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의 기능과 역사적의의

 

20081078 김동구

 

목 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읍성의 정의

2. 읍성의 기능

1) 읍성의 기본구조

2) 각 지역의 읍성

(1) 정의읍성

(2) 낙안읍성

(3) 해미읍성

(4) 고창읍성

(5) 무장읍성

3. 읍성의 의의

 

Ⅲ. 결 론

※ 참고문헌 ※

 

Ⅰ. 서 론

 성은 오래전부터 그곳에 주거하는 백성들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성의 구조라던가,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보면 그 시대의 삶과 사회구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볼 때 성이 우리에게 있어서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창문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읍성이라고 하는 곳의 중요성은 다른 기능분류에 의한 성곽들보다 중요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산성의 경우에는 평상시 최소한의 군사만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고, 유사시에만 백성들이 들어가서 생활하는 반면에 읍성의 경우는 그 기능이 사람이 사는 곳,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며 생활하는 공간이란 의미의 성격이 강하여 그 당시의 백성들의 삶을 파악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제주도의 읍성의 경우 현무암으로 축조하고 내부의 관아건물이 육지와는 달랐다. 이처럼 읍성내부에는 지역적 고유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고, 오늘날 향토문화사를 밝히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읍성내부에는 관청, 객사, 옥사, 장청 등 관아시설들이 존재하고, 읍성의 최고책임자 역시 그 지역에 파견되는 현령인 점에서 읍성은 당시의 지방제도의 파악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향청 같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자치기구도 존재하여 당시의 지방자치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어 읍성의 역사적의의와 기능을 중심으로 설명 파악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읍성의 정의

 읍성은 지방 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안의 관아(官衙)와 민가를 함께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아울러 갖는 시설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179개소가 나타나는데, 당시 부(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의 행정 구역이 330개소인 것으로 미루어 반수가 넘게 읍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남해, 서해안 지방과 북쪽의 변방에 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고을의 크기나 중요성에 따라 그 규모는 크게도 작게도 축조되었다. 읍성은 평지에만 쌓는 일은 드물고 대개는 배후의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하였다. 이런 형식은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산성(平山城)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우리나라 성곽의 특이한 점 이라고 하겠다.

2. 읍성의 기능

 

1) 읍성의 기본구조

(1) 동헌과 내아

 동헌은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 건물.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배판이 행해짐. 내아는 수령의 살림채, 서헌(西軒) 이라고도 함. 동헌과 내아는 담이나 행랑으로 격리, 협문으로 통하게 되어있다. 동헌은 3~4층의 석축위에 정면 6~7칸, 측면 4칸의 목조 팔작기붕 기와집. 현존하는 대표적 건물로는 강원도 감영의 정청이었던 원주의 선화당과 김제의 사칠헌, 홍주목(지금의 홍성군)의 안회당 등이 있다. 내아는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 주위에 곳간 등의 부속채가 딸려 있었다. 1914년 부군폐합령으로 대부분의 동헌들은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변경. 그 외에는 헐렸다.

 

(2) 객사(객관)

 사신이나 출장 관원들이 머물던 숙소.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는 동헌보다도 중요한 건물이다. 객사의 이름은 대개 그 고을의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 가장 오래된 건물로는 전주객사(1473년 이전, 보물 제 583호) 이다. 대부분의 객사들은 학교건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객사 건물들은 대개 학교 구석에 위치하거나 학교를 옮긴 후 그 자리에 복원된 것이 많다.

 

(3) 삼문

 동헌이나 객사 앞에 위치한 통로가 셋인 문.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성. 가운데 문– 수령, 사신, 빈객. 왼쪽 문– 향토의 양반, 아전. 오른쪽 문– 군관, 장교, 백성들이 드나듬. 1층은 출입문으로, 2층은 집회공간으로 활용하였음. 조선시대에는 외삼문 문루가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삼문도 독립된 건물로 인식되었다. 객사의 외삼문 문루는 관찰사나 수령들의 연회장소로도 이용. 현재 남아있는 삼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말기에 세워진 강릉 객사문(국보 제 51호)이다.

 

(4) 향청

 지방의 양반들이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 기구, 조선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향청’ 이라 불림. 좌수는 수령의 수석 보좌관이 되어 향임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각종 송사를 처리했으며, 환곡을 취급하였다.

 

(5) 작청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육방 가운데 우두머리인 이방이 근무하던 이방청으로 민원을 처리하던 곳이다.

 

(6) 관청(관주 官廚)

 지방관아의 주방, 각종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회계의 근거를 남기기 위해 조달 및 지출을 날마다 기록하는 등 업무가 복잡.

 

(7) 창고

 곡물을 보관하는 곳과 옷감,무기,보물 등을 보관하는 곳. 물가를 조절하던 곳은 ‘상평창’ 이고, 여러 방법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이것을 대여하여 빈민을 구제하던 곳이 ‘의창’, 의창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 초기에 국가의 지원으로 설치되었던 민영창고가 사창이다. 창고종류 중에 ‘무기고’’군기고’등은 반드시 읍성 안에 두었다.

 

(8) 성황사

 성읍을 지키기 위해 성읍 둘레에 파 놓은 성지의 신, 성읍의 수호신이나, 고을의 수호신인 성황을 모신 사당이다. 서낭당과도 관계가 있으며, 고려시대에 성황 신앙이 처음 유입되었으며, 문종 때 신성진에다 성황사를 세운 것이 최초.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을 빌었으며, 그래서 읍성마다 대개 높은 산에 3~4평 규모의 성황사를 기와집으로 세웠다.

 

(9) 옥

 죄수를 가두던 곳. 동헌과 거리가 있음. 실물이 남아있는 곳이 없어서 그 형태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옥터, 옥거리 등의 지명은 곳곳에 남아 있다.

 

(10) 성문

 대개 사방에 하나씩, 서너 군데의 출입문을 두었는데, 북문은 없는 경우가 많다. 남&동향을 선호한데다, 북쪽으로 야산이나 언덕에 기대어 쌓았기 때문에 출입문을 낼 수가 없었다. 홍예문(虹蜺門) 위에 초루(문루) 를 세운 경우가 많아서 성이 무너지거나 나무로 된 누각이 썩어도 그대로 남게되었다. 이름에 방향(동서남북) 을 뜻하는 글자들이 많이 들어가고,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등과 같이 인의예지(仁義禮智) 를 넣기도 했다. 병영을 겸한 읍성이나 진보의 경우에는 ‘진서루’같이 진(鎭) 자를 넣거나, 수성루, 감성루 같이 성을 지킨다는 뜻을 붙이기도. 이런 성문은 전투시작시 전투 지휘소가 되었다. 우리나라 국보 제 1호가 숭례문이고 보물 1호가 흥인지문(동대문)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문은 그 자체가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다.

 

(11) 향교와 선정비

 향교는 고을의 필수적인 건물로 학문하기 알맞은 곳을 찾아서 읍성밖으로 옮겨진 경우도 많았다. 선정비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백성들이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 업적과 이름을 세긴 비석으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관아나 향교 앞 큰길에 세웠다. 평균 열 사람 중 한 사람 정도 선정비가 세워졌는데 백성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떠나는 수령이 강제로 세우게 한 곳도 많았다.

 

2) 각 지역의 읍성

(1) 정의읍성 (성읍마을)

 정의읍성은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1리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정의현 관아가 있던 곳이다. 성을 쌓을 당시, 정의읍성은 표선리 바닷가에서 천미천을 따라 8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세워졌는데, 남쪽에는 영주산이 감싸고, 천미천 건너에는 남산봉이 솟았다. 바다 쪽에는 매오름이 매처럼 솟고, 서쪽에는 무찌오름이 솟았으며, 그 앞뒤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정의읍성을 감쌌다. 이런 봉우리들이 감싸고 있어 병화불입지지 (兵火不入之地)라고 알려진 곳에다 읍성을 세웠던 것이다.

 500년 동안 정의현의 읍성이었던 정의읍성은 지금도 성읍리라고 불리는데, 읍성과 관아, 민가에 예전 모습이 남아있다. 민가 다섯 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성읍마을 자체가 중요민속자료 제 188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마을들과 달리 오랫동안 관아가 있어서 기생들이 부르던 「용천검」,「관덕정 앞」등의 창민요도 전래되고 있다. 주민들이 아직도 갈옷을 입고 다니는 등 읍성 안에는 조선시대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2) 낙안읍성 (민속마을)

 낙안읍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에 걸쳐 있는 평지성이다. 1397년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물리쳤다. 그 후 돌로 고쳐 쌓은 기록이 있으며, 다시 그 뒤 인조4년(1626)부터 6년까지 낙안군수로 재임했던 임경업 장군이 고쳐 쌓았다. 이 마을 사람들의 임경업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다. 임경업은 재임 당시 선정을 베풀고 성을 쌓는 일도 편하게 해주었다 한다. 그리하여 임경업이 전임될 때 백성들이 그의 선정을 고마워하며 선정비를 세워주었고, 그 뒤 1748년 군수 김우가 비각을 세우고 1887년 중수하였다. 동문 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선정비와 비각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이다. 현재 성안 4만1018평과 성밖 2만6472평이 민속마을로 보호받고 있으며. 성벽 안팎에 민가가 들어서, 성벽이 마을의 일부처럼 되어 있다. 실제로 성벽을 담으로 쓰는 집들도 많다. 전시용으로 복원된 민속촌이 아니라, 주민들이 조선시대의 세시풍속과 통과의례를 지키면서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읍성이다. 낙안읍성의 내부는 북문이 없는 T자 구조로 동문, 서문, 남문을 이어주는 큰길이 나있다. 이 큰길을 따라 민가가 형성되었으며 출입문에 따라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1983년 6월 14일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2000여 호에 800여 명이 살았는데,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불량 가옥을 철거하여 현재는 108호에 300여명이 살고 있다.

 

(3) 해미읍성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은 1491년 해미현 읍성으로 새로 쌓은 석성이다. 현재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79년 10월 병영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 동안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효종 때에 북벌책을 내세우면서 전국의 병영이 강화되자 충청도에도 호서병영이 다섯 곳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 선임 병영인 호서좌영을 해미읍성에 두었다. 그래서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객사 중심인 다른 읍성들과 달리 병영이 설치되었다. 1847년 현감 겸 영장 이던 박민환이 성곽을 크게 개축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곽이 바로 이 때 고쳐 쌓은 것이다. 해미읍성이 역사적으로 크게 의미를 갖는 것은 흥선대원군 때 천주교인을 박해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충청도 바닷가에는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일대에서 붙잡힌 천주교인들은 모두 호서좌영이 있던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심문을 받다가 처형되었으므로, 해미읍성은 천주교의 순교 성지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은 성곽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읍성이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읍성 안에 무질서하게 들어섰던 학교와 민가들을 철거하고 성곽을 보수했으며, 1997년부터 10년 동안 객사와 관아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다. 지금은 공원같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 민가마저 복원한다면 낙안읍성과 같이 살아있는 민속촌이 될 것이다.

 

(4) 고창읍성 (모양성)

 고창읍성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으며, 조선 초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서 돌로 쌓았다. 고창읍성에는 본래 민가가 거의 없고 관아 건물만 들어서 있었다. 다른 읍성들처럼 평지가 아니라 야산과 좁은 골짜기로 되어있어 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성 밖 평지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만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웠다. 전란으로 거의 불타 버렸던 22채의 관아 건물을 1976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해 현재 12채가 복원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복원할 예정이다. 고창읍성은 전국 읍성 가운데 가장 많은 관아 건물을 복원할 수 있는 곳이다. 성문 앞에는 신재효 고택인 ‘동리정사’가 있는데, 이 집은 읍성 아전의 살림집이 어느 정도 넉넉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민속자료이면서, 판소리 명창들을 키워낸 현장이기도 하다. 성문을 들어서면 쇄국정책을 내세웠던 대원군이 1871년에 세운 척화비가 서있다. 고창읍성은 부녀자들이 해마다 성밟기를 한다. 성을 밟으면 잔병 없이 오래 살고 극락에 간다는 속신이 있다.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고 한다. 고창군에서는 해마다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를 개최하여 답성놀이를 재현한다. 고창군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여인들이 잔병이 없기를 기원하며 성돌이를 한다.

 

(5) 무장읍성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고려시대의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현‘으로 합병했는데, 장사현이 바닷가에 있어 왜구들의 침략을 자주받자 내륙쪽으로 옮겼다. 이때 무장읍성을 쌓고 동헌과 객사를 새로 지었는데,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일대에 무장읍성이 있었다. 현재 읍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옛 건물 주위에는 다른 건물들의 유구도 흩어져 있다. 무장읍성은 지방기념물 제11호이다. 예전에는 흙으로만 쌓은 토성으로 알려졌지만, 몇 년 전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다가 성벽의 동쪽 끝부분 단면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객사는 1581년에 지었다고 하며, 높이 80센티미터의 돌축대 위에 세워졌는데, 돌계단에 호랑이 및 구름무늬 등이 양각되어있다.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4호이다. 동헌은 1565년에 지었는데, 정면 6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높이 45센티미터의 석축위에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관아 건물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기둥이 높은 편이다.

 

3. 읍성의 의의

 읍성은 지방의 주요 지역에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에는 한(漢)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토성이 남아 있고, 이 시기의 현에도 작은 읍성들이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다. 수도로서 나라의 중심이 도성(都城)이라면 군, 현의 주민들이 살면서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기능을 지닌 곳은 읍성이다. 그러나 모든 행정 중심지가 성곽을 두루는 것은 아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만 성곽이 설치되었다. 또 대개 군사방어 시설인 산성들이 산 정상이나 계곡을 끼고 설치되는 것에 견주어 행정중심지이고 주거지역인 읍성은 평지에 설치되었으니 해미읍성과 함게 낙안읍성, 고창읍성들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에 성곽이 세워진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이다. 초기에는 주로 도성이 세워졌고 삼국간이나 다른 민족간에 영토싸움이 벌어지면서는 산성이 많이 세워졌고 고려 시대까지도 그런 추세가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중앙의 행정력이 온 나라에 미치게 되고 외적에 대비한 방비도 겸하여 읍성이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이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9조 5소경이 있었고, 신문왕 때에는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이 것이 어떠한 형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분지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개축을 하여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주요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土築) 읍성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차츰 석축으로 고쳐지거나 호구(戶口)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옹성과 치성․해자를 만들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평지성인 읍성은 대개 지형에 맞추어 굴곡을 지닌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방에 문을 내는 것이 원칙이나 지형에 따라 2~3개소가 설치되는 수도 있었다. 성문에는 문루를 세워 위엄을 갖추고 성벽 곳곳에 여장(女墻)과 치(稚), 포대(砲臺) 등 부속시설을 하였고 성문이나 망루에 옹성을 치기도 했다. 또 성벽 바깥에 인공으로 해자를 파서 방어시설을 강화하기도 했으며 방어의 지속성을 위해 읍성 안에 연못과 우물도 준비하였다. 성안에는 중앙의 북쪽에 행정 중심 처소인 관아와 객사를 두었고 그 왼쪽에 향교를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 민가들이 있었다.

 읍성은 부(府), 목(牧), 군(郡), 현의 행정구역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에 차이가 있었는데 이 차이는 주민의 수효와 관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수원읍성,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낙안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 태조5년에 각도 민정을 징발하여 축성을 완료하였다. 처음에는 토축이었으나 나중에는 석축으로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성문과 성벽은 숙종, 영,정조 때에 수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조 초기 도성의 축조가 있은 뒤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북방변경에서는 적의 침략에 대비 행성의 축조가 성행하였다. 행성은 일정한 지역을 갈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성으로 행성을 여러 개 묶어 연결된 것을 장성이라 한다. 행성의 설치위치는 적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고개 마루지역을 차단하면서 수십 혹은 수백 리를 쌓은 것이다. 산지는 내외의 지반을 삭토하고 평지는 내외협축의 석축이었다.

 한편 여말 왜구 침입에 대비했던 읍성축조도 계속되었다. 특히 세종, 성종 때에는 읍성의 축조가 활발했는데 이 당시 읍성축조의 특징은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적은 것은 크기를 늘리는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읍성중 이 당시에 축조된 것이 많다.

 조선조 산성은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산성축조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유사시에 지세가 유리한 산성에서 오랫동안 항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말부터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종전의 방어시설도 개선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성곽의 방어시설물은 보강이 요구되어 읍성에는 적대, 여장, 옹성, 해자등은 규격화하게 되었고 성벽은 견고하게 하고 높이는 자연히 높아졌다.

 

Ⅲ. 결 론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읍성은 그 지역의 중심지였다. 동헌, 관청, 작청, 향청 등 대부분의 행정기관들이 모두 읍성내부에 존재하여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낙안읍성에서 당산제를 지낼 때 중당에서 먼저 제를 지낸다는 것이나 고창읍성의 성밟기, 정의읍성의 타 지역에 비해 활발한 연자매 등 지역의 특색을 만들어주고, 지역의 문화를 만드는 문화적 중심지의 역할도 했다.

 또한 경제의 중심지로써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는데, 각 지역의 읍성의 경우 내부에 수많은 민가가 있었을 뿐 아니라 매달마다 장시가 서는 등 경제활동이 활발했다. 일부 읍성의 경우에는 향교가 읍성 내부에 있어 교육의 중심지로써의 역할도 수행했다.

 읍성은 백성들의 삶이 중심지인 것과 동시에 그 지역 일대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요새였다. 유사시에 백성들을 수용하여 언제든지 농성이 가능하게끔 곡식과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늘 읍성 내부에 두고, 읍성 내부에 여러 개의 우물과 연못을 만드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다. 또한 주변의 성들과 연계하여 안정적인 방어태세를 갖추는 읍성은 국가의 가장 큰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노력한 제도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읍성은 지방의 행정, 경제, 문화적 중심지였고 백성들을 지키는 요새였다. 최근에 들어 전국 읍성의 복원사업이 활발한 이유도 당대의 사회의 모습을 파악하기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읍성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앞으로 이러한 읍성의 복원과 보존을 활발히 하여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반영환, 『한국의 성곽』,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2000

• 탐구당, 『한국사 27 조선초기의 문화Ⅱ』, 국사편찬위원회, 2003

• 柳在春, 『韓國 中世築城史 硏究』, 景仁文化社 , 2003

• 허경진, 김성철,『한국의 읍성』,대원사, 2001

• 손영식,『韓國城郭의硏究』,문화공보부,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