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향교에 대한 고찰

20070270 최종윤

20081158 정정훈

20090247 이정원

 

 

Ⅰ. 서론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학교는 중앙에 설치된 관학(官學)으로써 귀족의 자제를 교육시키던 일종의 관리 양성 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경당(扃堂)’ 에서는 서민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인 향교가 등장하였다. 이 논문은 지방교육기관인 향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먼저 향교의 기원에서부터 출발하여 향교의 구성 및 여타 기능과 함께 더불어 향교의 역사적 의의까지 확인하고자한다.

 

Ⅱ. 본론

 

1. 향교의 변천과정

1) 향교의 기원

각 지방에 학교가 생긴 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를 그 기점으로 볼 수가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면 지방 학교를 대표하는 관학인 ‘향교(鄕校)’ 와 사립인 ‘서원(書院)’ 이 있었다. 이들 향교와 서원은 설립 주체나 ‘배향(配享)’ 인물, 설립 시기 등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형태나 기능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향교는 고려조에 설립되었으나 무신집권기와 몽고와 왜의 침입 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에 지방관과 유생들의 노력에 의해 점점 그 기능을 회복하고 숫자도 증가하였다. 즉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을 모든 백성에게 보급시키기 위한 ‘1읍 1교 (一邑一校)’ 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향교는 대부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는 향교는 남한에 231개가 있으며, 북한에도 1950년 이전까지 많은 수가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전국의 향교 현황

시도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향교수

1

2

3

4

1

2

2

25

16

18

36

26

28

39

25

3

231

 

2) 향교의 구성

향교 건물은 크게 선현에 제사지내는 배향 공간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 사이는 담을 쌓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향 공간에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대성전은 대성(大成)을 의미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던 건물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4성과 공자의 제자 등도 함께 봉안하게 되었다.

향교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 규범을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에 향교 건물의 건축 양식에서도 위계(位階) 질서를 찾아볼 수 있다. 대성전과 동·서무는 명칭에서부터 ‘전(殿)’ 과 ‘무(廡) 의’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다. 즉 5성을 모신 대성전은 대궐을 뜻하는 전의 개념을, 제현과 우리나라의 18현을 모시는 동·서무는 행랑을 뜻하는 무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향교의 교육 공간으로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다. ‘명륜(明倫)’ 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등문공(騰文公)」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즉 명륜당은 스승과 학생이 모여서 교육을 하는 곳이며, 일반적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는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명륜당이 교육 장소인 동시에 교관의 거처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교 정면 가까운 곳에는 대개 홍살문(紅箭門)과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한 나무문으로 선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나 왕릉 등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표시물이며, 하마비는 궁궐·종묘·문묘·성현의 탄생지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게 한 것이다.

한편 현존하는 향교 안이나 부근에는 양사재(養士齋), 흥학재(興學齋)등 향교의 교육기능을 회복하고자 지방관이 별도로 세운 조선 후기 건물들이 있다.

 

3) 향교의 운영

조선 초기에 각 군현에 향교를 설립하면서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였는데, 이들로 하여금 교생 교육은 물론 향교 운영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방 유생의 향교 기피와 교관의 질적 저하 등으로 향교 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조선 후기에는 교관 파견이 중단되었다. 대신 그 지방에서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을 뽑아 교육은 물론 향교 운영을 담당하도록 했는데 이들을 통틀어 교임이라고 한다.

교임들은 지방 유생들이 회의를 통하여 뽑고, 수령이 이를 승인하는 형태였다. 이것은 당시 향교 교육을 관에서 명목상으로만 관장하였고, 실제 운영은 그 지방 양반들이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임에는 서열에 따라 도유사(都有司) 장의(掌儀), 유사(有司)등으로 구분되었다. 교임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도유사는 지역별로 전교(典敎), 교장(校長)등으로 다양하게 불렀으며, 그 지방 수령이 도유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도유사는 향교를 대표하여 교임을 총괄하고 교생 교육을 비롯한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장의는 대개 두 명으로 동재와 서재로 구별하여 호칭하기도 했고, 담당하는 역할에 따라 청금장의(靑衿掌儀), 전곡장의(典穀掌儀), 과자장의(科資掌儀), 학고장의(學庫掌儀)등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 또 서열에 의해 수장의(首掌儀), 부장의(副掌儀)로 구별하였는데, 이것으로 장의 사이에 역할 분담과 서열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장의는 향교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은 실질적인 관리자였다.

유사는 가장 직위가 낮은 교임으로 색장(色掌), 재유사(齋有司)등으로 불렀다. 이들 유사는 문묘를 지키고 배향에 필요한 물건을 관리하고, 서책을 보관하는 등 향교 운영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맡은 역할에 따라 각각 전유사(典有司), 섬학유사(贍學有司), 유학유사(儒學有司), 용마유사(龍馬有司), 학유사(學有司), 학고유사(學庫有司) 등으로 구별되었다. 그리고 향교를 옮기거나 중수·중건할 때 일시적으로 중수유사(重修有司), 영건유사(營建有司) 등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향교 노비로는 대성전을 지키는 전직(殿直), 동·서재를 지키는 재직(齋直), 제기고를 지키는 고직(庫直), 산을 지키는 산직(山直)등이 있었으며 노비 가운데 우두머리를 수노(首奴)라 하였다.

 

4) 향교의 변화

향교는 고려시대에 설립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1읍 1교’ 의 원칙으로 전국에 세워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변화를 보였다. 조선 전기에는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여 향교 운영은 물론 교생 교육을 담당했으나 후기에는 교관 파견이 중단되고 그 지방에서 교임을 뽑아 운영과 교육을 맡게 하였다. 또한 전기의 교생은 양반과 양인의 구별이 없었으나, 후기에는 양반 자제들은 동재에 기거하고 평민들은 서재를 사용하는 등 신분상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향교와 별도로 양사재를 세워 교육 기능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사족들이 향촌에서 공론을 형성하는 근거지가 되었으며, 이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서원은 그 숫자에 있어 향교의 3배에 달했는데, 관학인 향교를 상대적으로 침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다가 고종이 즉위하면서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고 관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향교를 보수하여 사족들을 향교에 수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학 진흥 정책은 개항 이후 어지러운 정국과 서구 문물의 갑작스런 유입에 따른 향교 유림의 위정척사 경향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향교는 더욱 피폐해졌고, 갑오개혁이 단행됨에 따라 관학으로서 교육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에 유림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를 확보하고 옛날 교육 기관으로서 향교의 기능을 되찾기 위해 자구책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서당 설립으로 나타났다. 서당은 비록 근대적인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신식 교육 기관이 설립되기 전까지 외세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을 양성했던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항 이후 유림들은 대체로 근대 학교 설립에 반대하였으나, 1895년 소학교령(小學校令)이 발표되고 1905년 이후에는 사립학교가 증가하자 점차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유림들은 여전히 보수적이었지만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향교 설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 향교를 설립하거나 향교의 재산을 바탕으로 하여 사립학교가 설립, 운영되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향교 부지를 떼어 주기도 하고 일부 건물을 헐기도 하는 등 학교의 재원으로 사용되어 향교의 경제적 기반은 한층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뒤에는 향교의 지위와 역할이 완전히 변질되었다. 1911년 일제는 ⌜경학원규정(經學院規程)⌟을 발표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을 박탈하고 단지 선현에 봉사하는 사회 교화 기관의 역할만 수행하도록 하였다. 성균관과 향교를 통제하던 경학원은 총독부의 감독을 받으며, 총독의 추천을 받은 유림으로 하여금 향교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일본 천황이 하사금을 내려 석전을 거행하게 하는 대신 그 대가로 향교 재산을 일제가 관리하였다.

1915년에는 ⌜향교재산관리규정시행규칙⌟이 발표되어 석전제조차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거행하게 되고, 향교 건물의 보수도 군수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1920년대 유림 단체들이 향교 재산의 운영권을 되돌려줄 것을 총독부에 요구하는 ‘향교재산반환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나, 총독부에서는 1920년 ⌜향교재산관리규칙⌟을 발표하여 교육비로 전용되던 항교 재산의 수입을 향사 비용에 충당한다고 개정함으로써 유림의 움직임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또한 향촌 사회에서 유림이 가지는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식민지 통치에 순응하는 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친일 유림 단체를 결성하도록 지원하였다. 즉 공자교회, 유도진흥회, 유도선명회, 대동사문회 등은 총독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거나 친일파들로 구성된 단체들이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시 체제에 돌입, 조선에 대해 국가 총동원령을 내림으로써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본래 일제는 향교를 학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유림들을 식민지 통치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하기 위해 유교를 종교 단체로 인정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향교는 전쟁 수행을 선전하는 기구가 되어 갔고, 친일 경향의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가 조직되었다. 일제침략기 말기의 국가 총동원 체제에서 향교와 유림은 다른 종교 단체와 마찬가지로 전시 체제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일제 말 전세가 기울어진 뒤 향교의 재산 관리와 인원 규정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을 뿐 교육 기능은 완전히 상실한 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향교는 선현에 대한 향사 기능만 유지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지나친 사대주의를 지양(止揚)하자는 민족적인 자각과 재정상의 이유로 문묘 배향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즉 1949년 전국 유림대회가 열렸을 때, 5성과 송조 2현의 위패를 제외한 113위의 위패를 없애고, 우리나라의 18현도 대성전으로 옮기기로 결의하였다. 또 봄․가을에 거행하던 석전을 폐지하고 공자의 탄생일인 음력 8월 27일에만 한 차례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10여 년 시행되다가 1961년 공문 10철과 송조 4현의 위패를 복위시키고 봄․가을 석전도 종전대로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향교에서는 봄․가을에 석전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실시하고 있다.

 

2. 향교의 경제적 기반

1) 향교전

향교뿐만 아니라 어떠한 단체나 조직을 운영,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력과 경제력을 필요로 한다. 향교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은 국가에서 내려준 토지와 노비였다. 조선시대 향교전(鄕校田)은 교생 정원과 마찬가지로 향교의 크기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지급하였는데, 석전(釋典) 제향을 위한 위전(位田)과 교생 교육을 위한 늠전(廩田)으로 구분되었다.

조선 후기 각 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향교전을 보면 지역에 따라 차이를 나타낸다. 즉 국가에서 지급한 것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가 하면 그보다 미달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향교도 있다. 국가에서 지급한 도지에 미달되는 것은 토지를 판 경우이다. 반면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향교는 다양한 방법으로 토지를 조성하여 향교전을 만든 경우이다. 이것은 지방 교육 육성에 관심을 가진 수령이 금전을 기부하는 경우나 지방 유림들이 자기 소유의 전답(田畓)을 기증하는 경우, 또는 기금을 모아 이자를 불리다가 토지를 매입하는 경우이다.

 

2) 향교 노비

향교 노비는 조선 초에 여러 차례 변동이 있다가 경국대전에 부명, 대도독부 목 25명, 도호부 20명, 군현에 10명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노비가 지급되지 않은 향교에는 국가의 군역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부담을 지고 향교에 투탁(投託)하는 노비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 향교 운영의 기반이 되었던 향교 노비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폭 감소하는 것은 당시 신분제가 완화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사회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비가 부복한 향교에서는 일반인을 고용하였는데 , 이들은 직역(職役)을 해주고 향교로부터 급료를 받거나 향교 전답을 빌려 경작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3) 지방관의 보조

조선 왕조는 향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령을 통해 지방의 교육을 강화하였다. 즉 학교의 흥폐(興廢) 여부를 수령에 대한 고과기준으로 삼았으며, 태종 때에는 흥학을 지방관이 수행해야 할 일곱가지 중요한 임무중 하나로 규정하였다. 또한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에는 대성전의 공자를 알현하도록 했으며, 교관의 근무 태도와 생도의 교육성과를 관찰하게 하였다.

지방관이 향교에 전곡(典穀)을 보조하는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향교를 중수하거나 중건할 때 필요한 경비를 지방관이 부담하는 경우, 지방 유생들은 중수비에 그 내용을 기록하여 뜻을 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향교에서 이미 팔아버린 토지를 매입해 줌으로써 향교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일정한 양의 기금을 내어 이자를 불림으로써 제반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4) 원납

향교를 수리하거나 중수할 때 지방 유림들이 돈을 거두어 경비를 부담하는 것을 유전(儒錢)이라 한다. 이때 일반 평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유림들보다 적은 돈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스스로 토지나 거금의 돈을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원납(願納)이라 하였다. 향교에서는 원납을 받아들이고 이들에게는 물론 자손까지 군역이나 잡역 면제의 혜택을 주었다. 원납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전에는 이름 있는 가문이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원납을 통하여 하층민과 함께 잡역에 동원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향촌사외에서 선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는 다른 형식의 원납이 있는데 그것은 돈을 내고 향교에 입학하는 원납교생(願納校生)이다. 향교에서 이들 원납교생을 모집한 것은 향교 건물을 개수하거나 중수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담하기 위함이었다.

이밖에 향교의 재정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교촌(郊村,향교부근의 마을이며 향교의 경제적 부담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나머지 잡역에서 면제), 제역촌(除役村,군역 환곡 민고 잡역 등의 주담을 면제해주는 대신 향교에 일정한 부담), 속사(屬寺)의 공납(속사는 지방관이 관청이나 향교, 서원 등에 이용되는 물자를 납부하도록 한 사찰을 말함) 등이 있다.

 

3. 향교의 기능

1) 문묘향사

조선 후기에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의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향교가 존속하게 된 이유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행사가 석전제(釋奠祭) 이다. 석전은 봄, 가을인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에 올리기 때문에 정제(丁祭) 또는 상정제(上丁祭) 라고도 한다. 석전은 원래 산천이나 묘사, 또는 학교에서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올리던 제사의식을 일컬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학교에서 지내 지내는 것에 한정하고 있다. 향교에서는 이 밖에 대성전의 수리 등으로 신위를 일 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복귀시킬 때 고유제(告由祭)를 올렸으며, 향교가 갑자기 재화를 당했을 때에는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였다.

 

2) 교육의 기능

향교는 처음에 향촌 교화와 과거를 통한 인재 양성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건립되었기 때문에 향교 교육은 제도적으로 과거 제도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문과와 무과)로 구분되었고, 시험 과목에 따라 유교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명경과(明經科)와 시문을 짓는 제술과(製述科)로 나뉘었다. 소과에서 명경과 합격자인 생원과 제술과 합격자인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300일 동안 공부한 뒤에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향교나 서원의 학생들은 과거 급제를 목표로 공부했기 때문에 교육 과정도 과거에서 출제되는 시험 과목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향교의 교생들은 자신이 배운 과목에 대해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이것을 당시에는 고강(考講)이라 했으며, 공부한 내용으로 시험관과 문답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향교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었다고 해서 지방 양반들이 향교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향교 대신 교육 기능을 담당할 기구를 필요로 하였고, 학교 부흥에 관심이 많은 지방관의 지원을 받아 교육장을 마련한 것이 양사재였다. 그리고 과거 1차 합격생으로 이루어진 사마재가 양사재보다 상급교육기관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향교를 대신하여 세워진 양사재와 사마재는 대체로 활동이 지속적이지 못하였고, 향교는 이제 제향을 위한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3) 사회 교화 기능

문묘에 대한 향사(享祀), 교육기능과 함께 향교는 풍화지원(風化地源)으로써 향촌 사회를 교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석전이나 삭망 분향 등 문묘향사도 사회 교회 기능이라 할 수 있지만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을 상대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미풍야속을 장려하려는 사회 교화 기능과 구별하여 설명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향교는 향약을 주관하여 실시하였고,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함으로 지방의 풍속과 기강을 확립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향약이 관의 주도로 실시되었으므로 관립 교육 기관인 향교가 그 중심 기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으며, 정조대가 되면 국가에서도 향약의 중심기구가 향청에서 향교로 옮겨진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즉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향교는 향약의 중심 기구로 자리 잡았으며 향교가 퇴폐한 지역에는 서원이나 향청에서 주도하여 향약을 실시하였다. 향교에서는 향약을 통하여 전통적 관습에서 벗어난 자에게는 벌을 주고, 효자나 열녀는 표창하기도 하여 향촌민을 교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향촌의 사회교화 기능은 당시 위정자의 의식이나 관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관찰사가 관할하는 군현을 순방할 때 또는 수령이 부임지에 부임할 때나 교체되어 돌아갈 때 반드시 향교를 찾아 예를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사당에 알리기에 앞서 향교에 들러 제향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대부분의 향교에서 아직도 시행하고 있는데, 시장이나 군수가 부임할 때 문묘에 참배하며 봄, 가을에 거행되는 석전제에도 초헌관으로 참석하고 있다.

 

4. 향교와 서원의 차이

모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국민에게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도 새로운 정권을 세우면서 과거 불교의 이념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이념인 유교 특히 주자학을 전파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시하였던 정책은 교육이었다. 조선정부는 국초부터 충과 효 등의 유교이념을 잘 표현하고 있는 '소학'이나 '삼강행실도'를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념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교육기관이다. 조선왕조는 초기에 국가 교육기관인 향교를 전국에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향교에서 경서를 가르치기 전에 소학을 가르치라고 할 만큼(한국의 향교/97) 향교를 통하여 유교이념을 보급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아 초기부터 교육정책은 삐거덕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실패는 다른 교육기관의 발생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도학적 목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서원이다. 서원의 발생 원인은 공교육기관인 향교와는 다르고 그 교육의 목표도 달랐다. 서원은 철저하게 주자학의 근본원리인 수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서원은 초기에는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은 17세기를 기점으로 보수화하여 결국 고종 6년 서원철폐를 당하고 조선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5. 향교의 역사적 의의

향교는 우리나라 전통시대에 지방에 설립되어 국가에서 운영하던 중등 교육 기관이다. 향교가 전국적으로 ‘1읍 1교’의 원칙으로 운영된 것은 14세기 말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부터이다. 조선 왕조는 유학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아 숭유배불 정책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하고 유학의 소양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였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향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시대 향교는 교육 기관일 뿐 아니라 종교적 기능, 사회 교화 기관, 공론 소재처,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서 차지하는 영역이 넓었다. 중앙 집권제 전제 군주 국가였던 조선 왕조의 지방 제도는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하여 중앙 관료인 수령을 지방에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향교도 제도적으로 교관이란 중앙 관료가 파견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향교의 유지와 운영을 위하여 국가에서는 토지, 서책, 노비를 지급하였다.

조선시대 교육 제도에서 관학은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과, 중등 교육 기관으로 중앙에 4학(四學)과 지방에 향교가 있었다. 사학은 중등 교육 기관인 서원과 초등 교육 기관인 서당이 있었다. 향교는 양반과 양인을 불문하고 서당을 거친 자제들을 교생으로 받아들여 과거 시험에 대비하고 유학의 소양을 갖춘 선비를 길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운영하였다. 교생은 군현에 따라 정원이 달리 책정되어 있었으며 일정 기간 교육을 받으면 초시(初試, 생원․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이에 합격하면 성균관 유생으로 입학이 허용되며 대과(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교생은 향교 재학 기간 동안 국역이 면제되는 등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향교는 이러한 기능뿐만 아니라 그 지방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유풍을 진작시켜 미풍약속을 고취시키고 도의 생활을 앙양하는 교화 사업도 펄쳤다.

 

Ⅲ. 결론

조선시대 향교는 정치를 담당하는 관아(官衙)와 함께 교화를 담당하면서 향촌 사회를 운영하는 등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들어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문묘에 제사지내고 사회 교화를 담당하는 곳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또한 사학인 서원의 숫자가 크게 늘면서 상대적으로 침체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오늘날 향교는 지역 주민을 위해 충효 교실을 개설하는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비록 초기의 설립 목적과 비교하여 지위와 역할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여전히 선현에 대한 향사를 주관하고 지방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등 그 기능과 역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 참고문헌

1) 김호일 저, 『조선후기 향교조사 연구』, 중앙사론, 1985

2) 윤희면 저, 『조선후기향교연구』, 일조각, 1990

3) 김호일 저, 『한국의 향교』, 대원사, 2000

4) 보인회 편역, 『교궁기집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5) 김세봉 저, 『향교의 전국 분포 및 역사』, 동양고전학회, 2010

6) 박흥규 저, 『조선시대 향교의 발달과 현황에 관한 연구』, 전라남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