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유학

20081157 정윤환


  호남지역은 내륙과 해양을 겸하고 있다. 그러나 전남 북은 확연히 다른 지역적 특징을 지닌다. 전남지역은 지리산과 노령으로 둘러 쌓여 있고, 밖으로는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내륙보다는 해양을 향한 독자성을 지닌 문화로 발전 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북은 다르다. 넓은 평야를 중심으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앙의 세력이 남으로 진출하기에 더욱 용이한 지형이다. 이는 내륙의 문화가 전파되기에 유익한 환경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북을 일찍부터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제도권 안에서 합리화를 추구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이에 비하여 남도의 환경은 지리적으로, 중앙 집권 세력과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이는 독자적 문화의 성장을 의미한다.

  그것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루어진 마한 문화로서 발전한 남도문화의 모태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전북은 공주 익산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문화 중심지로서의 발전이었다. 따라서 북도의 무화가 집권세력들과 교감하고 참여하는 순응의 문화였다면, 나모 문화는 중앙집권세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야인의 문화였다.

  이와 같이 남도 문화는 해양진출을 통하여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으니, 그 첫 번째의 사실이 유학사상의 수용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왕인의 논어와 천자문의 일본 전수이다. 이는 한반도에 가장 먼저 유학사상의 전래가 이루어지고, 또한 해외로 문화 진출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공주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왕도의 문화는 넓은 평야와 풍부한 물산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도의 환경은 저항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합리적인 순종의 길들임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에서 이루어진 의식의 성장은 왕실의 보호 속에서 제도적인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 북은 서로의 다른 정신적인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성은 고려와 조선조 이후 중앙 집권세력의 지배 하에 들게 됨으로서 동일한 통치체제로서 잦은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지게 됨으로서 이러한 격차는 많이 해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신적인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특징에는 지금까지도 살아지지 않고 있다.

  백제의 멸망이후 호남은 중앙 집권세력의 중심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남 모두가 백제를 계승한 것이었고 고려의 왕통은 신라를 이어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호남출신의 정치 지도자의 배출이나 유학 사상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모샇였다. 유학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충효열의 삼강 사상을 실천하여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살펴보면 효도로서 이름을 남긴 장성의 서릉, 청렴한 정치로서 순천에 팔마비를 세우도록 한 순창의 설공검, 순창군의 민폐를 없애고 나중에 정당문학에 오른 광양 출신의 이무방 등을 들 수 있는데 『고려사』에서는 호남출신으로서 그 행실이 뛰어난 인물 40여명을 수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신유학의 전래 문제와 함께 검토되어야 할 호남의 인물로는 광산출신의 김양감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신유학의 전래가 늦어진 것은 고려가 원 나라의 지배에 있었고 송나라가 원 나라와 항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송나라와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송의 명망 이후에 원나라를 통하여 수입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김양감은 직접 송나라를 통하여 처음 신유학을 접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신유학의 수입이 원 나라에서 안향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엇고 그 이전 송나라와는 교통이 없었다고 여겨 온 사실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원나라의 눈치를 살피면서 송나라와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뜻 한다.

  김양감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등 여러 곳에 보이고 있는데 신유학의 전래에 관한 기록은 『광주읍지』에 비교적 자세하다. 이로 본다면 고려에서는 원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이 전래되기 이전 직접 송나라와 교역하기 위하여 요나라를 피하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였고 또한 태묘와 국자감의 그림을 그려오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더욱 확대되었다면 보다 일찍이 송을 통하여 직접 신유학의 수입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업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양감을 통하여 고려의 조정에서 처음 송나라의 신유학에 대한 문물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양감의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유학의 수입 이전 시문과 경학에 많은 업적을 남긴 호남의 인물로는 지포 김구가 있다. 그는 부안 출신으로서 그의 학문은 문장에 능하였으며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김구는 호남출신으로서 가장 먼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조 건국의 교체기에서 주자학은 명분과 의리 실리와 참여 그리고 성리학 연구와 출사를 겸하는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러한 출처관 으로서 입신하였던 것이 정몽주 정도전 권근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적 특징을 나타내기까지에도 두각을 나타낸 호남의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 권근은 1390년에 쓴 『입학도설』이 전북의 금마에서 작성된 저술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의 출발이 우리고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조선조의 성리학 곧 신유학의 발전과정에서 호남의 사상 의식이 하나의 주조를 형성하게 된 것은 어느 때부터였을까

  박상은 조선조 사대부정신을 일깨운 계기가 되었던 중종 초비 신비를 복위할 것을 상소하였던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호남 의리정신의 연원이 된다.

  박상의 아버지는 지흥인데 그는 권람과 동문 수학하였다. 권람이 세조 때에 제상이 되자 여러 차례 지흥의 출사를 권하였지만 이를 사양하고 광주로 내려 왔다는 기록이 있다.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다. 또한 박지홍의 큰항들 정은 김종직이 전라도 관찰사로 왔을 때 그와 교유한 사실이 있다. 박상은 박정에게서 수학하였으니 이러한 학문적 연원이 박상에게 전승된 것이다.

  박상이 올린 중종 초비 신씨를 복위 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을 작성한 곳이 순창으로서 순창은 조선조 의리사상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것에서 상소를 올린 세 사람이 박상, 김정, 유옥이었는데 박상은 광주, 유옥은 담양 김정은 보은 출신이다. 박상의 문하에서 임억령 송순 정만종 ef이 배출됨으로서 신유학 수입 이후 호남의 학문은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르고 잇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배출된 인물로는 해남 출신 최부가 있는데 그는 25세 때 태학에 들고 김종직 김굉필과 교육하였으며 동국통감의 찬수에도 관여하였다. 1487년 경차관으로서 제주도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중국을 거쳐 귀국할 때까지 5개월의 표류생활을 기록한 『표해록』을 슨 인물로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호남의 의식과 사상의 연원은 기묘 사림의 도학정신의 형성과정에 나타난 『청복고비신씨소』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