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역사적위치

99학번 김현도

 

I.머리말

본론

남한산성의 역사와 축성

병자호란

그 후의 남한산성

맺음말

머리말

남한산성은 한양의 남쪽을 지키는 산성으로서 우리들에게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억이 남을 것이다. 지금부터 남한산성의 역사와 구조, 위치에 알아보고자 한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약 24킬로 떨어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일장산(해발 497미터), 동쪽으로는 봉암(해발 479미터)을 둘러 본성의 길이만도 9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성이며 그 평면형이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성밖의 주변부가 높고 험한데 비하여, 성안으로는 가운데가 낮고 평평한 분지형으로 성밖에서는 성안의 동태를 살필 수 없고 풍부한 수원(물)과 넓은 활동 공간을 갖는 장점이 있어 산성의 지형으로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남한산성의 위치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군을 막는 역할과 함께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들로부터 피신하는 장소로 쓰였었다. 남한산성의 위치는  백제시대 때부터 중요시되어왔고 그 후 임진왜란당시 산성의 효용성을 알게된 조선이 인조때에 다시 축성하게 된다.

본론

 

남한산성의 역사와 유래

 

먼저 남한산성의 유래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산성 일대는 일찍이 백제의 옛터였으며 백제 온조왕 13년에 성을 축조하고 남한산성이라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있다. 그후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남한산성을 주장성(晝長城, 또는 日長城)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즉 홍경모(洪敬謨)의 <중정남한지, 重訂南漢志)에는 "신라 문무왕 12년 성을 한주(漢州) 동쪽 봉우리에 쌓고 주장성 또는 일장성이라고 불렀다. 석축으로 둘레는 4,360보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주 동쪽에 석축으로 재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지명이 바뀌게 되고 조선 중엽에 남한산이라는 지명이 붙게된다.

하지만 남한산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인조 때이다.

물론 남한산성수축에 대한 주장은 임진왜란직후부터 있었다. 임진왜란이전에는 압록강, 두만강 등의 국경지대의 방비와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여 해안지방에만 방어 시설을 확충하였고 내륙지방의 방어시설 확충에는 소홀히 하여 내륙지방에는 소수의 산성이나 입성 등을 개축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내륙지방과 수도까지 적에게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산성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또한 임진왜란당시 행주산성이나 독성산성등의 전투에서 산성을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치는 사례가 늘면서 조정에서는 산성의 필요성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고성이나 옛 성지를 증.개축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대 사도도체찰사 유성룡은 도성방어책으로서 경기지방의 산성을 수축하도록 주장하면서 광주 이천 등의 군사를 집결시켜 남한산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승장 유정이 거느린 승군 60여 명을 보내어 산성을 수비케 하고 앞으로의 축성에 대비토록 하게된다. 하지만 당시 임진왜란의 전후복구가 한창이었던 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산성의 수축은 어렵고 또한 수축 후에도 산성의 방어와 유지가 힘들다는 주장으로 인해 남한산성의 수축은 일단 포기하게 된다.

그 후 남한산성 수축의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인조반정이후이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서인들은 중앙군사력의 강화와 친명배금의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총융청, 어영청, 수어청의 설치는 서인정권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외교정책의 변화는 후금을 자극하여 변방의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남한산성의 수축문제는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세력의 대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남한산성을 적극적으로 수축하고자 주장하게 된 배경은 안으로는 국왕과 도성을 방어하고 밖으로는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로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서쪽 변방의 방어에 세심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이 외교정책이 광해군 시대의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숭명배청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것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

첫 번째의 축성계획은 산성의 책임을 맡았던 임회가 이괄의 난으로 피살되어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비록 짧은 시간에 진압되었지만 도성의 함락과 왕의 공주파천(1624, 인조 2년 2월 9일)을 초래하여 도성방어 대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사건 등으로 인해 인조는 남한 산성의 축성을 결정하게된다. 하지만 남한산성의 축성시기는 각자료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축성시기는 알 수 없다.        .

홍경모의 <중정 남한지>에 의하면,

 

추 7월에 산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청을 두고 광주 등 진(鎭)의 군무를 절제하도록 하니 처음에는 총융사라 칭하고 이서가 임명되어 그 일을 주관하고 남양부사 유림으로 목사를 삼았다. 이서에게 명하여 축성을 감독하게 하니 이서는 널리 명승인 각성과 응성등을 불러 지역을 나누어 맡도록 하였다. 인조 4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장유의 <남한산성기>에 따르면

 

갑자(인조 2년) 9월에 시작하여 병인(인조 4년) 7월에 완공하니 여장이 1700첩, 대문이 4개 암문이 8개다. 안에는 관청, 창고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축성에 동원되었던 인력은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승군(僧軍)이다. 기록을 통해서 각성 등 전국의 유명한 승려들이 승도들을 모아 지역을 나누어 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각 지방의 군병을 징발하였다. 경기도의 5읍인 양주, 광주, 여주 등의 군병을 남한산성의 입방군(入防軍)으로 편성하였다. 인조 14년(1636) 7월 남한산성의 입방군은 12,700명이었다. 이러한 남한산성을 수축하였음에도 불과하고 인조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남한 산성으로 피신하여 45일만에 항복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병자호란이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에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남한산성을 이야기하면서 병자호란을 빼놓을 수 는 없다. 병자호란의 원인은 만주에 후금이 건국되면서 부터인데 1616년 만주에 후금이 건국되면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왜란(倭亂) 뒤의 사고(史庫)정비, 서적간행, 호패(號牌)법의 실시 등으로 눈부신 치적을 올렸다. 한편 밖으로는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 발흥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처하여 현명한 외교정책을 펴서 국제적인 전란(戰亂)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였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에 못 이겨 강홍립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원군을 이끌고 돕게 하였으나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밀지(密旨)를 주어 명(明)군이 불리하게 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고, 이 때문에 후금의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은 없어서 양국간에는 별 사단(事端)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광해군은 국경의 경비에 유의하여 군비(軍備)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지(城池)와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하지만 권력싸움에서 패한 광해군은 서인들에 의해 폭군으로 낙인찍히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즉위하게 된 인조는 중립적인 위치를 버리고 향명.배금 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이것은 당시의 조선의 군사력과 위치로 봤을 때 상당히 불리한 조치였으나 인조는 그것을 향명.배금 정책을 계속 취하게 되고 조선으로 인해서 배후가 불안해진 후금으로서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게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난에 실패한 이괄은 후금으로 도망쳐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였고 이에 명분이 생긴 후금은 조선을 공격하게 된다.

후금의 태종은 즉위전부터 주전론자였고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까지 생기자 인조5년 정월14일날 장군 패륵 아민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공격하게 하였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뮨룡을 치고, 주력부대 3만여 명은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동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피란하며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에서도 강화(講和)의 의사를 표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후금이 조선보다는 명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화에서도 주화론(主和論)이 채택되어, 적과의 교섭을 진행시켜

 

형제의 맹약(盟約)을 맺을 것,

화약(和約)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金)과 강화하더라도 명나라를 배반하지 않을 것

등의 화약이 성립되어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였다. 이 화약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패전국으로서는 최소의 부담이었으나, 후금의 입장으로는 명나라와의 관계상 군사를 조선에만 묶어 둘 수도 없는 처지였으므로 화맹을 급히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후금은 전승국으로서의 우월한 입장에서 강북철병의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금병 1,000명.몽고병 2,000명을, 진강에 금병 300명.몽고병 1,000명을 주둔시켜 모문룡을 막게 하고, 중강개시의 교섭을 하여 이곳을 통하여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그들의 소기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

 

이 양차에 걸친 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도 짧았고, 또 국토의 적은 일부만이 전장화하였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으나, 청군이 거쳐간 서북지방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되었다. 게다가 문화적인 우월감이 청에 대한 반발을 돋구었다.  *임경업 등이 명과 연결하여 청을 치려고 한 사실이 있으며, 또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이 북벌을 계획한 일이 있음은 모두 이러한 감정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한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리하여 국방을 강화 하였다.

 

● 정묘(丁卯)조약

 

조선 인조 5년(1627)년 정묘(丁卯)호란 때 조선과 후금(後金)사이에 맺은 강화조약. 조선의 병조판서 이정귀.호조판서 김신국.이조판서 장유 등과 후금의 제이합랑.악탁과의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화의조건은

 

후금군은 평산을 넘어서지 않을 것,

맹약(盟約) 후 후금군은 즉시 철수할 것,

철수 후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오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그러나 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보였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친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와 대신.척화(斥和)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主和論)자보다는 척화(斥和)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다. 이에 조선은 의주부연 임경업으로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으나 청의 군대는 이것을 모두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해왔다. 14일 청나라 군대가 개성을 통과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舟師)대장으로, 심기원을 유도(留都)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대군을 집결시켜 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이토록 쉽게 조선의 방어선이 뚫린 이유는 먼저 산성중심의 방어체계에 있다 이것은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내려오는 적과 지속적인 보급을 받고 진격속도가 느린 적에게 있어서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당시 조선은 백성들이 산성으로 피신할 때 산성으로 피신하기에만 급급하고 군량과 무기등 을 없애는 청야작전에는 미숙했기 때문에 청나라의 군대는 거의 모든 군량과 보급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진격해나갔고 또한 팔기병의 빠른 진격속도를 이용하여 적의 주요거점을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미쳐 대비를 하기도전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것은 흡사 제2차 걸프전쟁에서 보여준 미군의 전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당시 조선은 청나라군의 진격속도에 미쳐 대비하지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게된다. 또한 청나라군의 목적이 조선의 점령이 아닌 조선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명나라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배후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것으로서 쓸대없는 전투를 피하고 인조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남한산성에 있는 병력은 1만2천명정도였고 식량은 50일을 겨우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대1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도 수성전투에서 청나라군대를 막아내었고 간간이 전투에서 승리를 하기도 했지만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명나라의 원병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틸 수 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 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국 진영에서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세폐(공물)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대략 이렇게 병자호란은 끝나게 된다. 하지만 병자호란이후 조선의 피해는 민간인 피해를 포함해 막심한 것이었고 후일 효종의 북벌론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된다.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은 임금이 피신해간 산성으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역할을 하게된다.

당시의 강화내용은 이러하다.

강화내용-1월 28일 용골대와 마부대가 가져온 한의 답서

 

1. 명에서 준 고명(誥命-고는 천자를 이르는 말, 명은 천자가 명령하는 말)과 책인(冊印)을 바쳐 죄를 청하고,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연호를 폐지할 것

 

2. 아들을 인질로 하고, 대신으로서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을 없는 사람은 아우를 인질로 하라. 만일 뜻밖의 일이 있으면 짐이 인질을 세워 사위케 할 것이다.

 

3. 명나라 정벌시 조서를 내려 사신을 보낼 것이니, 보병, 기병, 수군을 조달하되 기일을 어겨서는 아니 된다.

 

4. 정조(정월 초하루), 동지, 중궁의 천추, 태자의 천추 및 경조에 예를 바칠 것

 

5. 회군시 가도를 공격할 것이니 배 50척, 수병, 창포, 궁전을 갖추어 대비하고 회군시 예를 갖출 것.

 

6. 내외 모든 신하들과 서로 혼인하여 화호을 굳건히 할 것이며, 새 성을 쌓거나 헌 성을 수리하지 말 것.

 

7.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그이후의 남한산성

 병자호란후의 남한산성은 수어청과 몆 가지 기구들이 설치된 뒤 계속해서 수도의 남쪽을 지키는 원래의 목적으로 쓰여왔지만 한때는 그곳이 권력의 암투장으로 이용되기 도 했었다. 하지만 후일  현종과 숙종때 몇 개의 건물들이 신축되었고 그 후 1907년 조선의 군대가 일본군에 의해 무장 해제 당 할 때 남한산성의 각 사찰에  보관되어있던 무기와 탄약들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일본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맺음말

남한산성은 수도와 가깝고 방어하기에는 좋다는 점 때문에 축성되었지만 실제로 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축성당시 호국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병자호란이라는 패전의 기록을 갖고 있지만 그 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의 뼈아픈 실수에 대한 아픔이 서려있는 장소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후일 남한 산성은 북벌론의 중심지 되기도 하고 남한산성내에 설치된 수어청은 권력의 중심지이자 암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렇듯 남한산성은 산성의 본래목적과 우리민족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