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지역개관

 

20070236 이수용

20090203 박세미

20100262 진동섭

 

Ⅰ. 경기도 소개

  경기도는 서울과 인천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경 127°51'~126°22', 북위 36°53'~38°17'에 위치해 있다. 북은 황해도, 동은 강원도, 남은 충청남, 북도와 각각 접하고, 서쪽으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경기도의 면적은 16874㎢ 이고 27시 4군 31읍 111면 39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청의 소재지는 수원시 이며 해로나 육로로 남부와 북부를 쉽게 연결해 준다. 한강과 추가령 구조곡 등으로 백두대간의 동쪽으로 연결되며 한강 이북에는 산간지역이 한강 이남에는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인구는 1,157만여 명이며, 서울특별시 다음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행정구역이다.

 

Ⅱ. 경기도의 역사

  경기도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서,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국토의 남부와 북부를 쉽게 연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로 일찍부터 우리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경기도 지역의 유물, 유적 등을 통해 추측컨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생활해 왔으며, 이후 신석기와 청동기까지도 이어졌다. 그 뒤 초기철기시대의 문화를 기반으로 경기도 여러 지역에서 정치세력체가 형성되어갔다. 서기전 2세기경에는 경기 북부지역에 진국(辰國)이 있었다. 이후 경기도지역은 마한연맹체에 속하였는데 이 중에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溫祚) 집단이 위례성(慰禮城)을 근거지로 건국한 십제(十濟가 있었다. 십제는 하남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꾼 뒤, 마한연맹체를 병합하고 발전을 해나갔다. 그 후로 경기도는 백제에 속하게 되었는데, 삼국의 영토분쟁으로 인해 고구려로, 그 뒤에는 신라의 영토로 들어가게 되었다. 통일기 신라는 전국을 9주로 편제하였는데, 경기도지역에는 한산주(漢山州)를 두고 여기에 27개 군과 46개 현이 소속되었으며 이후 신라 말에 이르러 골품제의 모순과 왕위계승전 등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경기도지역의 여러 곳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은 궁예(弓裔)와 왕건(王建)이었고, 경기도 지역은 먼저 궁예가 건국한 태봉의 영토로 들어갔다. 곧이어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강화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한 송악(松嶽)의 호족 왕건(王建)이 패강진(浿江鎭)과 경기도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고려를 건국하여 개성을 수도로 정하였다. 이는 경기도 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는 개성을 도읍으로 하고, 이 지역을 개주(開州)로 삼았다. 그리고 995년(성종 14) 개주는 개성부(開城府)로 승격되고, 6개의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을 직할지로 삼아 중앙고위관리가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1018년(현종 9) 적현과 기현을 폐지하고 12개현을 특별한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확정하여 「경기(京畿)」라 하였다. 문종 때에 다시 개성부가 설치되었는데, 이때의 개성부는 왕경과는 별도로 독립되어 왕경을 둘러싼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경기가 확립되었다. 「경기」는 이후 크게 확장되었는데, 문무양반의 전시과 지급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양왕대에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졌으며, 수도인 개경은 삼국시대의 수도와는 다른 지역 환경적인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경기도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이며 수도 한양을 두르는 지역이었기에 행정·군사·문화·경제 등 모든 면에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한 뒤, 조선은 경기도를 원근에 따라 재조정하였다. 태종 때에는 좌도와 우도를 합하여 경기도라 하였고, 1개 목(牧)과 8개 도호부(都護府), 6개 군(郡), 26개 현(縣)이 소속되었다. 그 뒤 세종 때에 이르러 경기는 대체로 오늘날 경기도의 관내와 일치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개성·강화·수원·광주는 4도(都)로 취급되어 유수부(留守府)체계를 갖추었다. 개성부는 옛 수도로서 중시되었고 강화·수원·광주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왕도의 방어문제로 경기에서 분리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고종 때에는 광주·개성·강화·인천 등 4개의 부와 34개 군이 설치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경기도 지역 안에 고려와 조선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양이 있던 이유로 수도를 두르는 지역으로서 대단히 중요시 되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역할과 비중이 막중하였다.

 

Ⅲ. 경기도의 유적지

1. 화성시 당항성

  당항성의 옛 지명은 남양(南陽)으로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땅으로 당성군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당항성은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쌓여진 포곡식 내성과 서남쪽의 지맥을 쌓은 테뫼식이 혼합을 이루는 독특한 형식의 산성이다. 일반적으로 산의 정상을 테 모양으로 두른 성을 테뫼식 산성이라 하며,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을 끼고 쌓은 성은 포곡식 산성이라고 한다. 내성 부분은 구봉산의 정상에서 북동쪽과 남동쪽이 돌로 이루어진 석성이며, 남동쪽으로 달리다 갑자기 하강하는 지역은 흙과 돌로 쌓은 토석성이다. 산 정상에는 성황당이 있고 망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는 조선시대의 수군기지였던 화량진터가 남아 있다. 성황당 바로 아래는 당항성을 중심으로 200평에 이르는 평지가 눈에 띄며 이곳에서 기와조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안성시 칠장사(七長寺)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칠장리에 위치해 있으며, 사찰 자체가 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이다. 칠장사 일주문에는 양 옆을 지키는 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15호)이 있고, 경내를 들어가서 대웅전 왼쪽에는 안성 봉업사지 석불입상(보물 983호)과 혜소국사비(보물 488호)가 있다. 칠장사는 두 가지 사실로 널리 알려져있는데, 고려의 사적을 8년 동안 보관한 적이 있었다는 점과 임꺽정의 스승이고 조광조와 교류하며 도학정치를 꿈꾸었던 갖바치(병해대사)가 이곳에 은둔했다는 점이다. 원래 고려의 사적은 합천 해인사에 있었는데 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예천 보문사로 옮겼다가 1379년 선산 득익사로 옮겼으며 2년 후에는 충주 개천사로 옮겼다가 1383년 죽주의 칠장사로 옮겼다.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

 

 

3. 고양시 벽제관지

  경기도 고양시에는 사적 144호인 벽제관의 터(벽제관지)가 남아 있으며 벽제관은 조선 시대 때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거나 조선의 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 숙박이나 휴식을 취하던 공식적인 국가시설의 하나다.『신증동국여지승람』고양군 역원조(驛院條)에 보면 “벽제역은 군의 동쪽 십오 리에 있는데, 중조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에 묵는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벽제관의 기능과 중요도를 파악할 수가 있다. 벽제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서울이나 일본의 건물 보수용으로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두 칸의 건물도 6.25 전쟁 때 중국 인민군의 폭격으로 모든 건물이 타버려 지금은 정문인 삼정문의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 참고문헌

1) 한국고대사문제연구소, 『길따라 유적따라 한국역사기행』, 형설출판사, 1994

2)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의 어제와 오늘』, 경기도, 2001

 

 

수원시 지역개관

20090185 김소라

20100244 임승민

 

Ⅰ. 수원시 개관

  수원은 한반도의 중심부(동경127°, 북위°37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 중앙에 팔달산이 솟아 있고 북쪽에는 광교산, 서쪽에는 여기산이 병풍처럼 수원시를 감싸고 있으며 남쪽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경기도의 도청소재지로서 동쪽은 용인시, 서쪽은 안산시, 남쪽은 화성시, 북쪽은 의왕시에 접한다. 지형은 대체로 동북에서 서남 방면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기온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며, 연평균기온 11.6℃, 1월 평균기온 -3.2℃, 8월 평균기온 25.2℃이다(평년값 기준). 연평균강수량은 1,268.1mm이다.

  또한, 2010년 8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기초 자치 단체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수원은 네 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1988년 7월 1일 권선구와 장안구가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993년 2월 1일에 경기도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팔달구로 분구되었다. 2003년 11월 24일에는 팔달구가 분할되어 영통구가 생겼다. 수원시는 조선 왕조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역사도시로서 문화유적이 많고, 주변에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아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다음에서는 선사․삼한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수원의 역사와 시대변화에 따른 수원지역의 지명변화, 그리고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수원시의 역사 및 유래

  수원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고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서는 수원 지역에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거주하였음을 보여주는 다수의 고인돌과 집자리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삼한시대에 수원 지역에 자리했던 세 나라 중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모수국이다. 모수국은 광개토호태왕비문(廣開土好太王碑文)의 백제 정벌 58성에 나오는 모수성(牟水成)으로 추정된다. 모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 중의 수성(水成)혹은 음(音)과 관련하여 수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수'에서 '모(牟)'는 '보리'로 아마도 벌판을 의미하는 '벌', '수(水)'는 '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수라는 말뜻은 벌판과 물이 연관되는 곳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삼국 시대에 수원 지역을 최초로 차지했던 국가는 백제였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 백제 시대에 수원지역이 어떤 명칭을 사용했으며 그 범역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그 주변인 수원 지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각 지역의 이름을 고구려 식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수원 지역의 이름은 '매홀(買忽)'이라고 하였다. '매홀'이라는 이름은 '물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매'가 '물'의 변이음이고 '홀'이 '골'을 뜻하는 것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홀'이라는 지명은 물이 많은 동네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매홀의 의미는 앞서 살핀 모수의 의미와도 상통하고 있어, 수원 지역과 물과의 관련성을 다시 한 번 말해준다.

  고려 983년(성종 2)에 행정 구역 정리를 통해 전국에 12목을 설치 할 때 '양주(楊州)'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수주도 그 관할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고 992년(성종 11)에 수주의 별호로 '한남' 또는 '수성'이라고 하였다.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개 주에 각각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수주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가 설치되었다. 조선 1395년(태조 4)에 양광도에 속한 수원이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394년(태조3)에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한양의 위치에 맞게 경기도가 다시 조정되었다. 그러므로 한양 천도 다음해인 1395년에 양광도에 속한 수원부를 '경기좌도'에 내속시켰다. 1413년(태종13)에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였고, 수원부를 '수원 도호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또한 경기도 관찰사를 수원도호부에 두고 관내 행정을 총괄하였으며, 수원은 경기도의 중심 도시였다.

 

Ⅲ. 역사문화유적

1. 봉녕사 석조 삼존불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뒷 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본존불의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나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있고 눈, 코, 입이 마모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이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으로 보아 이 삼존석불은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 팔달문 동종

  고려 1080년(문종 34) 2월, 개성에서 주조되어 수원 만의사에서 사용되다가 숙종 13년(1687) 3월, 만의사 주지승 도화가 다시 주조되었다. 정조때 화성축성과 함께 파루용의 기능으로 전락하여 화성행궁 사거리(종로)에 종각 설치 후 이전되었으나 1911년 일제에 의해 정오 및 화재경보용으로 팔달문 누상으로 다시 이전·설치되어 팔달문동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 참고문헌

1) 수원시 문화예술과. 『(Welcome to Suwon . Korea)수원』. 수원시 문화예술과, 1996

2)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 문화재연구원.『수원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경기문화 제단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3) 경기도 수원시.『수원 도시변천사』. 수원시 2004

 

 

여주군 지역개관

20090240 이성진

20100267 최원상

 

Ⅰ. 여주의 지리

  경기도의 동남에 위치하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 광주시(廣州市),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 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지형은 구릉과 저지가 뒤섞여 있으며, 지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전체 면적 607.97㎢이며, 인구는 10만 5,084명(2001년 12월)이다. 평균고도 약 200m의 준평원면을 이루며 중앙부는 특히 낮아 여주분지를 이루고 주변의 최고지점인 동북단의 당산(堂山)도 648m에 불과하다. 태백산맥, 차령산맥, 광주산맥 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주평야가 한강을 끼고 펼쳐져 있다. 여주군을 관통하여 흐르는 한강을 여강이라고 부르며 여강의 동북 지역은 산지가 많고, 강남지역은 전형적인 여주평야로서 넓은 들과 야산이 잘 발달되어 있다.

Ⅱ. 여주의 역사

  여주군의 ‘여주’ 라는 지명은 조선 제 8대 임금인 예종 원년(1469년)에 세종대왕의 영능을 천능하고 나서 지명을 여주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그 명칭이 사용되어 오고 있다. 여주는 초기에는 백제의 요충지였으며, 그 후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잠시 백제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으나,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475년(장수왕 63년)에 다시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어 골내근현이 되었다. 그 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그 명칭이 ‘황요’로 바뀌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23년(940년)에 황려현으로 변경되었다. 현종 9년(1018년) 강원도 원주 임내에 속하였다가 1031년(현종 22년) 다시 충청도로 복구되었다. 그 후 고려 고종 원년(1214년)에 명칭을 ‘영의’로 개칭 하였다가 충렬왕 31년(1305년)에 ‘여흥군’으로 승격되었고, 지군사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2년(1401년)에 ‘여흥부’로 승격하였고, 태종 14년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는데 이 때,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 후 조선 예종 1년(1469년)에 천령현이 여흥에 병합 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고종 23년에는 23부제를 시행하게 되면서 충주부 여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원주군 강천면이 편입되었으며, 1896년에는 13도제의 시행으로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Ⅲ. 여주의 자연 경관

  광주군과의 경계에는 양자산과 앵자봉이, 충청북도와의 경계에는 오갑산이 솟아 있고, 양평군과 경계에는 고래산, 파사성등이 있다. 한강은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섬강, 남서부평지인 점동면을 관통하여 흐르는 청미천, 북부산지에서 발원하여 북내면 중심을 통과하는 금당천과, 가남면을 가로질러 능서면과 홍천면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양화천, 이천읍을 지나 홍천면소재지를 거쳐 흐르는 복하천과, 대신면을 흐르는 곡수천등이 남한강(여강, 황강)으로 합류, 여주를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며 양평을 거쳐 서울로 흘러간다.

Ⅳ. 여주의 문화재

1. 흔암리 유적

  여주지방에서 선사시대에 존재가 알려진 때는 1962년이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적인 ‘흔암리’는 바로 그 마을 사람의 제보로 서울대학교에서 1972년부터 1977년까지 6차에 걸쳐 발굴되었다. 그 결과 적어도 기원전 10세기 즈음에는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물이 재배되었음이 밝혀지는 등 이땅의 청동기 시대의 삶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드러났다. 또한, 6년간 제 6차 발굴까지 모두 14개의 집터가 찾아졌으며, 그 집터에서 질그릇과 석기를 비롯하여 곡물과 짐승뼈조각, 게의 발톱이 나왔는데 이 유적은 기원전 10세기 즈음부터 남한강 중류지역에서 터를 잡고 혼합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간직하고 있어 청동기 시대의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를 계기로 흔암리에 이웃한 지역의 지표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철울말’과 ‘멱곡리’ 유적을 발견했다.

 

2. 고달사지 승탑

고달사 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 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 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3. 김영구 가옥

뒷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을 하고 있는 이 집은 1753년(영조 29년)에 지은 것을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안채·사랑채·작은 사랑채·곳간 채가 모여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원래 대문은 바깥행랑채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깥 행랑채가 헐려 남아있지 않다.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대문의 오른쪽에 一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대문을 통하여 안마당을 들어서면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하는 ㄷ자형의 안채가 자리한다. 안방의 왼쪽으로 부엌이 꺾여 자리 잡았고 그 아래로 찬광·찬 모방·마루가 있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마루방·건넌방·부엌이 있는데, 부엌 옆에는 방 2칸과 마루가 있는 작은 사랑채가 돌출하여 있다. 작은 사랑채는 더러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문 것이어서 이 집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채는 큰사랑·큰사랑대청·사랑방·머리대청을 一자로 배치하고 앞쪽에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큰사랑 앞에는 마당 쪽으로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집의 뒤뜰에는 一자형의 광채가 길게 놓여있다. 안방과 대청, 사랑방과 사랑대청에는 각각 분합문을 달아서 여름에는 열어 놓아 시원하게 공간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마당의 중앙에는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안채와의 직접적인 시선을 막고 있다. 집 앞으로 있던 一자형의 행랑채가 지금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사대부의 개인 취향적인 우수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집을 지은 시기가 비교적 분명하고, 훈련된 목수가 기법에 따라 정성껏 지은 격조 높은 집으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주택이다.

※ 참고문헌

1) 이 준애, 『떠나면 길이 보인다』, 삶과 꿈, 2000

2) 김 승민, 『우리 역사 우리 지리 2』, 주니어 김영사, 2009

3) 최 미선, 『대한민국 절대 가이드』, 삼성출판사, 2010

 

 

강원도 지역개관

20100187 박예슬

20100256 정종남

 

Ⅰ. 연혁

  강원도 한반도 중앙부의 동측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크게 구분되어 있으며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현재는 남북이 함께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유일한 도급행정구역이다. 남과 북의 지역으로는 고성군 현내면 북위 38도 45분 근처에서 서남하하여 향로봉, 문등리 및 김화읍 의 북방을 연결하는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한다. 서방은 황해도 신계·김천군, 경기도 연천·포천·가평·양평·여주 등 여러 군과 접해 있고 남쪽은 충청북도 충주·제천시, 단양군 및 경상북도의 영주시, 봉화·울진군과 북쪽은 함경남도 안변·덕원군 및 황해도의 곡산군과 접하여 5도 3시 13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이 대부분 산지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태백산맥 동쪽은 경사가 급하여 해안평야의 발달이 취약하고, 서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영동과 영서로 나누었을 때 영동은 가파른 산자락이 동해와 맞닿아 평지가 협소하지만 대관령, 미시령, 진부령, 한계령 등 많은 령과 계곡이 산재하고 있어 그 경관이 빼어나다. 영서는 산악과 분지가 완만하게 서쪽으로 퍼져있어 서울, 경기지방까지 흘러내리고 대부분 고원으로 되어있어 논보다 밭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Ⅱ. 역사

강원도의 역사는 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신석기 시대에는 강릉 이외 춘천, 양양을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지방과 영서 지방의 북부, 남한강상유역으로 문화가 발전되었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고대에는 사람들이 모여 예맥(濊貊)이라 불린 국가를 세웠다. 『삼국지』에서는 예맥을 예라고 불렀으며 “고구려는 남으로 예맥과,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며........”라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삼국시대를 열면서 영서지방은 백제의 영향력을 받았으나, 고구려의 세력이 강하였던 3∼5C 경에는 강원도 전체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지방행정구역으로서 강원도의 영역 파악이 가능하게 되었던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확대된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지방행정조직인 9주를 설치한 신문왕 5년(685) 경 부터였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9주중 영서의 삭주와 영동의 명주로 구획되어 21개 속군 51개 속현을 관할하였으며 특별행정구역인 북원경이 삭주의 관내에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에서 행정구역이었던 강원도는 신라 말 농민봉기와 호족의 대두로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 지역에 양길(梁吉)에 의해 통치된다. 그 이후 양길은 부하 궁예에게 내선(지금의 영월), 욱오(지금의 평창), 어진(지금의 정선)을 점령하도록 하게한다. 궁예는 이를 토대로 세력을 키워 철원(鐵圓)에 근거지를 두어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다. 이때부터 후삼국이 시작된다.

  후삼국 시기 강원도는 가장 비중이 큰 지역으로 대두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 세력가인 양길과 궁예의 거점 지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궁예가 중이 되었다는 영월에 세달사(世達寺)를 들 수 있으며 후고구려의 뒤를 세워진 고려(高麗)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고려시기에 강원도는 고려 현종에서 숙종연간의 약 80년 동안 동여진이 선단으로 멀리는 경주까지 20여 회의 침범을 겪는 동안 강원도는 분란을 당하였고 고종연간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 전란에 휩싸였다. 고종 때의 몽고군의 침입은 온 국토를 피폐하게 하였으며 강원도는 더욱 그 피해가 심각하였다.

  조선시대 강원도는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지금의 명칭인 강원도라 불려진다.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정치적으로는 왕조교체에 따른 행정구역의 재편에 따라 1394년 도평의사사에서 행정구역의 일부 개편을 건의하면서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로 고칠 것을 청한 후, 그 다음 해인 태조 4년(1395) 영동의 강릉도와 영서의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로 합도 함으로써 '강원도'라는 도명이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시대의 중심 사상이었던 유교가 발달하였다. 대표적으로 율곡(栗谷)이며 강릉을 중심으로 기호학파의 영향이 컸으며 다른 학파가 들어오지 못할 만큼 강하였다. 그 밖에도 원주에는 정시한(丁時翰)과 퇴계의 제자인 조월찬을 들 수 있으며 춘천은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가 혼재 되어있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하여 강원도에는 서원이 각 지역으로 분포되어 있었으며 훗날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하였을 때 많은 서원이 철폐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강원도는 1894년 갑오개혁의 하나였던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춘천부와 강릉부의 두개로 나뉘어졌다. 곧 이어 13도제가 실시되어 춘천에 관찰부를 두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일제시대의 강원도는 일제에 의해 강제 공출을 당하였다. 특히 1930년부터 광산이 주된 공출 대상이었는데 일제는 이곳에서 나온 황금을 채취하여 부를 쌓거나 전쟁물자로 이용하였다. 대표적인 광산으로는 정선 화암동굴 광산이 있으며 대부분은 문을 닫아 남아있지 않다.

  해방이후 강원도 6.25전쟁을 맞으면서 후퇴하는 우리나라 군대의 피신처로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홍천과 횡성, 원주를 들 수 있으며 특히 원주의 경우 전쟁 초기 가장 치열하였던 지역이었다. 원주천 철교가 폭파 당하였으며 북한이 점령하기도 하기도 하였지만 9월30일 국군과 인민군의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이 재점령하였다. 1951년 2월15일 중공군의 마지막 대공세를 끝으로 원주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비록 국군의 승전을 끝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북한과 남한의 국경이 되었던 강원도는 피해가 극심하였다.

해방 이후 강원도는 피해복구를 위한 사업이 지속되었으며 가장 대두된 것은 1955년 원주와 청량리를 잇는 급행기동차, 2000년에 들어서 강원도는 서울과의 교통 원활을 위해 서울과 춘천을 잇는 경춘선이 있다. 최근에는 강원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2018년 동계올림픽이 평창을 중심으로 강원도가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Ⅲ. 대표적인 유적지

1) 오대산사고지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오대산 사고가 있던 곳은 원래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에 탔으나 1992년에 사각과 선원 보각으로 이루어진 사고의 건물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원주감영지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지어진 감영이다

 

 

 

※ 참고문헌

1) 장영민, 『원주 역사를 찾아서』, 경인문화사, 2004

2) 김우철, 『여지도 15, 강원도 1』, 디자인흐름, 2009

3) 강원도, 『강원도사』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0

4) 강원도, 『강원도사-2권 선사시대』, 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0

5) 강원도, 『강원도사-3권 고대』, 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0

 

 

평창군 지역개관

20090255 임지선

20100186 박성호

Ⅰ.기본현황

유 형

지 명

성격

군(군

위치

강원도 중남부

면적

1,464.16㎢

인구

4만 3,408명(2011년 현재)

행정구역

1개 읍 7개 면 188개 리

도·시·군청소재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

철쭉

나무

전나무

원앙

 

Ⅱ. 개관

  동쪽은 강릉시·정선군,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강릉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46'~128°14', 북위 37°16'~37°49'에 위치한다. 면적은 1,464.16㎢이고, 인구는 4만 3,706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7개 면, 188개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에 있다.

 

Ⅲ. 연혁

삼국시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있어 욱오현(郁烏縣(일명 于烏縣))이라 하였음

통일신라,

경덕왕16년(757)

백오현으로 개칭하고 내성군(現영월군)의 영현(嶺縣)으로 하였음

고려

태조 23년(940)

평창현으로 개칭하고 원주의 속현(屬縣)으로 됨

충열왕 25년(1299)

현령을 파견하고 원주로부터 분리하였음

조선

태조 원년(1392)

태조의 5대조인 목조비(穆祖妃)의 고향인 관계로 군으로 승격됨

우왕 13년(1387)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평창현으로 강등됨

1895. 05. 26.

칙령 제98호(1895. 5. 26 공포)로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충주부 평창군으로 됨

1896. 08. 04.

칙령 제36호(1896. 8. 4 공포)로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강원도 평창군으로 됨

1906. 10. 01.

강릉으로부터 대화, 봉평, 진부등 3면이 평창군으로 편입되었고 동면은 정선군으로 이관됨

1914. 03. 01.

군내·남·북면의 3면을 통합하여 평창면으로 하였음

1931. 04. 01.

부령 제11호로 정선군으로부터 도암면이 편입됨

1934. 07. 01.

대화면인 방림, 운교, 계촌리가 분리되어 방림면이 됨

1973. 07. 01.

대통령령 제6542호(1973. 3. 12 공포)로 진부면 장평리가 봉평면으로, 도암면 호명리 일부와 봉산리가 진부면에 편입됨

1979. 05. 01.

대통령령 제9409호(1979. 4. 7 공포)로 평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6면을 관할하였음

1982. 10. 12.

군조례 제811호로 군청소재지를 평창읍 하리 215번지로 이전하였음

1983. 02. 15.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1. 10공포)로 봉평면 백옥포·장평리, 진부면 속사·노동·용전·이목정·도사리와 대화면의 신리 일부를 통합하여 용평면을 설치하였음

1989. 01. 01.

군조례 제1144호(1988. 12. 31 공포)로 도암면 호명리를 진부면에 편입하였음

1990. 01. 01.

군조례 제1235호(1989. 12. 22 공포)로 평창읍 하6리, 도암면 횡계7·8·9·10·11·12리를 증설하였음

1991. 01. 17.

군조례 제1331호(1991. 1. 17 공포)로 지번합병에 따라 군청사를 하리 215번지에서 평창읍 하리 210-2번지로 변경하였음

1996. 03. 29.

군조례 제1484호로 진부면 송정3·4리를 증설하였음

1998. 09. 25.

군조례 제1553호로 면온·수항·유천출장소를 폐지하였음

2000. 10. 21.

군조례 제1645호로 백옥포3리, 횡계13리를 증설하였음

2003. 10. 04.

군조례 제1726호로 송정5리를 증설하였음

2007. 09. 01

군조례 제1803호로 도암면을 대관령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음

 

Ⅳ. 유물·유적

  국가 지정문화재는 국보 4개, 보물 3개, 사적 1개, 천연기념물 2개, 중요민속자료 1개로 모두 11개이고, 강원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20개, 기념물 3개, 무형문화재 3개, 문화재자료 6개가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 주는 고인돌과 주거지는 다수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평창읍 계장리·대하리·상리·유동리·임하리·종부리·주진리·후평리와 용평면 장평리, 진부면 수항리 등에 분포하고, 평창읍 임하리에서는 선돌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돌도끼·홈자귀·바퀴날도끼·간돌칼·반달칼·돌화살촉·돌창·가락바퀴·갈돌·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평창읍 여만리와 응암리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적석총이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전의 연맹왕국 단계에도 이 지역에 사회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으로 평창읍 하리에 통일신라시대 석실고분과 종부리 고분이 있다. 성지로는 평창읍 중리의 노산성지(魯山城址)를 비롯하여 봉평면 흥정리의 태기산성지, 대화면 대화리의 대화산성 등이 있다. 노산성은 조선 선조 때 김광복(金光福)이 축조하였으며, 높이 1.32m, 둘레 414m의 규모였다 한다. 평창은 진부면 동산리의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元寺)를 비롯하여 대덕사(大德寺)·법장사(法藏寺)·극락사·천왕사(天王寺) 등 유서 깊은 사찰과 평창읍의 원당리사지, 진부면의 평창수항리사지(강원도 기념물 제49호)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월정사적멸보궁(강원도 유형문화재제28호)·월정사부도군(강원도문화재자료제42호)·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勤善文,국보제292호)·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제221호)·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보물 제793호)·상원사목조보살좌상(강원도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있다. 이 밖에 월정사육수관음상(月精寺六手觀音像,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3호)·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동진보살상, 평창읍의 중리오층석탑·상리오층석탑·하리석탑·유동리오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0호)·방림리석조여래좌상, 진부면의 탑동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9호) 등도 평창군의 중요한 불교문화재로 꼽힌다.

 

※ 참고문헌

1) 건설부저,『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1986.

2) 김선풍 저,『평창군 민속지』,국학자료원,2002.

3) 시공사 편집부 저,『강원도』,시공사,2004.

4) 길을찾는사람들 저,『강원도 걷기여행』,황금시간,2010

 

강릉시 지역 개관

 

20081153 임정철

20100266 최소영

. 강릉시 연혁

  강원도 강릉시는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되어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阿瑟羅)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6세기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된 이후 북빈경(北濱京), 하서주(河西州), 통일 신라의 경덕왕 16년에는 명주(溟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후삼국 시대를 이은 고려의 태조는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으로 칭하였고 그 이후 940년에는 명주, 983년 하서부(河西府), 986년 명주도독부, 992년 명주목, 1260년 경흥도호부, 1308년에는 강릉부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시기(1389년)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등으로 명칭과 품계가 바뀌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처음에는 공양왕 시기의 강릉대도호부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666년 강릉 현으로 지정되었으며 1775년에는 대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1789년에는 강릉 부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13도제 실시로 1896년 강릉 군이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06년 임계면(臨溪面)·도암면(道岩面)을 정선군에, 진부면(珍富面)·봉평면(逢坪面)·대화면(大和面)을 평창군에, 내면(內面)을 인제군에 이관하여 관할 면이 축소되었다. 1913년 일제 강점기에는 강릉 군이 북1리면, 북2리면, 남1리면을 합쳐 군내면으로 개칭되다가 1914년 군내면은 강릉 면으로 개칭되기에 이른다. 그러고 나서 1931년 강릉 면은 강릉 읍으로 승격되며 1955년 강릉읍, 성덕면, 경포 면을 통합하여 강릉시로 승격시키고 나머지 면을 명주군으로 개칭하여 분리한다. 결국 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 시가 되었다.

 

Ⅱ. 위치 및 자연환경

  강릉은 한반도의 허리라고 불리는 태백산맥의 동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동쪽은 동해바다, 서쪽으로는 홍천군 내면, 평창군 진부면과 대관령 면에 각각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동해시 일원, 정선군 임계면과 북면에, 북쪽으로는 양양군 현북면과 현남면에 도내 5개 시군과 접하고 있다. 해안 및 산악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해안 형과 내륙 형을 겸비한 입지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해양성 기후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며 지형적인 여건에 따라 위도에 비하여 겨울철은 온난하고 여름철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어서 연기온의 격차가 적은 편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은 14.0℃로 영서의 다른 지방에 비해 높은 편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342.7㎜이다.

Ⅲ. 문화재

1. 한송사 터  

  신라 때 문수와 보현 두 보살이 세운 문수사(文殊寺)라는 창건설화가 전해지지만 그 이후의 내력과 폐사의 연대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 보물 제 81호로 지정된 한송사 터 석불 상은 오죽헌 내에 있는 강릉 향토 사료관에 있다. 그리고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한송사 터 석조보살좌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가 일본인 화전웅치에 의해 빼앗긴다. 그러다가 1966년에 반환되었다고 한다.

 

1) 한송사 터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 124호로 고려시대 작품이지만 통일 신라 조각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교하게 만든 작품이고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92.4cm로 머리에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통통하고 둥글며 눈은 반쯤 감고 있다. 입술에 붉은 채색을 한 흔적이 보이며 약간의 미소를 통해 인자함을 느낄 수 있다. 목에는 굵은 삼도가 새겨져있고 다리는 좌서상(左舒相)의 형태로 되어 있다.

 

 

2) 한송사 터 석불 상

  한송사 터 석불 상은 신라 조각의 전통을 따른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 81호로 지정되어있다. 석불 상은 오른쪽 다리를 안에 두고 왼쪽 다리를 바깥으로 하는 우서상(右舒相)의 형태로 되어있다. 그리고 몸의 높이가 56cm로 머리 부분과 오른쪽 팔 부분이 없고, 마멸이 심하게 되어있고, 몸의 단면을 살펴보면 중앙에 구멍이 있다.

 

2. 강릉향교

강릉향교는 강원도 강릉시 교동 233번지에 있으며 1313년에 김승인(金承印)이 현재의 자 리인 화부산(花浮山)에 창건하였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 치된 국립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 와 유학교육을 담당하였다. 강릉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십철·육현을 봉안한 대성전과 우리나라의 18선현과 중국의 유명한 유학자를 봉안한 동무·서무가 있고, 강론을 하던 명륜당과 학생들이 기숙을 하던 동재·서재가 있다. 이 강릉 향교는 1411년에 소실되었으나 2년 후 판관 이맹상(李孟常)으로 인하여 다시 세워졌다.

 

 

 

3. 강릉 단오제

  중요 무형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된 향토축제로서 약 50일 정도로 대대적인 행사가 진행된다. 음력 3월 20일 신주 빚기로 시작해 산신제, 국사서낭제, 구산서낭제, 관노가면극 등이 진행되다가 5월 7일 송신제를 하고 난 뒤 행사가 끝난다. 강릉 단오제는 제사지내는 것 뿐 아니라 그네뛰기, 씨름, 민요, 시조 경창, 농악 경연, 궁도, 투호 같은 놀이도 행하여진다.

 

※ 참고문헌

1) 한국문화유산답사회,『동해. 설악』, 돌베개, 1994

2) 최철,『강릉, 그 아득한 시간』,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3) 강원사회연구회,『강원문화의 이해』,한울, 2005

4) 강원도,『강원도사』, 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0

 

태백시 지역개관

20081113 서철화

20090272 조혜미

0

  백두대간의 중추인 태백산이 소재한 태백시는 민족의 젖줄인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다. 태백시(太白市)는 동경 129°06′~128°52′ 북위 37°03′~37°20′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303.52㎢이고, 인구는 2008년의 통계에 의하면 5만 1,028명이다. 태백시는 강원도의 7개시 가운데 하나로 태백이라는 이름은 태백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뜻으로는 크게 밝다는 의미가 있으며, 태백산은 ‘크게 밝은 뫼’ 이며 ‘한밝달’또는 ‘한배달’로 부르는 데 단군신화와 연관이 있다. 하늘나라 하느님(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고 그로 인하여 환웅이 내려온 산을 하늘로 통하는 길로 봤고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와 같은 곳으로 믿게 되었다. 하늘나라 하느님(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고 그로 인하여 환웅이 내려온 산을 하늘로 통하는 길로 봤고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와 같은 곳으로 믿게 되었다.

  태백시의 북쪽으로는 삼척시의 하장면을 경계로 남쪽으로는 경상북도의 봉화군 석포면과 강원도의 영월군 상동읍을 동쪽으로는 강원도의 삼척시가 있다. 태백시의 행정구역은 황지동, 황연동, 삼수동, 상장동, 문곡소도동, 장성동, 구문소동, 철암동으로 8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청은 황지동에 위치하고 있다. 도로는 영동 및 중앙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국도 31,35,38호선을 통하여 접근이 가능하며, 철도로는 시내로는 태백선이 연결되어있으며 외곽으로는 영동선이 연결되어 있다. 태백시는 백두대간의 중추인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태백산에 소재하고 있다. 남쪽은 태백산(1,567m)·연화봉(蓮花峰:1,053m), 동쪽은 삼방산(三芳山:1,175m)·백병산(白屛山:1,259m), 북쪽은 대덕산(大德山:1,307m), 서쪽은 함백산(咸白山:1,573m) 등의 연봉들로 둘러싸여 있어 고원성 산지로 높고 험준한 지역이다. 시 전체가 매봉산, 천의봉, 백병산, 함백산, 금대봉 등 수려한 경관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해발 650m의 고원분지이며 예로부터 무연탄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Ⅱ. 태백시의 역사

  태백시는 예로부터 삼척시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태백산 밑에 형성된 장성읍과 황지읍이 인구의 증가로 1981년 7월 1일 시로 승격되면서 합쳐지게 되었는데 두 읍이 모두 태백산 밑에 있기에 태백시로 한 것이다. 태백시가 되기 전 황지, 장성 두 읍의 대표들이 태백군 설치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군 추진을 노력하였으나 결과는 시로 개칭 된 것이다. 태백시는 삼한시대에는 진한(辰韓)의 실직국(悉直國)의 영역에 속하였고, 102년에 실직국이 신라에 항복하게 되어 신라에 편입되었다. 5세기경에는 고구려 장수왕때 남하정책으로 인해 한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나 505년에 신라가 다시 회복하여 실질주(悉直州)라 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아 다스렸다. 이후에 북진정책을 수행했던 신라에 의해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중요지가 되었고 무열왕대에는 북진(北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9주5소경이 정비되면서 하서주(河西州)에 속하였고, 이후 하서주가 명주(溟州)로 바뀌었는데 동시에 그 관할을 받는 삼척군(三陟郡)으로 개칭되었다. 이후에 고려 성종 14년에는 척주(陟州)로 승격되고 단련사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고 그 뒤 현종 9년에는 다시 삼척현이 되어 현령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지방제도가 5도양계로 정착되자 동계(東界)의 관할에 포함되고 1378년(우왕 4)에는 삼척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의 태백시는 조선의 건국 직후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삼척부(三陟府)로 승격되고 그 뒤에는 다시 삼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을 삼척 궁촌으로 유배하자 울진군의 장천영, 임제 등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 이때 울진군이 역모의 본거지라 하여 울진군은 현으로 강하되고 관하에 있던 5현(북산,태백,수비,비랑,우산)은 파하여 인근 군에 부속시키니 울진군 태백현에 속해있던 낙동강 수계의 동점,철암,장선,황지등의 땅은 안동도호부로 이속되었다. 원래 태백시의 옛이름으로 지금의 태백시와 삼척시 하장면 전체를 장생이라 하였고 인조 8년에 삼척부사 이준이 삼척부 경내를 9개리로 나누어 다스릴 때 이곳을 장생이라 하였다. <삼척군지>에 보면 장생의 어원을 장도 , 장천, 장진에서 찾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전통과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태백시 전역에 장도니 장천이니 장진이니 하는 지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작은 하천 밖에 없는 지역에 그렇게 큰 나루터는 없다.1895년(고종 32) 삼척도호부는 전국이 23개부(府)로 편제 될 때 강릉부 관할이 되어 이듬에 강원도 관할로 바뀌었다. 1963년 장성읍 황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64년 장성읍 철암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 후 황지지역 광산개발로 황지가 급속히 발전됨에 따라 1973년 장성읍 황지출장소가 황지읍으로 승격되어 태백은 장성읍과 황지읍으로 각각 분리되었다. 비로소 1981년에는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가 되면서 삼척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태백시는 고원성 산지라는 지역적인 조건이 영향을 많이 받는 곳으로 평야는 거의 없지만 매봉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비교적 완만한 고위평탄면이 곳곳에 자리하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태백시의 기후는 고원성 산지에 의해 고도가 높아서 기온이 낮아 특히 겨울에는 그 계절이 길고 봄과 가을은 비교적 짧다.

 

Ⅲ. 태백시의 유물·유적

  태백시의 유물·유적에 대해서는 국가지정문화재가 4개, 강원도지정문화재가 4개, 문화재자료 1개, 등록문화재가 2개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명승이 1개, 천연기념물 2개와 중요민속자료 1개이다. 강원도지정문화재는 유형문화재 2개와 기념물 2개, 민속자료 1개가 있다.

 

1. 태백산 천제단(太白山 天祭壇)

  태백산 정상에는 자연석을 쌓아 만든 3기의 제단인 태백산 천제단(太白山 天祭壇)이 있다.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둘레 27m, 폭 8m, 높이 3m 의 원형재단이다. 단군조선시대의 구울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며 이 제단은 1991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2. 고생대의 보고 구문소(求門沼)

  고생대의 보고 구문소(求門沼)는 낙동강 상류의 황지천의 물이 이 소에 머물렀다가 가는 곳으로 석회암이 용해되어 생성된 것으로 약 1억 5천만년에서 3억년전 사이에 생성되었다고 한다. 마당소, 자개문, 용소, 삼형제 폭포, 여울목, 닭벼슬바위, 용천 등으로 불리는 구문팔경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 41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참고문헌

1) 김흥운·조구현 공저, 『한국관광안내』, 형설출판사, 1999

2) 최상희 저, 『강원도 비밀코스 여행』, 웅진 리빙하우스, 2010

3) 최웅·김용구·함복희 공저, 『강원설화총람Ⅲ(원주시·태백시·횡성군)』, (주)도서출판 북스힐, 2006

 

 

정선군 지역개관

 

20090186 김소람

20090244 이윤정

Ⅰ. 정선군 연혁 및 행정구역

  강원도 정선군은 고구려 668년(보장왕 27)부터 ‘잉매현(仍買縣)’이라 부르다가 신라가 삼국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 행정구역을 9주로 개편할 때 ‘정선현’으로 개칭하고,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2년에는 정선현을 ‘정선군’ 으로 승격되었으며, 1018년(현종 9) 명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주진군으로 승격하였다. 1291년(충렬왕 17) 도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침봉군으로, 다시 1353년(공민왕 2)에 정선군으로 환원되었다. 1466년(세조 12) 원주의 부속령이 되었다가 다음 해에 환원되었다. 1906년에는 강릉군에서 임계면·도암면 2개의 면과 평창군에서 신동면이 편입되어 6개 면을 관장하였고, 1924년에는 군내면과 서면을 병합하여 정선면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에는 도암면을 평창군에 이관하였고, 1935년에는 정선면의 도암동, 백일동 일부가 평창군 진부면 간평리에, 신동면 천포리 석항 일부가 영월군 상동면 연상리에 편입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탄광개발이 시작되어 태백선·정선선 등의 철도가 연결되고 탄전지대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73년에 정선면과 동면의 사북출장소(舍北出張所) 관할구역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같은 해에 대통령령 제6542호에 따라 삼척군 하장면(下長面)의 가목리(柯木里)·도전리(道田里) 2개리가 임계면에, 명주군 왕산면(旺山面)의 구절리(九切里)·남곡리(南谷里) 2개리가 북면에 편입되었으며, 신동면 천포리 일부가 영월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신동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85년 사북읍이 고한읍·사북읍으로 분리되었으며, 이듬해 북면 북평 출장소가 북평면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임계면 봉정리가 북면 봉정리로 편입되어, 지금의 4읍 5면 1출장소가 되었다. 정선군은 4읍(정선읍 · 사북읍 · 신동읍 · 고한읍)과 5면을 관할한다.

  정선읍(旌善邑)은 1973년에 읍이 되었고, 조선 500년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본 군의 군청 소재지로서 정치, 행정,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읍사무소 소재지는 봉양리이다. 함백선의 개통과 함백탄전의 개발에 따라 발전하게 되었다. 특산물로는 메밀, 황기, 옥수수, 꿀·버섯·잣 등이 있으며, 평창군 대화면과의 경계에 있는 가리왕산은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한읍(古汗邑)은 조선시대에 동상면에 속했던 고토일, 물한리로 1906년(광무 10) 지방행정구역 개편시 동상면, 동중면이 통합되어 동면이 되는 동시에 고토일, 물한리를 합쳐 고한리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고토일, 물한리, 갈래, 대두문동, 소두문동, 만항, 박심으로 구분되며, 30년 전에는 780호 정도가 살고 있던 한적한 산촌이었는데, 무진장으로 매장된 석탄이 개발됨에 따라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현재 지방행정리 25개리로 주민 2,5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사북읍(舍北邑)은 조선시대에 동상면 관내로, 사음대, 북일, 고토일, 물한리, 발전, 수출 등 7개 동이 있었다. 이 일대는 지하자원의 보고로서 무연탄이 무진장으로 채굴되어 산업인구는 날로 급증하고 산업개발이 급속도로 확대되어 1962년에 동면 사북출장소가 설치되었으나 지역발전에 행정력이 따르지 못하여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사북읍이 신설되어 법정리 수 2개리, 행정리 수 15개리로 출발하였다. 신동읍(新東邑)은 조선 중엽에는 평창군 관할로 있었으나, 1906년 평창군 신동면(평창동쪽에 새로생긴 면)이 정선군으로 편입되었다. 1950년 광산개발로 상주인구가 차츰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 에너지 파동으로 인해 석탄소요량이 늘어나자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동면이 신동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에는 석탄합리화방침에 따라 지역의 모든 활동이 축소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화암면(畫巖面)은 조선시대 말 동중 또는 동상면으로 불리다가 1909년 동면으로 개칭되어 면사무소를 호촌리에 설치하였다. 1912년 군, 면 폐합 때 면사무소를 호촌리에서 화암리로 이전하였다. 1962년 고한, 사북, 직전리 등 3개리를 관할하는 사북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사북출장소 관래가 사북읍으로 승격되면서 동면에서 분할되었다. 2009년 동면에서 화암면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남면(南面)은 고려 충렬왕 17년에 군명을 "주진(朱陳)에서 도원(桃源)으로 개칭할 때 무릉리 증산에 읍 터가 있었다."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남상면과 남하면이었던 것을 1906년(광무 10)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시 남상면은 무릉리 현재의 증산에, 남하면은 낙동리 현재의 음지촌에 각각 면소재지를 두었던 것을 남상면과 남하면이 합친 후에는 유평리 음지촌에 면사무소를 개설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36년 수해로 면사무소가 유실 여러 차례 이전 끝에 1958년 8월에 지금의 위치에 개설 하였다고 한다. 여량면(餘糧面)은 구한국 시대에 북면과 여량면이었던 것을 여량면을 북면에 통합하고, 면사무소를 북평에 두었다. 그 후 1915년 4월에 리·동을 통합하여 9개리로 확정하고 면사무소를 남평리로 이전하였다가, 1932년에 현 면사무소를 여량리로 이전하였다. .

 

Ⅱ. 위치 및 자연환경

  정선군은 강원도의 동남부, 태백산맥 중에 위치하여 전역에 걸쳐 산악이 중첩하고, 남한강 유역 계곡에 좁고 기다란 평지가 있다. 북부에는 발왕산, 서부에는 가리왕산, 동남부에 대덕산, 백운산 등이 있다. 평안계와 조선계에 속하는 지층이 발달하여 많은 석탄을 매장하고 있다. 면적 1,221.00㎢, 인구 5만 1,299명(2001.12)이다. 이처럼 내륙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큰 편이며, 특히 겨울에는 추위가 심하고 여름은 서늘하다.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0.3˚, 1월 평균 -6.2˚, 8월 평균 24.3˚, 연강수량은 1,350㎜이다.

Ⅲ. 문화재

  정선군은 화암팔경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경관이 풍부한 정선아리랑(강원무형문화재 1)의 고장이다. 천혜의 경승지 35개소는 물론, 석회동굴 37개소, 가리왕산·함백산·민둥산·노추산·두위봉·백석봉 등 1,000m 이상의 명산 22개소 등이 산재한다. 군내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1점, 천연기념물 3점, 중요민속자료 8점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유형문화재 3점, 기념물 6점, 무형문화재 1점, 민속자료 4점, 문화재자료 2점 등 도지정문화재가 있다.

 

1. 정암사 수마노탑(淨岩寺 水瑪瑙塔)

  이 탑은 보물 제410호로 전탑계 모전석탑(7층)으로 탑신부를 구성한 횡전재는 회록색의 석회암으로 크고 작은 모양의 직6면체를 질서 정연하게 쌓아올려 수법이 정교하며 표면은 잘 가공 되어 마치 벽돌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탑신은 밑면이 178cm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cm 방형(方形)으로 만들었고, 1층 탑신 남쪽면 중앙에는 감실을 설치하였는데 화강석으로 외경 폭 65cm, 높이 70.5cm, 내경 폭 41cm, 높이 59cm의 틀을 짜서 판석으로 문짝을 세워 2짝의 문임을 나타내고, 중심에 쇠 문고리를 부착하였다. 옥개는 전탑의 전통적 형식대로 추녀의 폭이 좁으며, 전각에서 살짝 들린 듯 하고 각층 전각 끝에는 풍경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옥개의 체감 현상도 탑신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옥개 받침은 1층 7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옥개 윗면의 층단도 1층의 9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 3단이 되었다. 추녀에는 풍경이 있고 상륜부에 화강석으로 만든 노반이 있고 그 위에 모전재 2기을 얹어 청동제 상륜을 받치고 있다.

 

2. 정선아리랑

  정선군에서 보물보다 유명한 것은 정선 아리랑인데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영서·영동지방에 분포(分布)되어 옛 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 민요 정선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조선 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松都)에서 은신 하던 72현 가운데 7현은 정선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 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忠節)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心 情)을 한시로 읊은 것 중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7현들이 이러한 비통(悲痛)한 심정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며, 그 후 사화(士禍)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暴政時)에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시)라고 한다.

※ 참고문헌

1) 최웅, 『강원설화총람 4 - 영월시‧평창군‧정선군』 북스힐, 2006

2) 배희선, 『강원도 청정고을에 가다』, 가다출판사, 2010

 

 

영월군 지역개관

20081151 임성빈

. 영월의 역사

  영월은 삼한시대 진한의 땅이었으나 한강을 점령한 백제세력이 커지면서 그들 영역에 속하고 100가구가 넘는 작은 땅이었으나 백월(百越)이라 부리기도 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성종(成宗) 14년(995년) 1월 내성현의 일부이던 백오현을 평창현으로, 자춘현을 영춘현으로 고쳐 주천현과 함께 원주군에 소속되었다. 영월로 명칭이 정해진 것은 1167년 의종 21년이며, 1372년 공민왕 21년 5월 이 고을 출신 연달마실리(延撻磨失里)가 환관(宦官)으로 명나라에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영월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399년 영월군을 강원도에 이속시켰다. 1698년 숙종 24년에는 영월에 유배되어 숨진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그 능묘가 있는 영월군을 도호부로 승격하고 부사를 배치했다.

  그후 고종 32년(1895년) 도호부를 없앨 때 다시 군이 되었으며 원주, 평창, 정선과 함께 충주부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 다시 강원도로 복귀 되었다. 1905년 주천면과 수주면이 다시 편입되었고, 1960. 1. 1 영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 1. 1 경북 봉화군 춘양면 천평리(川坪里)와 덕구리(德邱里)가 영월군에 편입된 반면, 수주면 강림리, 부곡리, 월현리가 횡성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가 영월군에 편입되었으며, 상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영월이 되었고 조선 6대 단종대왕과 김삿갓의 발자취 등이 남아있다.

 

. 영월군 소개

  영월군은 강원도 남쪽에 위치 동쪽으로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 소천면이 있고 서쪽 원주군 신림면과 횡성군 안흥면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등과 접하고 있다. 그리고 위치는 동경 128°07′~128°55′, 북위37°02′~37°24′ 이다. 그리고 서북쪽은 차령산맥 남동쪽은 태백산맥이 있고 근처에는 구룡산, 배덕산 등 산 들이 많은 높은 산악지대로 연평균 10.8℃이며 내륙산간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다. 또 영월군은 영월읍, 상동읍, 중동면, 김삿갓면, 북면, 남면, 한반도면, 주천면, 수주면 9개의 읍과 면들이 속해 있으며 1970년대까지 곳곳에 산재한 탄광이 호황을 누리며 번성했던 사실상 탄전도시 이기도 했지만 1970년 12만3000여 명에 달하던 인구는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급격히 줄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서는 겨우 4만 명 선에 턱걸이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신재생에너지 관련 산업 유치와 ‘박물관 고을’ 조성을 통한 관광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단종의 애사가 서린 ‘장릉(조선왕릉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한 거리상 위치는 서울이 190.9km, 부산이 365.0km, 춘천이 156.7km, 원주가 71.9km, 강릉이 120.7km, 삼척이 120,0km, 평창이 33.7km, 정선이 65.4km이다. 교통편은 군 중앙의 쌍룡·영월·석항 등의 역을 통과하는 태백선 철도가 전철화 되었고 중앙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의 연결과 제천·평창·정선·봉화·태백 등지에 이르는 국도와 지방도가 잘 포장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 영월의 유적지

1. 조선6대 왕 단종의 묘 ‘장릉(莊陵)’

장릉은 단종의 주검이 묻힌 장소이기도 하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의 영조(營造)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더니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金誠一)ㆍ정철(鄭澈) 등의 장계로 영역(瑩域)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1698년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附廟)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石物)은 숙종과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며, 명릉(明陵 : 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진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은 장릉에서 그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단종에게는 영월이 특별하다고 표현 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단종의 유배지가 바로 영월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영월 주민들은 영월을 ‘편안히 넘어가는 곳’이란 뜻으로 불렀지만 단종에게 만큼은 그러하지 못했고 단종은 부모를 12세 때 여의고 왕위에 오른 이듬해 삼촌인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육신 보위운동 실패로 영월로 귀향을 오게 된다. 그래서 임금이 오른 고개 - ‘군등치’ 단종이 해를 향해 절했던 - ‘해일치’ 단종이 활시위에 목에 졸려죽자 절벽에서 뛰어내려 순절한 - ‘낙화암’등이 있기도 하다.

 

2.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 호 난고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집안은 홍경래의 난의 연좌제에 의해 집안이 망해서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으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김삿갓 유적지는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 참고문헌

1) 엄흥용,『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한결출판사 , 1990

2) 김기빈,『한국지명의 신비』, (주)지식산업사 ,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