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릉에 대한 고찰

20070224 오재우

20081143 이승훤

20100162 강혜영

- 목 차 -

Ⅰ. 서론

Ⅱ. 본론

1. 조선 왕릉의 이해

1) 왕릉의 유래

2) 왕릉과 원묘의 의미

3) 왕릉의 분포

 

2. 국장제도와 왕릉조성

1) 왕의 국장제도

2) 왕릉의 조영

3. 왕릉의 공간구성과 상설제도

1) 왕릉의 공간구성

2) 조선의 상설제도

3) 조선왕릉 조영의 시기별 변화

 

4. 조선 왕릉의 관리

 

Ⅲ. 맺음말

※ 참고자료 ※ - 왕릉 상설도 -, - 왕릉 분포표 -

 

Ⅰ. 서 론

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왕조는 긴 세월동안 우리의 곁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은 한 가문의 종가(宗家)였기에 실록이나 의궤(儀軌), 궁궐 등 의 기록물들과 유적들은 그들의 삶의 흔적이 가장 충실하게 반영된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왕실문화는 당대 문화를 선도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사람들 즉 우리의 선조들의 땀과 정성이 모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왕의 죽음을 장식한 왕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00리 안에 조성되어있는 왕릉들은 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역사유적이자 현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 전통과 현대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 1대 태조로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27대 순종에 이르는 왕과 왕비릉의 조영은 당시에는 수많은 인원과 물자가 소요되는 국사중의 하나였다. 그만큼 우리 곁에 남아있는 왕릉은 우리 옛 선조들의 우수한 기술력과 문화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조선 왕릉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왕릉은 물론 왕자와 공주의 묘에 이르기까지 완벽하리만치 보존됨에 따라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견고함에 새삼 그곳에 녹아있는 우리의 선조들의 기술력과 왕릉에 담겨있는 정성에 감탄을 보낸다.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가 살아생전에 머물던 궁궐과 조상신으로 숭배된 종묘의 중간단계의 조형물로서 그들의 삶과 죽음의 세계가 교차된 의미심장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을 벗어나 당대 조선의 정치·경제·문화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조경·건축·석조미술·제례문화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조선의 종합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 왕릉은 우리선조들의 고급문화를 진열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에 가면 명십삼릉을 찾아가 구경하고 일본에 가면 메이지진자를 관광지로 찾듯 중국과 일본의 왕실무덤에 비해서도 독특한 차이와 주변 환경과 어르러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왕릉고유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조선 왕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Ⅱ. 본 문

 

1. 조선 왕릉의 이해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조상의 무덤에 매우 각별한 문화적 의미를 담아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조상의 무덤을 정성껏 조성하고 또 관리하면서 이를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복을 내려주는 행위로 여기고 민족최대의 명절인 설과 추석에는 조산의 무덤을 찾아가 벌초하고 성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조상숭배에 대한 우리문화전통은 유교의 가르침을 통치이념이자 최고덕목으로 수용한 조선왕조시기에 더욱 공고해진다. 유교에서는 먼 조상으로부터 생겨난 자신의 존재가 자손에 의해 먼 미래로 이어진다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

무덤은 이처럼 절대적인 존경대상인 조상의 존재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특히 숭모제례(崇慕祭禮)에 입각한 유교적 세계관이 확고했던 조선시대에는 최고통치자의 무덤인 왕릉에 지극한 의미를 부여했다. 왕릉을 조성하여 죽은 전대 통치자의 무덤에 참배하고 제사지냄으로써 살아있는 후대의 통치자인 왕은 나라와 왕실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 그 존엄한 신분과 권위를 영구히 보호, 유지하는 장치로 삼았다.

 

1) 왕릉의 유래

왕릉이란 왕족의 무덤 즉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과 왕세자·왕세자비 및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능원제도는 『사기』 정의인괄지지에 보면 이미 중국의 하대 우왕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초기에 석총을 많이 썼는데 대표적인 석총으로는 광개토대왕의 태왕릉과 장수왕의 장군총이 있다. 또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구려의 동암리 벽화고분 등 중국의 왕릉문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백제의 분묘는 초기 서울 근교에서 발견되는 적석총과 일반 봉토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봉토분은 봉토 속에 석실을 만든 석실총과 토축으로 꾸민 토광묘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상통하며,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욱리하에서 큰 돌을 취하여 곽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었다(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라고 한 것과 비교되는 고분이어서 왕릉일 것으로 추측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웅진도읍기의 고분으로는 석실묘와 전축분을 들 수 있다. 전축분은 중국의 남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무령왕릉이 있다. 신라시대의 능으로서는 경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초기에는 평지에 봉토분으로 조성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가까이 오면서 점차 주위의 구릉지로 옮겨지게 된다. 고려의 왕릉은 개성 부근 산악지대에 분포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능의 소재가 확실한 것은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을 비롯한 19릉이다. 고려의 왕릉은 몽고의 침입과 도굴 및 조선시대의 개축 등을 거치면서 원형이 많이 변하였으나, 현릉·소릉과 칠릉군(七陵群)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아 좌청룡 우백호의 산맥이 능 뒤에서부터 좌우로 뻗어내리고 물은 능의 서쪽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지세를 택하여 소위 풍수도참사상에 의한 명당자리를 선택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중시된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의 왕릉들은 초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다가 우리민족에 맞는 고유한 건축문화와 특색을 갖춰 고려를 지나면서 중국과는 다른 왕릉문화를 갖추게 되어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왕릉과 원묘의 의미

조선시대 묘제를 보면 그 신분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엄격한 구분이 되어 있다. 능은 왕과 왕비 그리고 왕과 왕비로 추존된 이들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세자와 그 세자비,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한다. 또한 묘는 대군. 공주. 후궁. 귀인 등 나머지 왕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 명칭을 다르게 하였다. 능·원·묘와 관계된 조선왕조의 무덤은 모두 119기로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가 있다.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제외한 왕실가족에 대한 무덤 또한 왕릉과 유사한 격식으로 조성하고 모셔왔기에 넓은 의미에서는 원과 묘 모두 조선왕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왕과 왕비로 추존된 분들의 무덤도 능이라 불리었다. 그 예로 세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의 경릉이 있으며 모두 5기가 있다.

 

왕은 살아서는 각종 궁궐에서 거주하며 통치를 하게 되고 죽은 뒤에는 종묘에 혼을 모시고 능에 체백(體魄)을 모시게 된다. 따라서 그 공간구조와 시설물의 배치도 같은 성격으로 마련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1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있으며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한편 원에 대표적인 예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드라마 동이에서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 씨의 무덤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소령원은 영조(英祖)의 생모(生母)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무덤으로 처음에는 소령묘로 불렀으나 영조 29년 숙빈 최 씨를 화경(和敬)이라 추시(追諡)하고, 묘(墓)를 원(園)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묘는 능과 원에 들지 못하는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칭호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이의 예로는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의 묘가 있다, 이들은 왕위에 있었지만 묘호를 받지 못했다. 또한 폐비 윤씨와 같이 왕의 생모로서 한때 능이라 불리었지만 폐비된 후 복권되지 않은 경우에도 묘라고 불리었다.

 

3) 왕릉의 분포

조선왕조는 19392년 탄생 이래 왕조의 문을 닫는 1910년 까지 518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27대에 걸친 왕과 왕비를 배출하고 42기의 왕릉을 조성하였다, 조선왕릉 42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재위한 왕과 왕비의 그리고 추존된 분들을 포함하는데 조선왕조 10대와 15대 왕으로 재위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그들이 폐위되어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추존된 덕종의 경릉, 원종의 장릉, 진종의 영릉, 사도세자의 융릉, 문조의 수릉이 추존되어 조선왕릉 42기에 포함되었다.

조선왕릉 42기 가운데 건국초기에 조성되어 현재 북한 개성에 자리한 1대 태조 왕비 제릉과 2대 정종 후릉 2기를 제외한 대부분은 서울시내와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4대 세종의 영릉과 17대 효종 영릉, 6대 단종의 장릉이 서울근교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있으나 세종의 영릉과 효종 영릉은 추후에 풍수의 길흉 론에 따라 이장하였고 , 단종의 장릉은 사후 240년 만에 복위되어 능호를 받은 경우이다,

 

왕릉은 6대 단종 장롱과 단종왕비 사릉처럼 왕과 왕비의 능이 개별 능역을 이루거나 3대 태종 헌릉이나 4대 세종 영릉, 문종 현릉처럼 왕과 왕비가 한 능역을 이루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왕릉이 한 지역에 모여 왕릉군을 이루기도 한다, 왕릉군의 ‘도성의 동쪽에 있는 아홉 기 능’이라 하여 동구릉이라 이름 붙여진 왕릉군이 있다, 이 동구릉에는 1대 태조 건원릉을 비롯하여 5대 문종 현릉 14대 선조 목릉 16대 인조왕비 휘릉 18대 현종 승릉 20대 경종왕비 혜릉, 21대 영조 원릉, 24대 헌종 경릉 추존 문조 수릉 등 능 9기가 모여 있다. 또한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과 남양주시에 있는 고종과 순종황제의 능이 있는 홍·유릉이 있다, 특히 홍·유릉은 다른 조선 왕릉과는 달리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었다,

북한에 있는 왕릉 2기를 제외하고 서울시내와 근교에 있는 왕릉 40기를 역사성과 문화재 관리의 행정에 따라 개별능역을 포함한 왕릉군의 개념으로 나누면 왕릉지구 18곳이 된다, 18곳의 왕릉지구를 크게 지역으로 살피면 각각 서울시내와 서울 동쪽, 서쪽이다. 왕릉을 지구나 지역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은 문화재 관리의 편의를 위한 조치이지만 이 같은 분류가 가능한 것은 왕릉을 조성한 당시 도성을 한양중심으로 반경 4㎞ 밖 40㎞안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정한 국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 국장제도와 왕릉조성

유학자의 필독도서인 『논어』에 “마지막을 삼가고 멀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군주가 일반사람들이 소홀하기 쉬운 상례를 예법대로 실천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면 백성들이 그의 도타운 덕을 본받아 교화가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것이다.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상례를 오례의 하나로 정하여 왕도정치로 삼았던 것이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장례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이 태어났을 때 누구나 제 부모 품에서 삼년이상씩을 안겨 자랐기 때문에 부모의 은혜를 기리며 3년 이상을 정성을 다해 부모의 죽음에 슬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실에서부터 일반백성에게 까지 적용되었다.

왕이 승하하면 졸곡이 끝난 후에 종묘나 사직과 같은 대사에서만 제례악을 연주할 뿐 그 외에는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모든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이것은 왕의 장례는 모든 백성이 근신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치러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내려친 조치였다.

 

1) 왕의 국장제도

왕의 장례는 여느 사대부가와는 달라도 무척 다르다. 왕의 장례인 국상은 국가사업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경비와 인력이 소요되는 중대사로, 새로 등극한 왕이 맡게 되는 첫 번째 국사이기도 했다.

당시 왕의 장례절차를 보면 먼저, 왕의 승하가 공표되고 국상을 치르기 위해 장례를 담당할 3개의 관청이 설치되는데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을 설치하고 염습과 복식을 준비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어 국장을 분담하게 한다. 국장의 절차는 국장도감설치 → 빈전마련 → 성복(成服) → 발인(發靷) → 하관(下官) → 반우(返虞) → 국장도감 해산의 순서로 진행된다.

도감들이 설치되고 3개월에서 5개월에 이르는 국장 기간 동안 왕릉 터가 상지되는데 이때 동원된 다수의 풍수지관들과 함께 대신들은 한양 주변 백리 안팎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풍수로서 판단하여 천거된 후보지는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재위 왕의 결정으로 정해지거나 선왕이 생전에 정해두었던 명당자리에 왕릉을 조영하기도 하였다.

 

2) 왕릉의 조영

조선시대 왕릉은 한양도성으로부터 거리, 주변 능과의 거리, 방위, 도로와의 관계, 주변 산세 등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조선 왕릉의 입지는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인 조영방법을 따랐다.

왕릉은 대부분 도성의 행정구역이자 생활권을 성저십리라 하여 서울성곽을 중심으로 대개 10밖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권역 밖으로부터 왕이 하루 행차할 수 있는 거리인 100리로 잡아 왕이 궁을 떠나 참배의 행렬이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도성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거리에 왕릉조영의 기준이기도 했다, 이 기준을 만족한 택지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먼저 배산임수조건으로 왕릉 뒤쪽에 있는 산은 바람을 감추는 장풍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임수에 해당되는 왕릉 앞쪽의 물줄기는 생동하는 기운의 방위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장 금기시했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풍수법칙으로 계산되어졌고 장풍(藏風)과 득수(得水)를 줄인 말이 풍수(風水)라는 것이며, 그래서 왕릉 택지의 배산임수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충족 조건은 풍수였다. 조선 왕릉은 야지도 산지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양식을 택하게 된다. 그 이유는 흙은 생기(生氣)의 몸이라는 풍수 원리에 따라 생기 저장탱크 격인 흙더미 위에 자리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들은 작은 언덕이라는 강에서 생기를 공급받고, 강에 생기를 공급해주는 것은 뒤쪽을 이어주는 배산의 산줄기였다.

3. 왕릉의 공간구성과 상설제도

조선 왕릉은 궁궐처럼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이나, 일제 식민 지배, 해방 후의 전쟁과 혼란의 와중에서 왜곡되거나 크게 파괴 되는 등의 많은 변화를 거치지 않았다. 다만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처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군에 의해 파헤쳐 다시 만든 곳도 있고, 천장(遷葬) 등을 통해서, 또는 후일 임금으로 추숭(追崇)되면서 본 모습이 바뀐 경우도 없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능은 만들어질 때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능은 각각 그 능이 조성되던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고, 그 점에서 문화유산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왕릉의 공간구성

조선 왕릉은 죽은 자가 머물며 산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아래 성과 속, 신분이라는 유교적 이념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공간구성에 있어서도 독특하고 일정한 법칙을 갖고 있다. 봉분이 있는 능침 공간, 정자각 등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물이 위치해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왕릉의 관리와 제례를 준비하는 진입공간으로 구분한 것이다.

왕릉의 공간구성에서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을 통틀어 신성공간이라 하고 진입공간을 세속공간이라 하여 제례물품을 보관하는 공간과 왕릉주변 화제발생시 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는 화소지역을 두어 왕릉을 조영하였다. 그리고 이 공간에는 왕릉관리인이 머무는 제실이 있으며 주위에 제례 때 필요한 기물을 보관하는 향대청, 전사청이 있다. 또한 풍수상 비보를 위해 마련한 연못인 지당이나 왕릉군이 있는 곳에 능역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조성하는 외홍살문 등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신성공간의 구성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왕의 체백이 모셔져 있는 능침공간과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제향공간으로 구분된다. 제향공간은 산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진입 공간(세속 공간)을 지나면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신성공간과 세속공간의 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이 다리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세워져있다. 홍살문 안쪽 바로 오른쪽에는 네모난 판위가 있는데, 이곳은 왕이 능에 도착했음을 고하는 알릉례와 능을 떠날 때 사릉례를 올리는 배위이다. 이 배위에서 왕이 사배를 하는 것으로 제례는 시작된다. 그리고 참도를 지나 제수가 진설된 정자각으로 이동하는데, 이 참도는 2단으로 구성되어있다. 참도에서 한단 높은 길은 능에 모신 돌아가신 왕이나 왕비가 이용하는 신도라고 하며 왕과 참배자가 사용하는 그보다 낮고 좁은 길이 어로가고 한다. 이렇게 참도가 끝나는 길에서 선왕의 혼백을 불러 제향을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의 주위에는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라간과 수복방, 비각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제례의식을 마치고 축문을 태워 묻는 예감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공간의 핵심시설은 봉분이다. 봉분은 주변산세와 지형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되어있다. 또한 봉분의 양옆과 뒤쪽 삼면으로 곡장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의 존재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봉분둘레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을 수호하는 각 두 쌍의 석호 석양을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병풍석이나 난간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하거나 글씨로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연꽃, 모란 무늬 등을 새겨 장식하였다. 또한 능침공간은 가로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삼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위쪽은 선왕의 영혼이 깃든 상계이며 그 아래 단(중계)은 문인의 공간 맨 아래 단(하계)은 무인의 영역으로 표현되었다. 상계에는 곡장과 봉분, 석호·석양, 혼유석과 망주석 등을 놓고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석인과 석마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세웠다. 능역 그 자체가 자연환경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전통적인 풍수 사상에 따른 능역의 자연 친화적인 조영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2) 조선의 상설제도

조선 왕릉에 배치된 조형물들은 유교국가의 문화적 전통성을 유지하며, 현재에도 이어오는 우리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선왕에 대한 유교적 제례의식에 따라 설치된 시설물들이다. 또한 왕릉의 석물과 기타 시설물배치 등은 기본적으로 조선 왕릉의 상설제도를 따랐으나 왕릉 조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감과 변화가 적용되었다. ‘상설’은 ‘형상을 설치한다.’란 뜻의 말로 능역에 설치하는 모든 시설물과 석물을 일컬으며 이에 해당하는 배치규범을 ‘상설제도’라 한다, 상설 가운데 특히 석물 곧 병풍석과 난간석, 문·무인석 등의 크기나 조각양식은 시대에 따라 생동감 있게 시대적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능역에 설치되는 시설물은 입지와 주변 산세에 따라 규모와 자리가 정해진다. 이는 인간의 건축 또한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전통적 풍수 사상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 친화적 자연관을 기반으로 조성된 조선 왕릉의 봉분은 단릉·쌍릉·합장릉·삼연릉·동원이원릉·동원상하릉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3) 조선왕릉 조영의 시기별 변화

유교적 국가이념을 표방하고 정통성을 중시하며 500여 년간 동일한 체제로 변함없이 조성된 조선 왕릉의 산릉제도는 『세종실록』 「오례」 흉례의식 치장조와 『국조오례의』 흉례 치장조에 왕릉의 형식 및 석물의 규정, 규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지면서 후대의 모본이 되었다. 자주적으로 확립된 조선의 예제는 중종 때에 조선의 대명관이 달라지고 1518년 이지방에 의해 『대명회전』이 들어오면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와 함께 조선 왕릉에도 새로운 모습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 전통과 사상, 정치, 외교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로 승화된 왕릉의 석인·석수는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제1기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시기부터 세종 전기까지의 시기로, 건원릉, 제릉, 후릉, 헌릉이 조영되었다.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문·무석인과 석양, 석호만을 세웠다가 송대의 황제릉 제도를 반영하여 세종 24년에 석마를 추가로 조성하였다. 석마가 세워진 공간이 협소하고 다른 석물과 다른 양식으로 조각되었고 석물의 배치가 일정치 않아 조선의 왕릉제도를 정비하는 과정 중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석인과 석수는 고려 현정릉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가며 전체적인 신체비례와 세부적인 표현이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제2기는 세종 후기부터 연산군 대까지로, 조선 초기 국가의 예제가 정립된 이후 독자적이고 자주적으로 왕릉제도를 성립하여 현재 왕릉과 같이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호, 석마를 갖추어 조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인릉에 세워져있는 영릉의 석물, 광릉, 천장한 영릉, 창릉, 순릉 등이 조영되었는데, 무석인의 갑주표현에서 송대의 영향이 보인다. 1기의 사실적인 표현을 이어가며 단아한 자세와 사실적이고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 자연스러운 세부묘사가 나타난다. 이와 동시에 현릉과 창릉, 순릉에서 개성 있는 표현들이 다양하게 보이면서 조선왕릉 만의 다양하고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고 있다.

 

제3기는 중종 대에 시작되어 조선 전기의 마지막 왕인 선조 대까지로, 현릉과 새롭게 천장하여 조성된 희릉, 정릉, 효릉, 태릉, 강릉, 목릉이 조성되었다.「오례」이후 조선의 전례에 모범이 되는 『국조오례의』를 통해 성립, 계승되는 왕릉의 석인·석수는 중종 대에 명과의 관계가 새롭게 전개되면서 이전의 왕릉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명대 황제릉의 무관석인과 회화 속 무인의 의복이 조선 왕릉의 조각으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석인·석수는 거대해지고 과장된 표현이 많아 사각주형의 경직되고 둔중함이 괴체감과 함께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얼굴과 세부표현에서 더욱 양식화, 도식화되어 다소 경식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4.조선 왕릉의 관리

조선왕릉 능역 밖에는 왕릉을 관리하는 재실을 두어 종9품 참봉과 함께 다수의 인원을 상주시켜 놓았다. 이때 왕릉 관리를 근처의 사찰을 지정하여 운영하게도 했으며, 해당 사찰은 원찰로 불렸다. 건원릉의 개경사, 정릉의 흥천사, 영릉의 신륵사, 광릉의 봉선사, 정릉의 봉은사 등의 원찰들은 숭유배불이라는 조선왕조 당시에도 선비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만큼 권력을 지녔었다.

왕릉 관리를 충당키 위한 내용은 『능원묘위전』을 보면 약 80결이 정해진 규모였으나, 제4대 세종 왕릉은 180결에 이르고 제20대 경종 왕릉은 21결 그리고 제9대 성종 왕릉과 제11대 중종 왕릉은 1결도 없었던 것에서 보아 조선 왕릉 관리는 무소불위의 권력 위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로 조선 왕릉 능위 전 80결 기준은 오늘날 밭 24만 평에 해당되었고 이를 수조권으로 환산해 보면 쌀 약 480가마에 해당되는 양으로 오늘날 화폐 가치로 칠 때 약 1억 원에 달하는 경비가 왕릉 1기의 예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술 가치는 조선왕조의 시대 상황에서 볼 때 무의미한 계산이다. 왕릉 관리에 투입된 사람이 수백 명이건 수천 명이건 쌀 한 톨, 엽전 한 닢 지급하지 않아도 가능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Ⅲ. 맺음말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왕이 기거하던 궁궐과 왕의 시신을 모신 능 그리고 역대 왕의 혼백을 기리는 종묘, 이들 역사 공간은 나라의 정체이자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조선시대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역할을 하던 중요한 곳이며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먼저 조선 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각각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또한 조선 왕릉은 유적지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수반한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은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지금까지 살펴본 왕릉의 유래와 장례제도, 왕릉구조와 조영을 살펴보면서 조선시대 왕실문화와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를 넘어서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살아있는 문화전통과 한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동시에 우리의 고유하고도 아름다운 전통경관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중한 문화유산에 우리는 우리 선조의 정신에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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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원,『왕릉; 왕릉기행으로 역은 조선 왕조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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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미디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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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고 논 문

・ 이정선, 「조선 전기 왕릉제도의 성립과 石人·石獸 양식 연구」

『美術史論壇 第29號』,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