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癸酉靖難)에 대한 고찰

20070198 박지현

20090219 손원빈

《목    차》

Ⅰ. 서론

1. 수양대군 그는 누구인가?

2. 수양대군의 성장과 활동

 

Ⅱ. 본론

1. 계유정난 원인

1) 문종시대 수양대군의 활동

2) 단종의 즉위와 의정부의 국정 주도

2. 계유정난의 경과 및 결과

 

Ⅲ. 결론

 

※ 참고자료

 

Ⅰ. 서론

단종 원년 1453년 10월 10일 저녁. 그날 조선에는 한차례의 피폭풍이 휘몰아친다. 바로 수양대군의 주도하에 일어났던 계유정난이라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좌의정이었던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 영의정 황보인, 이양, 민신, 조극관, 윤처공, 이명민, 조번, 원구, 이현로, 김연등이 처형 되었다.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은 권력의 중점에 서게 되고 1455년 단종에게 선양을 받아서 왕이 되었다. 이때 중요한 논점이 제시되는 바, 정난의 성공으로 인하여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던 계유정난의 원인과 정난의 성공요인, 정난의 성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수양대군 그는 누구인가?

먼저 계유정난을 살펴보기 전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수양대군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양대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계유년의 정난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폐륜의 왕’이라는 호칭을 받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 씨이다. 세조대왕은 태종 17년(1417) 9월 24일에 태어났다. 12세인 세종 10년 6월 16일 대광보국 진평대군에 봉해졌다.

17세인 세종 15년 6월 27일 함평대군으로 개봉되었고, 다시 7월 1일 진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29세인 세종 27년 2월 11일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 39세인 세조 즉위년 윤6월 11일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선위 받아 조선 제7대 왕으로 등극했다. 예종 즉위년 9월 8일 수강궁의 정전에서 재위 13년, 춘추 52세로 승하하였다. 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2. 수양대군의 성장과 활동

정난이란 당시 정치권력의 중점에 서고자 하며 행하여진 행위이다. 즉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다는 소리이며 여기에서 무력이 존재하려면 어느 정도의 정치 활동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성장하면서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권력에 다가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초기에 수양대군은 이중지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왕의 자녀들은 신하의 집에서 양육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는 의견이 당시 상왕으로 있던 태종으로부터 제기되어 왕자와 공주로서 궁 밖에서 양육되는 자들은 모두 궁에서 양육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수양대군도 4살 경부터 궁에서 성장하였다. 12살 때인 세종11년 2월 세종이 평강(平康)에서 무술훈련을 할 때 수양대군이 사슴을 향하여 쏜 7발이 모두 적중하였으며, 그해 9월 수양대군에게 안평대군, 임영대군과 함께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시 수양대군은 궁마에 관심을 갖고 무인들과 힘을 겨루니 능히 따를 자가 없었고, 문종은 수양대군의 뛰어남을 칭찬 하였다고 한다.

세종 12년 5월 수양대군나이 13세 때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6세일 때 진평대군에서 함평대군으로 개칭하였으나. 4일 뒤 진양대군으로 다시 고쳐 봉하였다. 당시 중국 사신 맹날가래와 최진등이 돌아갈 때 세종은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송별연회를 대신 주관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수양대군은 세종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10대 후반 대에 부왕인 세종과 형인 세자의 건강상의 문제로 인하여 중국에서 파견되어온 사신들과의 중요한 연회를 대행 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수양대군은 자신의 외교적, 정치적 식견을 높이고, 경험을 확대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훗날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의 중국 대행길에서도 나타난다.

22세 때인 세종 21년에는 종부시(宗簿詩)의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종부시를 관장하였는데, 종부시는 종친들을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당시 종부시 제주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관장해 왔으나 병으로 그 이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워,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나이는 어리지만 수신(修身)의 법을 알고 있으므로 대신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10대에서부터 20대까지의 수양대군은 부왕인 세종의 의해 자기의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고, 중국 사진의 접대를 대행하는 정치 외교적 경험을 축척하였으며, 왕의 집안을 관장하는 종부시의 제주가 됨으로써 그의 객관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한 세종으로부터의 평과와 신임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집현전의 관료 및, 의정부, 육조, 그리고 승정원의 관료들과도 자연스럽고 원만한 교류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Ⅱ.본론

1. 계유정란 원인

 

1) 문종시대 수양대군의 활동

문종은 세종의 장남으로서 세종 말기부터 세자로서의 건강상의 문제를 심각히 내포한 채 세종 사후 왕위를 계승하여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완치되지 못한 신병으로 세종의 3년 상을 끝낸 그 해 5월 재위 불과 3년 만에 39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건강상의 문제가 불식되지 못한 가운데 문종이 즉위한 후 국정의 현안은 대외적으로는 북방문제였고, 대내적으로는 불교 논란이었다. 일국의 통치자로서 권력의 한정을 도모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여러 가지 효과적인 방안들을 강구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문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온건한 방법에 의해 실현시켜 나가고자 하였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례는 다음의 세 가지로 파악된다. 하나는 문종 즉위 후 집현전 관료들의 대간으로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그들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둘째로 육조 직계제의 시행을 이해하는 것과 세 번째로 집현전 관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주면서 측근 환관들을 총애하고, 그들을 중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던 환관 중용책이다.

이 기간에는 수양대군으로서도 세종조에서의 활발했던 활동이 현격히 자제 되면서 세종의 국상과 관련된 불사에 주로 참여하였고, 조선 왕조 개창 이후 종친으로서 유일하게 정부의 공식적인 사무를 관장하는 관습도감의 도제주에 임명된다든지 문종이 줄곧 관심을 갖고 추진하였던 국방력 증강 문제와 결부되어 여기에 깊이 관여하면서 실질적으로 병서 편찬과 교정을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군의 위치 자체가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는 권력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갖게 되고, 왕권과 직결되어 오해를 유발시킬 수 있는 개연성을 크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만, 문종을 조언하고 보필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고, 자기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공개적인 활동은 자제 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문종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으며, 수양대군에게는 문종연간이 내면적,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보다 깊이 더해가는 시기였다고 하겠다. 세종은 자기 사후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 수양대군을 공격하는 관료들이 있을 것임을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언급하면서 항상 친애의 마음으로 현혹되지 말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처신을 간절히 당부하고 있다. 문종 즉위 이후 수양대군은 세종의 유명을 명심하여 보다 신중히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자연히 그의 활동은 외형적으로 축소되고 있었던 것이다.

 

2) 단종의 즉위와 의정부의 국정 주도

문종이 뜻하지 않게 운명하고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했던 당시 상황은, 국내적으로 세종의 3년 국상이 겨우 종결되고 새로이 문종의 3년 국상이라는 국가적 불행이 거듭 발생된 어려운 시기였다.

내부적으로 연이은 국상으로 왕실 및 국가적 분위기의 침체와 일종의 위기의식을 동시에 수반하면서 왕권 역시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기에는 미약하고 불안정하였으며,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과 동요의 요인이 향존하여 고조될 수 있는 개연성을 심화시켜준 시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히 세종 후반 이후 긴장감을 고조시켜주었던 북방의 군사적 불확실성과 야인족의 침입에 따른 우려의 요인들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으나 단종 즉위 당시에는 그 이전에 비해 다소 평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문종이 운명한 4일 뒤 세자인 단종은 12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 하였는데, 단종이 즉위한 이후 국정 운영과 연관된 정책 결정에서 의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아가 결정적으로 처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문종 임종기와 단종 즉위후의 전후 상황을 고려해 보면 당연한 귀결로 보여 진다. 당시 단종은 국정 운영의 구체적인 구상과 시책사항들을 총 24조목으로 발표하였다.

① 대사령

② 의창 대여 곡식 3분의 1 감면

③ 관청 부채 탕감

④ 옥중 죄수 보호

⑤ 어려운 백성 구제

⑥ 효자 절부 표창

⑦ 긴요치 않은 토목공사 등 철폐

⑧ 부역 평균 부과

⑨ 농잠 학교 장려

⑩ 국방 방어 전력

⑪ 감사(監司) 임무 충실

⑫ 경연 강론

⑬ 모든 정사 정부 육조 논의 시행

⑭ 육조 직계제 폐치

⑮ 관료 임명 의정부와 의논

⑯ 모든 범죄 처벌결정 의정부와 의논

⑰ 승정원 임무

⑱ 대간 직언, 모든 사람의 진언 모두 청납

⑲ 대소신료 사적 붕당 엄벌

⑳ 군사관계. 대신의 집에 군사 출입금지

㉑ 공식적인 일과 승지들의 건의사항의 가부는 의정부 대신 논의

㉒ 이조, 병조의 집정관의 집과 정부 대신 및 왕실 모두 분경금지

㉓ 특별히 물품 하사시 의정부 논의 후 시행

㉔ 노리개감 등의 물건은 진상하지 말 것 등

 

이 중에서 일반적 민생 관련 시책들을 제외한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조목들을 살펴보면, 의정부의 권한이 대폭 강화 되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관료들의 대한 임면권의 실질적인 장악 등 의정부의 기능이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격하게 강화되고 있었다.

당시 의정부 당상관으로는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남지, 그리고 우의정 김종서 및 찬성. 참찬으로 정분, 이양, 허우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대간의 제의에 따른 분경금지 조치와 관련하여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공동으로 도승지 강맹경을 통하여 의정부에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단종 즉위 초기에는 왕을 형식적·상직적인 권력의 중심축으로 하여, 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인 관료 임면과 관련된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의정부의 당상관을 중심으로 이들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고 있었고, 승정원은 의정부와 동류 집단으로서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단종은 왕이었으나 실제 거의 모든 정사는 정난이 발생되기까지는 의정부 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왕은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였고, 왕의 의사가 승정원과 의정부에 전혀 수용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단종의 왕으로서의 한계 또한 여실히 표출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정국구도를 파악하고, 의정부가 국정의 최고기관으로 급부상된 바탕 위에서 의정부를 통하여 대간을 견제하고 있었고, 이것이 관철되면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정분, 정인지, 강맹경 등과 함께 세종의 능인 영릉의 형세를 관찰하고 승정원을 통하거나 또는 직접 단종에게 민간의 실정과 관련된 건의를 하고 있는 것 등이다.

단종 즉위년 7월 홍윤성이 수양대군을 방문하여, 세종, 문종이 연이어 운명하고, 지금 왕은 어리고 충성과 거짓이 섞여 있으며, 조정이 문란하다는 등 시국관을 피력하였을 때 수양대군은 사직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겠느냐고 그의 뜻을 확인하고 있었다. 8월에는 당시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그리고 전직 병조참판 황수신의 협조를 얻고 있는 사례들이 확인되는데 전반적인 특징은 당시 수양대군에 협조하거나 관계를 갖게 된 관료들은 세종 이래 집현전에서 각종 편찬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어왔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정국이 내면적으로 더욱 불안정하고 혼미하였으며, 관료들 간의 이해관계에 의한 냉소적인 분위기와 연계되어 종실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동조하는 관료 세력들이 서서히 이분되는 양상을 가져오고 있었고, 이 과정은 곧 양 대군 상호간에 있어서도 서로를 견제하고 불신하는 현상이 고조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안평대군의 핵심 측근이었던 이현로 사건이다.

단종 즉위년 8월 중국으로부터 단종을 정식 조선국왕으로 승인하기 위한 사신이 파견된다는 보고가 전달되었다. 당시 홍보인은 최근에 왕래하였고, 남지는 병중에 있었으며, 순서상 김종서의 차례였으나 그는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려 회피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자청하였는데, 황보인이 수양대군에게 완곡한 어조로 안평대군을 추천하였으나 수양대군의 논리적인 설명에 더 이상 안평대군을 추천할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도승지 강맹경은 수양대군을 단종에게 추천하였는데, 단종은 부마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추천하였지만 부마들은 모두 질병이 있어 어렵다는 강맹경의 의견에 따라 의정부에서 논의하게 하여 논란의 끝에 종실로서 선정한다면 수양대군이 합당하다는 의견으로 귀착됨으로 난항을 거듭한 이 문제는 수양대군으로 결정되었다.

수양대군의 중국 출국 일자가 가까워 오자 정계의 미묘한 분위기가 관료들의 이해관계 및 정치적 득실과 연계되어 갈등이 조성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사행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안평대군측의 불의의 사변을 사전에 봉쇄하고자하는 면밀한 대안을 신중하게 고려하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중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 평양 근교 순안으로 마중 나온 안평대군을 만나 언급한 내용은 수양대군의 귀국 이후 국정상황과 연계되어 당시의 사실을 이해 할 수 있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왕비를 간택할 것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이 구상은 중국을 다녀오면서 구체화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당시가 문종의 국상 기간이지만 왕의 대를 계승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소상 제사가 끝난 뒤에 단종에게 요청하겠다고 한 것은 단종의 혼례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이 귀국한 이후 정계의 기류는 안평대군 측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수양대군 측의 경계와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때 한명회는, 안평대군 측 역모를 폭로하지 않으면 의거한다고 하여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발언하고 있었다. 그래서 3월 21에는 한명회가 그의 옛 친구로 안평대군의 측근이 되어 있는 조번(趙藩)을 통해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파의 동정을 탐색하였다. 또 3월 22일에는 김종서의 문생으로 패악(悖惡)하여 김종서의 눈 밖에 나서 수양대군에게 포섭되어 있던 홍윤성(洪允成 1425~ 1475)을 충청도에 돌아온 김종서에게 인사 보내어 기밀을 탐지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안평대군과 함께 김종서과 연관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김종서는 자기의 정치적 지위와 기반을 확실하게 인정해 줄 수 있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묵인 하면서 합법화해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으로부터 훌륭한 평가와 신뢰를 받아왔고, 단종대에 들어서도 이현로 사건 때 대간으로부터 오히려 고명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던 수양대군에게서 자기의 부정과 비리를 묵인 받고 정치적 보장을 담보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수양대군의 판단력과 능력하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과의 결연은 서로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으며, 보다 용이하게 추진되면서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키 위한 준비와 시기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김종서의 안평대군에 대한 편향은, 세종 및 대간 등으로부터 간교한 인물로 평가된 이현로를 정직한 인물로서 평가하고 있었던 영향도 작용하고 있다. 이렇듯 수양대군의 행보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김종서 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7월 1일 허후(許詡)를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이조사로 삼고 이징옥, 김효성을 판중추원사, 박중림을 호조참판으로 하며 감종서의 장자인 김승규를 지형조사(知刑曹事), 황보석을 수사복시윤(守司僕侍尹)으로 삼아 조직적으로 수양대군의 반역을 차단하려 한다. 뒤이어 7월 28일 박중립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기는 것도 이런 차원의 인사이동이었다. 10월 2일 수양대군의 반역 음모가 누설되고 삼정승은 이를 징치하려는 대책을 논의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권람(權擥 1416~ 1472)이 수양대군에게 알렸다. 사료로 확인해 볼 때 10월 2일의 기록을 보면 황보인이 김종서를 만나는데 김종서는 비록 수양대군이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실질적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는 적극적인 주변 지지세력이 소수이며 가정하여 김종서 세력과 수양대군측의 물리적 대결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김종서는 우려하지 않았을 정도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에 권람과 수양대군의 대화를 살펴보면 ‘저들이 비록 알았다고 하나 의논하는데 3일, 경영하는데 3일, 약속하는데 3일 등. 총 8~9일은 소요될 것이니 10일을 넘기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였다.

2.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경과 및 결과

정난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그 주체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인원이었으며, 당일 초대된 사람들에게 저녁 무렵에야 계획을 전달하자 이때 이들 수십여 명 간에도 의견이 분분했음은 이 계획이 극소수에 의해 대단히 용의주도하고 신중하게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계획을 밝혔을 때 분분한 의견 속에서 한명회와 홍윤성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등의 조언에 수양대군은 단호하게 결행할 것을 천명하였으며, 집의 중문으로 나오니 부인이 갑옷을 입혀주어 평복 안에 갑옷을 입고 하인 임어을운을 거느리고 단기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람과 한명회는 지원 조치를 취하였다.

수양대군이 양정과 임어을운 등을 데려가 김종서와 그 아들 김승규를 살해하고 순청(巡廳)으로 돌아와 권람을 시켜 입직 승지를 불러오게 하였다. 승지 최항에게 전후 사정을 전달하고 환관 전균으로 하여금 단종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연루자들을 처벌함으로써(황보인・김종서・김승규・이양・민신・조극관・윤처공・이명민・조번・원구・이현로・김연 등은 처형되었다.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은 강화에 유배되었고, 지정은 영암에 안치되었으며, 정분은 낙안, 조수량은 고성, 이석정은 영일, 완완경은 양산, 한숭은 어연의 노비, 황귀족은 강계의 노비로 가게 되였다. 경성도호부사 이경유는 참하고, 함길도도절제사 이징옥은 평해에 안치시켰다.) 정난은 10월 10일 저녁과 11일 새벽에 사이게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종 즉위 당시 모든 권한을 의정부에 위임하였던 것과 같이 국방과 국정의 중요한 일들을 모두 수양대군에게 위임하여 총괄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다음날 11일 단종은 사건의 전말과 함께 안평대군은 지친(至親)으로 차마 처단하지 못하고 안치시키는 한편, 친정(親政)할 때까지 숙부 수양대군이 정치를 보좌하면서 군국중사(軍國重事)를 모두 위임받아 처리할 것을 지시하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안평대군 처벌 문제는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 및 육조에서 규정대로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우사간 성삼문 등 대간에서도, 박팽년 등 승정원에서도 그의 처벌을 요청하는 거듭된 건의로 결국 안평대군은 사사(賜死)되었다.

정난 후 대폭적인 인사 임명이 단행 되었다. 정인지가 좌의정으로 임명되어 수양대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당시 주요한 관료임명을 살펴보면, 의정부에서 정인지와 좌찬성으로 임명된 이사철, 이조판서 정찬손, 병조판서 이계전, 도승지 최항, 우승지 신숙주, 좌부승지 박팽년, 사헌부 집의 이개, 사간원 좌사간 하위지, 우사간 성삼문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정난 전에는 황보인, 김종서의 전횡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상황에서 정난 후 요직에 기용되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정난에 적극 가담하거나 구체적 협력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권력 상층부의 고체에 대하여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즉 정난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호응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Ⅲ. 결론

이광수가 『연려실기술』을 토대로 기술한 소설인 『단종애사』적인 정서대로 계유정난을 수양대군이 왕이 되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비판되어 진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는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한 소수 측근들에 의해 당시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 등과 연계된 안평대군 세력들을 사전에 제압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계유정난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일단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의 지위가 확고해 졌다는 점과, 조선의 제 7대왕 세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양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바로 세조가 중국으로 갔을 때이다. 이때 세조는 명나라의 사은사로 갔을 때 태종의 왕릉 참배에 가서 다짐했다는 일화이다. ‘명나라도 되는데, 조선에는 안 될 게 없다. 나도 조선의 영락제가 되어 조선을 부강한 나라고 만들 것이다.’라는 일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화에 비추어서 권력의 정점에 서고자 했던 수양대군이라면 한 가지 모순점이 발생된다. 바로 단종의 왕비 책봉 문제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자 마음먹었으면서 단종의 왕비 책봉식을 추진했던 이유이다. 이는 단종즉위년부터 계속 되어왔던 논의였으며 정난이후로도 추진되었던 논의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였을 때 지금의 왕에게 결혼을 추진한다는 것은 자신의 입자 강화가 아닌 왕의 입지 강화를 위해서 행하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왕비책봉 요청과 정난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정국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희생자이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추종하는 관료사회의 속성 속에서, 특히 시류에 영합하는 관료들의 이간질에 안평대군이 현혹되어 무비판적으로 그들에 동조 편승하여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였던 희생자였으며, 수양대군은 이광수의 왜곡되고 편향된 소설 속에서의 서술이 어떠한 비판이나 객관적인 검증 없이 그대로 수용되어 역사적 진실인양 한국인들에게 인식되어 왔다는 측면에서 현재까지도 역사의 희생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따라서 용어자체의 의미를 파악해 봐야 될 것이다. 바로 위난(危難)을 평정한 것이라는 뜻인 ‘정난(靖難)’의 의미 차제로 이제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1)『세종실록』, 조선왕조실록

2)『문종실록』, 조선왕조실록

3)『노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4)『세조실록』, 조선왕조실록

5) 최정용 지음. 『수양대군 다시 읽기』학민사. 1996

6) 지두환 지음.『세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7) 문효 지음.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왕의 서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