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의 설화

20060854 최고야


1. 대흥사 천불상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설화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때 아도라는 중이 창건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고, 천불전은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도선이 이곳 대웅전에 들어 불경을 외우다 잠시 졸음에 취했다. 계곡 밑에서 수천 중들이 몰려오더니 맨 앞에 선 노승이 도선을 향해 호령하는 것이었다. "네 이놈, 도선 너는 불법을 크게 편 신라를 망하게 하고 불법을 탄압할 고려왕국이 일어서도록 협력한 놈이다. 그리하여 너를 잡으러 왔노라." 도선은 깜짝 놀라 두 손을 합장하고 빌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내가 왕건에 상주해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 이곳에 천불상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도선이 이처럼 약속하자 스님들은 두고 보겠다며 물러갔다. 그가 죽기 전 왕건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어 왕건이 숭불을 국책으로 삼고 대흥사에 천불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천불전 건물의 문짝, 국화문, 연화문, 무궁화문은 특색 있는 양식이다. 상이 각각 다른 천불은 경주옥석인데 중건 당시 원효대사의 감독으로 10인의 조각사가 6년 걸려서 완성했다고 한다. 이 완성된 천불을 3척의 배에 나눠 싣고 울산을 떠나 해남으로 향했다. 항해도중 풍랑을 만나 배 1척이 일본으로 떠내려갔다. 이 훌륭한 옥불선을 발견한 일본인들은 자기들 땅에 절을 짓고 이 불상들을 봉안하기로 했다. 그날 밤 이 곳 일본인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났다. "    바닷가에 떠밀린 옥불은 조선국 해남 대흥사의 것이니 보내도록 하라." 일본인들은 하는 수 없이 배를 돌려보내면서 그 옥불 밑에 <日>자를 새겨서 보냈다고 전해온다. 이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그의 의발과 교지를 이장하라고 유언하여 오늘날의 대흥사에 있게 된 것이라고도 전한다.


2. 도갑사 대웅전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설화


  도갑사는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다. 이 절 입구의 해탈문은 국보 제50호이고 불탄 대웅전은 도지정문화재 42호였으며, 미륵암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8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국보로 지정된 해탈문은 1473년에 지은 건물이고 대웅전은 1776년(1651년 설)에 세운 것이라 한다. 오늘날 남은 해탈문은 도갑사 중창 때 묘각왕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도갑사는 암자를 12개나 거느리고 총 가람이 9백66간에 달했다 하며 승려 또한 7백30여명에 달해 도내 제일을 자랑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오늘날은 해탈문과 대웅전 요사채등만 남아 있는 사찰에 불과하다. 이처럼 절이 폐한 것은 (3백여년전) 이 절에 전설로 내려오던 기인이 나타나고 부터라 전해온다. 이 절은 창건이후 철모를 쓴 자가 나타나면 절이 망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대중이 절 밖에서 간장을 달이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여러 중들은 갑작스런 비라 몸을 피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철모를 쓴 7척 거인이 나타나 솥 위에 가랑이를 벌리고 서서 간장 솥을 보호해 주었다. 그 모양이 하도 괴이하게 생겨서 공양주와 여러 승려들을 깔깔 웃었다. 그러나 노승들은 이 일이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걱정들을 하였다. 이날 밤 원인 모를 불이 거찰을 태우고 겨우 해탈문과 천왕문만 남았었다. 그 후 천왕문도 도괴되고 말았다. 생각되어지는 것은 철모를 썼다는 것으로 미루어 임란때의 군인이라 추측된다. 이때 소실된 대웅전의 서까래에 얽힌 전설이 있다. 당시 비교적 사용되지 않던 부연식 서까래를 이 대웅전에 사용했는데 부연식 서까래란 하나로 내자르던 서까래를 둘로 연결한 방식이다. 도갑사에서 대가람을 세울 때 국내에서 이름 있는 목수들을 동원했다. 대웅전의 서까래는 그 중에서도 명목이라는 팔순노인이 맡았다. 이 노인은 몇 달 동안 서까래 5백여개를 자르는데만 전념했다. 상량식을 며칠 앞두고 자르기를 마친 노인은 그만 얼굴색이 파래지며 여러개의 서까래를 허둥지둥 도면과 맞춰보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아차차, 큰일이군" 모조리 짧게 잘랐다. 상량을 며칠 앞두고 걱정거리도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노인은 감당 할 수 없어 몸져눕고 말았으나 광명으로 이루어진 중창사업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몸져누웠으나 누운 것이 아니요 눈을 감았으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다. 자나깨나 서까래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시 만들자니 나무도 문제지만 시일 또한 어림없었던 일이었다. 이러한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다 못한 며느리가 간곡히 그 연유를 물었다. 궁지에 빠진 노인은 며느리에게 하소연하듯 자신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알고도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 며느리도 암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밖에 나와 처마를 쳐다보던 며느리는 초라한 자기집 초가 서까래 몇 개가 부러져 기울자 처마를 다시 서까래 토막을 이어 받친 곳을 발견하고 시아버지의 걱정이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 시아버지께 달려가 여쭈었다. "아버님, 짧은 서까래를 그만큼 이어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아직 상량은 2,3일 남았으니까 그동안 이어 놓으면 되지 않겠는지요." 듣고 있던 노인은 며느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옳다 네 말이 맞다. 그걸 부연식이라 하느니 그것을 깨닫지 못했었구나." 노인은 상량일에 맞춰 작업을 끝내고 대웅전을 예정대로 완성되었다. 이처럼 며느리의 기지로 인해 다른 건물과 다른 형식으로 완성된 대웅전을 보고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현 도갑사의 대웅전은 1776년에 재건한 것이라 하며 당시의 대웅전은 그 모습이 이러한 전설로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