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과 정자의 건축 양식

 

20115205 이미영

20110184 김창민

20133016 임상민

 

 

-목 차-

 

1. 서론

 

2. 누각과 정자 건립 배경

1) 정자와 누각 건립자

2) 누각의 건축양식

3) 정자의 건축양식

3. 누각 종류와 특성

1) 남원 광한루

2) 무주 한풍루

3) 밀양 영남루

4. 정자의 종류와 특성

1) 담양 척서정

2) 담양 송강정

 

5. 결론

 

참고문헌

 

 

 

1. 서 론

누각과 정자는 선비들이나 유한계급이 설립하여 이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시를 읊으면서 시국을 담론하고 울분을 털어놓기도 하며 서로를 달래는 양반계층의 사교의 장이 되었다. 누각과 정자는 일반적으로 산수가 좋은 곳에 설치하여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즐기고, 씨족의 종회나 촌락의 각종 계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활쏘기의 수련장이나 성의 문류나 조망대 구실을 하 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던 전남지방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정권의 소외지역으로 지방민의 불만과 울분이 쌓여 왔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건국으로 넘어가는 격변기에도 이 지방은 현실의 부귀영화에 타협하지 않는 은둔의 선비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또한 조선 초에 태종의 살육과 세조의 찬탈 및 무단독재가 자행되자 정의롭기 충성되게 살아가려는 뜻있는 선비들을 이 땅에 은둔하게 하였고, 누정을 짓고 살면서 분을 토로하고 한을 달래게 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여러 차례의 사화와 당쟁의 시기에 정의를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사림들이 이 지방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의 사교장이요 안식처인 정자와 누각이 많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자와 누각의 여러 모습은 전통문화의 이해와 우리의 문화유산을 새롭게 인식하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2. 누각과 정자 건립배경

 

1) 정자와 누각 건립자

정자 건립자의 중수기”, “중건기”, “상량문”, “시문등 문헌 해석을 통해 정자의 건립배경을 확인 할 수 있다. 남부지방 정자의 건립 배경은 첫 번째, 학문을 닦고 연구하기 위한 배경으로 후학을 양성하거나 자신과 주변 인문들의 학문적 수양을 위해 지은 것이고, 두 번째는 조상이나 스승 선인등 인물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세 번 것으로, 이웃이나 친구들이 모여 휴식하거나 마을의 일을 의논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시를 읊고 즐기려는 목적을 갖는 것으로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러한 건립배경들은 강학”, “추모”, “풍류, 단독적인 배경으로 정자가 지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강학-추모-풍류”, “기거-교류-풍류”, “강학-기거등 복합적인 목적으로 정자가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누각의 건축형태는 사료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누정조에서 전하는 기문(記文)과 시문(時文)의 내용은 건축과 관련성이 적은 당대의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대상을 기술함에 있어 형태에 관한 내용은 단편적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많은 기문과 시문들 중 건물의 형태에 관하여 전하는 사례는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누정조에서 일루로 나타나는 건물들은 고을 수령에 의해 건립된 누각 건물로 증층으로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높고 넓다고 전하는 사례가 자주 나타나는데 기본적으로 누각의 상부 공간은 대형 규모로 구성된 건물로 보여 지고 있다. 누각의 평면 규모는 대부분 세 칸과 다섯 칸으로 말하고 있는데 규모를 나타내는 칸수는 정면 칸수만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 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문루에 해당하는 것이 상당수였고 이 중 순수한 접객과 연회를 위한 누각은 적은 수였으며, 대부분이 칸수는 다섯 칸으로 나타난다. 산수가 좋은 곳에 설치하여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즐기고, 씨족의 종회나 촌락의 각종 계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활쏘기의 수련장이나 성의 문류나 조망대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던 전남지방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정권의 소외지역으로 지방민의 불만과 울분이 쌓여 왔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건국으로 넘어가는 격변기에도 이 지방은 현실의 부귀영화에 타협하지 않는 은둔의 선비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또한 조선 초에 태종의 살육과 세조의 찬탈 및 무단독재가 자행되자 정의롭기 충성되게 살아가려는 뜻있는 선비들을 이 땅에 은둔하게 하였고, 정자와 누정을 짓고 살면서 분을 토로하고 한을 달래게 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여러 차례의 사화와 당쟁의 시기에 정의를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사림들이 이 지방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의 사교장이요 안식처인 정자와 누각이 많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자와 누각의 여러 모습은 전통문화의 이해와 우리의 문화유산을 새롭게 인식하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2) 누각의 건축양식

누각의 건축형태는 사료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전하는 기문(記文)과 시문(時文)의 내용은 건축과 관련성이 적은 당대의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대상을 기술함에 있어 형태에 관한 내용은 단편적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많은 기문과 시문들 중 건물의 형태에 관하여 전하는 사례는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누정조에서 일루로 나타나는 건물들은 고을 수령에 의해 건립된 관아의 누각 건물로 증층으로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높고 넓다고 전하는 사례가 자주 나타나는데 기본적으로 관아 누각의 상부 공간은 대형 규모로 구성된 건물로 보여 지고 있다. 관아 누각의 평면 규모는 대부분 세 칸과 다섯 칸으로 말하고 있는데 규모를 나타내는 칸수는 정면 칸수만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 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문루에 해당하는 것이 상당수였고 이 중 순수한 접객과 연회를 위한 누각은 적은 수였으며, 대부분이 칸수는 다섯 칸으로 나타난다. 세부 수법으로 난간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난간은 추락을 방지하여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으로서 돌출된 형태로 나타나 공간의 확장으로 개방감을 준 것이다. 특히 영천군 명원루에 관한 서거정의 기문에서 구부러진 난간이라고 말하고 있어 이는 계자난간의 계자작 형태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3) 정자의 건축양식

정자는 평면형태에 따른 유형 분류와 평면구성”(-마루의 구성 방법)에 따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평면 형태는 정자의 평면을 방형장방형”, “긴장방형으로 분류한 방법으로, 방형은 정면과 측면 비율이 약 1:1인 유형이고, 장방형은 정면과 측면이 약 3:2의 비율로 보이는 유형, 긴장방형은 정면과 측면이 약 4:2의 비율로 보이는 유형이다. 전라남도는 총 38개소 중, “장방형의 정자가 전체의 절반이 넘는 20개소, “긴장방형” 10개소, “방형” 5개소로 많은 분포를 보인다. 평면구성은 방과 마루의 구성방법에 따른 분류로서, 장방형 평면의 방과 마루의 위치 관계를 기준으로 분류한 방법이다. 크게 무실형유실형”, “특수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이중 유실형을 다섯 분류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 “배면형정자는 정자의 배면에 방이 길게 위치하고 정면으로 마루가 위치한 정자이고, 두 번째,“측면형정자는 방의 한쪽 측면으로 방이 위치하고 마루가 반대쪽 측면으로 위치한 정자이다. 세 번째, 중앙형은 정자의 중앙에 방이 위치하고 마루가 방을 두른 형태의 정자이고, 네 번째 분리형은 정자의 중아에 마루가 위치하고, 좌우로 방을 둔 정자의 유형이다. 마지막 무실형은 방이 없이 마루로만 구성된 정자이다.

 

3. 누각과 종류와 특성

 

1) 남원 광한루

광한루는 신선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광한루원 내에 누원의 경관을 감상하기 조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춘향전이 배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열녀 춘향의 정신을 민족정서로 승화시켜 후세에 기다리고 있다. 주변에는 요천이 흐르고 있고, 공원 내에는 춘향사당 ,월매집 ,완월정 , 영주각 , 삼신각을 비롯한 여러 누각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춘향제, 칠월칠석 축제 등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고, 가까운 거리에 충향 테마파크와 남원 관광단지 등이 위치하고 있다. 1418년에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창건하여 광통루라 이름 지은 것을 1434년 남원 부사 민여공에 의해 증축 되었다.1444년 관찰사 정인지가 경치가 아름다워 월궁 속에 있는 광한청허부와 같다하여 광한루라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소 된 것을 1626년 부사 신감에 의해 개축되었고,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광한루는 정면 5, 측면 4칸에 1고주 7량가의 장대한 규모로 이루어져 있고 정조 때 증측된 정면 3간 측면 2칸의 익루가 있고, 본루의 후면 중앙 칸에는 누에 오르기 위한 정면 1칸 측면 3칸의 승강계단채가 멋 달아져 있다.직사각형으로 가공된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 받침을 놓고 누하주를 세웠는데, 누하주의 형태는 외진주 열의 정면과 네 귀는 방형 석주를, 나머지 삼면은 원형의 동바리 초석위에 목재 동바리 기둥을, 내진주는 목재 두리기둥을 세웠다. 누하주 상부로 청방과 귀틀을 결구하여 우물마루를 구성하고, 마루 위로 퇴를 둘러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누상부는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평주와 내진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종보와 종보를 받치고, 종량 위에 파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주간의 창방과 주심장혀 사이에는 파련형 화반을 얹고, 공포는 1출목 2익공의 구조다. 천정은 연등천정과 창호는 머름위에 안쪽으로 들어 걸 수 있게 사분합 띠살창을 설치하였고, 띠살창 위로는 교창을 설치해 놓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네 모서리에 활주를 세워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 익루는 첨차의 마구리에 도깨비와 동물들의 얼굴을 조각한 초익공의 구조로 지붕의 형태는 본루와 단 차이를 두어 팔작지붕으로 마감하였고, 방 내부는 2칸 의 온돌방을 만들었다. 광한루는 소설 춘향전의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다. 춘향전은 춘향과 성 이성 등 실존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사나 설화가 가미돼 집필된 소설이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은 실존인물이다. 다만 성이 이씨가 아닌 성씨였다. 인조시대 호남 암행어사 성이성은 순천에 출두해 암행을 끝내고 남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눈보라가 심해 앞을 분별하기 힘든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한루로 나갔다. 이곳에서 성이성은 늙은 기생 여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소년 시절을 생각하며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춘향은 159648일 태어나 17세기에 사망한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인물이며 춘향의 연인 이 도령 역시 본래이름은 성 이성(1595~1664)으로 실존인물이다. 성이성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부용당 성안의의 아들로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같은 또래의 기생 춘향을 사귀었다.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남원을 떠나야했다. 남원 광한루 안에 있는 성안의 부사의 송덕비는 이몽룡 실존 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다. 당시 유교 양반사회의 특성상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춘향전에서는 성 이성을 이 도령 이라는 인물로 바꾸었다.

 

2) 무주 한풍루

현재 무주 공설운동장 옆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으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객관의 앞에 있었다고 한다. 건립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위 기록으로 이루어 보아 조선시대 초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599(선조 32)에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으며, 1783년 현감 임증원이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시대 영동군 양산 강변으로 옮겨져 불교와 관련된 장소로 사용되 금호루로 불려졌고, 이 후에 1971년 무주 사람들이 다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오량가 팔작지붕이다. 강회다짐 기단에 경계석을 두르고 사각형의 가공초석을 놓고 민흘림 원기둥을 세워 하부 공가능을 구성하였다. 누하주 상부는 귀틀 청방과 결구하여 귀틀을 시설하였고, 누상부는 우물마루를 구성하여 계자난간을 부르고 귀틀 상부에 누상주를 세웠다. 평면은 누 상부가 정면 3,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는데, 누하부는 측면의 주간에 기둥을 하나씩 더 세워 정면 3, 측면 4칸이다. 기둥 상부에는 쇠서형 이익공으로 구성하여 대들보를 걸고 측면의 층량을 올려 종보와 증도리를 올려 오량가로 구성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어칸의 종보 상부로는 우물반자를 시설하였다.

무주 한풍루는 호남에서 전주 한벽당, 남원 광한루와 함께 호남의 3목으로 유명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3) 밀양 영남루

1931년 조선총독부에서 선정한 조선 16경 중 하나로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루로 알려져 있다.옛 밀양 읍 성터로서 밀양강변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천진, , 아랑각, 밀양시립박물관 등과 인접해 있다. 영남루는 고려시대 영남사에 부속되었던 누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1174년 영남사의 죽루에 임춘의 영남사죽루라는 시문이 전함에 따라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1365년 고려 말 김주가 영남사의 부속 누각을 개칭하여 영남루라 명명한 후 조선 개국 초 밀양 부사 안질이 본루를 중수하였다. 임진왜란(1592)1834년의 대규모 화재로 소실되는 등 수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44년 밀양 부사 양인재에 의해 개창하여 조선 후기의 객사 부속건물로서 일출목 삼익공 양식의 세부적인 수법을 지니고 있다. 건축형태는 정면 5, 측면 4칸의 본루와 승강계단채로 누각 사이의 통로를 지형의 높낮이에 맞게 연결된 침류당이 있다. 본루는 2고주 7량가의 대형 누각 건물로 툇간을 제외하면 무고주 5량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약간의 흘림이 있는 원주를 누하주로 세웠다. 어간에는 누상으로 출입이 가능한 목조계단을 시설하여 진입할 수 있게 하였고, 상층은 우물마루를 구성하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두리기둥을 세워 일출목 삼익공을 짜서 퇴량을 받고 있다. 주간의 창방 상부에 놓인 화반은 초각이 정교하다. 양 측면의 중앙에는 기둥상부와 대들보의 높이차를 배려한 우미량을 가설하여 우미량 상부에만 외기반자를 구성하였다. 일반적인 대형 누각 건물과 같이 연등천장으로 상부 가구를 개방하였고, 부연을 달아 겹처마를 구성한 팔작지붕이다.

 

4) 구례 운조루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혜사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자형 사랑채, 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집을 지 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칸 집이었다. 화재와 세월로 인한 유실, 필요한 의한 복구와 증축 등의 과정이 있었다.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다.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운조루' 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 사랑채 이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다.

운조루의 평면 형태는 본채인 ''에 사랑채가 서측과 남측으로 곁달린 형태이다. 이렇게 ''자집에 사랑채를 곁달린 형식은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안동의 충효당과 양진당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사랑채가 독립되어 나오는 것은 남녀의 규율이 더욱 엄격해지고 제례시 손님 접객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필요함에서 발달된 것으로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이해가 더 깊어지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운조루의 사랑은 서측의 큰 사랑채와 남측의 중간사랑채로 나누어져 있다. 그전에는 중간사랑 아래도 작은사랑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사랑채가 많이 있는 것은 당시의 대가족제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큰 사랑채는 중간에 사랑대청을 놓고 좌우로 온돌방과 누마루를 두었는데 특이한 것은 후면에 마루방을 별도로 두고 그 뒤로 온돌방을 하나 더 두었다. 이곳은 본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한 서고와 공부하는 글방으로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독립적인 공간이다. 운조루의 안채는 사랑채와 사이에 있는 중문간을 통하여 진입할 수 있다. 안방 위에는 골방이 있고 그 위로는 다락을 두었는데, 좌측채와 우측채 모두 상부에 다락이 있다 이렇게 다락을 두어 층을 구성하는 수법은 경북의 예천권씨종가나 의성김씨종가처럼 역시 경상북도 가옥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서측채 다락은 사랑뒷마당으로 오를 수 있는데 남단 벽에는 원래 가로로 누워진 띠살 들창문이 달려 있어서 과거 남성들에 의해 통제된 젊은 여성들이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주인의 어린 시절만 해도마을 앞 조망을 즐기는 놀이공간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붙박이창 하나만 붙어 있다. 동측채 다락은 안채주인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건넌방을 통하여 오를 수 있고 안채 안쪽으로 계단과 쪽마루가 있어 부엌에서 다락으로 음식을 나를 수 있도록 하였다. 가옥의 멋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가 입면의 장식이다. 입면은 외부로 직접 보이는 부분으로 건축주의 성향과 미감에 따라 장식에 차이가 있다. 사람의 인체와 대별하여 보면 운조루의 경우에도 다리에 해당하는 기단부와 몸통에 해당하는 벽체부, 머리에 해당하는 지붕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기단부를 보면 큰 사랑채는 막돌을 허튼층으로 쌓은 외벌대 기단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상부하중을 받도록 하였다. 기단의 중앙부에는 6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놓았다. 초석은 모두 부정형의 자연석을 사용하였지만 사랑채 앞의 쪽마루 하부초석과 활주초석은 화강석을 팔각으로 하여 멋을 내었다. 중간사랑채는 대지경사를 적절히 이용하여 입면구성을 하였는데 경사의 방향에 직각으로 세워져 제일 아래의 마루는 자연스럽게 누마루가 되었다. 이렇게 운조루의 머리에 해당하는 큰사랑 마루와 날개에 해당하는 중간사랑 마루를 누형식으로 함으로 마치 공중에 떠서 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운조루에서 특이한 것은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굴뚝을 별도로 두지 않고 전면 기단에서 연기가 배출되도록 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설계라고 하니 당시 사대부의 인품을 느낄수 있는 부분이다. 운조루의 벽체부를 이루는 기둥의 단면형태를 보면 큰 사랑채는 모두 원기둥으로 되어있고 중간사랑채를 비롯하여 안채는 모두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이는 운조루 솟을대문 앞의 연못과 같이 당시 천원지방과 연계된 건축관으로 가장 높은 어른이 거하는 큰사랑만 위계를 달리하여 원기둥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각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안채의 경우 대청마루 2칸을 이루는 정면 기둥 3개만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역시 가옥내에서 안주인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벽체는 기과 기 사이에 인방을 두고 여기에 중깃과 가새를 설치한 다음 눌외와 설외를 다시 엮고 흙을 안팎으로 맞쳐 바른 후 미장하여 마감하였다. 창호는 모두 띠살 창호를 설치하였다. 큰사랑채의 경우 가로 띠살이 위로부터 5-6-5로 되어있으며, 대청입면에는 상부에 정자살창을 설치하였다. 중간사랑채의 경우 가로 띠살이 4-5-4로 설치하여 역시 위계의 차이를 두었는데 누마루가 있는 귀래정 남측 창호의 경우 상부에는 띠살을 두지 않고 중간과 하부에만 띠살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남측 창호 중 하나가 후대 보수과정에서 잘못 설치되어 거꾸로 달려있는데 추후 재정비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큰사랑채의 누마루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하였다. 난간동자를 계자각으로 하고 그 위에 하엽무늬의 두겁받침을 두고 그 위에 원형의 난간두겁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큰사랑채의 서측에만 합각을 둔 팔작지붕형태이며, 중간사랑채에서 남측에만 우진각지붕으로 하였다. 그 외에는 모두 맞배지붕이 기본이다. 운조루의 가구는 사랑채의 경우 모두 3량의 가구를 지니고 있으며, 안채만 5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사랑채의 경우 평주 위에 대들보와 납도리를 결구한 후 대들보 중간에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설치하여 가구를 이루었는데 눈여겨봐야할 것은 대청과 같이 상부가 개방되는 곳에는 연등천장으로 하고 대공 없이 크게 휘어진 곡량을 대량으로 하였다. 안채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대보와 종보를 놓고 5량가를 하는 방법과 다르게 약간의 곡이 있는 대보만 놓고 5량을 구성하였다. 연목 역시 중도리에서 종도리까지 단연을 별도로 사용하지 않고 장연만을 이용하여 구성한 2가연 가옥이다. 이러한 수법에 대해 누다락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특이한 의장수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4. 정자의 종류와 특성

 

1) 담양 척서정

담양 척서정(滌暑亭)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정자로 창건연대가 비교적 앞서는 마을내부의 무실(無室) 정자로 교류와 교육공간이며, 건축적 측면에서 보면 3칸 규모의 팔작집으로 충량을 비롯한 덤벙 주초나 원주 및 선자연 등의 결구방법과 자연스러움을 살린 부재 사용 등 고격(古格)을 갖추고 있다.
담양 척서정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정자들이 선비들에 시문학과 원림문화의 본거지로 기능하면서 대부분 강변 등의 경승지에 위치하는데 반하여, 척서정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있어 일종의 종회소 겸 교류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다른 정자들과 대별되는 특징이라 하겠다. 사회문화의 변화에 따른 미세한 변형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원 기둥을 그대로 두고 덧대어서 수리하는 등 원형 보존에 애쓴 흔적이 있다. 특히, 입지나 성격이 지역문화의 교류 및 교육의 장으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공간과 연계해 볼 때 고유한 향토 문화적 공간의 보존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척서정은 남향으로 자리하는데 정면 3, 측면 2, 8작 지붕형태의 무실형 정자이다. 한단의 낮은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원주 위에는 보아지와 단여를 십자형으로 걸치고 그 위에 대량과 납도리를 얹었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주두와 소로, 장혀 등은 보이지 않으며, 대량 위에는 판대공을 얹고 종도리를 걸쳤다. 양 측칸의 충량은 안쪽은 대량에 걸고 바깥쪽은 평주와 결구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여러 곳에 기문이 걸려있다.
마루는 장귀틀과 동귀틀을 엮어 우물마루로 깔았는데 맞춤부분이 일부 해이해졌으며, 배면에만 낮은 머름이 있으나 풍혈이 없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홑처마이며 지붕 기와도 일부 번와를 하였다. 건물은 충량을 비롯한 서까래와 선자연 등에서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고격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기둥이 싸리나무로 전하는 것도 있으며 서까래 등 일부를 수리하거나 기둥을 동바리 보수하고, 장부를 내어 추가한 부재를 연결하는 등 원형을 유지하려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부에는 척서정 현판과 시기문 편액 10개가 있으며 이 기록 가운데 척서정에 관한 처음 기록의 시라 할 수 있는 야은 이정태(野隱 李鼎泰, 15951669)의 시 2, 원운으로 전하는 이인(李璘, 1657년 정유생)의 시, 1849년의 이동욱(李東勖, 1789-1849)의 기문, 1893년의 시와 기문 등이 기록되어 있는 편액도 있다. 이들 기록으로 미루어 척서정은 17세기에 건립의 유서가 마련되며 1827년 등 몇차례 중수하였다. 그리고 강호정을 척서정으로 했다는 기록(<광주읍지>, 1879)도 있어 원래는 강호정이라 했다가 뒤에 척서정으로 불리운 것으로 보인다.

 

2) 담양 송강정

19721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환벽당,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1584(선조 17)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대사헌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이곳 창평(昌平)으로 돌아와 4년 동안 조용히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1770년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철은 이곳에 머물면서 식영정(息影亭)을 왕래하며 사미인곡속미인곡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와 가사(歌辭)를 지었다.송강별집7 기옹소록에 따르면, 사미인곡을 제작한 연대는 창평으로 돌아온 해인 1585년으로부터 23년 뒤가 된다. 사미인곡은 제명 그대로 연군지정을 읊은 노래이다. 임금을 사모하는 심경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사에 비겨 자신의 충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아름다운 가사문학의 정취가 배어나는 글이다. 이 시기에 정철은 실의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고 음주와 영탄으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정철의 은거와 관련된 송강정은 동남향으로 앉아 있으며, 건물규모는 정면 3, 측면 3칸이고 단층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중재실(中齋室)이 있는 구조로, 전면과 양쪽이 마루이고 가운데 칸에 방을 배치하였다. 정각 바로 옆에는 1955년에 건립한사미인곡시비가 있으며, 현재의 건물 역시 그때 중수한 것이다. 정자의 정면에 송강정(松江亭)’이라고 새겨진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편액이 있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으여, 멀리 무등산이 바라다보인다. 정자 앞으로 흐르는 증암천(甑岩川)은 송강(松江) 또는 죽록천이라고도 한다

 

5. 결 론

우리의 조상들은 멋과 풍류를 알았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바탕으로 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멋진 경치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가 보면 수많은 누정들이 존재한다. 이곳에서 조상들은 더위를 피해 차를 마시며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다지며 인품이나 정신수양을 하였다. 또한 당시 전통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개인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풍류를 즐기거나 교류의 장소임과 동시에 당시 사회를 이끄는 자들이 모여 담론을 형성하여 정치를 논한 곳이기도 했고 교육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는 강연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유흥상경을 위해 설치된 정자와 누각은 시를 읊고 시국을 담론하는 상류계층의 사교장으로 이용되었으며, 후진의 강학과 씨족이나 향촌의 단합과 상부상조를 이룩하는 공동체의 회합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누정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정치적 변혁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정치적 변혁과 불의에 반항하여 정의와 충절을 지키려는 사족들이 이 지방에 은둔하면서 그들의 분노를 삭이고 한을 달래는 장소로 필요했으며, 재지사족이나 유력씨족들도 이를 모방하여 다투어 누정을 건립했다. 그에 따라 지방의 유력자들이 그들을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고, 민중들도 이들을 따랐다. 호남정신은 정의롭게 살면서 충절을 지키는 인간의 도리인데 이를 지키고 확산시키는데 의로운 사림들의 지방은거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대의명분과 충절을 지키는 정신은 상층은 사림으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어 이 지방의 주된 정서가 되었다. 또한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사회는 현실정치의 이해에 따라 권모술수와 불의가 일시적으로 득세하지만 훗날 정의로운 피해자나 은둔자들에게 복권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대의명분과 충절은 나라를 지탱하는 지주로 받들어졌고, 이는 호남정신이 되었으며, 더욱 앙양하고 고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5.18민주화 운동까지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은 모두 이 호남정신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뿌리가 근거했던 곳, 그곳이 바로 누정이었다. 누각과 정자는 단순히 우리의 전통문화의 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시대정신의 뿌리를 이루는 토양을 제공해주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라는 지키는, 혹은 정치적 압박에서 자유를 지키게 해주는 사상적 장소를 마련해 주던 곳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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