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대몽항쟁>

-진도 용장산성을 중심으로

 

 

20100173 김종식

 

 

-목 차-

 

머리말

 

.본론

  1. 삼별초는 왜 봉기 하였는가

  2. 왜 삼별초는 진도를 택하였는가

  3. 삼별초의 저항활동

    (1)고려내륙에서의 삼별초활동

      1)고려내륙에서의 삼별초
      2)제주도 점령

    3)원의 회유

  4. 삼별초의 패인

  5. 삼별초의 항쟁이 남긴 의의

 

.맺는말

 

참고문헌

 

 

 

 

 

.머리말

고려의 중말기 대표적인 사건이라면 묘청의 서경 반란 정 중부일파의 무부란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려는 삼별초의 항쟁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묘청, 정중부의 난이 내부적 반항 운동에 역점이 주어진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삼별초 항쟁은 이처럼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도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삼별초가 남긴 역사적 의의에 있어서도 고려의 정치적 내부에 끼친 어떤 영향보다는 오히려 국내에 뻗어드는 외세의 소장에 더욱 지대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입니다. 이번 삼별초를 조사 하면서 삼별초의 전반적인 활동들은 익히 들어왔으나 그들이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에 대해서 소개를 하려합니다. 삼별초의 항쟁 배경과 삼별초가 왜 진도를 택하였는지 삼별초의 저항활동과 삼별초의 패인과 삼별초 항쟁이 남긴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1. 삼별초의 봉기

강도에서의 삼별초 봉기의 추이와 전후과정에 대하여 검토해야한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는 원종 11(1270) 61일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대장군 우존혁,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임명함으로써 신정부의 출범을 선포하였다. 이어 63일 삼별초는 1천 척 선박에 분승하여 강화도를 출발하여 남쪽 진도를 향하였다. 그러나 강도에서의 삼별초의 봉기 시점은, 그 이전 523일자의 일이었다. 523, 삼별초는 정부의 개경환도 공시에 대하여 반발하여마음대로 부고를 열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봉기의 기점이라 할 수 있다. 523일 삼별초 봉기의 계기는 514일 임유무 무인정권의 붕괴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삼별초는 왜 진도를 택하였는가

우선은 삼별초 봉기는 523일자라 할 수 있고, 이에 의하여 신정부가 수립도니 시점은 61일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개경정부에서는 강화도의 삼별초군을 수륙으로 공격하여 진압해야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별초의 철수 준비는 상상이상으로 매우 신속히 진행되었다.원고려기사에 의하면 신정부 선포 다음날인 62일 이미 철수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것은 삼별초가 여몽군의 강화도 공격을 예상하고, 이들의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기 이전에 서둘러 철수를 진행하였던 점을 말해준다. 이것은 신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상세한 준비가 있었던 점을 의미한다.

강도를 출발한 삼별초군은 서남해 일대의 여러 섬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몽고 세력과의 피나는 항쟁을 벌이면서 진도의 벽파진에 상륙 하자마자 진도 도성축성에 착수하였다.

삼별초가 몽고와의 장기전을 펴기 위하여 새로운 항몽의 근거지로서 특별히 진도를 택한 것은 첫째 강도에 집중적으로 확보되어 있는 배를 이용하면 남하하기에 용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몽고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남방 해중 도서라는 점이다 진도는 서남해안의 해상 교통요지로서 전라도와 경상도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며,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제주와 근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섬으로서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일찍부터 바다와 관련된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할 수 있는 자연적인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삼별초가 항몽을 위해서 진도로 천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이 지역출신 사람들의 바닷길 이용 능력과 선박 제조기술이 뛰어난 점 등을 고려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삼별초가 유목민족인 몽고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육전보다는 해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별초 진영에는 해전경험이 풍부한 수군을 많이 보유하여 해상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고군에 의해서 전통적으로 해도입보책을 취하였고, 항쟁지역으로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셋째 진도가 강화도와 같이 광활하고 육지와도 가까울 뿐만 아니라 만약의 경우에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고 마지막으로 진도는 제해상의 요새이며 도성으로 삼기에 알맞은 용장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용장사는 진도 용장리 동남방 상류 산곡에 있는 천혜의 요새지로서 삼별초가 도성을 이루고 항몽의 근거지로 이용하는데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했음이 확실하다. 삼별초가 도성을 이룩한 용장산성은 무엇보다도 대륙에 가깝고 벽파진이라는 진도 유일의 양항을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려봉을 주산으로 동서남북의 천연적 산성을 이루고 있는 대길지였다. 여기에 사방으로 산성을 쌓고 용장사의 대가람과 부속건물 그리고 관아를 이용한 삼별초군의 진도 도성 본영은 당시의 한양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웅대하고 항몽의 요새지로서의 손색없는 면목을 보여 주었다.

다른 이유 하나로는 도참설을 들 수가 있는데 고려는 도참신앙을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나 어려움이 처할 대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삼은 적이 많았는데 삼별초 역시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할 때 도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방열은 삼별초를 따라 진도로 이동한 관리인데 그는 삼별초의 난이 태조 어진 앞에서 점을 쳐보니 반존반망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 점괘를 가지고 생각해보니, 고려시대에 유행한 참설 중에 용손십이진 향남 작제경이 있었는데 이것과 연관시켜 고려 왕손은 12대가 되면 끊어지고 남쪽에 황제의 수도가 건설된다는 설이 삼별초의 반란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은 것 같다. 삼별초가 이동한 진도라는 지역은 그들이 말하는 황제의 수도로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급박한 상황에 처한 삼별초의 입장에서는 안방열의 참언이 진도 입도의 당위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고무적인 설이 되었을 것이다. 삼별초는 이와 같은 참언을 기다렸을 것이고 오히려 이 내용을 유포시켜 진도 천도에 반신반의하며 동요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취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 할 수 있다.

 

3. 삼별초의 저항활동

(1)고려내륙에서의 삼별초

삼별초의 진도에서의 활동은 원종 11(1270) 819일부터 원종 12(1271)515일까지 약 9개월 동안 해당된다. 삼별초는 진도의 방어책을 강화함과 아울러 우세한 해상 기동력을 이용하여 전라도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삼별초는 점차 세력이 커져가고 일부 지역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12714월경에는 경상도 창원, 부산 동래, 김해등의 남부 해안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 연안지역을 지배하는 해상왕궁을 건설하였다.

이후 해상요충지를 모두 지배하면서 개경정부로 이동하는 조운선을 납치하여 개경정부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몽고군의 일본정벌 계획에도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삼별초의 지배권역은 진도를 중심으로 경상도의 김해, 밀양, 남해, 마산, 거제, 창원, 등의 남해 연안과 도서지역에 걸쳐 있었다.

삼별초 가운데 경상도지역을 장악하고 활동한 사람은 삼별초 봉기 당시 좌승선에 임명되었던 대장군 유존혁이었다. 고려사배중손 전에 진도가 함력되자 적장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갔을 때 남해도에 있던 유존혁은 80여척의 선단을 가지고 제주에 합류하였다.

삼별초 가운데 배중손과 노영희, 김통정 등은 진도정부에 중심을 두고 전라도 권역에서 활동 하였고, 유존혁은 경상도 남해도에 머무르면서 경상도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2)제주도 점령

삼별초는 8월초에 진도에 입도한 후 113일에 제주도를 함락시켰다. 이것은 진도에 내려 온지 3개월 만에 제주도를 점령한 것이다. 제주는 이미 원종 원년(1260) 김준세력의 해도입보 지역으로 거론된 바가 있고 그 후 원종 10(1269) 임연의 원종 폐립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고려에 군사를 파견하자 강화도 방위에 위협을 느낀 임연이 들어가려고 했던 지역이다.

제주는 무신세력들이 몽고의 압박과 침략이 심해지면 피난지와 항몽지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제주가 중요한 이유로는 첫째 삼별초는 진도가 함락되면 몽고에 저항할 최후의 보루지로 제주를 생각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도 입도 후 얼마 되지 않아 제주를 함락시켜 삼별초의 남방 거점으로 삼았다. 둘째는 제주는 개경정부로부터 바다 깊숙이 들어가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지대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종 원년 김준과 원종 10년 임연에 의해서 해도재천 지역으로 제주가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는 남송과 일본 진출의 해양 교두보로서 실제로 송나라와 일본 상인들이 왕래하였던 곳이기 때문에 삼별초가 몽고와 적대관계에 놓여있는 남송이나 일본과 외교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개경정부도 제주를 중요시하여 영암부사 김수를 보내어 군사 2백 명으로 제주도를 지키게 하고, 또 장군 고여림을 보내어 군사 70명으로 방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종 원년(1260)에 제주부사 나득황으로 하여금 방호사를 겸직시켜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중요시 하였다. 제주는 몽고의 입장에서도 장차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기지로서 필요하였고, 삼별초가 송이나 일본과 교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요시 하였다. 결국 삼별초의 진도 정부는 자신들의 남방 지배권역의 확대를 위해서 제주가 필요하였고, 진도가 붕괴되었을 때 새로운 저항지역으로서 제주를 점령하여 그들의 세력권에 놓아두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3)원의 회유

삼별초의 진도 이동 이듬해인 1271년 초에 원은 삼별초 구성원에게 회유책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여몽 여합군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진도정부를 진압하고자 하는 원 황제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진도정부는 몽고를 오랑캐로 여기고 개경정부와 다른 독자적인 자주정부를 자임하여 유화책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항몽 의지를 강화하였다. 12711월이 되자 개경정부와 원나라에서는 진도공격이 자주 실패로 돌아가고 삼별초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짐을 알고 삼별초를 회유하려는 정책으로 돌아 섰다. 개경정부에서는 박천주를 진도에 파견하여 삼별초를 회유하고 달래려는 유화책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개경정부의 회유책에 대해 삼별초는 두가지 전술로서 개경정부에 타격을 주려고 하였다. 한 가지는 적의 유화책을 받아들이려는 위장술로서 박천주를 벽파정에서 잔치를 벌여 위로하는 척 하였고, 또 다른 전술로는 삼별초의 위장술에 방비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병선 20척을 보내어 관군을 공격하여 배 한척을 빼앗고 관군 9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은 삼별초가 개경정부의 유화책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 항몽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삼별초의 패인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 간 후에 다만 그의 해상 세력을 자부하여 해상과 연안의 초략으로써 자원 획득의 유일한 수단을 삼아 군색스럽게 섬 안에서 시일을 보내는 한편, 연합측의 해상 세력을 과도하게 경시하여 진도의 방어까지 소홀히 한 결과 드디어 진도를 쉽사리 빼앗긴 것이니, 이것이 삼별초의 패인에 있어서 자못 중대한 것이다.

진도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삼별초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으니 그들의 중심 인물을 거의 다 잃어버렸으며 전함과 성 안에 쌓아있던 곡식 및 각종 제보, 그릇 등의 진귀한 보물을 일시에 빼앗겨 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잔당이 제주에 들어간 뒤에는 그의 세력은 이미 편단불급의 한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서 비록 일시에는 연안 일대를 떠들썩하게 한 바가 있었으나 그들은 벌써 정치적 의의를 잃고 점차 해구의 운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도 함락은 삼별초로 하여금 정치적 성능을 잃게 한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삼별초와 연합군측을 군사상으로 비교해 보면 먼저 병력에 있어서 삼별초는 비록 해상권을 차지하였다고 하나 양적으로 보아 안합군측의 그것에 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을 뿐 아니라 무기에 있어서도 말하지 못할 만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몽고측에서는 화약의 무기로서 화창, 화포, 화전 등 당시에 있어서는 가히 놀라울 만큼 위력 있는 무기를 사용하였으므로 활과 창칼 등 재래 무기만 가지고 싸운 삼별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에서 연합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한 번도 맞붙어 싸워 이겨 보지 못하고 참패만 당한 것은 이러한 신무기의 위력에 눌린 관계도 컸지만 연합군을 기습 공격하여 수차에 걸쳐 승리하였기 때문에 관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비를 소홀히 한 것과 몽고측의 회유 정책에 총공세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작전상의 실수가 그 패인으로 생각된다.

 

 

5. 삼별초의 항쟁의 의의

삼별초는 비록 무신정권의 친위세력이었을지언정 삼별초의 대몽 저항은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민족적 항거였다. 몽고는 가혹한 징발로 민중을 수탈하고 고려 정보는 그 하수인 노릇을 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치솟고 있을 때 삼별초가 대몽 항장의 선봉에 나서자 민중들은 삼별초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정부 대신 반외세 투쟁의 선봉자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삼별초의 항전은 고려 정부가 몽고의 침략에 굴복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요, 민족 주체성을 끝까지 지키려는 자주정신의 발로였다.

비록 삼별초의 항전이 여몽 연합군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지만 외침에 대항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저항 정신은 이후 우리 민족의 생명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봉기가 단순한 항거가 아니라 외세에 굴복한 왕을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 다른 대안으로 보여 주려는 차원까지 승화시킨 것으로 볼수가 있다.

 

 

. 맺는말

진도는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역사적으로 한때는 대륙으로부터 소외받은 지역이었고 유배지로 이용되어 왔으나 지리적으로는 서남해 해상교통의 요새지로서 잦은 전쟁과 외침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려 말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저항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게 되면서 한때는 남해 연안지역을 장악하는 해상왕국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삼별초가 항몽지로 진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대륙과 가까우면서 울돌목이라는 천혜의 거센 물살에 가로막힌 섬으로 몽고군의 방어에 유리한 군사지리적 요충지이다. 둘째, 정치적으로는 과거 최씨 무신정권의 농장들이 분포하고, 삼별초와 지연과 인맥으로 연결된 곳이었다. 셋째, 자급자족이 가능한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물산 등이 갖추어져 장기적인 저항을 위해 부족함이 없었다. 넷째, 사상적으로는 당시 고려사회에 풍미하였던 풍수 도참사상의 영향을 받은 점이다. 삼별초의 진도 저항 활동은 적은수로 기동력을 발휘한 기습작전과 게릴라전술, 그리고 심리전과 기만술을 이용하여 여몽군에 타격을 주었다.

삼별초는 개경정부와는 달리 왕온을 황제라 칭하고 진도정부가 자주독립 정부임을 천명하며 당당하게 저항하여 밀양, 개경, 대부도의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허나 삼별초의 진도에서 활동은 항몽이라는 명분은 잘 설정되어 개경정부와 몽고에 저항하여 백성들에게 삼별초의 존재를 알리고 자주성을 일깨워주는 목적은 달성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전체적인 발전과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해서는 기대 이상의 결과는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삼별초의 진도정부와 친원적 개경정부의 대립은 결과적으로 힘없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피해만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존립기반이 백성들이라면 고려 말 삼별초를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삼별초의 진도 입도배경과 저항활동,박종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08.

고려 삼별초의 항전과 진도,윤용혁,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1.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尹龍爀, 일지사, 2000.

용장산성의 충절,진도문화원, 전남교육연구원,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