, 체제 운영에 있어서 많은 모순을 지닌 채 지속되어가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반계 선생은 정치 체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 주자학적인 도학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체제를 논의하며, 정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청(人淸)에 대한 파악으로부터 제도론의 근거를 이끌어 내고 있다. 반계 선생의 체제론은 도덕 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 제도론에 있어서는 백성이 항산성에 바탕을 둔 경제적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경제 조직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 기반 위에 정치 사회의 조직을 구축하려는 정치 체제론을 구상한다.

 

토지 제도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반계 선생은 체제론의 단계에서, 백성의 항산론에 대한 착안으로부터 그의 제도론의 근거를 이끌어 내고 있으며, 이념의 면에 있어서는 주자학적인 도학주의의 원리인 도덕 사회를 이루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 사회에서의 도덕 사회를 지향한 농본주의적인 경제 체제를 그의 경제 체제를 그의 경제 조직론의 기반으로 살고 있다.

반계선생은 육등분전(六等分田)에 대해 6등급이 너무 불공평하게 되므로, 백성의 경제 생활을 균등히 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제도론의 비판으로부터 반계 선생은 고대 정전법이야말로 백성의 항업을 지탱할 수 있는 모법적인 제도라고 하여, 이상적인 제도론의 근거를 정전법에서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대에 맞는 제도론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이는 고대의 정전법의 제도는 고대 중국에서의 봉건 체제 아래에서 행해질 수 있는 제도이며, 당시 조선에서와 같은 유교적 사민론적(四民論的) 체제 아래에서는 제도가 행할 수 없는 바가 있으므로, 정전법의 내용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고, 제도를 살펴보아 행해질 수 있는 제도론을 설명하고 제도의 이상을 정전법에서 구하는 것이다. 반계 선생은 우선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해야 공평하고 모든 일이 분수를 얻을 수 있다 하여 공전제(公田制)를 실시할 것을 설명한다. 공전으로 한다는 원칙 하에 첫째로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하여 신분 및 신분 내부에 있어서의 품계와 직종에 따라서 토지를 분급할 것과, 둘째로 분급된 토지의 세습이라든가 그 이상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지 아니함을 원칙으로 하며, 셋째로는 세솔(稅率)은 분급된 토지의 수확량의 1/20로 하며, 국가의 지출에 있어서도 정규의 세입만으로 충당하고 그 외의 부과를 없앤다. 넷째로는 중간착취를 막기 위해 토지를 구획하는 단위로서 종래의 결부법을 폐지하고 경묘법을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백성의 경제적 생활을 동일시 하기 위해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9등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다.

 

경제적 분업론

반계 선생의 경제 사회 조직은 사민론적 체제에 입각하고 있다. 반계 선생은 사민에 관하여 사람은 모두 하늘이 내신 천민(天民)으로서 하늘이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을 내었다.” 고 언급한다. 즉 반계는 백성에 대한 관념을 하늘이 내신 천민(天民)이라는 발상에 입각하고 있으며, 천민(天民)을 사민으로 파악해 사농공상이라는 분업체계를 소여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반계는 사민의 항업을 기초로 하는 사회관은 언급하며, 토지제도를 기초로 사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양을 조절하는 방법에 의하여 항업을 갖도록 하였다. 농민 1인에게 토지 1경을 급여하는 걸 기준으로 하여 토지와 상공에 대한 토지의 분배량을 조절한다. 먼저 산업에 종사하는 농, 상공에 관하여 보면, 상공의 업은 농업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산업에 필요한 것이라고 인식하나 농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공, 상업을 장려할 것을 설명하여, , 상의 업을 갖는 백성에게는 농민에게 급전하는 토지의 분배량의 1/2을 급전할 것과, , 상업을 갖는 백성의 수를 조절할 것을 설명 한다. 이와 같이 사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양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사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반계는 사민 중 산업에 종사하는 농, 공상을 노력자(勞力者) 층이라,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선비를 노심자(勞心者) 층이라 구분하여 사회 분업론에 입각한 경제조직을 설명한다.

 

사회관

반계는 이와 같은 경제조직을 기초로 하여 정치 사회론에서는 사민을 근본으로 하는 직분 사회론을 설명한다. 따라서 이러한 직분은 사회 분업론에 근거하며, 지배복종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통치자 층과 피통치자층으로 구분하였다. 통치자층이 있음이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하였고, 통치자 층의 구분을 합리화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복종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를 언급하면서, 통치의 주체인 통치자층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뜻을 둔 학문을 하는 직분이라고 하였다. 통치규범의 단계에 있어서는 []에 입각한 통치론을 설명하여 정치 사회에서 예용을 이루고자 하였다. 반계 선생은 이러한 실덕과 예에 입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통치자층을 선별하는데 잇어 [현능지실]을 갖춘 인재를 공거제(公車制)에 의하여 선발할 것을 설명한다. 이와 같이 반계 선생의 정치 사회론은 경제 제도를 기초로 하여 실덕, 예용에 입각한 도덕사회를 이루고자 하고 있다. 또 반계 선생의 직분론은 천지의 사이에 스스로 있는 이치와 형세를 살펴보고, 이를 정치 사회에 얻을 수 없이 있게 되는 [불양지리][불양지세]라 하여 이에 입각한 직분 사회를 설명하며, 또한 그가 살펴본 천지화육의 이치를 정치사회에서 명분이라는 이념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5) 민본주의

반계 선생은 율곡 이이의 제도 개혁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민본주의를 객관적 규범의 차원에서 전개시켰다. 주자학의 정치적 이념인 도덕적 가치의 실현을 계승하여 정치의 목표를 도덕국가의 실현에 두었지만,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긍정하여 인간을 외부에서 규제하는 객관적 규범에 유의해 정치제도론의 차원에서 민본주의를 전개시킨다. 먼저 제도론을 밑받침해 주는 철학적 기초를 살펴보고 제도론과 민본주의적 정치이념인 항업과 예악흥행론을 고찰했다. 반계 선생에게 있어서 정치의 목적은 도덕국가의 실현이었다. 하지만 이는 백성의 경제적 안정이 전제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양민(養民)을 지도자의 첫 번째 과제로 보았다. 양민을 이루고서는 교민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반계의 이런 선양민 후교민 사상은 맹자에서 출발하였고 한국에서는 율곡 이이가 먼저 제시했었다.

반계 선생은 민생안정의 근본을 토지제도에 있다고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공전(公田)을 실시하면 빈부의 차가 바로 잡히고, 호구(戶口)가 스스로 분명해지며 군오(軍伍)가 바로잡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한 후에 교화를 행하고 예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고 이렇지 아니하면 대본(大本)이 문란해질 것이라 하였다. 즉 반계 선생은 교민을 위해서 공전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계의 주장은 인간의 욕망을 밖으로부터 규제하는 제도나 객관적 규범에 의해 정치사회 질서를 확립하려는 정치적 사고의 영역이 있으면서도, 또 퇴계 이황이 확립한 인간의 내면의 규범을 기초로 하여 정치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교화 주의적 정치사고가 계승되고 있었다.

 

3. 결론

호남의 실학사상은 민본주의적이면서, 토지에 대한 개혁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호남의 지형적 특징을 본다면 알 수 있는데, 호남지역은 산보다 평야가 많아 논이 많았었다. 그만큼 수탈이 심하였고, 호남의 넓은 토지 중 대부분은 백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호남지역에서 은거하던 재야 지식인층들은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백성을 위하면서 토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조사한 반계 유형원 선생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고 위와 같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반계 유형원 선생이 태어났던 17세기의 조선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양 난으로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던 시기이다. 또 이 시기의 비판적 재야 지식인들은 성리학의 공론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학을 주장하였다. 반계 선생도 이러한 재야 지식인중 한명으로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 했었다. 우선 교육에서는 각 개인에 따라서 얼마든지 교육의 기회를 개방해 주자고 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획기적인 개혁이었고 백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상을 볼 수 있다. 또 교육을 주도하는 교사를 엄격히 하면서도 경제적, 사회적 신분을 보장해주면 학교가 잘 돌아갈 수 있고 이렇게 된다면 백성과 교화되어 나라가 발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학교제도 뿐만 아니라 과거제도에 대한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반계 선생은 과거제도의 대안으로 공거제를 제시하였고, 이는 인재등용과 학교제도를 연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계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적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1차적으로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할 정도로 백성의 안정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이는 그의 가 주장한 균전제(均田制)에서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반계 선생은 백성들과의 교화를 통한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실학자들 대부분이 재야의 지식인이었기에 위와 같은 개혁안은 국가의 정책이 될 수 없었고, 중앙 권력층은 이룰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학의 사상은 조선의 근대화 이후 개화파에게 계승되어 개화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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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정, 「반계 유형원의 전문교육개혁안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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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숙, 「實學에서의 民本主義 : 磻溪, 星湖, 茶山을 中心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