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과 강화도

99학번 박홍원

 

-목차-

Ⅰ. 머 리 말

Ⅱ. 본 론

 1. 몽고침입

 2. 왜 몽고는 고려를 침입하였는가?

 3. 최씨 집권의 강화도 천도

   1) 천도론 전개 과정과 결행

   2) 강화도 천도 배경

 4. 천도 이후 강화도의 경영과 방비책

   1) 궁궐과 관아

   2) 저택과 民居

   3) 방어 시설

 5. 무인 정권의 강화도 생활

 6. 삼별초의 대몽항쟁

Ⅲ. 맺 음 말

 

 

Ⅰ. 머 리 말

 

 13세기 초엽 몽고족은 테무진이라는 영웅이 나와 주변의 부족을 정복, 통일하여 동아시아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중원으로 진출하였다. 중국 대륙의 남부에는 南宋이 자리잡고, 북부 및 만주에 걸치는 지역은 여진족의 金이 지배하고, 몽고의 서쪽에는 티벳족의 일파인 탕구트족의 西夏가 있었다. 칭기즈칸은 이들 나라에 대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거란족은 몽고병에게 쫓겨서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내로 들어와 북방 지역을 노략하고, 또 수도 開京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에 고려의 토벌군은 이들을 쳐부수고 저들의 주력부대를 江東城에 몰아넣었다. 몽고, 동진의 연합군은 고려에  식량의 요구와 함께 강동성에 대한 공동 작전을 제의해 왔으며 이듬해 1월 金就麗 장군과 함께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이것이 고려 몽고 양국간의 첫 접촉이었으며 이로 인해 兄弟의 盟約이 맺어졌다. 이러한 표면상의 우호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맹약의 조건 중에는 고려가 몽고에 대해 일방적으로 조공을 부담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 후 두 나라의 관계가 평탄할 수 없었다.

 몽고의 정복야욕과 그들의 사신 著古與의 살해로 인해 고종18년(1231년)에 몽고의 太宗이 고려침공을 명함으로써 1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무력에 일시굴복한 고려는 몽고의 심한 내정간섭과 많은 공물의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집권자 최우는 항몽 정책을 채택하여 많은 관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고종 19년, 1232). 이는 대외적인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처사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그보다는 최우가 자기의 정권을 보위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는 비판적 입장도 있다.

 본론에서는 주로 대몽항쟁에 대한 사실보다는 강화 천도 그 자체에 대한 구체적 사실에 촛점을 두었다.

 

Ⅱ. 본 론

 

1. 몽고침입

 고려시대 때에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커다란 특징은 중국 한족의 주변에 복속되어 있던 북방민족들이 연이어 흥기하였다는 것이다. 10세기 초 당의 멸망이후 흥한 거란족이 중원의 송을 압박하고, 12세기초에는 다시 여진족이 흥기하여 요, 송을 아우르는 금을 건국하여, 동아시아의 정세를 바꾸었다. 이 같은 중국대륙의 정세 변동은 때로 직접적인 군사적 침입을 수반하여 고려의 내정에 변화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몽고와 고려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고종 6년(1219)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공격하면서부터 이다. 몽고에 쫓겨 고려에 들어와 있던 거란족은 강동성에 갇혀 있다가 고려와 몽고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몽고는 고려에 크나큰 은혜나 베푼 듯이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그 태도 또한 불손하여 고려인에게 분노를 샀다. 양국 사이는 점점 소원해져 갔으며, 이런 고려와 몽고의 심리적 마찰은 전쟁을 예고하는 태풍전야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고종 12년(1225) 사신 저고여가 몽고로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되자, 이를 계기로 몽고는 고려를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고종 18년 이후 46년 동안에 이르는 사이의 여ㆍ몽 전쟁기간 중 몽고군의 고려 침략은 도합 11회로 파악된다. 그러나 침입의 시간적인 간격을 고려하면 4차 혹은 6차로 나눌 수 있다. 몽고의 1차 침입은 고종 18년(1231)에 시작되었다. 장군 살리타이가 거느린 몽고군은 고려의 국경 군사구역인 북계 여러 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살리타이가 수도 개경에 임박하게 되자, 고려는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몽고군은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였다. 강화 이후 몽고는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고 관리의 횡포도 심해지자, 당시 집권자인 최씨 정권은 몽고와의 항전을 결의하고 장기간의 항쟁을 위하여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하게 된다. 개경을 거쳐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몽고군은 장군 살리타이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곧 철수하였다. 여ㆍ몽 간의 3차 전쟁은 고종 22년부터 26년에 이르는 5년에 걸치는데 이것은 도합 3회의 침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간 동안의 전투는 경상, 전라도까지 확대되었고, 고종 25년 겨울에는 경주 황룡사가 소실되었다. 제 4차 전쟁은 몽고의 선발대가 고종 33년(1246) 고려에 입국하여 이듬해부터 침입을 본격화함으로써 개시되었는데 고종 35년(1248) 초까지 군사행동이 전개되었다. 이 4차 침입군은 그 전후의 경우보다 병력 규모가 작았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방면으로 나누어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40년(1253)의 제 5차 여·몽 전쟁은 비록 충주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더욱 잔혹하고 강력해진 침략군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고종 41년(1254)부터 전개된 6차 침입은 다른 어느 때 보다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기간이었으며 피해 횟수 또한 많았다. 이 기간동안 몽고는 주력부대를 경상도 남단과 전라도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번갈아 오르내림으로써 강화도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해도를 직접 공략함으로써 마치 강화도를 공격할 것처럼 무력 시위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고종 때의 대략 11회에 걸친 몽고군의 침략 양상을 종합하면, 나름대로의 일정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험이 있는 자를 계속 파견하여 전쟁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으며, 침입시기가 거의 7, 8월로 일치되는 것으로 보아 이는 8월의 추수기를 의식한 군량의 현지 조달과 관련을 있을 것이라 본다.

 한편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침입이 있을 때마다 거의 모든 국토가 유린당하는 희생을 무릅쓰고 항전을 고수하였다. 최씨 정권은 반몽정책을 강력히 유지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몽고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2. 왜 몽고는 고려를 침입하였는가?

 1206년 칭기즈칸은 몽고족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원 제국을 건설한 다음 동서 각 방면으로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다. 원의 동아시아에 대한 정복 전쟁은 1211년에 금에 대한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의 금에 대한 침략으로 금에 지배하에 있었던 거란족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그 여파가 고려에 미치게 되었다. 이른바 거란 유족(遺族) 혹은 유종의 고려 침입이었다.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원의 금에 대한 침입을 틈타, 1212년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하여 요왕이라 하였다. 이후 야사불(耶斯不)이 다시 거란족을 통솔하여 스스로 황제라 하고 대요수국이라 하였다. 야사불이 그의 부하에게 피살되자, 걸노(乞奴)가 거란의 무리들을 통솔하였다. 1216년 몽고에 투항하였던 야율유가 도리어 거란 유종을 공격하자, 이들은 쫓기어 이해 8월 고려로 쳐들어 왔다. 이들은 고려의 서북지역, 수도인 개경부근과 파주, 광주, 원주, 제천 등지를 유린하였으나, 1219년 정월 마침내 고려·몽고·동진국의 연합군에 의해 고려의 강동성에서 섬멸되었다. 고려와 원은 형제의 맹약을 맺는 등 강동성 전투는 양국이 최초로 외교적인 접촉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원과 고려의 관계사는 이와 같이 양국간의 첫 접촉의 계기가 되었던 강동성 전투가 상징하듯, 원은 시종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의 여러 방면에서 유목민족 특유의 강압적인 수탈과 요구를 앞세운 일방적인 관계만을 고려에 강요하였다. 군사적인 물리력을 앞세운 원은 정복지역과 장차 정복할 지역에 대해 지배층 자제의 입질(入質), 호구조사의 보고, 몽고군 원정시의 조군, 원에 대한 식량조부의 수납, 다루가치의 주재, 역참설치 등 이른바 6사(六事)를 강요하였고, 상대국이 이를 거부할 때 곧바로 정복전쟁의 형태로 구체화하였다. 1219년 원은 고려와 연합하여 거란 유종을 공동으로 제압한 이래 고려에 대하여도 6사에 준하는 일방적인 관계를 강요하였다.

 10∼12세기의 약 3세기동안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국으로 자처하였던 고려가 원의 그러한 요구에 응할 리가 없었다. 1215년 몽고 사신 저고여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원의 관계는 긴장관계로 접어들었으며, 끝내는 1231년 제1차 전쟁을 시발로 하여 1259년에 이르기까지 6차에 걸친 30여 년간의 전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전쟁은 1259년에 종식되었으나, 이후 삼별초군의 항쟁까지 포함하면 약 40년간에 걸친 것이었다. 고려와 원의 전쟁 대부분의 기간은 유목계인 본지파가 원 제국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원은 이 전쟁을 통하여 그들의 전통적이고 수탈적인 형태의 이민족 지배방식을 고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관철하고자 하였으며, 고려는 그러한 원의 일방적인 요구에 대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하는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고려와 원의 30여 년간에 걸친 전쟁은 양국 내부의 커다란 체제 변동으로 인하여 끝내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원은 1251년 헌종이 즉위한 후 농경계 한지파가 황제의 자리를 독점하면서 원제국의 중심지가 유목적인 경제기반을 가졌던 본지파의 근거지인 막북에서 한지로 옮겨졌다. 이로 인하여 원 제국의 이민족 지배방식이 유목 봉건제국적인 체질을 청산하고 황제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로 크게 전환되었던 것이다. 고려와 원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던 1260년 농경계 한지파인 쿠빌라이의 즉위를 계기로 원의 이민족 지배방식은 더욱 분명한 추세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른바 '한법으로 한지를 다스리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 해당지역의 풍속과 제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간접적인 통치방식으로 크게 전환되었던 것이다. 원 세조가 고려의 제반 문물제도에 대하여 '토풍을 고치지 않는다.' 는 원칙을 천명한 것은 이러한 원 지배방식의 변동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와 원의 관계사는 원 세조의 집권을 계기로 하여 하나의 커다란 획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원은 고려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음으로써 대내적으로는 농경계 한지파가 정치적인 우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남송과의 전쟁에 전력을 쏟아 부을 수가 있었다.    

 

3. 최씨 집권의 강화도 천도

 

 1) 천도론 전개 과정과 결행

 최우(崔瑀)가 몽고에 대한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은 고종 19년 (1232) 6,7월이었다. 그 전년 살례탑(撒禮塔)을 주장으로 하는 몽고의 대군이 요동을 점령하고 압록강 하류를 건너 고려에 침공하였다. 북계 제성에서의 치열한 전투와 3군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11월에는 몽고의 선봉대가 개경 근교에 도달함으로써 고려는 국도가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몽고와 일단 화의를 성립시키고 이에 따라 몽고군은 이듬해 정월 철수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천도 문제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은 몽고군 철수 직후인 1232년 2월이었다. 그러나 강화 천도가 현존 기록상으로 최초로 표면화하기 시작한 때는 고종18년(1231) 12월 경이다. 당시 최우는 승천부의 부사 윤린과 녹사 박문의의 보고에 의거, 피란지로서 강화도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보게 했다고 한다.

 천도 문제는 고종 19년 2월 20일 처음으로 宰樞 會議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고 그것은 5월까지 계속 되었다. 계속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내려지지 못한 채, 5월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재추회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4품 이상의 회의로 논의 대상이 확대되어지고 있다.

 조신들의 절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에는 최우는 자신이 私第에서 직접 회의를 주관하며 천도론을 확정시키고자 한다. 고종 19년 6월 16일의 회의에서 천도책이 최종 확정되는 데 이때도 여전히 반대론이 제기된다. 이 때의 반대론은 소극적 화친론과 적극적 대결론이 각각 제기되었다. 유승단(兪升旦)이 몽고와의 화친론을 들고 나와서는 천도론의 허실을 지적하여 그것이 다만 소수 권력층과 관료들의 피란행위로 전락하여 천도가 오히려 백성들을 엄청난 환난과 곤경에 빠뜨리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편 김세충(金世沖)에 의해 제기된 것이 몽고와의 대결을 전제로 하는 개경고수론이다. 이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하면서 개경의 역사성을 설명하고 "그러므로 마땅히 힘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는 당위론이다. 당시 중론은 이같이 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최우는 김세충을 참형에 처하는 동시에 천도를 결의하였다.

 

 2) 강화도 천도 배경

 천도책을 집정자 최우와 그 추종자들이 일방적으로 추진 결의하게 하고 또 그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몽고가 고려에 대해 보여준 고압적 태도와 무례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의식을 자극시킨 점을 들 수 있다. 고종 6년 강동성 전투로 인한 여몽 관계 성립 직후 몽고 사신 등은 융복(戎服)에 무장도 풀지 않은 채 전상에 올라가 왕의 손을 잡고 문서를 전달하는 등의 무례한 태도를 보였고 이러한 태도는 1차 침략 이후 여전히 계속되었다. 몽고의 방자한 태도는 애초 고려가 몽고에 대해 가지고 있던 '蒙古於夷狄最凶悍' 이라 한 극악한 선입관을 확신시켰고 그로  인한 자존심의 손상은 고려의 반몽의식을 강화시켰다.

 둘째 몽고의 지나치게 과중한 경제적 징수를 들  수 있다. 여몽 관계가 성립된 이후 저고여 살해 사건이 일어난 고종 12년까지 공물 징수를 위한 사신이 매년 수 차례 파견되었고 1차 침략 이후에도 막대한 경제적 징수가 일방적으로 요구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고종 8년의 경우 수달피 10.000령(領), 세주(細紬) 3.000匹, 세저(細紵) 2.000匹, 면자(綿子) 10.000근, 용전묵(龍전墨) 1.000丁, 필(筆) 200管등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고려에게는 과중한 부담이었다.

 셋째 몽고의 고려에 대한 요구가 단순한 공물의 징수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과 같은 인적 자원에 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했다는 점이다. 몽고는 그들의 정복사업에 필요한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하여 줄 것과 왕족 및 대관의 동남,동녀 각 500 명씩을 인질로 보내고 공장(工匠), 자수부인(刺繡夫人)을 징발하여 줄 것도 강요하였다.

 네번째는 1차 침략 이후 몽고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로 인한 점이다. 고려와의 강화 직후 몽고는 고려의 군사적 요지인 북계의 제성에 대한 72인의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로 인해 고려는 변경의 방어 거점을 상실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다루가치는 개경에까지 퍄견되어 내정에 간섭하였다.

 최우의 천도지 강화에 대한 관심은 몽고의 1차 침략이 종식되기 이전인 고종 18년 12월에 이미 나타나 특별히 강화도룰 살펴보도록 조치하고 있다. 몽고 침략의 대응책으로 이 당시 "海島入保"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바로 해도입보 차원의 천도지로서 강화는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에 대해서는 첫째 水戰에 취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도서라는 점, 둘째 육지에 핍근하면서도 조석 간만차와 조류 등으로 효과가 크다는 점, 세째 개경과의 근접성, 네째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 등의 편의성으로 요약된다.

강화 천도 후 이것을 주재한 최우에 관한 칭송과 천도의 의의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 많다. 이규보는 <晋陽侯封冊敎書>에서 우리의 사직을 완전히 보위할 수 있게 한 것은 오로지 최우의 공로라 했고 <望海因追慶遷都>에서도 지극히 어려은 천도를 신속하게 단행해서 우리 나라가 일찍이 蠻化하지 아니한 것이 그의 공적이라고 찬미하고 있다. 또 최자는 그의 <<三都賦>>에서 강도는 천험의 요새와 방어 시설이 완비되어 "부안不能盡飛, 豺虎不能窺  " 즉 비록 부안과 시호라 하더라도 능히 날아 들지 못하고 엿볼 틈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을 그는 "金  萬世帝王之都"라고 읊조렸다. 이들의 입장과 관점을 완전히 달리한 근래의 사가들에 이르기까지 강화 천도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견해들은 강화 천도를 전략적 가치면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종전까지와는 달리 비판하는 입장의 견해도 나오고 있다. 강화 천도의 목적이 '정권의 보전'과 '지배계급의 안전'에 있었다고 하며 최씨정권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천도를 강행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천도가 이와 같은 회피적 수단외에도 '초적'과 지방 반민들의 반정부적 활동으로부터 그들의 안전 및 정권의 보전을 도모하려 했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4. 천도 이후 강화도의 경영과 방비책

 

 1) 궁궐과 관아

 강화에의 천도는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도의 경영이라는 사전준비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천도가 결정되자 다음 날 바로 최우는 2領軍을 발하여 궁궐 조영문제 뿐만 아니라 천도를 앞둔 강화에서의 제반 사전 준비작업을 전담하였을 것이다. 국왕이 강화에 입어한 것은 이로부터 불과 보름후였기에 강화 천도는 先遷都 後設備라는 逆順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 준다.

  "때는 비록 천도의 초창기였으나 무릇 구정(毬庭), 宮殿, 寺社의 號는 모두 松都를

   모방하고 八關, 燃燈, 行香道場은 한결같이 舊式에 依하였다."

   ({고려사}23,고종 21년 2월 癸未 )

 궁궐 및 관아건물 뿐만 아니라 최우의 저택  또한 고종 21년에 대대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천도 초기의 임시 건물에서 강도 정부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 고종 21년 전후의 시기에 본격적 건축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최씨정권의 공적을 기리는 국왕의 조서 가운데

  "晉陽公 崔瑀는 ……몸소 乘輿를 받들고 땅을 골라 천도를 단행, 몇년 되지 않아

   궁궐과 관아를 모두 짓고 憲章을 다시 떨쳐 三韓을 再生시켰다. "

   ({고려사})

 이라 한 것도 천도 초기에 궁궐과 더불어 관아건물이 우선적으로 營建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이상의 몇가지 사실들을 통해 파악해 보면 강도시대 각종 건축물의 조영은 고종 19년 7월 천도 이후 몽고의 3차 침입이 개시되는 22년 이전까지의 수년간 집중적인 작업이 있었다. 그 후 고종 30년대를 전후한 시기, 그리고 36년부터 대략 40년 이전의 시기 등 주로 대몽항전의 소강기에 계속적인 정비 혹은 신, 개축 작업이 보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2) 저택과 民居

 궁궐, 관아 이외에 지배층의 저택과 개경으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의 가택도 새로 건축되었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그 저택이 극히 광대호화하였음은, 개경으로부터 재목을 가져왔다든가, 정원수를 본토에서 전부 실어와 수십리에 달하는 園林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집정자 최우의 저택은 궁궐보다는 규모가 못하였으나, 꽤 컸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그가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투입, 저택을 건축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은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노출된 권위의 불안을 의식한 면이 없지 않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당시 궁궐과 관아,최씨의 저택 등 주요시설은 송악산의 남쪽기슭과 동남쪽 견자산의 북쪽 및 동쪽기슭을 중심으로 경영되었다. 그러면 새로 이주해 온 民居로 말미암아 크게 확대되었을 시내 거주지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었을까. 이 같은 관심을 두면서 주목해 볼 것은 江都時代의 빈번한 화재 사건이다. 즉 강도시대 민가에서의 대형 화재 사건의 多發은 현저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질서하게 밀집되어 버린 도시구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급작스러운 천도의 단행으로 한꺼번에 대규모 인구가 이입해 옴으로써 계획성 없이 민거가 밀집되었기 때문이다. 강도는 고종 21년을 계기로 보다 왕도의 면모를 갖추는 방향으로 도시가 새롭게 정비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협소성과 밀집성은 탈피하지 못하였던 듯, 고종 32년의 화재사건은 연경궁, 법왕사 ,그리고 몇몇 관아까지 연소시켰다.

 강도의 시가는 대궐 남쪽이 중심가를 이루었다고 보여지고 견자산 북쪽에도 큰마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당시의 민가와 시가지는 오늘의 송악산 남쪽과 견자산 북쪽을 연결짓는 선상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3) 방어 시설

 강화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점에서 몽고군 방어에 큰 지리적 이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건만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강도에는 고려의 주요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강도 방어에 대한 무인정권의 확고한 의지와 입장, 거기에  3중의 성곽이 장치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여러 요소가 강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각각의 요소였던 것이다.

 몽고의 병란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한 당시의 상황에서 강도의 방어설비는 궁궐, 관아시설 이상으로 긴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방어설비의 중심은 역시 강도를 둘러싼 성곽이었다. 강도의 성곽은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축되었다.

 내성은 그 성격상 가장 먼저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축조시기는 천도 초기 궁궐의 영조와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강화 산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외성은 그 축조시기에 대하여 고종 20년, 혹은 동 24년의 두 가지로 등장하는데 이는 외성의 시축과 완공의 연대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외성은 대략 5년의 축조기간이 소요된 셈이 되는데 외성의 규모를 감안할 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길이는 내성 길이의 10배에 가까운 장성이었음을 말해준다.

 중성은 최항 집권기인 고종 37 년에 構築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이 전한다.

 "中城을 쌓은 공으로 최항을 門下侍中에 임명하고 晉陽候에 封하고 府를 열도  록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高麗史節要]17,고종 37년 12월) 그리고 실제 답사의 결과로 보면 이 중성의 잔적이 가장 뚜렷한 것 같다. 강화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점에서 몽고군 방어에 큰 지리적 이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건만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강도에는 고려의 주요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강도 방어에 대한 무인정권의 확고한 의지와 입장,거기에 3중의 성곽이 장치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여러 요소가 강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각각의 요소였던 것이다.

 강도 방어상에 있어서 성곽의 중요성과 비중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당시 천도에 대한 칭송 혹은 강도의 안전을 표현한 詩文 가운데 성곽을 자주 들고 있는 점이 그 하나이고 , 다른 한가지는 전쟁 말기 몽고와의 화의가 진행되면서 몽고에 의해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실행되어진 것이 다름 아닌 강도 성곽의 파괴라는 사실이다.

 한편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데 고종 37년 최항에 의해 중성이 새로 축성되자 이 무렵 고려에 온 몽고 사신이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한 몽고의 5차 침입 기간인 고종 40년 적장은 사신을 강도에 파견, 성곽의 파괴를 요구했고, 마침내 고종 46년 6 월 몽고 사신의 감독하에 고려의 내,외성이 깨뜨려진다.

 

5. 무인 정권의 강화도 생활

 우선 강도시대의 개경을 보자.

 강화천도에 의해 당장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舊都 개경이었다. 천도 이후의 李通의 亂과 뒤이어 몽고의 2차, 그리고 3차 침략은 개경을 크게 파괴시켰다. 강도시대 초기,개경과 강화를 지칭하는 언어로서 개경을 舊京,舊都 혹은 故京등으로 지칭하는데 비하여, 강화는 新京, 新都, 新邑 등으로 표현하고 강도가 임시적 이상의, 보다 항구성을 띤 도읍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천도 초기의 미비한 상황에서 개경은 강도와 일정한 연결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량의 생활용품 또는 과일류와 같은 실품들이 개경으로부터 공급되고 있었음을보아 초기 강도의 개경에의 경제적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천도이후 강도정부에 의해 개경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관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에는 천도의 요행성과 강도시대에 대한 찬양, 그러면서도 개경에 대한 회고지심이 시를  통해서 잘 나타난다. 천도 초기의 가장 문제되었던 것은 주거문제였다. 이 점은 국왕이 강화에 입어하자 거처할 곳이 없어 강화의 객관에 임시로 거처하였던 상황과 심지어 이규보조차 강도에 집을 마련하지 못하여 島內의 河陰縣 客舍 서쪽 행랑을 빌려 우거하는실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거처문제 이상으로 보다 심각했던 것은 식량의 조달이었다. 천도 이후 강도는 이주민들에 의해 갑자기 새롭게 개간되어 농지가 마련되었던 것이나 이는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당시 이규보의 시에서는 자신의 궁핍상을 호소하는 내용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강도 정부가 얼마나 궁핍한 상황에 있나 알수 있다.

 강도시대 국가 재정의 전체적 고갈에도 불구하고 무인정권은 사병집단의 유지, 정방과 같은 사적 정치기구의 운영, 기타 문무 臣僚 혹은 야별초군에 대한 사적인 시혜, 새 궁궐의 조영과 국자감과 같은 사적 시설물의 건축지 충당, 팔만대장경의 재작비 지원, 사원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 등 그 재정소요는 일개정부를 방불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였다. 이러한 가장 중요한 경제 기반이 최충헌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식읍, 진주였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주외에도 경상 ,전라에 걸쳐 꽤 많은 땅을 지배하었다. 또한 익성보(翊聖寶)란 명칭의 금융 조직을 지방에서 운영, 경제기반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 할 수 없다. 私的 경제기반의 개별적 확보는 강도시대 집정자에게 밀착했던 권세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적 경제적 기반으로 이들은 대체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시의 詩에서 보면 연회에 대한 묘사가 몽고의 3차 침략이 끝나자 갑자기 빈번해진다. 이같은 현상은 적군을 물리쳤다는 승리에 찬 자족감과 긴장감의 이완 등이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된 국면에 접어선 고종 30년대 이후 이같은 경향은 더욱 증대된다.  주요 연회 사례가 거의 최우,최항 등 집권자에 의해서 주관된 것이었다. 그들의 카리스마적 지배권의 상징이며 과시 행위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최씨정권의 몰락 이후로는 이제까지의 것과 같은 성격의 연회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무인 정권의 생활과는 달리 강도 후기에는 큰 경제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후반기,즉 고종 말년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더욱 심각한 양상이 전개되는데 이는 고종 40년부터 46년까지 무려 7년에 걸치는 기간동안 몽고의 참담한 구략이 연이었고 여기에 民心의 離反현상이 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실정에서 정부는 관리들에 대한 녹봉의 지급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의 경제 형편이었다. 이같은  경제적 압박이 무신정권의 약화 및 몽고와의 화의 모색을 유도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6.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군사적인 뒷받침이었을 뿐아니라 항쟁의 선두에 있었다. 그러므로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데 대하여 반한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들은 배중손의 지휘 하에 우선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었다. 그리고 항몽정권을 수립하였다.

 강화도는 40년 동안이나 몽고와의 항쟁을 지탱해 온 근거지였다. 그러나 이미 원종의 개경정부가 몽고와 결탁하고 있는 지금은 정세가 달랐다. 보다 항구적인 근거지를 개경과는 먼 곳에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진도로 남하하였으나 고려와 몽고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제주도로 옮겼으나 역시 함락되고 말았다. 따라서 4년에 걸친 반항은 끝나고 말았다.

 

Ⅲ. 맺 음 말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강화 천도는 1232년 최우에 의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행되었다. 이 강화 천도는 그 후 몽고로 하여금 침략의 구실을 보태어 주었고 몽고의 재침략을 촉진시켰으며, 민중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민심의 이탈을 가져왔다.

  강화 천도는 몽고의 오만 불손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 의식을 자극시킨 점, 그리고 그들의 지나친 경제적 수탈, 게다가 단순한 공물의 징수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하였다는 점과 다루가치를 비롯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 등 위의 여러 가지 이유로 단행되었다. 또한 우리는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도 간과 할 수 없다.

  천도 이후의 강화 경영에 있어서도 그들은 연경궁과 최우의 저택을 見子山 부근에 위치시켰다. 한편, 강화도에는 갑작스럽게 인구가 유입되고, 무질서한 도시구조로 대형 화재의 발생이 빈번하였다. 방어 시설면에서도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한다. 이러한 강도 시대 국가 재정의 전체적 고갈에도 불구하고 무인 정권은 그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다고 보아진다.

  전쟁의 전기간을 통해 침략에 대한 항전의 주체적 역할을 한 것은 민병들로서 초기의 국내 통치 계급의 학정에 반대하여 궐기한 농민반란의 폭동군인 초적들과 노예나 부곡민들로 된 천민들이 주요한 항전 세력이었다. 이들 농민, 천민의 항전이 바로 강력한 몽고 침략에 대하여 30년간이나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의가 주살된 1258년 戊午정변으로 최씨 정권은 종말은 고하고 왕권 복고의 절차가 취해졌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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