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개관

 



1. 들어가는 말


 "문화재는 국민에게 있어서 정신적 가치 또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물 또는 사상으로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멸실, 훼손될 가능성이 짙은 국민적 재산"이라는 정의나 "문화재란 문화를 광의로 이해하는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의 모든 활동 또는 그 활동의 소산인 것과 이들과 밀접한 상호관계에 있는 자연적 환경으로서 학술적, 예술적, 관상적, 역사적 가치가 크고, 희귀성을 갖춘 유.무형의 국가적 민족적 유산"이라는 정의가 유효하다면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바로 문화재이다. 도심과 외곽지역을 가릴 것 없이 산재한 유형문화재 자원은 경주를 명실상부 노천박물관이라 지칭하는데 손색이 없다. 지금도 주거용 택지를 조성하거나 공공용, 또는 공장용 부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땅을 파기만 하면 더할 수 없이 귀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으니 도시 전역이 유적지 아닌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경주는 산재한 문화재뿐 아니라 경주를 미적으로 관조한 선조들의 지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도시경관도 훌륭한 자랑거리이다.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강과 숲과 절이 절경 아닌 곳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풍부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도시경관은 신라문화의 가치를 논함에 있어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신라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정신사적 가치에 있다. 신라는 강대한 통일삼국의 민족대업을 성취한 힘 있는 단일민족, 단일전통 문화 역사의 민족국가였다. 그 힘의 연원은 화랑도이며, 그 얼인 풍류도가 민족통일의 지도이념이 되어 한국의 정신계의 역사가 되었으며, 이후 선비정신으로 승화되었으니 신라정신은 신라 이후 오늘날까지 왕조는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민족정기와 얼의 연원이다. 본고에서는 경주의 개관을 비롯해서, 경주에 해당하는 문화재의 현황 및 설명을 덧붙여 보겠다.

 

2. 경주의 개관


경주는 경상북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1995년 경주시군이 통합되었다. 대구의 서쪽 95km, 부산의 북부 87km, 포항의 남서쪽 30km의 거리에 있다. 즉 북쪽은 포항시, 서쪽은 영천시와 청도군, 남쪽은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동쪽은 동해에 접해 있다. 면적은 1319.63㎢ 이며 인구는 28만3622명(1997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4읍, 8면,17동으로 되어있으며 시청소재지는 경주시 노동동 및 동천동에 있다. 경주의 자연환경은 태백산맥의 지맥인 동대산맥과 주사산맥이 남북으로 주행하여 동서의 경계를 이루며 형산강구조곡과 영천-경주간구조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침식분지가 형성되어 그곳에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명활산. 금오산. 옥녀봉. 선도산. 금강산 등이 있다. 시가지 서쪽을 남류하는 형산강의 상류인 인천이 서천에 흘러들고, 북천이 중심부를 관통하며, 반월성을 끼고 도는 남천이 이에 합류하여 형산강 본류를 형성하여 영일만으로 흘러든다. 경주의 문화재는 전통 민속축제로 1962년부터 시작된 신라문화재가 있다. 1983년 이후 주최가 신라문화선양회에서 경상북도로 옮겨지면서 경상북도 종합 예술제의 형식을 띠고 활성화되었다.

주요 행사로는 가장행렬, 민속놀이 등 6개 부분 44개로 나누어지며 신라문화재의 부대행사로 전국 국악 경연대회. 신라미술대상전등이 전국 규모로 열리고 있다. 경주의 민속은 이 고장의 특징적인 민속놀이로 가배놀이와 사자놀이를 들 수 있다. 가배놀이의 전통은 신라 유리왕 때의 길쌈놀이까지 소급된다. 이때 경주의 6부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이

각기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고 음력 7월 16일부터 매일 부의 달에 모여 길쌈을 하였다. 8월 보름이 되면 길쌈의 성과를 비교하여 승부를 가린 뒤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사례하며 축제를 벌였다. 사자놀이는 흔히 주지놀이로 일컬어지는데, 이 놀이 역시 신라때까지 소급된다. 정월 대보름에 사자 모양의 커다란 탈을 쓰고 풍물잡이들과 함께 마을을 돌며 춤을 추고 한바탕 신명을 돋우는데, 이때 쓰는 탈을 주지탈이라고 하며 두 사자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 그래서 이 놀이를 흔히 주지놀음 혹은 주지싸움이라고 한다. 경주의 동제는 이 고장의 부락제는 가을 단위로 제의가 이루어지는 동제와, 시장의 상인들이 상업의 번영을 위해 주최하는 장굿형태의 별신이 있다. 장굿으로 행해지는 별신은 봄.가을 농한기에 매년 한 차례씩 하거나 3년만에 한 차례씩 행해지며 주제자는 지방의 무당들로 구성된다. 경주의 특산물은 경주옥돌이 유명하며 심장병 환자에게 약으로 사용되는 '오수유'라는 약초가 널리 알려져 있다. 경주는 B.C 57년 6촌이 연합 ,국호를 서라벌, 사로 또는 사리라 하였고 계림이란 별칭도 있었으나 지증왕 4년(503) 신라로 하였다. 경주는 북에 금강산, 남에 남산, 서에 서도산, 동활산이 4방을 에워싼 가운데 남에 남천, 서에 서천, 북에 북천이 맑게 흐르는 분지이다. 철과 금의 생산이 많아 화려한 금속공예품을 만들게 했고 남산의 수정과 옥은 신라인들이 화려한 장신구를 만드는데 쓰였다. 신라 당시의 인구 1백만이 넘는 대도시로 오늘날 경주의 10배 가까운 규모였다. 수많은 기와집에서 행여 건물이 그을릴세라 참숯으로만 밥을 하였다하니 당시의 부귀를 알만하다. 신라인은 여기에 불국토를 건설하려했다.


①.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1)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릉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2)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3)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 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4) 대릉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5)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②. 경주의 역사

경주의 역사는 신라의 모체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던 사로부족이다. 이사로가 부족연맹체로 발전하는 시기는 A.D356-402년동안 왕으로 지냈던 내물마립간 때부터로 추측된다. 이때부터 왕위도 박,석,김이 교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김씨가 독립하게 된다. 고대국가로 출발이 늦었던 사로는 북쪽의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놓이고 서쪽의 백제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433년 눌지마립간 때 백제와 동맹을 체결한다. 500년부터 지증왕시대에 고대국가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 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바꾼다. 514년에 즉위한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한다. 또한 이때 본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유역 진출의 계기를 마련한다. 540년에 즉위한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동맹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해 중국과의 교류를 추진하였고 영토확장을 계속해 북쪽으로는 함경도 남부까지 차지하는 등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때 화랑도가 조직되었고 순수비를 세워 신라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신라의 모체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던 사로부족이다. 이 사로가 부족연맹체로 발전하는 시기는 AD356-402년 동안 왕으로 지내던 내물마립간 때부터로 추측된다. 이때부터 왕위도 박, 석, 김이 교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김씨가 독립하게 된다. 고대국가로 출발이 늦었던 사로는 북쪽의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놓이고 서쪽의 백제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433년 눌지마립간 때 백제와 동맹을 체결한다. 500년부터 지증왕시대에 고대국가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바꾼다. 514년에 즉위한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한다. 또한 이때 본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유역 진출의 계기를 마련한다. 540년에 즉위한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동맹하여 한강우역을 차지해 중국과의 교류를 추진하였고 영토 확장을 계속해 북쪽으로는 함경도 남부까지 차지하는 등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때 화랑도가 조직되었고 순수비를 세워 신라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신라의 성립시기를 6단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기 - 신라 정치의 성립과 발전

신라의 건국으로부터 연맹왕국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기이며, 신라는 최초의 성읍국가 형태로 발전을 하게 되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라가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이에 연맹왕국체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 2기 - 귀족국가 태동기

1기에서 보아왔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박, 석, 김의 암투로 정치계가 아주 시끄러웠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 2의 내물마립간 때부터는 세 3성씨에 의한 왕위교체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는 부자 상속제가 실시되면서 왕권이 안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제 3기 -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국왕과 여러 귀족과의 일정한 타협,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가던 시기이다. 법흥왕시대의 일련의 계획과 더불어 정치적, 사회적 기반은 그 전에 왕이었던 지증왕으로 부터 마련되었다. 이때 농사를 장려하는 우경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발전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제 4기 - 신라의 황금시대

이 시대는 태종무열왕의 왕실이 계속 왕위를 승계하고 왕권이 전제왕권으로  안정된 정치기반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단행된 광범위한 중앙귀족의 도태, 숙청 및 지방세력과의 연계강화, 집사부 중심의 일반 행정체제와 유교적 정치 이념의 도입과 강행, 나아가 이로 인한 관료의 발달 등이 전제왕권이 확립한 계기로 예측된다.

제 5기 - 신라의 쇠퇴

이 시대는 진골 귀족들이 왕실에 대하여 서로 연합하는 형세를 띠면서 실제로 각기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귀족연립 혹은 분열의 시대로 볼 수 있다. 지방에서는 호족세력의 등장이 새로운 경향으로 발전하여 이에 통일 신라는 안으로는 귀족의 권력다툼과 밖으로는 호족세력의 거대화가 후에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 6기 - 신라의 멸망

신라가 50년간 내란 끝에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