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의 발자취를 따라서

20070253 정광운

20081086 김영훈

20090244 이동희

- 목    차 -

 

Ⅰ. 서론

 

Ⅱ. 율곡 이이의 생애(生涯)

1, 율곡의 탄생(誕生)

2. 입지기(立志期)

3. 출사기(出仕期)와 은거(隱居)

4. 탄핵(彈劾)과 죽음

 

Ⅲ. 율곡 이이의 사상(思想)

1. 율곡 이이의 이기론

2. 율곡 이이의 인성론

3. 율곡이이의 정치사상

 

Ⅳ. 율곡 이이의 저서(著書)

1. 율곡전서 수록 저서

2. 기타 저서

 

Ⅴ. 결론

 

※ 참고문헌

 

 

 

Ⅰ. 서론

율곡 이이(李珥)는 조선시대 중기의 유학자로 퇴계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조 유학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정치, 경제, 문화, 사상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불교와 도교, 성리학의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한 영역에 대해 탐구하고 정리하고 있다. 지방에 향약을 실행하여 미풍양속의 문화를 지역사회에 심으려 하였고 임진왜란이 발생할 것을 9년 전에 예견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는 등 그의 천재적 재능은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고 율곡 자신의 저서에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부터 조선 중기의 한 선비를 탐구해 나가고자 한다. 여기서는 율곡의 탄생으로부터 죽음까지의 생애, 그리고 율곡의 사상과 사회개혁의 업적, 그리고 그가 세상에 남긴 저서를 소개하여 율곡 이이가 현재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를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Ⅱ. 율곡 이이의 생애(生涯)

 

1. 율곡의 탄생(誕生)

율곡 이이(李珥)는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 외가인 강릉부 북평촌(현재의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이고 그의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 씨(申氏)이다.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안정된 가정 분위기 속에서 건실하게 성장하였다.

율곡의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라고도 부른다. 그의 어린 시절 불리던 이름은 현룡(見龍)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율곡이 태어나기 하루 전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 쪽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있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의 본명은 이이(李珥)이다.

그의 아버지 이원수는 비교적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으며 그의 성격이 착실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였다. 당시 6품관인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사임당은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딸로서, 율곡의 어린 시절 인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인자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자상한 보살핌과 외가의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6세까지 성장하였고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학문적 독창성과 명철한 현실 분석력을 키우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입지기(立志期)

1541년(중종 36) 율곡이 6세가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외가를 나와 한양에 있는 본가로 돌아온다. 당시 병조판서 김안국(金安國)이 태지(苔紙)를 만들고 유교 교과서인 4서 3경을 많이 간행하여 지방의 선비들에게 보급하였는데 율곡이 4서 3경을 어린나이에 접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틈틈이 글을 배워서 한문의 원리를 깨우치고 4서를 이해하였다. 「진복창전(陳復昌傳)」은 율곡이 남긴 최초의 문장이다. 그 밖에 경기도 파주(坡州)의 율곡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한문으로 된 시(詩) 한편을 지었는데 그 정감이 애틋하여 세상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율곡의 언어능력은 그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하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어머니의 죽음

1548년(명종 3) 율곡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 그는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하며 그 이름이 서서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51년(명종 6)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이 상을 당한다. 사임당은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모셔졌고 율곡이 이곳에서 여막생활을 하면서 3년간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다. 당시 어린 율곡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여막생활 때문에 별다른 스승을 두지 못하고 혼자서 학문에 매진해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생(生)과 사(死)의 대해 고민하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봉은사에서 불교서적을 탐독(耽讀)한다.

 

2) 금강산 입산(入山)

1554년 율곡의 나이 19세에 3년 상을 마친 율곡은 금강산으로 입산한다.

율곡의 입산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은 불교에 심취하여 그것을 탐구하고 철학적 동기를 얻으려 하였다는 해석과 어머니 사임당의 죽음으로 급변한 가정 사정의 이유의 2가지로 나누어진다.

입산한 율곡은 불교에서 행하는 참선으로는 그 진리의 본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불교의 진리를 찾는 것에 실망하였다.

1555년 (명종 10) 불교공부를 마치고 하산한 율곡은 강릉에 있는 외가로 돌아와 유학공부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짓는다.

 

3) 퇴계(退溪)와의 만남

1558년 (명종 13) 율곡의 나이 23세에 역사적인 두 학자가 만나는 날이다. 당시 퇴계는 사직하여 경상도 안동에서 후생을 양성하고 있었다. 율곡은 경상도 성주(星州)에 있는 외가의 들렀다가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인 예안(瘞安)에 있는 퇴계를 만나보고자 하였다.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단 사흘간에 불과했고 그 이후 율곡은 퇴계에게 편지하면서 불교에 빠졌던 일을 반성하거나 성리학에 대한 열띤 토론주제를 올리고 퇴계는 이에 답변하는 5통의 편지가 왕래하였다.

퇴계는 밝고 총명한 젊은 이이에 대해서 당시 제자인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곡에 대해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으로 극찬하였다.

그 후 율곡과 퇴계의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조선의 뛰어난 두 학자의 대면은 역사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3. 출사기(出仕期)와 은거(隱居)

그의 첫 과거시험은 13세의 나이에 치룬 진사과 초시에 합격한 것이었다. 장원합격은 아니었으나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시험은 1556년 21세의 나이로 한성부에서 실시한 한성시(漢城試)로 장원으로 뽑힌다. 끝내 1564년 그의 나이 29세에 천도책(天道策)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답안지로 생원, 진사과의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해 대과(명경과)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이마저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를 마지막으로 총 아홉 번의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였다.

명경과에 합격한 율곡은 호조좌랑으로 관식생활이 시작되고 30세에는 예조좌랑, 33세에는 사헌부 지평(持平)의 관직에 오른다. 같은 해 이조좌랑으로 관직을 옮기고, 다음 해 교리(校理)의 명을 받는다. 1568년 (선조 원년) 율곡은 서장관(書狀官)의 임무를 맡고 북경(北京)으로 출장을 떠나기도 한다. 1569년 홍문관의 교리에 임명받아 서울로 왔다. 1570년 35세의 나이에 청주목사(淸州牧使)의 명을 받아 그 곳에서 손수 향약(鄕約)을 지어 주민들의 교화에 진력하였고 37세에 신병으로 목사직을 사임한다. 38세에 직제학(直提學)의 명을 받고 선조에게 선정(善政)이 펼쳐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간언(諫言)한다. 39세 되던 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고 40세가 되던 해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의 명을 받는다. 41세에 모든 관직에서 은퇴할 것을 결심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간다. 이후 율곡은 47세 탄핵 전까지 이조판서, 형조판서, 원접사, 병조판서의 임명되어 사회개혁에 매진하였다.

 

4. 탄핵(彈劾)과 죽음

48세의 율곡은 삼사(三司)로부터 터무니없는 탄핵을 받는데 그 내용은 율곡이 국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고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것이다. 율곡의 억울한 탄핵에 우계(牛溪)는 삼사의 모함을 선조에게 상소하고 태학생(太學生) 460여명이 율곡에 대한 삼사의 모함을 상소하면서 삼사의 모함을 꾀한 관리들이 모두 귀양을 가게 된다. 선조는 다시 율곡을 이조판서로 명하였지만 율곡의 건강상태는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1583년 10월 율곡은 직책에 부임하였는데 이는 율곡의 건강상태의 악화의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기회였다. 그는 10만양병설을 주장하여 국가 군대의 강성을 꾀하였다.

율곡이 죽기 3개월 전 10년 동안 알고 지내온 유지(柳枝)라는 기생(妓生)과 함께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녀에게 시를 한편 남겨준다. 그리고 1584년 1월 16일에 별세하니 그의 나이 49세였다.

 

 

Ⅲ. 율곡 이이의 사상(思想)

 

1. 율곡 이이의 이기론

율곡은 상이한 개념의 이와 기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표현한다.

 

1) 이기지묘(理氣之妙)

율곡 이전에 퇴계 이황은 이(理)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고, 또 화담 서경덕은 기(氣)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 율곡은 이(理)와 기(氣)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와 기는 서로 떠나지 않는 불상리(不相離) 관계와 서로 섞이지 않는 불상잡(不相雜)관계를 지속하며 이것이 이른바 이기의 묘합이라 하겠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리 체계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유곡이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중국유학에서는 기(氣)를 이(理)의 하위개념으로 보아 종속시킨 반면에, 율곡은 이(理)와 기(氣)를 똑같이 대등하게 두었다.

2) 기발이승(氣發理乘)

율곡이 이(理)와 기(氣)의 묘합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理)와 기(氣)가 각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기발이승이란 발하는 ‘기(氣)’ 위에 ‘이(理)’가 올라탄 상하의 존재구조를 말한다. 율곡은 자연세계를 막론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구조를 기발이승으로 일관하여 설명하였다. 기발이승은 ‘기(氣)’는 발하는 것이지만 ‘이(理)’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율곡이 말하는 ‘이(理)’는 그 자신이 발하지 않지만 기발의 원인이 되고 주재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理)’의 발을 부정하기 때문에 기발이승으로서 존재 구조의 형식을 삼는다.

3) 이통기국(理通氣局)

이(理)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이고, 기(氣)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국한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理)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고, 기(氣)는 언제 어디서든지 한계가 지워지고 국한된다는 의미이다. 이통기국(理通氣局)에 따르면 기(氣)가 만가지로 다른데도 근본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이(理)의 통함 때문이며, 이(理)가 하나인데도 만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은 기(氣)의 국한됨 때문이다. 즉,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속에서 항상 보편적인 이(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은 ‘이무형(理無形)’, ‘기유형(氣有形)’의 개념을 통해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관계성 속에서 이와 기를 유기적으로 통찰한 표현이다. 즉 율곡은 만물의 보편성과 차별성을 ‘이통기국(理通氣局)’의 개념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2. 율곡 이이의 인성론

인성론이란 인간존재의 내면구조를 철학적으로 구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의 심성론을 기질지성(氣質之性), 본연지성(本然之性),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 도심(道心)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질지성(氣質之性), 본연지성(本然之性)

율곡이 인산의 성(性)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理)와 성(性)의 개념 구별에서부터 시작된다. 율곡에 의하면 성(性)은 이기(理氣)의 합이다. 따라서 율곡의 견해는 인간의 성(性)에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 두개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은 단지 하나 일 뿐인데, 이(理)만을 가리켜 말하느냐 아니면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말하느냐에 따라 그 표현상의 명칭을 달라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이는 본연지성(本然之性), 이(理)와 기(氣)의 묘합된 것은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보았다.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결코 두 개의 성(性)이 아니라, 기질상(氣質上)에 나아가 단지 그 이(理)만을 가리켜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이(理)와 기질(基質)이 묘합(妙合)된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기질(氣質)을 겸해 말할 수 없으나,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오히려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겸할 수 있다.”

2)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중국 성리학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가 한국 성리학에서는 중요한 논제로 대두되었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등 네 가지 단서로 분류해 말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인간의 감정을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7가지 종류로 나누어 말한 것이다.

율곡은 퇴계와 기대승의 사단논변에 대해 기대승의 견해에 동의한다. 율곡에 의하면 사단칠정의 구조를 기발이승이로 본다.

율곡은 퇴계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비판 하였다. 퇴계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각각 이(理)와 기(氣)의 발(發)로 인해 나타난 감정이라고 규정된데 반해 율곡은 기(氣)는 발하지만 이(理)는 발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기(氣)의 발로써 나타난 칠정(七情)이 나타나고, 그 속에 포용되는 칠정(七情) 중의 선(善)한 부분이 사단(四端)이라 생각했다.

3)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어 이야기한 것으로 후일 성리학계의 주요한 논란거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대한 율곡의 견해는 인심과 도심에 있어 두 가지 이름은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 마음은 있을 수 없다는 유일심적(惟一心的) 입장이었다.

율곡에 의하면, 인심이든 도심이든 그것이 발생하는 근원에 있어서는 한마음이지만, 마음이 어떠한 의지적 정향을 갖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즉, 율곡은 인심(人心)이나 도심(道心)을 모두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율곡은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처음에는 도심이던 것이 사사로운 뜻에서 인심으로 끝마치게 되기도 하고,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고정된 게 아니라 인심의 도심화와 도심의 인심화가 가능하다.

율곡에 의하면 도심은 순전히 천리이므로 순선하지만 인심은 천리와 인욕의 양면을 겸하므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인심(人心),도심(道心)을 이기설(理氣設)과 일체화시키며 그 논리를 전개함은 물론,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 사단(四端), 칠정(七情)에 연관시켜 정밀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철학사상은 당시의 학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시대에서 앞선 뛰어난 사상으로서, 특히 이원성의 극복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3. 율곡이이의 정치사상

1) 민본덕치주의

율곡은 만인평등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정치의 주체를 백성으로 규정한다. 즉, 현실참여의 기준을 백성에 두고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이론을 전개한다. 또한 ‘시폐 7조책’에서는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에게 이로우면 모두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기준을 나라와 백성의 편안함과 이익에 두고 있다.

또한 정치에 있어서 지도자의 역할과 위치를 매우 중요시했다. 지도자의 도덕성이 항상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어 임금의 도덕적 자질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가 가조된다. 그는 당시의 경연제도의 형식적 운용을 비판하면서 임금의 도덕성을 제고하는 것은 경연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지도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현명함에 한계가 있어 어진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율곡은 도처에서 지성으로 어진 사람을 찾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덕적으로 어진 사람이 그 위치에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그 직책을 맡아 지도자의 부족함을 보완해야 백성과 국가에 실질적인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현실인식과 역사인식

율곡의 정치철학에 있어 일차적으로 주안점이 두어져 강조된 것은 정치인의 시대인식이었다. 그것은 민본(民本)이라는 정치의 본질은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히 변경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의 형태나 방법론은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거기 알맞게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한데 연유한 것이다.

율곡은 이러한 정치적 관점에 근거하여 자신이 처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시폐가 누적되어 변법과 개혁이 절실히 요청되는 경장(更張)의 시기로 보았다. 율곡의 개혁은 관리를 위한 개혁이 아닌 백성을 위한 개혁으로 단정하고 백성들에게 유리하고 백성들이 편리한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을 개혁의 표준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의 구체적인 방안으로써 오래되어 모순된 법제를 고치고자했다. 그러한 법제 개혁은 국가체제의 재정비, 공안 · 군정 · 부세제도의 개혁, 향촌질서 유지 및 농민생황 안정을 위한 향약의 실시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소모적인 논쟁인 붕당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던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려 노력했던 율곡 이이는 그 자신마저 동인에게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여론정치(輿論政治)

또한 율곡은 현인정치 뿐만 아니라 민의 광범위한 수렴을 통한 여론정치를 주장한다. 율곡은 국시의 정립을 위해 공론이 형성되어야 하고, 공론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언로(言路)가 활짝 열려야 한다고 하여 언로개방과 여론정치를 주장한다. 따라서 언론자유를 봉쇄하고 죄를 다스린다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Ⅳ. 율곡 이이의 저서(著書)

율곡 이이의 주요 저서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경연일기(經筵日記),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가 있다. 이 저서 중 성학집요, 격몽요결, 경연일기는 <율곡전서>에 실려 있다.

1. 율곡전서 수록 저서

 

1) 성학집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 저서로서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임금에게 이 책을 올리는 의미를 밝힌 "진차(進箚)" 와 함께 서문, 통설 등을 실었으며 2∼4편은 "수기편(修己篇) "으로써 자기 몸의 수양에 대한 내용을 실었고 또 5편은 "정가편(正家篇)"으로 가문을 바로 하는 법을, 6∼7편은 "위정편(爲政篇)" 으로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8편은 학문과 위정의 바른 줄기를 밝힌 성현도통(聖賢道統)을 담고 있다. 이이는 사서와 육경에 담긴 도를 개략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수기, 정가, 위정편은 각기 총론과 여러 개의 각론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본 구도는 '대학'을 따른 것으로서 수기편은 '대학'의 수신(修身)에 해당하며 정가편은 제가(齊家)에 해당하고 위정편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해당한다.

2) 격몽요결

율곡 이이가 선조 10년, 즉 1577년에 쓴 책으로 "격몽" 은 몽매함을 깨우친다는 의미이고 "요결"은 그 일의 중요한 비결이란 뜻이다. 이 책은 덕행과 지식의 함양을 위한 초등과정의 교재로 근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학자들에게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이어 널리 읽혀졌다.

본문은 입지(立志), 혁구습(革舊習), 지신(持身), 독서(讀書), 사친(事親), 상제(喪制), 제례(祭禮), 거가(居家), 접인(接人), 처세(處世)로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 끝에는 사당도(祠堂圖), 시제도(時祭圖), 설찬도(設饌圖)와 제의(祭儀)의 출입의(出入儀), 참례의(參禮儀), 천헌의(薦獻儀), 고사의(古事儀), 시제의(時祭儀), 기제의(忌祭儀), 묘제의(墓祭儀), 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데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배우고 깨우쳐야 할 10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3) 경연일기

율곡이 조선명종(明宗)부터 선조(宣祖)때까지 17년간 경연(經筵)에서 강론한 내용을 적은 책이다. 필사본 1책으로 규장각도서 '석담일기(石潭日記)'라고도 한다. 율곡의 친필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저자가 임금에게 경적(經籍) 등을 진강(進講)한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당시의 주요사건과 인물에 관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1권은 1565년(명종 20) 7월∼1571년(선조 4)까지, 2권은 1572∼1576년까지, 3권은 1577∼1581년까지의 경연 강론 내용을 싣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의 원본 중 제 2권은 6 ·25전쟁 때 분실되었고, 제1권, 3권은 1972년 홍수로 한수재 고가가 침수되면서 유실되는 등 완전히 손실되었다. 다행히 <율곡전서> 28∼30권에서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2. 기타 저서

 

1) 동호문답

조선 선조 때 자신의 정치관을 문답식으로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정치 사상서이다. 당시에는 젊은 관료들을 선발하여 잠시 직책을 떠나 독서당(讀書堂)에서 여유 있게 글을 읽도록 하였는데, 이때 월과(月課)로 제출한 것이다. 필사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책으로 1569년(선조 2)에 완성된 것으로, 율곡이 34세 되던 해, 홍문관 교리로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로 있으면서 썼다. 내용은 군도(君道), 신도(臣道), 군신상득지난(君臣相得之難), 동방도학불행(東方道學不行), 아조고도불부(我朝古道不復), 당금지시세(當今之時勢), 무실위수기지요(務實爲修己之要) 안민지술(安民之術), 교령지술(敎令之術), 변간위용현지요(辨奸爲用賢之要), 정명위치도지본(正名爲治道之本)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2) 만언봉사

성학(聖學)의 대요(大要)를 적은 책으로서 필사본 1책 53장으로 되어있으며, 규장각도서'갑술만언봉사(甲戌萬言封事)'라고도 한다. 1574년(선조 7)에 지어 올린 봉사(封事)로서 주로 성학의 대요를 논하였고, 수기안민지요(修己安民之要)와 기천영명지술(祈天永命之術)에도 언급하였다. 전문(全文)이 <율곡전서>에도 실려 있다.

 

Ⅴ. 결론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율곡 이이의 생애, 업적, 저서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율곡은 철학적으로는 삼강오륜 도덕을 절대시하고 이기이원론(관념론)을 견지하는 봉건 이데올로그였지만, 정치 자세에서 보였던 실천성을 반영하여, 철학 이론에서도 많은 독자성을 보였다. '이기겸발'(理氣兼發)을 주장하여 이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에 반대하고, 또 인식으로는 '서상'(書上)의 인식, '잠사정찰'(潛思精察)의 인식, '진천역행'(眞踐力行)의 인식의 3단계가 있다고 하는 인식론 등은 그의 철학의 적극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정치, 철학 사상은 후에 실학 사상가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율곡은 철학이나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교육의 이론 뿐 아니라 스스로 스승의 입장에서 교육을 실천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의 교육사상은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의미를 갖기에 충분한 것이며, 그의 도로 표현된 교육목표, 교육동기로서의 입지, 성선과 기질변화의 교육가능성, 평생교육이념, 지행병진, 상벌제도, 전인교육의 강조 등 다양한 교육방법, 그리고 그의 교사론 등은 현대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현대교육이 당면한 문제해결에 중요한 시사를 주기도 하였다.

율곡 이이의 이러한 사상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전의 혼란한 상황에서 이대로 방치하면 나라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시기에 맞게 법을 고쳐 폐단을 바로 잡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율곡의 개혁 논리는 오늘날에도 유효함에 틀림없다. 특히 국내외 문제로 적지 않게 난국을 헤쳐 나아가야 할 우리의 현실에 많은 교훈을 던져 준다. 비록 개혁에 이르진 못했으나 그의 훌륭한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참고문헌

1) 이병도, 『栗谷의 生涯와 思想』, 서문당, 1972

2) 율곡학회논문집율곡사상연구제20집, 1994

3) 조남국, 『율곡의 삶과 철학 그리고 경제·윤리』, 교육과학사, 1997

4) 황준연, 『이율곡, 그 삶의 모습』,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 황의동, 『한국의 사상가 10인(人) 율곡 이이』, 예문서원, 2003

6) 류태건, 「이황과 이이의 우주론과 인성론 비교정리」, 2005

7) 황의동,『율곡 이이』, 살림, 2007

8) 최정묵,「율곡의 정치사상과 그 영향」,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