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와 호남사림

 

20100177 김진구

 

 

-목 차-

 

  Ⅰ.김인후의 가계와 출사

 

  Ⅱ.김인후와 필암서원

 

  Ⅲ.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

    1)호남사림의 형성과 학맥

    2)호남시대의 사림의 학맥과 사상

 

  Ⅳ.호남유학과 김인후의 위치

 

  Ⅴ.맺음말

 

참고문헌

 

 

.하서 김인후의 가계와 출사

 

(1)하서 김인후의 가계

김인후의 관향은 울산으로 자는 후지厚之이고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이다. 그는 1510(중종5)에 태어나 1560(명종15)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諡號)는 현종10년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으나 다시 문정공(文靖公)으로 내려졌다.

그가 장성에 뿌리를 두게 된 것은 김인후의 5대조인 흥려군(興麗君) ()때의 일로, 온공이 1423(태종13) 세자책봉 문제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정부인 민씨(閔氏)3형제[달근(達根달원(達遠) 달지(達枝)]를 거느리고 장성맥동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김인후의 고조부는 김달원(金達遠)으로 충자위 중령사정(中領司正)을 지냈으며, 증조부는 김의강(金義剛)으로 사온서(司醞薯) 직장동정(直 長同正)이었다. 조부는 김환(金丸)으로 종사랑(從仕郞) 금구훈도(金溝訓導)였으며, 아버지는 김령(金齡)으로 의릉참봉(義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김인후는 14세 되던 해 (1523) 여흥윤씨(驪興尹氏)와 혼인을 하게되는데, 윤씨는 진안현감(鎭安縣監) 윤임형(尹任衡)의 딸이다. 결혼후 1년 뒤에 큰아들 종룡(從龍)을 얻었다. 종룡은 나중에 태극이기일물설(太極理氣一物設)을 주장하였던 일재 이항(一齋 李恒)의 사위가 된다. 김인후가 28세 되던 해(1573)에는 둘째 아들 종호(從虎)를 얻었는데, 그는 1572(선조5)에 음취재(蔭取才)에 합격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지냈다. 그의 아들 남중(南重)1603(선조36)에 종6품인 선교랑(宣敎郞)에 임명되며,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의 사위가 된다.

김인후에게는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막내딸은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 명의 딸들은 함께 교유하던 지인들의 며느리가 되는데, 첫째 사위는 조희문(趙希文)이고, 둘째 사위는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인 양자징(梁子澂)이며, 셋째 사위는 미암 유희춘(眉巖柳希春)의 아들인 유경렴(柳景濂)이다.

 

(2)하서 김인후의 출사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5세에 천자문을 이미 통달하고 6세에 상원석(上元夕)과 하늘을 운으로 하는 시를 지을 정도로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8세에 전라도 관찰사 조원기(趙元紀)로부터 장성신동 천하문장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특히 9세에는 복재 기준(服齋 奇遵)에게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될 만하다.”고 칭찬을 들으면서 붓 한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10세에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호남에 관찰사 왔을 때, 그를 찾아가 소학을 배우고 대학·논어·맹자·중용·오경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18세 되던 해에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 동복(同福)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를 찾아가 수학하면서, 사서(四書오경(五經제 자(諸子사책(史策) 뿐만 아니라 천문(天文지리(地理백가(百家중기(衆技) 등에 이르기까지 능통하게 되었다.

19세 되던 1528년에는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칠석(七夕)을 주제로 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다. 22세인 1531년에 대곡 성운(大谷 成運),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소과 (小科)에 합격한 김인후는 대과의 꿈을 갖고 성균관 시절을 보내게 되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등과도 깊은 사귐을 갖는다.

성균관에서 9년을 보내고, 154031세 되던 해 별시(別試) 문과(文科)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종9품인 권지승문원(權知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된다. 이 때 손윗동서인 김약묵(金若黙)도 대과에 합격함으로서 장인인 윤임행의 집안에서는 축하행사인 은영연(恩榮宴)을 베풀었는데, 당대 문장가였던 면앙정 송순도 초대되었다. 대과에 급제한 다음해 (1541) 김인후는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 경연(經筵) 전경(典經)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에 제수된다. 1년뒤 가을 7월에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었다.

 

 

. 김인후와 필암서원

김인후의 학문적인 업적과 성리학적 선비정신을 드높이기 위하여 후학들은 그에 대한 숭모활동을 전개한다. 먼저 하서 김인후의 넋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게 된다. 김인후가 세상을 떠난 4년 후인 명종 19(1564)에 오과현감을 지낸 그를 위해 옥과에 영귀사(詠歸祠)를 건립하였다. 선조 3(1570)에는 순창 선비들이 화산사(華山祠)를 건립하고 뒤에 또 어암사(漁巖祠)를 세웠다. 선조 23(1590)에는 장성 선비들이 장성읍 기산리 기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가 뒤에 황룡면 필암리에 터를 잡게 되었다.

1658(효종9)에는 전라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장성에 건립한 서원에 사액(賜額)을 청하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662(현종3) 봄에 필암서원으로 사액하고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사액서원으로서의 필암서원은 후손들의 선조현양과 문인들의 학통계승, 그리고 향인들의 활동근거지로서 사회적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전라도지역의 대표적 서인계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국학의 하나로서 지방의 교육을 맡아 후학을 길러내는 한편 국가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필암서원은 19세기 후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의연하게 살아남은 전남의 유일한 서원이었다.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는 장성 필암서원이 사액을 받자 숙종 20(1694)에 전라도 진사(進士) 조명근(曹命根)이 순창군에 있는 원우(院宇)에 사액을 청하였고, 영조 32(1756)에 옥과현감 송명흠(宋明欽)이 김인후가 배향된 영귀사원(詠歸書院)에 사액을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서 김인후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작업은 선조 때 시작되었다. 먼저 선조 1(1568)에 문집이 간행되었고, 숙종 12(1686)에 증간되었다. 또 정조 20(1796)에 문묘배향 된 이후 순조가 경연에서 문집을 증간하라는 분부가 있어 순조 2(1802) 여름 5월에 중간(重刊)한 문집이 완성되었다.

 

 

.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

 

(1).호남사림의 형성과 학맥

호남이라는 말이 전라도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불린 것은 조선초기까지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6세기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는 재지 중소지주로서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향촌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호남이라는 별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전라도가 행정 단위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지역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호남의 정체성을 형성한 주체, 호남의 유교문화를 형성한 주체는 호남사림이었다. 특히 16세기 호남사림들은 나름대로의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다양한 학파를 이루며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선조 초년에는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남사림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범주화해서 보려는 노력은 198년대 후반부터 있어왔다. 물론 그 이전에도 호남사림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호남사림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단순히 호남지역의 사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었지 독자적으로 개념화시켜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호남사림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부터 있어왔다. 호남사림 중에서는 기대승에 대한 연구가 제일 활발하여 이미 1972년 서거 400주기를 기념하여 그의 사상을 다각도에서 살펴본 기념논문집이 간행되었으며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단행본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연구가 많이 된 인물이 김인후이다. 호남사림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부터 이루어져 왔는데 관련 사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90년대 들어와 하서기념회를 중심으로 연구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연구 성과들이 크게 늘어나 이것들을 묶은 단행본들이 계속 출간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6세기 선비들의 일상세계를 김인후를 통해 살펴보라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호남사림의 사상을 거시적인 시각 또는 학맥별로 살펴보려는 시도도 1990년대 들어와 활발히 이루어졌다. 전자의 경우 호남유학의 의리적인 성격을 강조하거나 성리학 발전기에 사상적 초석을 높은 점을 강조한 연구에 이어 호남유학을 도학·성리학·실학 또는 도학적 흐름·성리학적흐름·의리적 실천의 흐름·실학적 흐름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호남유학의 학문유학의 학문적 특징을 조선시대 유학사상의 보편적인 흐름 속에서 살펴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후자의 경우 초기에는 학맥별로 학문적 수수관계를 밝혀내는데 그쳤으나 점차 관련 연구가 늘어나면서 학맥의 사상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6세기 전반 호남사림의 학맥이 김굉필계의 학통이 큰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의리정신을 중시한 김굉필 도학사사상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 연구와 호남사림이 명종대 서경덕계열과 송순계열로 학파의 분기를 이루면서 서경덕계열과 송순계열로 학파의 분기를 이루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호남사림은 학계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호남사림의 사상도 어느 정도 독자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한말의 기정진학파·전우학파를 제외하고는 독자적인 학파를 설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호남 유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더욱 많고 치밀한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2)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

호남지역이 유학과 관련을 맺기 시작하는 것은 이미 마한백제시대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관계 맺게 되는 것은 성리학이 도입되는 고려 후기부터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유교적 덕목과 생활관습을 규정한 거가십훈을 저술한 서릉, 공민왕대 개혁정치를 추진하며 권문세족에 대항하다 유배 도중 사망한 전록생, 정몽주의 문인으로 유교적 역사서인 화동인물총기등을 저술하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던 범세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이 시기 호남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수용해 권문세족과 대항하며 개혁을 추진해가던 다른 지역의 신흥사대부들과 다를 바 없었으며 이들의 사상도 유교적 생활관습의 시행과 유교적 가치를 중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사상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들어와 호남지역은 태종대 광주에 향약이 시행되는 등 일찍부터 유교적 교화가 행해졌던 곳이었다. 또한 불사이군하고 낙향한 범세동전신민조유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도 초기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이 지역에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는 최덕지와 김문발이선제정극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호남지역에는 성리학이 점차 퍼져 나갔으며 15세기 호남유학은 향촌교16세기 호남유학은 호남사림의 형성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중종대 성립되어 성장한 호남사림은 대체로 조선 건국 이후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에 연루됨으로써 받았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은 의리명분적인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실천적 성격이 덧붙여졌으니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것이 소릉복위 주장과 신비복위소였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되면서 폐릉되었으며, 신비는 중종의 왕비로 중종반정 때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살해되자 반정세력에 의해 강제로 폐출당하였다. 따라서 이 두 왕비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나므로 다시 본래의 상태로 복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호남유학의 전개과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 지역에 유배를 온 김굉필과 조광조였다. 김종직의 제자로 평생토록소학만 읽었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한 김굉필은 무호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를 와 사사되기까지 4년 동안 있었는데 그 동안 최산두유계린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한 달 만에 사사당하였다. 그러나 호남사림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친구로, 또는 문인으로 교유하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죽음으로써 호남유학이 도학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호남사림의 사상이 김굉필조광조의 도학사상지치주의유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명종 대에 이르면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명으로부터 양명학과 장재나흠순 등의 학문이 들어와 퍼지면서 조선의 사상계는 다양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학문적 성향에 따라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호남사림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비교적 단일한 학문적 성격을 가졌던 중종대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학문집단이 형성되었는데 크게 송순계열과 서경덕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송순, 김인후, 기대승, 이항 등 송순계열 인물의 사상은 서로 간에 학설의 차이가 없지 않았지만 크게 보면 정통 주자성리학에 가까웠다. 이들의 견해는 이항김인후기대승송순의 순서로 이이의 견해와 비슷하였는데 송순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과 비슷한 학설을 이미 이이가 자신의 견해를 체계화시키기 이전말하자면 이들의 사상이 이이학파의 학설이 정립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시기별로 살펴보았듯이 호남유학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상적으로 다른 지역과 차이가 없지 않았으니 그 첫 번째 특징은 절의적節義的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호남사림은 조선 건국 이후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가문의 후예들이 많았으며, 소릉복위 주장과 신비복위소에서 볼 수 있듯이 의리명분의 실천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리명분적, 절의적, 실천적 성격은 호남사림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등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나아가 많은 사림의병장들을 전쟁터에서 순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역으로 이러한 사림의병장들의 순절과 활발한 의병활동은 호남유학이 절의와 충렬을 더욱 강조하게 만들었다.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과 리 절대화 경향은 호남유학에서의 절의 강조의 전통을 계승하여 이론적으로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것과 다름 아니다.

두 번째 특징은 사상의 다양성과 개방성이다. 16세기 조선에는 정통 주자성리학 뿐만 아니라 북송성리학과 명의 나흠순의 학문, 양명학 등이 들어와 사상계를 풍부하게 하였다. 호남지역도 이러한 사상들을 받아들여 다양한 학문집단이 형성되었는데 크게 정통 주자성리학에 가까운 송순계열과, 주자성리학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면서 오히려 다른 사상들을 계승한 면이 없지 않은 서경덕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계열 내에서도 학자마다 학설의 차이가 없지 않았다.

이들은 영남 기호사림과 활발한 학문 교류를 벌여 호남유학이 이론적으로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하였으며, 같은 학파 또는 학파를 초월하여 수준 높은 학문적 토론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이황학파와 이이학파의 학설이 정립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다양성과 개방성은 남인계와 소론계 호남사림을 통해 계속 이어져 호남실학을 꽃피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세 번째 특징은 문학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16세기 호남지역은 학문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최고 수준이었다. 무등산 원효계곡과 영산강 주변의 수많은 누정들을 중심으로 면앙정시단성산시단(星山詩壇)등 많은 시단들이 만들어지고 문학 창작활동이 이루어졌다. 박순과 삼당시인(三唐詩人)인 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호남사림들은 당시 유행하던 남북조시대의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과 송시(宋詩)를 대신하여 진한고문(秦漢古文)과 당시(唐詩)를 중시함으로써 선조대 고문부흥운동(古文復)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사상계가 점차 이황학파와 이이학파로 재편됨과 동시에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묵수하는 경직된 방향으로 나가고 호남사림 역시 독자적인 학파를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결국 호남사상계는 학계에서 주도권을 잃고 이이학파, 성혼학파, 근기남인학파 등에 개별적으로 흡수되어 갔던 것이다. 흥운동(興運動)을 선도하고 문풍(文風)을 쇄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호남유학과 김인후의 위치

기묘사화는 조선조의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轉回)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의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능주로 귀양오게 됨으로서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고,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서는 기묘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서 기묘사화 이후 호남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하서를 가리켜 도학과 문장 그리고 절의정신이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서 자신의 학문이나 그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서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인품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서를 전후한 호남유학자들을 보면, 위로 박상, 조광조, 최산두등이 있고, 같은 시기로는 송순, 임억령, 양산보, 유희춘이 있으며, 이후로는 김성원, 양응정, 박광옥, 기대승, 최경희, 고경명, 정철, 김덕령등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거의가 하서와 깊은 인연을 맺었거나,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맺음말

하서는 기묘사림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를 실현시키고자 하였지만, 훗날 인종이 된 세자의 보도를 맡게 됨으로서, 조정의 세력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물러나 후학을 길러내고 학문을 닦았다.

그의 도학은 천명도와 성리학 이론으로 정립되었고, 절의는 인종에 대한 의리 정신으로 나타났으며, 문장은 시로서 표현된 것이었다.

하서의 이러한 삶과 학문적 특징은 호남유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성리학 연구와 의병활동, 그리고 문학적 발전이다. 조선조 중엽 호남의 사상과 문화가 나타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하서의 삶과 학문적 업적이 그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권정우,河西 金麟厚筆巖書院 국립광주박물관, 2007.

고영진,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혜안,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