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역사인물

20040414 류해동


1. 왕인

  왕인은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로 근초고왕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 등을 보내어 학덕 높은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왕의 손자인 진송왕과 함께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오진천황의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신하들에게 경·사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화미길사'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아신왕 말년경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서 전후 30∼40년간의 차이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입으로 전해지기만 했을 뿐 역사에는 전혀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과 경도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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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인후

  본관은 울산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이다. 아버지는 참봉 영()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10세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노수신(盧守愼)·기대승(奇大升)·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올랐다.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에 이르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주자학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3. 김덕령

  조선 중기 의병장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좌랑(刑曹佐郎)으로 조정의 명을 받아 종군해 전주(全州)에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다. 1594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권율(權慄)의 휘하로 진해(鎭海)·고성(固城)에서 왜군을 방어하였다.

  1595년 고성에 상륙하는 왜병을 기습 격퇴하여 석저장군(石低將軍)으로 알려졌다. 1596년 도체찰사(都體察使)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해 7월 이몽학(李夢鶴)의 모반을 토벌하러 출정하였다가, 무고를 받아 고문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사후에 신원(伸寃)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옥사하기 직전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지었다는 시조「춘산곡(春山曲)」이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에 전하며, 김덕령의 전기를 소설화한 고전소설『김덕령전』이 있다. 1678년(숙종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다가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4. 양한목


  양한묵(1862-1919)은 철종 13년 옥천면 영춘리에서 한학자 상태씨의 3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사서삼경등 한학을 공부해 7살에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총명했다.

19세가 되던 1881 년데 해남을 떠나 화순군 능주로 이사갈 때까지 그가 공부한 양씨 문각 ‘소심제’는그의 후손들에 의해 사랑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1894년(고종 31) 31세가 되던 해에 양한묵은 능주의 세무관리인 탁지부에 근무했으나 개화기의 신문명을 공부하기 위해 3년만에 관직을 그만뒸다.

  당시 국내사정은 일제의 침탈과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가속화 됐으며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국운은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중의 한 사람이었던 지강 양한묵 해남 옥천면 출신인 지강선생은 호남인으로는 유일하게 독립선언이 민족대표로 참가 했다. 민족주의자들중 친일파로 변절한 경우도 많으나 3.1만세 주동자로 투옥된 후 일경의 가혹한 고문에 옥사할 때까지 의연한 민족기상의 표상으로 제자리를 지켰다.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양한묵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형벌로 그해 56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지난 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현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수여받았던 그는 화순군 앵남리에 묻혀있으며 옥사한지 73년만에 옥천면 영신리 고향에 순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