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대 성곽에 대해서

 

20070179 김수호

20081073 기영민

20090269 조아름

- 목     차 -

 

Ⅰ. 서 론

 

Ⅱ. 성곽의 의미

 

Ⅲ. 성곽의 기원

1. 조선시대 이전 성곽의 기원

2. 조선시대 성곽의 기원

1) 조선 전기의 성곽

2) 임진왜란과 성곽

3) 조선 후기의 성곽

 

Ⅳ. 성곽의 분류

1. 축성 재료에 의한 분류

2. 구조 형태와 규모에 의한 분류

3. 위치 및 지형에 의한 분류

4 .거주 주체에 의한 분류

 

Ⅴ. 성곽의 구성요소

1. 성문

2. 성벽

3. 내부 시설

 

Ⅵ.맺음말

 

※ 참고 문헌

 

Ⅰ. 서 론

  우리나라 전국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 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는 퇴락했지만 역사의 이끼가 덮인 읍성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성곽 유적은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지키려했던 호국 의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일찍이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쳐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중요한 성곽이 언제 나타났는지는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문헌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사기 조선전》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으로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로 표현 했던 만큼 성곽은 다른 나라로부터의 침략에 우리를 방어해주고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논고를 통해서 성곽의 개괄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우선 성곽의 개념 및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 후 조선시대를 기반으로 하여 성곽의 기원 및 발달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또한 성곽의 분류와 구성요소를 밝혀 구체적인 성곽의 구조를 이해해보겠다.

Ⅱ. 성곽의 의미

  성곽이란 적군이 침입을 막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축조물로 내성과 외성을 모두 일컫는 말로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의 공동목적을 갖고 거주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건축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이란 뜻은 성곽이 지역 방어 국가 방어 등 각종 군사방어 목적을 갖는 것이 으뜸이다. 한 가정의 울타리나 목장과는 다르다. 행정적이란 성곽은 군사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일부는 행정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도 있다. 자연지형이 아무리 천연요새와 같다 하더라고 이를 성곽이라 부르지 않듯이 반드시 사람 즉 인공에 의해 최소한 일부 축조되어야 한다. 일정한 공동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성벽 등으로 거주 주체의 활동을 보장하는 수용공간을 보유하여 방어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면적(공간)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성벽으로 완전히 둘리지 않아도 적에 대치할 수 있는 일정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종전까지는 성곽이 당시에 필요한 군사방어시설물 이었으나 현재는 그 기능이 끝나고 단순히 문화유적으로서의 기능만 간주되는 입장에서 이제까지 성곽 정의에서는 시간의 한계성을 부여하지 않았었다. 군사적 기능이 살아있었던 조선말까지 축조된 성곽을 말하게 됨으로 전통 건축물이라고 불려야 될 것으로 보인다.

Ⅲ. 성곽의 기원 및 발달

1. 조선시대 이전 성곽의 기원 및 발달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성곽이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사기 조선전》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처음인데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남한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은 삼한시대에 성곽에 관한 문헌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적인 성과로는 대체로 서기 2세기 이후에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곽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성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발견된 예가 있다. 하지만 철기 문화를 누리고 삼국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삼한이나 삼국에 성곽과 비슷한 방어시설이 생겨났다고 보이며 백제나 신라는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을 신축했으며 삼한의 여러 세력들도 취락주변에 성을 가지고 있어 성을 기초단위로 한 성읍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

  대부분 처음에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석성을 쌓았다. 삼국시대의 성곽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발생 과정도 산성이 다른 형식의 성곽보다 먼저 나타났다. 초기에는 주로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토성을 쌓다가 후기로 갈수록 성곽의 규모도 커지고 재료도 대개 석축으로 바뀌게 된다. 산성의 둘레는 4백 내지 6백 미터 가량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8백 미터가 넘는 큰 것도 있다. 성벽을 토축으로 한 것이 많으며 또 그것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성내의 계류는 평지에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를 통해 밖으로 흘려보내는데 성문도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는 수가 많다.

  성벽은 대개 견고한 석축으로 쌓았으며 자연석 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석축 방식은 이른바 물림 쌓기란 공법으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 쌓아 전체적으로 성벽이 15도 가량의 경사를 유지하게 하였다. 따라서 성벽의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견고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한 공법상의 배려였다.

 

2. 조선시대 성곽의 기원 및 발달

  조선의 개국으로 한양 도성이 일차적으로 축조되고 동북면의 영토 개척과 서북면의 방어를 위한 진보 축성에 이은 행성의 축조가 진행되면서, 연해 읍성 축조도 병행하는 등 축성이 계속되었다. 특히 세종과 문종 때 매우 큰 규모로 전국에 걸쳐 축성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국방의 목적을 위한 축성 이외에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사행로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왜사로에 있는 지방도시는 외관상의 이유로 성의 수·개축이 계속되었다. 화약 병기가 소개되면서 산성의 비중뿐만 아니라 읍성의 비중이 커지고, 평지에 가까운 낮은 지대의 축성으로 빚어지는 방어의 능률 저하를 막기 위하여 세종 때에는 부속시설로서 옹성·해자·적대가 의무화되기도 하였다.

  성종 때에는 연해 지방의 진·보마다 군량과 병기를 둘 성보가 축조되었고, 해안 방어계획도 일단 상륙한 외적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삼포왜란과 같은 작은 전투에서는 효과가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투에서 무력했다. 임진왜란에서 방어에 성공한 성이라고는 진주성과 몇몇의 산성들뿐이었다. 이러한 결과를 분석하면서 우리나라의 축성은 일대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국의 평지 네모꼴 성은 직선 성벽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성 밖의 깊은 참호와 현안·치성·여장 등 부대시설과 성벽 자체의 견고함이 우수하였다. 또한, 석축이나 벽돌로 안팎을 똑같이 채워 쌓은 겹축 성벽, 성벽의 규형 단면, 각종 화포를 설비하는 시설과 현안 시설 등이 뛰어났다. 왜식 성의 경우, 지형은 고립된 산과 구릉을 이용하고, 벽을 겹겹이 쌓되 물매를 많이 두는 방법 등이 지적되었다. 축성의 재료도 벽돌이 응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축성에 이용한 각종 기구가 새로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반성과 종합이 이루어진 위에 나타난 것이 수원 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 축성 기법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새로운 성곽 축조였다.

1) 조선 전기의 성곽

  조선조는 창업과 동시에 축성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 말의 외침에 시달린 경험을 바탕으로 성곽 축조를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연해읍성의 축조도 계속되었다. 특히 읍성은 여말에 축성된 것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읍성이 없었던 곳은 신축하였다. 이 시대의 읍성으로 현존하는 것이 많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한 후 민정을 징발하여 축성을 완료하였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개축된 석성은 둘레가 약 17km, 높이가 40척 2촌이었다. 성에는 대문이 4, 간문이 4, 총 8문이었다. 현존하는 성문과 성벽은 숙종, 〮영·정조 때에 수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있는 남대문의 공역은 태조 때에 완성되었고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보물 1호인 동대문은 태조 때 축조되었으나 현재의 성문은 고종 때에 전부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8문중 현재 남아있는 성문은 남대문, 동대문, 광희문, 숙청문이다. 이중 동대문, 돈의문은 옹성이 있었다.

  조선 초기 도성의 축조가 있은 뒤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북방변경에서는 적의 침략에 대비 행성의 축조가 성행하였다. 행성은 일정한 지역을 갈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성으로 행성을 여러 개 묶어 연결된 것을 장성이라 한다. 행성은 적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고개 마루지역을 차단하면서 수십 혹은 수백 리를 쌓은 것이다. 산지는 내외의 지반을 삭토하고 평지는 내외협축의 석축이었다. 관문은 행성이나 장성 혹은 내지의 중요한 요로에 문을 닫고 지키기 위한 것으로 임진왜란이후 숙종·영조 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선조 때에 석축하게 된 조령관문이 있는데 이성은 삼중관문이었고 영조대의 남안과 청천강의 북안 중간에 있는 적유령을 비롯하여 수 십 개소에 관방시설이 만들어졌다. 왜구 침입에 대비했던 읍성축조도 계속되었다. 특히 세종, 성종 때에는 읍성의 축조가 활발했는데 이 당시 읍성축조의 특징은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작은 것은 크기를 늘리는 등 현존하는 대부부분의 읍성중 이 당시에 축조된 것이 많다. 이 당시 읍성의 대부분은 석성이었다. 읍성은 산지에 축조된 산성과는 달리 평지나 구릉지 지역에 축조한 경우가 많아 원형 방형 형식이 많았다. 조선 왕조의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산성축조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유사시에 천연자연지세가 유리한 산성에 입보하여 오랫동안 굴복치 않고 항쟁할 수 있는 것도 산성 특유의 장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전쟁양상이 변화하게 되어 종전의 방어시설도 개선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성곽의 방어 시설은 보강이 요구되어 읍성에는 적대, 여장, 옹성, 해자 등은 규격화 화게 되었고 성벽은 견고하게 하였고 높이는 자연스레 높아졌다.

2) 임진왜란과 성곽

  임진왜란은 조선을 7년간에 걸친 전쟁 속으로 몰아넣어 무수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내게 하였다. 임진왜란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산성 수축의 불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 조정에서는 험준한 산을 의지하여 관액을 설치할 것과 산성을 수축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혹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유성룡 등 많은 사람들은 험준한 요로에 산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충주, 용인, 진주성에서의 패전의 원인이 평지성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의 주장은 포루제도를 쓰자는 것이었다. 포루제도는 명나라 사람의 병서 기효신서에서 비롯된 착상으로 산성의 일정한 거리마다 포루를 설치한다면 적의 조총도 무기력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기효신서에 의하면 성 밖 둘레에 우마의 울타리처럼 담장을 쌓고 그 위에 대총통의 구멍을 내고 아래쪽에 소총통의 구멍을 내어 천보마다 하나씩 포루를 설치하여 적이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 일시에 총을 쏘아댄다는 것이다.

  포루의 설치는 조총이라는 신무기의 등장으로 현실적인 필요성이 제기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성의 수축과 포루제도를 절실하게 강구하고자 하였으나 포루의 설치는 그 뒤에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산성 수축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령일대의 관문 설치를 검토하게 되고 제천, 단양, 영춘 등지에서 수축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전라도에서는 남원의 교룡산성, 정읍의 입암산성, 건달산성, 가야의 용기, 지리산의 귀성 등을 수축하였다. 축성을 서두르기 시작한 것은 선조 26년 이후 왜적들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전국이 소강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수복된 지역 내의 장기전에 대비코자 한 준비였다. 이때의 축성에는 대부분 승군들이 동원되었는데 전투에 참여했던 유능한 승장들이 축성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도 해변에 성을 쌓았다. 울산, 서생포로부터 동래, 김해, 웅천, 거제로 이어지는 해변의 열여섯 곳에 진을 쳤는데 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속셈으로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서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지구전을 전개하였다.

 

3) 조선 후기의 성곽

  임진왜란을 치르고 나서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요지의 읍성과 변방의 요새에 축성과 개축이 활발해졌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1백여 년이 지난 숙종, 영조시대에 축성 공사가 크게 일어나 많은 토성이 석성으로 바뀌어졌고 새로운 성이 만들어졌다. 영조 이후에는 이렇다 할 축성은 찾아볼 수 없으나 성의 개축은 미미하게나마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와서는 병자호란 이후 2백여 년간의 평화가 계속되면서 상하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군제마저 해이해짐에 따라 축성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국력이 쇠퇴하고 사회 각층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터에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축성이 추진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1812년에 대외 방비책으로서 저술한 《민보의》에서 민간의 전력 동원책과 선수후전을 골자로 하는 민간 자위체제를 역설하였다. 다산의 주장은 관의 지원 없이 백성들이 자력으로 전시에 향민과 그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각 지역별로 요충지에 사보를 설치하고 이를 거점으로 적에 대해 소모전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다산의 민보의의 구상은 그 뒤에 1867년 훈련대장 신관호가 쓴 《민보집설》, 1872년 주희상의 《민보신편》 등으로 이어졌으며 《민보집설》은 현실적인 비변책으로 조정에서 공인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절실하게 제기되었던 민간방위의 여러 대책도 현실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Ⅳ. 성곽의 분류

1. 축성 재료에 의한 분류

1) 토 성

  토성은 흙을 다져서 쌓는 판축법과 성터의 안팎을 깎아 내황과 외황을 만드는 삭토법이 있다. 판축법에 의한 토성은 주로 평지에서 축조되었으며, 산지의 경우에는 삭토법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산지에서는 산기슭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흙을 파내어 가운데를 둔덕처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렸다. 토성은 석성에 비해 경비와 인력이 훨씬 덜 들기는 하지만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토성을 석성으로 수축하는 일이 많았다.

2) 석 성

  석축은 돌을 조금씩 뒤로 몰려 쌓아올리기 때문에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전체 성벽의 경사는 약 15도 가량을 유지하게 된다. 석성은 처음에는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하다가 조선 숙종 때에 오면 정방형으로 다듬어진 무사석을 사용하게 된다. 무거운 돌을 다루어 축성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고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르는 공사이다. 또한 충분한 석재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조 때에 수원 화성을 쌓으면서 석재를 얻기 위해 고심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그래서 석성을 비경제적이며 비실용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벽돌로 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였다.  성흥산성과 온달산성, 삼년산성, 미륵 산성 등은 아직도 성벽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삼년산성과 온달산성은 안팎을 모두 석축으로 하여 벽면이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가장 높은 곳은 10∼13m나 된다. 이 밖에도 관문성, 용장산성 등이 있고, 천리장성이 지형에 따라 평지에서는 석축으로 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석성으로는 북한산성, 남한산성, 해미읍성이 대표적이며, 모든 읍성이 석축으로 되어 있다.

2. 구조 형태와 규모에 의한 분류

1) 장 성

  국경의 변방에 외적을 막기 위해서 축성한 것인데, 행성 또는 관성으로 불리었다. 고구려는 당을 막기 위해 요동장성을 쌓았으며, 신라는 왜구를 막기 위해 관문성을 고려는 북쪽 국경 지대에 국내성과 압록강 경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구축하였다.

2) 옹 성

  옹성은 성문 앞에 차폐물이 없을 때 성문을 가리기 위해 축조한 시설인데, 동대문의 반원형 옹성을 비롯하여 수원 화성의 장안문과 팔달문에도 옹성이 있다. 박제가는 「北學議」에서 성문 밖에 옹성을 만들지 않고 혹 있다 해도 옹성 위에 여장을 만들지 않는다고 비판을 한 바 있다.

3. 위치 및 지형에 의한 분류

1) 산 성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였다. 산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약화시키고 항전을 계속할 수 있도록 축성되었다. 산성은 평야를 앞에 둔 높은 산에 자리 잡은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들판을 건너오는 적을 빨리 발견하여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평지와는 동떨어진 깊은 산중에 산성을 쌓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외부와 단절된 채 천험을 이용, 지구전을 지속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산성은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여 능선을 따라 정상 가까이 이어지는 포곡식 산성과 산봉우리의 중턱쯤에서 한 바퀴 휘돌아 쌓는 퇴뫼식 산성으로 나누어진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를 감싸고 축성되며, 따라서 그 규모가 큰 경우가 많다. 퇴뫼식 산성은 멀리서 보면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같이 보이므로 시루성이라고도 불린다. 골짜기에는 성문을 설치하고 수구도 만들었다. 성문의 주변은 적의 공격 목표가 되기 때문에 대개 큰 돌을 사용하여 다른 곳에 비해 더 튼튼하게 쌓았다.

2) 평지성

  산성에 대비하여 평지에 쌓는 성곽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대부분 평지성에 해당되는데, 이러한 평지성은 군사적인 방어 목적뿐 아니라 읍치로서의 행정 구역의 성격도 아울러 갖는다.

4. 거주 주체에 의한 분류

1) 도 성

  왕궁이 있는 성을 도성이라 하며, 왕성 혹은 재성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도성의 규모를 정방형으로 잡고 그 평면의 중심 위쪽 한 구역에 왕궁을 만들었으며, 이 왕궁의 정문을 중심으로 가로세로 아홉 줄씩의 도로를 72척의 너비로 잡아 바둑판같은 도로망을 설치하고, 이 도시의 외곽으로 각 변의 길이가 90리에 이르는 성벽을 쌓는다는 규범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성은 자연 지세에 따라 성기를 마련하기 때문에 규격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2) 읍 성

  읍성은 지방 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안에 관아와 민가를 함께 수용하고 있어서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아울러 갖는 시설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179개소가 나타나는데, 행정 구역이 330개소인 것으로 미루어 반수가 넘게 읍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남해와 서해안 지방과 북쪽의 변방에 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고을의 크기나 중요성에 따라 그 규모는 다르게 축조되었다. 평지에만 쌓는 일은 드물고 대개는 배후의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하였다. 이런 형식은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식으로 우리나라 성곽의 특이점이다.

Ⅴ. 성곽의 구성 요소

1. 성문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관문이요, 통로로서 통행의 편의만이 아니라, 전투할 때에 적을 요격하기 위해 출격하는 즉, 공격적 방어를 하기에 적당한 곳에 설치한다. 성문의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문비는 성문의 개구부에 설치된 문짝으로 여닫도록 한 것이다. 문루는 문 위에 누각이 설치된 구조물을 문루라 하는데 외관을 돋우고 위엄을 갖는 의미가 있다. 또한 유사시 장수의 지휘소가 되며 적을 조기에 발견하고자 감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초루라고도 한다. 또한 암문은 노출을 꺼리는 출입통로로 문루를 세우지 않고 몰래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으로 성벽의 일부를 이용하여 은밀한 곳에 설치했다. 수문은 배수를 위한 시설로 규모가 크고 문의 형식을 갖춘 경우 수문이라 하고 규모가 작은 것은 수구라 한다. 암문처럼 작고 눈에 띄지 않게 설치하였다.

  다른 요소인 옹성은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을 말한다. 적이 성문에 접근하여 성문을 뚫으려 할 때 문루와 옹성에서 사방으로 협공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적대는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치(雉)를 말하는데 이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주변 가까운 측면에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방어시설물의 하나이다.

2. 성벽

  성문을 중심으로 벽으로 둘러져 성의 형태를 갖추게 하는 시설이다. 주요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성체는 성벽에서 가장 근본을 이루는 성곽의 몸통 부분으로 보통 성곽의 높이는 성체의 높이를 말한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체 위나 주변에 부대시설을 설치하며 방어에 대비하였다. 다음 요소인 여장은 성체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여장이라 한다. 바깥쪽에서 보면 성벽의 연장으로 성벽을 높이 쌓은 역할을 하고 안쪽에서는 적으로부터 은폐된 활동공간을 제공한다. 여장은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기능을 제공하는 동시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미석은 성체와 여장 사이에 납작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시설로 마치 눈썹처럼 보여 성체와 여장 사이에 납작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시설로 마치 눈썹처럼 보여 미석이라 한다. 총안은 성벽 위에서 적으로부터 노출되지 않고 적에게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여장에 나있는 구멍을 말한다. 여장에는 원거리를 관측하고 사격할 수 있는 원총안이 있고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한 근총안이 있는데 근총안은 급경사로 뚫었다. 원총안은 수평으로 뚫려 있다.

  그리고 현안은 성벽의 바깥쪽 면을 수직에 가깝게 뚫어 성벽가까이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적이 성벽에 완전히 밀착하면 성 위에서 발견하여 물리치기가 어려워져 14세기 말경에 창안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치는 성벽에서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하고 전투시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장방형으로 내쌓은 구조물이다. 치의 형태는 장방형이 많고 반원형의 형태도 있다. 산성의 경우 성벽과 능선이 교차되는 높은 지점에 치를 만들고 평지성의 경우에는 산성보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치를 설치하였다.

  또 다른 시설인 각루는 성곽에서 성벽에 부착된 치의 일종으로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것을 각루라 한다. 네모난 성에서는 모퉁이에 설치하였고 산성 등 자연 지세를 이용한 경우에는 지형상 돌출되어 관측과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공심돈은 성벽에 설치한 돈대의 하나로 각루, 포루, 포루가 위치한 곳과 같은 치의 자리에 높다랗게 설치한 시설물인데 내부가 비어 있어서 공심돈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해자는 성벽의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성곽시설의 하나이다. 해자는 적의 기동에 장애를 주는 하천, 바다 등을 이용한 자연 해자와, 인공적으로 호를 파거나 고랑을 낸 인공해자로 구분할 수 있다.

3. 성내 시설

  성곽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도성과 읍성의 경우는 산성에 비해 성 내부시설이 다양하다. 도성인 경우 궁성을 비롯한 한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여러 시설과 건물이 있어야 하고 읍성일 경우 객사, 동헌, 창고, 우물, 도로망 등을 구비해야 되는 시설들이다. 모든 성곽 안에는 샘, 우물, 저수지 등이 있다. 군사적인 목적을 지닌 성곽에는 장대가 있어야 하는데 장대는 전투시 군사의 지휘에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대체로 성곽의 규모가 큰 곳에 장대가 설치되었다. 장대는 보통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 형식이 대부분이나 중층누각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Ⅵ. 맺음말

  우리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며 조상들의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조선의 역사 속에서 외적을 막아 국토를 지키려 했던 선인의 끈질긴 호국의지의 산물이다. 성돌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하기 위해서 목도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시절에 백성들의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성곽은 쉼 없이 축성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은 성곽의 나라라는 표현까지 나오게 되었다. 얼핏 하잘것없이 보이는 성의 흔적이라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문화재라는 점을 인식하여 보존과 또 성곽에 대한 연구에 힘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1) 변영환, 『한국의 성곽』,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2000

2) 신응수, 『천년 궁궐을 짓는다』, 김영사, 2002

3) 송석상·이강승,『(그림으로 배우는)우리의 문화유산』, 학연문화사, 2003

4)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5) 주남철, 『한국 건축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6)  홍기원, 『성곽을 거닐며 역사를 읽다』, 살림 출판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