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

00학번 김미진

 

<목차>

서론

 

본론  1.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

      2. 불교미술의 기원과 성격

      3. 불교회화

    Ⅰ. 불교회화의 뜻

    Ⅱ. 기원

    Ⅲ. 불화의 종류

    ⅰ) 재료

        (1) 재료의 성질

        (2) 재료의 기능

    ⅱ) 쓰임새  

        (1) 장엄용 불화(莊嚴用佛畵)

        (2) 교화용 불화(敎化用佛畵)

        (3) 예배용 불화(禮拜用佛畵)

    ⅲ) 주제(主題)

       1. 불화

         (1) 석가모니후불화(釋迦牟尼後佛畵)

            1)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

            2) 팔상도(八相圖)

         (2) 비로자나불화(毘盧遮那佛畵)

            1) 비로자나 삼신후불화(毘盧遮那三身後佛畵)

            2) 비로자나 삼존불화(毘盧遮那三尊佛畵)

         (3)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1) 아미타불화

            2)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3)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4) 약사여래불화(藥師如來佛畵)

         (5) 미륵불화(彌勒佛畵)  

         (6) 53불화

         (7) 천불화(千佛畵)

       2. 보살화(菩薩畵)

         -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3. 나한·조사도(羅漢·祖師圖)

         (1) 나한도(羅漢圖)

         (2) 조사도(祖師圖 ; 眞影畵)

       4. 신중도(神衆圖)

         (1)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2) 사천왕도(四天王圖)

         (3) 지옥계불화(地獄系佛畵)

            1) 지장보살화(地藏菩薩畵)

            2) 시왕도(十王圖)

            3)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4) 감로왕(甘露王圖 ; 盂蘭盆經變相圖)

         (4) 칠성도(七星圖)  

         (5) 산신도(山神圖)

  

     4. 한(韓)민족(우리나라)의 불교회화(佛畵)

      (1) 한(韓)민족 불화(우리나라불화)의 시대적 배경

      (2)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불화

      (3) 고려시대

      (4) 조선시대

 

결론

* 주석(註釋)

<참고문헌>

 

 

서론

 한반도에서는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4세기에 이르러서야 조형미술이 나타났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順道)는 불상과 함께 불경을 가지고 왔으며, 375년(소수림왕 5)에는 최초의 사원 초문사(肖門寺)가 건립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고구려를 기점으로 백제와 신라에도 잇달아 전해지면서 곧 한반도의 사상체계와 신앙을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불교미술은 이 땅에서 이룩된 최초의 시각혁명(視覺革命)으로서 한국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불교 자체가 외래종교이기는 하나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그 조형활동 역시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세 나라가 나름대로 성격을 달리한 삼국시대의 조형활동은 매우 다채로웠으며,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그 전통은 계승되어 더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한국 불교미술의 절정기를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며 이와 같은 신라미술의 찬란한 조형적 성과로 불교미술은 전성기를 맞았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 역시 불교를 국교로 하여 불교미술은 새롭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다만 선종(禪宗)의 대두와 더불어 이 시대의 조형물은 특징을 달리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미술의 특색 또한 불교미술이라는 커다란 민족미술의 한 주류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의 위축과 더불어 그 미술 활동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의 불사(佛寺) 건축물을 비롯한 모든 조형활동은 점차 퇴조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화(戰禍)로 말미암아 수 천년의 전통을 이어온 민족문화재가 수난을 당해 황폐화하는 시련기를 거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미술은 삼국시대부터 크게 융성하여 종교적인 정열과 발랄한 힘, 그리고 귀족적인 우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은 국제적인 세련성과 사실적이고 탄력적인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단아하고 인간적인 정감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불교미술은 역사시대 이후 한국미술을 대표하였으므로 불교미술을 이해해야만 한국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금부터,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본론에서는 위의 목적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상, 불교회화의 연관성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우리가 이제껏 미처 알지 못하고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이러한 우리나라의 불교회화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선 불교회화를 알기 위해 전체적인 불교미술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알아볼 것이며 이를 이해한 다음 불교회화의 기원과 종류 등에 대해서도 알아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나라 시대사와 맞추어 불교회화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본론

1.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가 일반민중의 구제를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켜야 한다. 민중들은 대부분 지식이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교리를 그들에게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시청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쉽게 말하면 가시적인 증거물로 신앙의 대상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더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석가모니부처를 신격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기도 하였다. 교세의 팽창과 더불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져 갔고 따라서 탑(塔)·불상(佛像)등과 같은 숭배대상의 미술품이 조성되어 불교미술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탑의 발생이다. 탑은 돌아가신 부처님의 뼈(舍利)를 봉안하는 일종의 무덤이다. 부처님의 뼈를 탑에 모신다는 것은, 후대의 불교도(佛敎徒)들에게는 신앙심의 결정체를 모시는 것이며, 불교의 구체적인 진리에 한층 더 다가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탑은 불교의 대표적인 건축미술이 되었다.

 점차 후대로 내려오면서 탑만으로는 일반 신도들의 신앙심을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탑 주의를 장엄(莊嚴)한 난간에 부처에 관한 여러 가지 설화들을 조각하여 어려운 경전(經典)의 내용을 그림으로 쉽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단계 진보하여 나타난 것이 불상과 보살상(菩薩像), 천부상(天部像) 등이다. 즉, 이것들은 부처님의 얼굴이나 신체를 직접 대함으로써 불교의 진리나 부처의 경지를 보다 뚜렷이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는 이를 봉안할 집이 있어야 하는데 이 집을 보통 법당(法堂), 정확히 말하면 금당(金堂)이라 한다. 부처님을 모신 금당은 여러 가지로 장엄하게 꾸며진다. 벽에는 벽화(壁畵)를 그리고 건물 내외에 수많은 장식을 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불교건축이 등장하게 되며, 벽에 그린 벽화는 바로 불교회화의 새로운 전개인 셈이다. 불화(佛畵)는 조각으로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지만, 세밀하게 묘사하기 힘든 여러 가지 불교설화나 다종다양(多種多樣)한 경전을 변상(變相)으로 마음대로 그릴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애용되던 불교미술이었다.

 보다 후기로 내려오면 의식(儀式)이 극히 중시되고 의식을 통하여 불교의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밀교(密敎)의 등장으로 다양한 불구류(佛具類)들이 제작된다. 금강령(金剛鈴),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많은 불구류들이 나와 불교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불교미술은 바로 불교의 조각·건축·회화·공예 등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종교적인 신앙의 결정이며 불교의 교리를 단적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聖)스러운 미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불교미술은 불교의 교리를 어떤 형태로든지 표현하여 교주에 대한 숭배심과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미술을 말한다.

 

2. 불교미술의 기원과 성격

 불교미술은 불교의 교의를 근본으로 하여 발생한 종교미술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수한 믿음의 산물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런 발생동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불탑과 불상이 처음부터 등장되었다고는 볼 수 없고 매우 단순하고 순박한 신앙심에서 출발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수목숭배와도 연관되고 있다. 수목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또 인간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며, 무언지 모를 신비를 지니고 있는 음덕의 근원으로 생각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나무 중에서도 불교도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석가세존이 직접 깨침을 얻으셨던 보리수 자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먼저 보리수를 숭배하게 되었고, 또 그들의 조형활동에 보리수를 등장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1) 이 같은 신앙대상은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이른바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를 대표하는 믿음의 주체로서 불상이 등장되기 이전에 있었던 불교미술의 중요한 부분들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부처의 모습을 신비스런 존재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감히 형상화하지 못하고 부처님이 꼭 존재해야 할 위치에도 공백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불교미술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순수한 자연발생적 신앙의 동기를 읽을 수 있다. 불교의 양대 예배 대상을 불탑과 불상에 두고 있지만 이들 가운데 불상은 불탑에 비해 훨씬 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불탑의 신앙, 즉 부처님의 유신(遺身)인 사리를 신앙하는 것은 상당히 초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불사리는 불교도에게 매우 귀중한 신앙대상이 되었고, 또 이와 함께 시대가 내려오면서 부처님의 교훈을 상기시키고, 또 그것을 상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형들이 불탑을 의지하여 발생됐던 것이다. 이러한 조형 속에서는 불교를 설명하는 상징적 표현이 있어 매우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조형들은 바로 초기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고대불상이 지닌 종교적 성격이란 매우 정적이면서 적정(寂靜)의 세계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삼매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것은 불교가 지니고 있는 차원 높은 진리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상 그 자체는 부처님의 내밀(內密)한 세계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에 지극히 고요하면서 한없이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정신의 표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불상을 조성하는 장인의 조형의지는 믿음에서부터 출발되고 있다. 그 형상은 작가 자신 속에 내재한 불심의 발로인 동시에 자기 부처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상을 완성하는 것은 바로 자기 부처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 형상은 장인 개인의 종교적 발원이나 시대적 양상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같은 조형양식은 우리의 역사를 통하여 신라의 불상, 고려의 불상, 그리고 조선시대의 불상이 각기 달리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해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불상을 본다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그 불상의 내면세계, 다시 일러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불교미술이 지닌 종교미술로서의 복합적 문제점을 지닌다. 그것은 비단 불상에만 국한될 성질의 것은 아니고 불교회화나 공예, 심지어 불교건축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불교미술을 이해한다거나 예술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내밀한 인간정신의 체험으로부터 도달될 수 있는 종교적 법열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불교회화

Ⅰ. 불교회화의 뜻

 불교회화는 흔히 불화라고 하는데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좁은 의미의 불교회화는 절의 법당 등에 모셔 놓고 예배하기 위한 그림 이른바 존상화(尊像畵)만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존상화 이외에 불교도나 이교도를 교화하기 위한 갖가지 그림이나 절의 장엄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단청 같은 여러 가지 그림들을 포함, 불교적인 목적으로 쓰이는 일체의 그림을 통틀어서 불화라 한다.

 

 Ⅱ. 기원

 불화가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다만 조각과 건조물의 성립시기와 거의 같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초기의 불화로서 남아 있는 예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초기의 불교사원에 불화들이 그려졌던 사실을 여러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화는 기원전 2세기경에 그려진 아잔타 석굴의 벽화들이다. 그러나「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라는 경전에 의하면 인도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에 불전도(佛傳圖), 본생도(本生圖) 그리고 야차(夜叉) 등 넓은 의미의 불화가 그려졌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적어도 기원전 3세기에는 어떠한 종류 형태로든지 불화가 그려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6∼7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부처님의 모습 등 불교적인 소재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실제의 제작은 그 이전에 있었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불화는 아잔타의 벽화들이지만 이 불화들은 B.C 2세기경의 작품들이어서 부처 생존 당시나 초기불교시대의 불화들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물론 초기의 불화들이 틀림없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당시 사원들의 쇠멸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B.C 2∼3세기경의 탑 조각이나 경전에서 보이는 것처럼 초기 불화의 주제는 불전도나 본생도와 같은 교훈적인 불화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Ⅲ. 불화의 종류

 ⅰ) 재료

 불화의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성질과 기능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재료의 성질

 불화를 만드는 재료는 대개 흙(土)·나무(木)·베(布 ; 織維)·종이(紙)·금속(金屬)·돌(石)등 다양하다. 이러한 재료의 성질에 따라 흙바탕(土本), 나무바탕(木本), 베바탕(絹本·麻本·苧本 등)등의 불화로 나뉘며, 이 바탕의 소재에 따라 불화의 기능은 물론 교리적인 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보존이나 유행 등과도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재료의 성질이 불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 재료의 기능

 불화는 재료의 성질(바탕)에 따라 그 기능도 달라진다. 가령 흙이나 돌, 나무 등 대개 벽면(壁面)이나 지붕을 구성하게 되므로 여기에는 천정화(天井畵)나 벽화(壁畵)가 그려지게 되고, 종이나 베 같은 재료에는 탱화(幀畵)나 경화(經畵)가 그려지게 된다.

 벽화는 또한 흙벽그림(土壁畵), 돌벽그림(石壁畵), 판벽그림(板璧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토벽화는 사원 건물의 파괴나 보수(補修)로 인해 없어졌기 때문에 조선조 전기 이전의 작품들은 거의 남아 있지 못한 형편이다.

 돌벽그림(石壁畵)은 석굴사원이나 목조건물이라 하더라도 경변상도(經變相圖)를 그러거나 새긴 판석을 벽으로 시설한 경우 등 특수한 예를 말한다.*2)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석굴사원이 더러 있긴 하지만,*3) 본격적인 돌벽화의 예는 남아있지 않으므로 현재로서는 무어라 잘라 말할 수 없고, 다만 새로운 자료의 등장을 기대해 볼 따름이다.

 판벽그림(板璧畵)으로 현재 남아있는 예는 누각이나 건물의 외벽(外壁)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를 붙이고 이곳에 불화를 그린 경우이다. 이것들은 대체적으로 수명이 아주 짧고 연대가 오래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원의 나무기둥이나 문 등에 그린 그림도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천정화(天井畵)는 목조사원의 천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름을 칠하거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름이나 채색을 덧입히는 것이다. 특히 법당 같은 곳은 부처님을 모신 성소(聖所)이기 때문에 화려하고 장엄하다. 이에 따라 천정에도 여러 도안으로 채색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단청(丹靑)이라 부른다. 이러한 단청은 목재를 보존하고 조악한 면을 감추며, 아울러 종교 건축물의 장엄함과 불교의 교화를 위한 것으로 크게 성행하였다.

 벽화는 천정화들이 일정하게 고정되어서 이동 할 수 없는 그림이라면, 탱화(幀畵)나 경화(經畵), 병풍화(屛風畵)등은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의 의식에 맞추어 장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현재 사원에 가장 많이 남아 있지만, 역사가 그리 긴 것은 아니다.*4)

 

 ⅱ) 쓰임새

 불화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다. 첫째 불교를 장식하면서 또한 우러러 보이게 하는 장엄용(莊嚴用)과, 둘째 일반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해 주고자 그린 교화용(敎化用), 셋째 의식이 있을 때에 예배하기 위한 예배용(禮拜用)불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용도가 엄격히 분리되어 쓰인 예는 극히 드물고, 그 용도를 서로 겸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 장엄용 불화(莊嚴用佛畵)

 불교미술, 특히 조각이나 회화 같은 것은 불탑이나 불전(佛殿) 또는 그 밖에 신성한 건조물을 장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불상의 출현으로 조각은 차츰 예배의 다상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불화는 예배적인 성격보다는 장엄적인 성격을 오랫동안 유지해 온 셈이다.   가령, 후불탱화나 후불벽화 등은 본존화의 성격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본존상을 장엄하는 뜻이 더 강하다. 이때의 장엄하다는 것은 단순히 '꾸민다(飾)'는 뜻보다는 종교적인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한다(嚴)'는 의미가 강하다.

 장엄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천정이나 가둥, 벽면에 그린 단청이나 벽화가 있다. 그 내용은 도안적인 무늬가 대부분이지만 상(像)이나 서조(瑞鳥), 서수(瑞獸)등을 그리는 경우도 많다.

 (2) 교화용 불화(敎化用佛畵)

 성스러운 불교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교리의 이해는 물론 신성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설화적인 그림을 많이 그려 일반 대중들이나 초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서 불교 교화에 크게 이바지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화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그려졌는데 팔상도(八相圖)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지옥의 여러 가지 유형을 그려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따라 어떤 지옥에 떨어진다는 지옥변(地獄變), 가령 시왕탱(十王幀)이나 우란분경변상탱(盂蘭盆經變相幀)등이 많이 그려졌는데, 이들은 죄를 두려워하게 하는 좋은 교재가 되었다.

 이 외에도 착한 일을 하면 내세에 좋은 곳에 인도된다는 내용을 그린 미타래영도(彌陀來迎圖) 같은 것은 권선(勸善)을 장려하는 좋은 교재였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 등의 설법그림도 이 범주에 속하며, 본존불의 후불탱이나 후불벽화도 역시 일종의 교화용으로 쓰였다.

 특히 어느 특정한 경전의 내용을 변상으로 그린 경변상도(經變相圖)는 교화용 불화의 으뜸으로, 각 장마다 그림과 글이 동시에 표현된 것과 각 권의 앞에 압축·묘사된 것 등이 있다.

 (3) 예배용 불화(禮拜用佛畵)

 우리나라 사원에서는 불화를 예배용 본존으로만 사용한 경우는 드물다. 특히 불전의 후불탱화나 벽화들은 장엄적·교화적인 역할도 겸하고 있어 예배화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법회가 있다. 이런 경우 옥외에서 거행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는 본존불상을 봉안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화를 본존으로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 불화를 흔히 괘불(掛佛)이라고 한다. 이것은 보통 수 미터 내지 수십 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으로 절 마당에 장치된다. 법당 앞 뜰에 있는 돌로 된 당간지주는 여기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ⅲ) 주제(主題)

 1. 불화

 (1) 석가모니후불화(釋迦牟尼後佛畵)

 1)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

 우리나라 불교사찰은 주불전(主佛殿)이 대웅전(大雄殿)일 경우가 많다. '대웅전'이라 이름한 법당에는 반드시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게 되며, 이 뒤에 석가후불화도 반드시 모시는 것이 원칙이다. 대웅전의 후불화로 그려지는 주제는 원칙적으로 법화경의 내용을 압축·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대웅전의 후불화의 구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현존하는 불화의 대부분인 조선후기 불화들을 예로 들면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삼세불화(三世佛畵)로, 중앙에 석가불(현재불), 왼쪽에 약사불(과거불), 오른쪽이 아미타불(미래불)등 삼세불인데, 이 삼세불을 그림으로 나타낼 경우 중앙에는 석가불화인 영산회도, 왼쪽에는 약사회도, 오른쪽엔 극락회도를 배치한다.*5)

 둘째는 단독 그림인데, 삼세불의 중앙 그림만을 단독으로 배치한 것이다. 중앙에는 수미단 위에 석가여래가 앉아 있고, 그 좌우로 보살들과 제자들, 그리고 모든 분신불이 배치되며, 이들 앞에는 사천왕, 뒤로는 모든 호법신중(護法神衆)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원칙이다. 대개의 조선조 후기 불화에는 이러한 기본적인 구도가 충실히 지켜진 것 같다.*6)

 영산전(靈山殿)은 석가여래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한 영산회상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도를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지은 전각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석가후불화와 구별하기 어렵다. 다만 석가후불화보다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더욱 설명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송광사 영산전의 영산회탱(靈山會幀)이 자세히 묘사된 대표적이 예이다. 그러나 통도사의 영산회탱은 사리불이 질문하는 장면 등을 생략하여 석가후불탱과 꼭 같다.

 2) 팔상도(八相圖)

 석가여래의 전기(傳記)는 근본불교(根本佛敎)시대부터 신도들에게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서 전기를 조각이나 회화를 즐겨 표현하곤 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부터는 부처님의 전생설화(前生說話)와 함께 불교미술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초기에는 보통 부처님의 생애를 네 가지 극적인 장면으로 압축·묘사하였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극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같은 석가불의 생애를 극적인 8장면으로 묘사한 그림을 팔상도라 하고, 이 그림을 봉안하기 위하여 따로 마련한 전각을 팔상전(捌相殿)이라 한다.*7)

 현재 우리나라의 팔상도는 대개 법화경을 신봉하는 법화·천태종 계열의 종파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있다. 이것은 팔상도가 팔상전 외에 영산전에도 봉안되어 있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팔상도에는 보통 다음의 8가지 장면이 그려진다.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 [兜率來儀相],

 ② 룸비니동산에서 내려오는 상 [毘藍降生相],

 ③ 4문에 나가 관찰하는 상 [四門遊觀相],

 ④ 성을 넘어 출가하는 상 [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 [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구니에게 항복받는 상 [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상 [鹿園轉法輪相],

 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상 [雙林涅槃相] 등이다.

 이와 같은 8상도는 그 세부적인 장면의 표현이나 배열하는 구도에 있어서도 조금씩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또한 화폭의 장면마다 그 장면의 내용을 적어 놓아 그림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한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통도사·쌍계사·선암사·천은사·개심사·해인사·흥국사(의정부) 등의 팔상도는 이러한 모습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쌍계사나 운흥사, 개심사의 팔상도들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 팔상도들은 병풍식으로 된 것이 많다.

 

(2) 비로자나불화(毘盧遮那佛畵)

 1) 비로자나 삼신후불화(毘盧遮那三身後佛畵)

 비로자나불화를 모신 전각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文殊殿), 화엄경변상인 7처9회도(七處九會圖)를 모신 화엄전(華嚴殿) 등이 있다. 특히 대적광전은 대웅전과 비슷한 비율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비로자나불화 역시 석가불화 못지 않게 많이 조성된 만큼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로자나는 본래 "광명이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광명을 어디에나 두루 비치게 하는 부처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佛身), 즉 진신(眞身)이요 법신(法身)이라는 뜻이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법신으로 보아 법신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고 있고, 후기에는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화신(化身)인 석가불 등 3신불을 채용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신불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대적광전에 비로자나를 중앙 본존으로 모시고, 노사나불과 석가불을 좌우 협시불로 배치하는 것이 통례였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전각에는 삼신불의 장면을 보충설명한 삼신후불화들이 반드시 봉안되는데, 그 중앙의 불화가 바로 비로자나후불화이다. 비로자나후불화는 화엄경을 설법한 장소의 하나인 보광명전(普光明殿)이나 적멸도량(寂滅道場)의 설법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출정된다. 중앙에는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결가부좌한 비로자나불이 큼직하게 묘사되고, 이 불상을 중심으로 상·하단으로 앞면의 양쪽에 5∼7명씩 보살성중이 배치된다. 상단부에는 성문들(聲聞衆)이 빽빽이 묘사되며, 양 끝에 천왕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외호중(外護衆)인 사천왕과 8부중은 여기에 배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8)

 노사나보신후불화(盧舍那報身後佛畵)는 비로자나후불화의 왼쪽에 배치된다. 구도는 오른쪽의 석가화신후불화(釋迦化身後佛畵)와 같으며, 노사나불은 결과부좌한 모습으로 두 손은 설법인을 짓고 보관을 쓴 보살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전면의 좌우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배치되고 그 위의 양쪽으로 보살들이 둘러싸고 있다.

 석가불화신후불화(釋迦佛化身後佛畵)는 항마촉지인과 설법인*9)을 한 석가불이 앉아 있고, 전면에 광목천왕(廣目天王)·다문천왕(多聞天王)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뒤로 석가불을 둘러싼 보살들(菩薩衆)이 묘사되고 있다.*10)

 2)비로자나 삼존불화(毘盧遮那三尊佛畵)

 비로전에는 비로자나 삼존불화를 주로 봉안한다. 이와 함께 화엄전이나 문수전에도 비로자나불화를 봉안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문수전은 문수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때때로 비로자나 삼존상을 모시기도 한다. 문수보살이 석가의 좌협시보살로서보다 비로자나의 좌협시보살로 더 애용되었던 화엄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문수전의 후불화는 대부분 비로자나 삼존불화를 모시게 마련이다. 이 불화의 형식은 좌우로 사천왕의 외호중들을 더 첨가시키고 좌우의 협시보살들도 더 큼직하게 묘사하여 삼존화로서의 의의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아마도 신라시대부터 유행했던 것 같다.

 

(3)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아미타불화 역시 석가불화·비로자나불화와 함께 많이 그려진 불화이다. 특히 살아서는 수명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이 아미타 신앙은 시대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며, 어떤 특정한 종파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전불교적인 신앙이었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봉안한 전각도, 그리고 아미타불화도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1) 아미타불화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여기에는 반드시 아미타불화가 있으며, 이밖에 아미타래영도와 관음도 등이 있다.

 아미타불화는 주존인 아미타불상 뒤에 모시는 불화이다. 이 불화의 주인공인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이자 모든 중생들에게 안락과 수명을 보장해 주는 대자비 부처이다. 중생들은 이와 같이 좋은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아미타부처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불화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미타불화는 몇 가지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첫째, 아미타불이 단독으로 그려지는 경우로, 아미타불이 연화대좌 위에 9품인의 손모양(手印)을 하고 앉거나 서서 설법하는 모습이다. 둘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의 삼존불을 그리는 경우로, 중앙에 설법하는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음과 지장보살을 배치하는 두 가지 경우가 보편적이다. 고려불화에 보편적으로 이런 삼존도가 그려져 있다. 셋째, 아미타불과 4보살 또는 8대 보살을 그리는 5존도와 9존도의 경우이다. 아미타불의 좌우에 관음·대세지·보현의 네 보살과 여기에 미륵·지장·제장애·금강장보살을 더하여 8대보살을 그린다. 넷째, 아미타불과 보살들, 아라한들, 그리고 이들을 외호하는 사천왕 등이 묘사되는 복잡한 형식*11)이다. 중앙의 아미타불 좌우로 보통 네 명씩 8대 보살이 배치되는 것이 통례이고, 여기에는 지장보살이 빠짐없이 보인다. 이 외에 여러 불(佛)과 제자 아라한들의 성문중이 배치되며,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 등이 각각 좌우로 배치된다. 크기나 벽면에 따라 한 폭에 다 그리는 경우도 있고, 동와사의 아미타후불화처럼 좌·우의 외호중과 성문중을 따로 떼어 3폭에 그리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서방극락 장면을 묘사한 그림*12)이다. 서방극락을 2단으로 배치하여 윗부분에는 궁전을, 아랫부분에는 극락의 연못을 그리고, 아미타불과 관음·세지의 삼존불을 중심으로 온갖 권속과 극락의 정경을 충실히 묘사한 극락정토변상인 셈이다.

 이러한 아미타불화들도 후대로 내려올수록 구도가 복잡해지는데 17∼18세기의 그림들이 가장 화려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2)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아미타 신앙의 극치는 결국 서방극락에 태어나는(往生)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신분의 귀천이나 고하를 막론하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외우며 염불하게 되는데, 염불을 잘 행한 사람은 죽을 때나 그 수행이 성숙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나와 서방극락으로 인도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염불왕생 신앙은 신라시대부터 일반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그림도 몇 가지 형식으로 그려진다.

 첫째, 아미타 단독으로 염불수행자를 맞이해 가는 그림으로 1286년의 아미타래영도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아미타불과 관음·세지의 삼존불이 와서 맞이해 가는 것으로, 첫째 형식과 함께 이 형식의 구도는 하늘에서 아미타불과 삼존불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셋째, 아미타불과 8대보살이 와서 맞이하는 아미타9존래영도로 이 그림 역시 아미타불과 8대 보살이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이다. 넷째, 아미타불과 성중이 맞이해 가는 그림으로 아미타와 관음·세지보살에 제자·아라한·공양비천·주악상 등이 따르거나 또는 8대보살과 성중들이 따르는*13) 등 다양하다. 다섯째, 아미타불과 성중이 맞이해 가는 것으로 왕생하는 자들을 배(龍船)에 태워 인로왕보살과 관음보살이 극락의 아미타불에게 인도해 가는 모습이다. 조선후기의 그림으로 은해사(경북 영천)의 염불왕생첩경지도(念佛往生捷徑之圖)등은 매우 복잡하고 화려한 구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3)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변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서분변상(序分變相)과 본변상(本變相)등 두 종류가 있는데, 서분변상은 경을 설하게된 인연을 그린 그림이고, 본변상은 극락을 16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16관경변상도이다. 서분변상으로는 1312년 서분변상도와 서복사 소장 관경서분변상도가 유명하며, 부처님 당시 마가다왕국의 아사세 태자가 부왕을 죽이게 된 부자의 왕권쟁탈전의 전말을 설법한 내용이다. 본 변상인 16관경변상도로는 서복사 소장 16관경변상도와 설충 필(薛沖筆) 관경변상도, 인송사 소장 관경변상도(1323년)등이 고려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또한 조선시대 것으로는 1465년 관경변상도와 개심사 관경변상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4) 약사여래불화(藥師如來佛畵)

 약사여래는 온갖 병고와 재난을 없앰으로써 중생들의 고통을 씻어주는 부처님이다. 특히 의술이 부족했던 때에 질병은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약사신앙은 성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650년경부터는 이 신앙이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를 불화로 조성할 때에도 몇 가지 형식으로 그려졌다.

 첫째, 약사여래 단독상만 그려지는 경우로, 시무외·여원인을 한 왼손 바닥에 약기를 올려  놓은 것이 보통이다. 둘째, 약사여래와 일광·월광보살만 그린 경우로 개인 소장 약사삼존도(고려)와 국립박물관 소장 약사여래삼존도(조선 명종)의 구도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셋째, 삼존상 이외에 12신장과 기타 성중을 거느리고 있는 그림으로 지적원(智積院)소장 약사경변상도(藥師經變相圖)가 대표적이다. 넷째, 동방유리광세계(東方琉璃光世界)인 동방정토를 변상으로 그리는 경우로, 앞의 경변상도와 같은 구도인 통도사 약사전 후불탱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또 하나 주목되는 형식은 조선조 후기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석가삼존후불탱의 왼쪽에 약사불변상도를 표현한 것이다. 즉 중앙에 석가, 왼쪽에 약사,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묘사하는 삼존형식을 말하는 것이다.*14)

 

(5) 미륵불화(彌勒佛畵)

  미륵불화는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과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을 주경전으로 한 미륵사상을 나타낸 불화이다. 주로 법상종(法相宗)의 종파에서 주불화로 봉안하고 있는데, 현재 상생경변상도는 남아 있는 예가 없다. 하생경변상도로는 고려의 것이 2점 남아 있는데, 1350년 회전 필(悔前筆) 미륵하생경변상도와 지은원(知恩院)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가 유명하며, 조선후기 것으로는 장곡사 미륵괘불화가 대표적이다.

 

(6) 53불화

 53불화는 보광불(普光佛)에서부터 상만왕불(常滿王佛)까지의 53불을 그린 것으로, 한 장에 모두 그리는 경우와 몇장에 나누어 그리는 경우가 있다. 송광사 불조전에 봉안된 53불화는 9불탱 2폭, 13불탱 2폭, 5불탱 2폭 등으로 모두 6폭에 나뉘어 그려져 있다.

 

(7) 천불화(千佛畵)

 천불화는 과거·현재·미래의 천불을 각각 그리는 경우가 있고, 3천불을 모두 그린 경우도 있으며, 현재 천불만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현재 천불만 그리는 경우가 많다. 고창 선운사 천불탱은 1폭에 250불씩 4폭에 나누어 그린 것이다. 이밖에 1폭에 그리는 경우와 몇 폭에 나누어 그리는 경우도 있는데, 천안 광덕사의 천불화는 한 폭에 천불씩 모두 3폭에 3천불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한 폭에 천불을 모두 그린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2. 보살화(菩薩畵)

 -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관음보살은 중생제도를 실천하는 자비의 화신(化身)이다. 말하자면, 중생들의 고난을 구제하여 안락한 세계로 인도해 주는 구제자로서 특히 일반 대중들에게는 인기 절정의 보살이었다. 이러한 관음보살이 그려진 관음보살화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관음전(觀音殿)의 후불화로 혹은 극락전에도 모셔졌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관음보살 신앙이 대단히 성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관음보살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해졌다.

 첫째, 머리에 쓴 보관에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는 일반적인 관음보살로, 무량수경에서 아미타불의 좌협시보살로 등장한 관음이다. 4세기경부터 보관에 아미타불의 화불을 모시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관음불화 가운데 가장 많이 묘사되는 형태이다. 둘째, 흰 옷을 입은 관음상과 버들가지를 손에 든 관음상으로, 힌두교적인 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 뒷면의 백의관음은 버들가지까지 들고 있는 모습으로 두 관음상을 합쳐 표현한 예이다. 해인사 양류관음도는 양류관음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셋째, 11면관음보살로 법화경에서 유래하는 보살인데 관음의 여러 가지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제자로서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얼굴은 자비와 분노, 폭대소상(暴大笑像), 흰 이를 드러낸 상 등 다양한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다양한 성격으로 중생을 적절히 제도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11면관음보살이 인기가 있었다. 넷째, 성관음(聖觀音), 즉 33신의 관음은 첫 번째의 관음과 동일한 형태로 관음의 33신으로 변화하면서 어느 경우에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후기부터 신앙되고 제작되어 많은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다섯째, 수월관음(水月觀音)은 남쪽 보타락가산의 바닷가에 거주한다는 법화경과 화엄경에서 유래한 보살이다. 산호초가 있는 바닷가 바위굴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대안(對岸)에는 법을 묻는 동자 등이 있고, 버들가지를 꽂은 병과 쌍죽(雙竹)이 솟아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관음도들은 거의 대부분 수월관음도이며, 아미타불화와 함께 대표적인 걸작들이 많이 있다.*15) 여섯째, 천수천안(千手千眼)관세음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음이라는 뜻이다. 보통 18손이나 40손을 크게 표현하고 손이나 팔에 눈을 표현하는 이 관음은 관음 가운데서도 가장 힘 있는 구제자를 상징한다. 분황사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는 대단히 유명하여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한 기적까지 보이고 있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 남아 있는 예는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가끔 단독으로도 묘사되기도 하였다. 일곱째, 마두(馬頭)관음과 준지(准 )관음으로 마두관음은 4면(面)8비(臂)의 분노상이다. 즉, 머리 위에 말 머리를 표현하여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관음이다. 준지관음은 18비(臂)로 머리에 화불이 있는 관음상이다. 여덟째, 여의륜(如意輪)관음은 밀교적 관음으로 미륵보살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관음도량이 매우 성행하여 다양한 관음상과 그 불화들이 제작되었지만, 특이한 관음상의 예*16)는 그리 유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작품도 별로 없다.

 

 3. 나한·조사도(羅漢·祖師圖)

 (1) 나한도(羅漢圖)

 응진전(應眞殿)에는 부처의 16제자를 상으로 또는 불화로 그려 모시고 있다. 16나한은 석가여래 열반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은 이들로,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까지 널리 미쳐 조선시대 사원에는 보통 응진전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한도의 배치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양편으로 각각 배치된다. 이 그림이 만약 탱화로 되었을 경우에는 제각기 한 나한을 1폭에 표현하여 16폭이 되기도 하고, 2명 혹은 4명씩 표현하기도 하여 일정하지는 않다.

 나한들의 모습 역시 정해져 있지 않다. 서 있는 상, 앉아 있는 상, 돌아앉은 상 등 제각기 특징이 있으며 이들은 또 1명 내지 2명의 동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응진전의 후불화는 꼭 나한도만 봉안하고 있지는 않으며, 영산회도를 후불화로 삼고 있는 경우*17)도 더러 있고, 석가 5존도를 그려 모시는 경우도 있다.

 (2) 조사도(祖師圖 ; 眞影畵)

 영정(影幀)은 고승들의 초상화인데, 흔히 진영(眞影)이라 불린다. '○○祖師影' , '○○國師影' , '○○大師影' , '○○禪師影' 등으로 이름 붙인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이런 류의 그림들이 매우 성행했던 것 같고, 고려시대에는 특히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웬만한 사찰에는 반드시 이들 조사도가 모셔져 있는 조사당(祖師堂) 또한 영각(影閣)이 있고 그곳에 흔히 수십여 점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18)

 조사도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덕 높은 스님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통례이다. 그림 윗부분의 한쪽에 '○○眞影' 이라 제(題)하고 있는데, 연대를 적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이 그림들의 작자나 연대를 알 수 있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그러나 송광사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진영이나 선암사 대각국사 진영처럼 연대를 알 수 있는 것도 가끔 있어서 조사도의 양식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4. 신중도(神衆圖)

 (1)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석가·비로자나·아미타 등 불법의 외호중으로 모든 불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있다. 이들은 본래 인도 재래의 토속신이었다가 불교신으로 수용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항상 이들을 호법신으로 등장시켜 도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신들을 그림으로 그려 예부터 신앙해 왔고,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널리 확대되었다.

 이러한 제석·신중도는 몇 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제석천을 위주로 그린 제석 그림, 둘째, 제석과 천룡(天龍)을 함께 그린 제석·천룡그림, 셋째 제석과 금강역사(金剛力士)를 그린 것 등이다. 이 외에도 각 신종들을 독립적으로 그리는 경우도 많이 있어 그 형식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다. 첫 번째 그림은 제석을 중앙에 두고 모든 신중을 보살이나 왕의 모습으로 표현한*19)예와 무장(武裝)을 한 신중의 모습을 표현한 예*20)가 있다. 두 번째 그림은 화폭을 2단으로 구분해 상단에 제석을 위주로 한 신중도를, 하단에 천룡을 위주로 한 무장 모습의 신중을 그린 것이다.*21) 천룡은 천병(天兵)을 나타낸 것으로 천룡만을 독립해서 그린 경우*22)도 있다. 세 번째 그림은 상단에 제석과 신중을, 하단에 칼을 든 금강신과 좌우로 무기를 든 신장들을 배치한 것이다.*23)

 (2) 사천왕도(四天王圖)

 사찰에 들어가는 문 가운데 중문(中門)에 천왕문(天王門)이니 금강문(金剛門)이니 불이문(不二門)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다. 중문에는 대개 이 절의 수문장격인 신장을 봉안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보통 천왕문과 금강문이 많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을 안치하거나 때로는 사천왕 그림을 그려 봉안하는 경우(통도사의 예)가 있고, 불상 뒤에 사천왕 그림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3) 지옥계불화(地獄系佛畵)

 1) 지장보살화(地藏菩薩畵)

 지장보살은 죽은 후에 육도윤회(六道輪廻)나 지옥에 떨어지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명부(冥府)의 구세주로서 인기 절정의 보살이었다. 지옥계 불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옥의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 그림이다. 이 그림도 몇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 단독의 지장화로 특히 고려나 조선초기에 많았으며 입상과 좌상이 있으나 대부분 입상이다. 흔히 두건을 쓰거나 석장(錫杖)을 짚거나 구슬을 잡고 있다. 둘째, 아미타불의 협시로서 그려진 경우이다. 아미타삼존으로 그려질 때도 있고 많은 보살들과 함께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셋째, 지장삼존화의 형식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린 형식이다. 여기에는 좌상과 입상이 있다. 넷째, 지장과 그 권속 일행을 그린 경우이다. 즉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이밖에 제석·범천과 사천왕 등이 배치된다. 또한 10왕과 기타 성중들이 배치되는데 그 형식이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일정치 않다. 다섯째, 지장과 그의 권속 외에 시왕(10大王)까지 첨가된 가장 복잡한 형식으로, 여기에도 여러 가지 변형이 있다. 여섯째, 지장시왕도 아래에 지옥도를 첨가한 지장도로, 자수궁정사 지장보살도(慈壽宮淨社 地藏菩薩圖)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은 첫째, 지장보살이 두건을 쓴 형태와 머리를 깎은 승형(僧形)의 형태가 있는데, 조선조 전기 이전에는 두건형 보다 승형이 좀더 많고 조선조 후기에는 승형이 우세하다. 둘째, 앉는 형식으로는 결과부좌 형태와 반가(半跏)형태 등 두가지가 있으나 전자가 훨씬 많다. 셋째, 인계(印契)의 모양은 왼손에 석장을 짚고 오른속에 구슬(寶珠)을 잡은 형태, 또는 오른손의 둘째와 셋째손가락 끝을 가슴에 대어 올린 형태, 그리고 두손 모두 둘째와 셋째손가락을 대어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든 것으로 도명존자가 석장을 대신 들고 있는 형태 등 다양하다.

 2) 시왕도(十王圖)

  시왕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염라대왕을 그린 그림이다. 육도에서 헤매던 중생들이 죽으면 염라대왕 앞에 끌려나가 지은 죄에 따라 엄격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된다. 염라대왕(閻羅大王)은 염마왕(閻魔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중국에서 더욱 발전·전개되어 10대왕으로 변형된다. 10대왕을 따로 한 장면씩 묘사한 시왕도일 경우에는 죽은자를 재판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대개 명부전의 중앙에 지장보살상과 그림이 있고, 그 좌우로 10왕상과 10왕도가 있는데, 홀수 대왕(1·3·5·7·9)과 짝수대왕(2·4·6·8·10)그림이 좌우로 배치된다.*24) 어떤 것은 한 폭에 2·3·4·5대왕씩 묘사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나 짝수와 홀수의 배치는 같다. 그림의 상단부는 각 대왕을 중심으로 시녀·와호신장·판관들이 둘러서 있고, 하단부는 구름으로 구별하여 죽은 사람·사자(使者)·귀졸(鬼卒)·판관·지장보살 등이 그려져 있다. 대왕 중에 전륜대왕(轉輪大王)만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일 뿐, 이밖에는 모두 관을 쓰고 붓과 홀(笏)을 잡고 있는 왕의 모습으로, 앞에는 모두 책상이 놓여있고 그 위에 필기도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왕에 따라 죽은 자를 재판하는 지옥의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3)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삼장보살도는 지장보살도가 확대·발전되어 나타난 그림이다. 즉, 석가여래가 1신에서 3신(法·報·化身)으로 사상이 발전된 것처럼 지장보살 신앙이 더 심화되고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다. 삼장그림은 보통 한 폭에 그려지는 것이 통례인데, 이것도 역시 몇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지장(地藏)·천장(天藏)·지지(持地) 보살 등 삼장보살과 협시존자만 그리는 경우와 둘째, 협시와 모든 권속까지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두 번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권속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보통 2단으로 구분하여 위쪽 중앙에 천장보살이 앉아 있다. 천장보살 앞쪽 좌우로 진주보살·사공천중(四空天衆) 우두머리와 대진주보살·18천중 우두머리가 배치되고, 그 주위로 그의 권속이 있다. 왼쪽의 지지보살(持地菩薩)은 앞쪽 좌우로 용수(龍樹)보살·견뇌신중(堅牢神衆) 우두머리와 다라니보살·금강신중 우두머리, 그 주위로 그의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배치된다. 지장보살 앞쪽 좌우에 도명존자·관음보살·무독귀왕·용수보살이 배치되며 주위로 그의 권속이 표현된다.

 또한 천장보살은 보통 설법인을 짓고 있으며, 지지보살은 왼손에 구슬을 들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25)

 4) 감로왕(甘露王圖 ; 盂蘭盆經變相圖)

 음력 7월 15일(百中日)에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시방(十方)의 부처님과 스님께 음식을 공양하면 아귀도(餓鬼道)에 빠진 부모를 구해낼 수 있다는 의식이 우란분재(盂蘭盆齋)이다. 우란분재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성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선시대를 막론하고 대단히 유행하였다. 이런 의식이 있을 때면 우란분경상을 그려 모시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작품도 자연 많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수백여 점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부분이 감로왕탱들이다. 이것은 지옥에 빠진 자기부모(친지, 가족들)를 위해 성반(盛飯)을 올림으로써 지옥의 고통을 여의고 극락왕생한다는 발생에서 나온 것이다.

 감로왕은 바로 서방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이다. 감로왕탱의 맨 윗부분에는 극락의 아미타불 일행이 지옥의 중생을 맞으러 오는 장면을 그리고 있으며, 그림 오른쪽에는 인로왕(引路王), 즉 지옥의 중생들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데려가는 보살이 그려져 있다. 아랫부분에는 아귀지옥뿐만 아니라 갖가지 지옥이나 현실의 여러 가지 고통이 묘사되어 있다. 이 감로왕도는 성반의식(盛飯儀式)을 그린 것*26)과 성반의식 없이 불·보살·스님, 아귀나 귀왕, 인로왕보살 등이 표현된 형식*27)이 있다.

 이 밖에도 각종 지옥도들이 펼쳐지는데 염라대왕이 업경대(業鏡臺)에 죽은 이의 죄를 비추어 보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톱으로 써는 장면, 캄캄한 지옥, 아귀지옥, 화탕(火湯)지옥 등 다양한 지옥의 장면들이 전개되기도 한다. 또한 목을 베는 장면, 타향으로 떠돌아다니는 장면, 나무가 쓰러지고 담이 무너지는 장면, 부모들이 성교하는 장면 등 무수한 장면들이 천태만상으로 전개된다.

 봉정사 감로왕탱은 이 그림들 중 가장 복잡하고 가장 처참한 지옥의 그림이며, 그만큼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강렬히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4) 칠성도(七星圖)

 별 가운데 가장 널리, 가장 친근하게 느껴지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별이 바로 북두칠성이다. 이 별은 그 특이한 별자리와 함께 방향을 가리켜 주는 길잡이로 각광을 받았던 것인데, 사람들은 어느덧 이 별을 신앙하고 모든 소원을 빌게 되었다. 이러한 민간전래의 칠성신앙을 불교에서는 재빨리 흡수하여 불교토착화에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칠성은 신에서 불(佛)로 승격하게 되고 별 하나하나에 무슨무슨 여래불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는 이들 칠성의 주존불로 칠성을 대표하며, 따라서 칠성의 성격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칠성각은 칠성과 치성광여래를 모시는 전각으로, 흔히 중앙에 치성광삼존 그림이 있고, 좌우로 칠성도를 배치하게 된다. 1폭에 모두 표현하는 경우와 본존 1폭 좌우 1폭씩 3폭으로 하는 경우*28), 그리고 본존 1폭 좌우 각 칠성 1폭씩 및 성군(星群) 2폭 등 10폭 또는 11폭*29)으로 하는 경우 등 다양하다. 칠성을 배치하는 방법은 다른 불화의 예처럼 오른쪽에 2·4·6, 왼쪽에 1·3·5·7 등으로 짝수 홀수의 칠성도가 배치된다.

 치성광삼존 그림은 중앙의 치성광여래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배치된다. 치성광여래는 보통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손바닥에 금륜(金輪)이나 약합을 올려 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려 엄지와 다른 손가락을 맞대거나*30) 꽃을 잡는 경우도 있다. 좌우에 협시한 일광·월광보살은 보관에 붉은해(일광보살)와 흰 달(월광보살)을 그린다. 이들 주위로 좌우 각각 필성(弼星) 1명씩, 14명(位)씩의 성군(星群) 및 삼대육위(三大六位)와 성(星)을 그리기도 하며*31) 필성 이외에는 따로 그리기도 한다.

 칠성그림들은 상·하단으로 구분하여 위에는 여래와 좌우 협시, 아래에는 의자 위에 앉은 관을 쓴 왕이나 도인 모습의 성군과 그 협시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통례*32)이다. 그러나 불상과 협시만 표현하는 경우*33)도 있어 이 역시 다양하다.

 (5) 산신도(山神圖)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를 무서워하며 떠받들고, 또 그러면서도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짐승으로 여겨왔다. 그리하여 호랑이를 산의 신령으로 존경하게 되고 차츰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데, 북두칠성의 경우에서처럼 불교는 이 호랑이 신앙도 재빨리 수용하여 불교화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산신각(山神閣)을 짓고 산신도를 그려 모셔 신앙하게 된다.

 산신도는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을 큼직하게 그리고, 진짜 호랑이는 신선 앞에 정답게 애교까지 떠는 모습으로 그려 놓기가 일쑤이다. 항상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를 배경으로 기암괴석 위에 백발이 성성한 신선을 그리는데, 간혹 옆에 동자까지 배치하여 완전히 인도 스타일로 그리기도 한다. 호랑이는 크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고양이처럼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무섭지 않고 정답게 그린 예가 많은 편이다. 특히 산신도는 없는 절이 거의 없으므로 작품 수는 수천 점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4. 한(韓)민족의 불교회화(佛畵)

 한국의 불화를 회화사적인 위치에서 살피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한국불화의 기원과 전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전래와 함께 바로 제작 보급되었다고 하겠으나 오늘날 초기의 작품은 한 점도 볼 수 없다. 다만 문헌기록을 통한 화적(畵蹟)이 짐작되고 있지만, 그것도 불교 전래국의 짙은 영향하에서 이룩되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저 유명한 화승(畵僧) 솔거(率居)가 황룡사의 금당벽화를 그렸고 또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과 그 제자들은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 금당의 벽화를 그리는 등 신기(神技)에 이르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들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추출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불교회화는 불교의 교의에 바탕을 둔 종교미술이기 때문에 남달리 보수성이 강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같은 반도 내에 있어서도 지역이나 유파에 따라 양식이나 기법에는 다소간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겠으나 그 전체적 분위기, 또는 내용면에 있어서는 가장 전통성을 존중해 온 회화라 하겠다.

 그러므로 불교회화의 이해란 순수 회화성에서 찾기보다는 종교적 장엄함이라든지 예술적 사상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결코 추상성에 흐른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와는 별개다. 물론 불경 속에 등장되는 사상성 역시 다분히 추상적 개념이지만 이의 표현수법에 있어서는 완연히 실존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더 부연해서 말한다면 작가 자신은 작품을 통하여 자기 부처를 표출하는 것이요, 우리 스스로는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부처를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 불화가 지닌 종교적 내지 예술적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불화의 원색적이고 강렬한 색상은 곧 내연(內燃)하는 종교정신의 표출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대체로 불화는 벽에 그리는 벽화가 있는가 하면, 천이나 종이에 그려 후불벽(後佛壁)에 걸게 되는 소위 탱화(幀畵), 그리고 목판(木板)에 새겨 찍어내는 판화와 함께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경변상(寫經變相) 등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18세기를 전후하는 탱화들이고, 그 외 고려시대의 중요한 불화들이 상당수 이웃 일본에 전래되고 있다. 다만 이들 탱화 가운데는 화기(畵記)가 확실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고려의 것으로 판명되고 있으나 그 외 화기가 없는 것은 대부분 중국 송나라의 것으로 분류되고 있어 그 국적을 가리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불화는 고려시대가 되면 전대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고려의 독자적 화풍을 구축해 가려는 경향이 있다. 고려는 그 건국 초기부터 태조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보다 복고적(復古的) 경향을 보인 나머지 특히 불화에 있어서도 고려 귀족들의 취향에 알맞은 화려한 작품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제작은 일반서민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가의 비용이 소요되는 것이므로 자연 고려시대는 불화의 제작 역시 더욱 귀족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복(祈福)을 위한 원당(願堂)은 바로 불교미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동시에 그들이 희구하였던 신앙은 내세의 왕생을 염원하는 정토(淨土) 계통의 미술로서 그 주축을 이룩하였다. 따라서 아미타불 불화의 제작과 함께 관음보살의 그림은 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의 대상이 되었다.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위안과 구원을 약속하는 관음보살의 종교적 역할은 그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불화는 <법화경>신앙에 입각한 관음의 제작이 가장 많았다고 볼 수 있다.*34) 고려시대의 불화와 함께 다양한 조선 시대의 불화는 그러나 고려에서와 같은 화려함이라든지 고가의 재료를 사용한 사치스런 작품 경향은 차츰 사라진다. 그것은 유교사회에 있어서 불교의 위치와 역할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특히 이 시대는 대형 그림, 즉 괘불(掛佛)과 같은 영역에서 사양에 접어든 불교미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괘불의 제작은 이미 권력층의 국가적 지원으로부터 멀어진 불교의 역할이 이제 새로운 후원자로서 등장된 민중의 발원을 담고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외형적 욕구는 새로운 예술성을 지닌 불화로서 지양되지 못한 채 그 후기에 와서는 더욱 간략화와 심지어 편화(便化)의 경향이 역력해진다. 동시에 고려시대의 입체적 감각을 지닌 화려하고 보다 복합적 양식에서 더욱 평면적이고 도상적 수법으로 전락되고 만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불화제작은 뜻은 컸지만 이에 상응한 후원자의 지원이나 작가의 힘과 기량이 따라주지를 못한 미완의 장으로 남아 있다.

 

(1) 한(韓)민족 불화의 시대적 배경

 불화는 감상 대상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신앙생활과 관계되는 실용화(實用畵)이며, 불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함께 불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난해한 교리를 알기 쉽게 대중들에게 전해주는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원의 장엄을 위한 수단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고려후기 이후의 것들이며, 그 중에서 조선시대, 특히 후기의 불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불화는 한 사찰에 적게는 몇 점에서부터 많게는 수십점, 수백점씩 남아있으므로 전국적으로 따져본다면, 그 수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국교(國敎)로서 큰 발전을 보았던 불교는 조선초기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급격히 쇠퇴하였고, 유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왕실의 지나친 숭불과 폐단을 지적하고 규탄하는 소리는 이미 고려말기에 유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노골화되었는데, 이러한 척불세력(斥佛勢力)중 대다수가 조선 초 개국공신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출범과 더불어 억불의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그러나 비록 신앙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고, 불교는 사회의 이면(裏面)에서 활동하는 민간신앙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되었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는 이러한 불교의 성격에 따라 고려시대의 귀족, 왕족 계층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섬세한 양식의 작품보다는 일반 민중의 취향에 맞는 그림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물론 조선 전기에는 왕후나 비(妃), 빈(嬪), 왕자들을 중심으로한 왕실의 호불정책(護佛政策)으로 인하여 궁정적 취향에 맞는 대중적인 작품들이 많이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는 민중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대중적인 불교회화가 발달했던 시기였다.

 불화의 첫째 특징은 신앙의 대상이나 교화적 의미를 갖는 내용을 도설화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신앙의 대상을 인격화하여 도설한 존상화(尊像畵)가 대종을 이룬다.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같은 것은 정토(淨土)광경을 도설함에서 정토의 궁전, 연못, 보수(寶樹)등을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성중을 더 비중있게 묘사하고 있어 불화에서 존상화로서의 위치가 간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한다. 둘째로 불화는 원근법*35)을 쓰지 않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불화의 세계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세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로는 불화는 5색의 향연이란 특징을 지닌다. 곧,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을 어떻게 조화하느냐에 따라 상징성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넷째로는 자연주의적 사실적 경향을 지닌 그림이 많다. 여기에서 국한하고 있는 한국의 탱화*36)라는 입장에서 보면, 넓은 의미의 불화는 추상성이 강한 선화(禪畵)와 상징성이 강한 본격적인 밀교화(密敎畵)로서의 만다라*37) 등을 포함한다.

 곧, 극락정토를 표현함에서 극락의 궁전, 연못, 수림 등을 묘사함이 그러하고, 존상화에서 각 존상의 묘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관음상 등에서 보듯이 입체감을 내어 풍만한 육체에는 관능적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고려시대 불화는 공간을 충분히 즐기면서 임체감을 살려나가는 화법을 쓰고 있음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것들은 공간을 메우고 도식화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불화양식은 전기(1392년∼임진왜란)와 후기(임진왜란∼20세기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화는 어떠한 존상(尊像)을 그렸느냐에 따라 크게 여래화(如來華), 보살화(普薩畵)로 조사(祖師), 나한도(羅漢圖), 신장도(神將圖)등으로 나눌 수 있다.  

 

 (2)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불화

 우리나라의 불화는 불교의 전래시기와 회화적 전통의 발전에 따라 변화해왔다. 즉, 고구려가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과 그로부터 12년 후인 침류왕 원년 서기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 그리고 527년 법흥왕 때가 되서야 이차돈의 순교로 국교로 공인된 신라의 경우를 종합해 볼 때 불화의 경우도 이시기 이후에 점차 중국으로부터 전래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불화는 없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고 보면 작품을 통해 접근하기는 곤란한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고분벽화나 삼국 시대의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등을 토대로 삼국시대의 불화가 어떠했는지를 추론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 회화는 사원의 건립과 함께 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삼국의 오랜 사원에는 불교 회화가 봉안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삼국시대의 불교 회화는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불교적인 요소를 살펴보거나 기록에 의하여 약간의 화적을 짐작할 뿐이다.

 먼저 고구려에 있어서는 일본에 건너간 화사들, 그 중에서도 담징(曇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의 벽화가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구려 무용총의 공양도나 쌍영총의 행렬도, 장천리 고분의 예불도 같은 고분 벽화에서 불교 회화의 소재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에 있어서는 백제의 각 절에도 많은 불화들이 그려졌을 것이다. 이런 점은 부소산의 절터, 금성산의 절터, 익산미륵사 사지(寺址)에서 벽화단편들이 발견된 예에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부소산 절터에서 발견된 사원 벽화의 파편 및 무령왕릉 유품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의 천장도에 나타난 연화문 등에서 백제 불교 회화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당초무늬 같은 무늬들이어서 본격적인 불화와는 다르기 때문 당대 불상불화들의 실상은 구체적으로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벽화단편들에서 당시 그림의 필력이나 색채 그리고 형태 등은 약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살펴볼 것은 고분벽화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쌍용총에서 연꽃의 잎 모양을 한 연엽문이나 연화문과 같은 문양의 그림이 발견됐고 백제의 경우도 공주 송산리 6호분에서 발견된 연화문을 통해 불교회화라고까지 주장하기는 곤란하지만 토속신앙과 관련된 회화적 요소에서 불교회화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모습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고분벽화의 주된 내용은 다분히 도교적이면서도 주술적인 내용, 그리고 자연의 여러 대상을 상징화한 문양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공식적으로 삼국시대의 불화를 만날 수는 없지만 그 단초를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고신라에 있어서는 금관총이나 천마총, 고령의 벽화 고분, 순흥의 벽화 고분 등에서 발견된 연꽃무늬를 통하여 당시의 화적을 다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고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회화에 관한 기록이 산견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원의 벽화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 분황사의 천수대비관음보살도(千手大悲觀音菩薩圖)와 단속사의 유마상(維摩像)을 그린 솔거(率居)는 너무나 유명하다.

 즉, 또 한가지는 삼국시대의 탑과 불교건축을 통해 삼국시대의 불화의 모습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경주 남산의 수많은 바위에 새겨진 불보살상과 감은사지 석탑, 분황사 석탑 등에서 보이는 화려한 조각은 당시의 불화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이같이 삼국시대의 불화가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불교회화의 재료가 되는 종이나 비단, 그리고 건축물의 벽면 등이 전란과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소실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존되기 쉬웠던 석탑이나 마애불 등이 다수 남아 있는 반면, 소실되기 쉬운 벽화나 불화 등이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38)

 통일신라 불화 역시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이밖에도 경주 남항사(南巷寺)의 11면관음도, 내제석원(內帝釋院)의 미륵상, 흥륜사 벽에 정화(靖和)와 홍계(弘繼)가 그렸다는 보현보살 벽화 등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이들 불화들의 양식은 당시의 조각과 같은 양식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최근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 744∼745년, 호암미술관 소장)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자색(紫色)으로 물들인 닥종이에 금은니(金銀泥)로 불상·보살상·역사상 등을 그렸다. 유려한 필선과 정교하고 화려한 세부 표현 양식 등은 이 변상도의 우수함을 말함과 동시에 8세기 통일신라 불교 회화의 높은 수준을 입증하고 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통일신라 말부터 일기 시작한 선불교와 밀교신앙의 유행으로 불교문화에 있어 새로운 모습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큰스님들을 중심으로 하고 일부계층에 의한 불교였다면 고려시대의 불교는 사상적으로 수용된 불교가 대중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회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불화는 우리역사에 있어 꽃을 피웠다는 평을 받을 만큼 미적인 측면이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고려 불교의 큰 특징이기도 한 밀교신앙과 정토신앙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고도의 회화적 기법을 이용하여 교리를 표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됨으로서 불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밀교는 고도로 발달한 상징주의로 인해 이 같은 교리를 상징화한 만다라 등의 불화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폭넓게 퍼진 정토신앙은 극락정토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민중들에게 극락세계에 대한 믿음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고려불화는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즉 고려후기에 그려진 불화들이라는 점에서 몇몇 작품만이 전하는 고려 전기의 불화가 어떠했는지는 알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 지금부터 고려불화의 특징을 살펴보겠다.

 첫째, 고려불화는 귀족적인 불화였다. 고려불교의 특징이 귀족 불교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것으로 보이며 왕족과 지방 호족 등 권문세가들의 후원을 받아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로는 고려불화 특유의 제작배경에 관한 것이다. 아미타신앙을 대상으로 하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밑바탕에는 아미타신앙을 기본으로 하여 밀교사상이나 법화경 신앙과의 융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14세기 중기 이후의 아미타여래계불화에는 말법사상(末法思想)도 더해져서 이것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그때까지 제작된 적이 없었던 아미타팔대보살도와 그 내영도, 그리고 관음·지장보살병립도, 아미타여래·지장보살병립도 등 다양한 도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제작배경 가운데 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는 제작에 관련한 발원자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고려불화 가운데 제작목적, 동기, 연대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작품은 실제 그리 많지 않아서 10여건에 불과하지만 그들 불화가 제작배경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어서 고려불화 전체적인 제작 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우선 발원자는 궁정과 관계있는 자, 사원의 승려, 그리고 개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불화제작의 목적은 호국(護國)과 관련한 것, 집단, 또는 집안과 관련한 것, 그리고 개인과 관련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화의 제작은 여러 계층의 발원, 또는 다양한 목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사실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고려불화에서 볼 수 있는 계층 또는 목적이 고려불화만의 특성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각 도상의 성격에 어울리게 제작목적을 부여한다든지 발원자들의 신분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든지 하는 것은 조선조불화의 일반적 경향과는 다르다. 그리고, 화엄경과 법화경에 의한 회화작품이 두드러지게 많았다는 특징도 있다.

 셋째는 아미타 불화나 관음 지장보살 시왕도와 같은 불화들이 권문세가들에 의해 시주돼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미타 불화는 통일신라 때부터 계속된 불화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안락과 현세의 평안을 위해 많이 조성됐다. 또, 의식용 불화인 인왕, 제석 같은 각종 도량들이 개최될 때마다 제석불화 등이 많이 조성됐다.

 넷째, 고려의 불화 가운데에서도 사경화와 판경화가 성행이 주목된다. 사경화는 고려불화의 큰 특징이기도 한다. 당시 사경화의 성황은 <금은자 사경원>에서 <금은자 대장경>을 위시한 사경을 만들 때 반드시 사경화를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뛰어난 작품들이 대량으로 만들어 졌던 것이다. 또한 판경화는 목판 대장경의 조성에 따라 사경대신 목판본 대장경의 중간 중간에 경전의 내용과 관련된 판화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다섯째로 고려불화의 재료적 바탕은 아직까지도 벽화였다는 점이다. 당대의 걸작이나 대작등 주 예배대상 불화는 그때까지도 벽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여섯째는 화풍의 양식적 변화, 즉,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이라는 것과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이라는 두 개의 화풍상의 경향을 지적할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1286년 제작의 아미타여래도를 비롯하여 1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경향으로서 밝고 산뜻한 색채, 유려한 묘선, 동적인 상용(像用) 그리고 온화한 화취(畵趣)를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하여 후자는 1320년 제작의 아미타팔대보살도를 비롯하여 14세기 전반 이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경향으로서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상용에 움직임이 적어지며, 평면적이고 경직화한 화취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에 걸맞게 문양, 이마선, 입술 등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모티프의 형상도 역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상적 변화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연대관(年代觀)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 자연주의적인 화풍을 보이고 있는 작품 중에서는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에 의하여 발원(發願)되고 작품 자체도 회화성이 뛰어난 불화군(佛畵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궁정공방의 제작이라고 생각되는 이들 불화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추세를 규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의 존재 그 자체는 고려불화의 복층적존재(復層的存在)를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특징은 중국불화의 영향에 있어서 여러 측면에 관한 것이다. 고려불화는 도상면에서는 돈황불화의, 표현면에서는 송대불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즉, 아미타삼존래영도의 형식, 아미타팔대보살도의 도상, 피건상의 지장보살도의 원류는 돈황불화의 계보에 속하는 도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에 반하여 여래상에서 보이는 대의를 투명한 듯이 표현한 기법, 그리고 복제(服制)나 장식품의 묘사의 원류는 송대불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고려시대 전기불화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현시점에서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현존하는 고려와 중국의 당시 불화를 비교할 때 화풍 또는 미적감각이 다른 것 또한 사실이며, 고려 독자적인 도상과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불화의 형성과정에서 또는 발전과정에서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서든 중국불화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며 당시 양국간의 교류형태를 염두해 둔다면 앞서의 지적도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

 고려불화는 또 작품 경향에 있어서도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리거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으며 화려하면서도 색조에 있어서 다른 시대의 불화들이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화의 특징을 가진 고려 시대는, 역대를 통하여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으므로 수많은 불화가 조성되었다. 또한 불교 회화가 새로운 면모를 과시한 시대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몇 점의 작품만 전하고 거의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나 불경 판화를 통해서 이 시대 불교 회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벽화로는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 벽화를 주목할 수 있다.*39) 조사당의 조사도를 호위하던 범천·제석천과 사천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천·제석천의 정적이고 유려한 선묘(線描),*40) 사천왕상의 힘찬 동적인 구성과 표현력 등은 고려 불화가 지니는 격조 높은 예술성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현재 일본에 전하는 고려 불화는 대체로 관경변상도·미륵변상도 등의 변상도와 아미타도·양류관음도·지장보살도 및 지장시왕도 등 다양한 작품들이다. 이들 중 화기가 있는 작품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1286년 작의 아미타여래도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활기찬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박력 있는 필치와 표현을 보여 주는 걸작이다.

 또한 동경 아사구사사(淺草寺)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는 특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섬세 유려한 고려 불화의 특색이 화면 전체에 잘 조화되어 매우 아름답고 귀족적인 기풍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양류관음도(1323년)는 해변가 바위 위에 반가부좌 자세로 앉아 선재동자(善財童子)*41)를 내려다보는 모습의 관음보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도상을 가지는 유사한 그림들이 일본에 많이 전하고 있다.*42)

 또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를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은 검은 칠 바탕의 병풍(漆屛)에 금니로 그린 것이다. 그림의 체제는 사경변상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림의 주위를 금강저(金剛杵)*43)로 결계(結界)하고 있다. 이 그림은 화기가 있어 1307년 선원사(禪源寺)의 반두(班頭) 노영 (魯英)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사경변상도로는 화엄경변상도, 광덕사의 법화경변상도 등을 특히 주목할 수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조선의 국시(國是)가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으로 바뀌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게된다. 그러나 고대(古代)로부터 뿌리깊게 내려진 불교는 여전히 인기가 있어 왕실의 비빈(妃嬪), 궁녀(宮女)나 당대(當代)의 귀족들인 사대부의 처·첩(妻·妾)들이 그들 자신의 원망(願望)을 기원해서 사찰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지배계층(支配階層)인 왕실 귀족층은 그렇다하더라도 피지배계층(被支配階層)인 서민들은 유교보다는 앞시대부터 그들과 친숙한 불교에 더욱 집착하게 되어 불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중화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질·양(質·量)면에서 여전히 우수한 면을 보이는 조선전기 불화는 1400년경부터 임란(壬亂)과 병란(丙亂)을 겪고 난 후인 1650년경까지를 한 시대로 설정할 수 있으나 두시기로 세분되기도 한다.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2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전기의 작품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후기의 작품들은 전국 사찰에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전기 불화는 고려불화와 마찬가지로 국내(國內)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일본에 전(傳)한다.

 먼저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벽화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본존 후불벽에 아미타후불 벽화와 그 뒷면에 있는 수월관음도 그리고 좌우벽에 있는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와 석가설법도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앙의 아미타후불 벽화는 미타 좌우에 관음과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그 위에는 각각 3분씩 6분의 제자상을 나타냈다. 고려 불화에서 보이던 복잡하고 화려한 묘선이 많이 간명해지긴 하였으나 아직도 섬세하고 우아한 화풍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우수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뒷벽의 관음도는 버들가지와 감로병(甘露甁)을 들고 큰 원형 광배를 등지고 서 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흰 천의를 나타낸 먹선의 힘찬 필세와 당당한 기풍은 참으로 명공의 절묘한 표현 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아미타내영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8대보살의 입상을 나타내었고 그 뒤쪽에 성문(聲聞)의 제자상이 보인다. 그리고 석가설법도는 석가와 문수·보현의 양대 보살 및 아난·가섭을 위시하여 제자상과 두 보살이 보인다. 이 무위사 벽화는 1476년(성종 7) 작으로 조선 초기 불화 양식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44)

 그리고 전기에 속하는 탱화로서 일본 등 국외에서 전하고 있는 것이 몇 점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조선 전기불화의 큰 특징을 살펴본다면 첫째, 이 당시 새롭게 대두되는 현상으로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탱화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조선전기 불화는 대부분 족자형 탱화인데, 거대한 크기의 탱화가 사원(寺院)의 주법당(主法堂)에서 후불탱화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유포본(流布本)으로 애용된 듯한 작은 크기의 탱화는 아마도 귀족 내지는 와족들의 원찰(願刹)이나 작은 법당(法堂)에 봉안되었을 것이다.

 둘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탱화가 한 전각이나 사찰의 삼단탱화(三檀幀畵)로 봉안됨에 따라 불화의 주제도 다양하게 발전한다. 또한 그 바탕 재료도 비단 외 삼베, 모시, 종이 등이 사용된다.

 셋째, 조선전기 불화의 대부분(40여점)은 화기(畵記)나 화면(畵面)의 각 정면에 명문(銘文)을 지니고 있어 양식상(樣式上) 편년(編年)을 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넷째, 불교 국가였던 고려불화가 귀족적이라면 조선불화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서민적으로 변모했다고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조선 전기 불화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왕실발원의 화원(花員) 그림들은 고려불화와 마찬가지로 화려, 정교하거나 더 뛰어난 불화가 발견되기도 한다. 다만 조선조 전기 사회가 성리학의 소박하고 단엄한 기질을 숭상했던 분위기나 억불책의 시행으로 전대(前代)의 불화에 비해 화려한 채색이라는가 요란한 금치장 등이 다소 억제된 느낌이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전기불화는 중앙화단의 화원이 그린 많은 불화와 지방에 거주하는 승려화공이 조성한 불화로 구별되기 때문에 귀족적인 고려불화와 비교하여 조선불화는 대중화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단계를 보여준다는데에서 침체했다는 인식에서 벗어난 세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조선전기시대의 불화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불교 회화는 새로운 양식 변화를 겪게 된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중반의 병자호란 등 40여 년 간에 걸친 외국과의 전쟁은 전국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국의 사찰은 승병의 본거지였던 까닭에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전기에 걸쳐 조영된 많은 사원들은 이 기간 동안 대부분 불타버렸으며, 수많은 불교문화재들이 약탈, 방화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승병들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하여 조선전기의 강력한 억불정책은 다소 완화되었고 전란 중 소실된 사찰들은 숙종대 이후 대부분 중건 또는 중창되었다. 조선전기까지의 사찰 수 보다 조선후기에 조영된 사찰의 수가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은 당시 사찰의 중건, 중창이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사찰의 활발한 조영에 따라 불교미술도 일대 조성붐이 일어나 각 분야에 걸쳐 대규모의 불사가 행해졌다. 더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각 종파 고유의 신앙형태와 사상에 따라 전각의 명칭이 분화되고 세분화되었던 앞 시대와는 달리, 한 사찰 내에 여러 종파의 전각이 함께 건립되는 등 통불교적인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다양한 불교미술이 발달하였다. 전각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그 안에 봉안하는 불교회화 역시 성하게 조성되었는데, 일부 왕족 및 귀족계층이 주요한 시주자였던 고려,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는 일반백성들이 대규모로 불화조성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불교회화의 규모가 대형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전국의 사찰에 전해지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 시대 이후의 작품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일정한 양식 속에서 구도와 형태 그리고 채색 등이 전대와 다른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즉, 고려의 불화가 주존과 협시보살과의 2단 구성임에 비하여 이 시대에는 이러한 구도가 점차 무시되면서 화면에는 보살·사천왕 등 많은 구성 인물이 등장한다. 또 전대의 탱화가 주로 홍색을 많이 사용하였음에 비하여 이 시대에는 연분홍 계통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전란의 피해를 입은 사찰들이 일시에 중건되면서 수많은 불교회화가 일시에 제작되었으며, 불화의 시주계층도 일반 향촌의 불교신도들이 위주가 됨에 따라 앞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였다. 실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의 발달과 민족의식의 성장에 따라 한국적인 정서가 깃든 고유한 양식을 형성하여 갔으며, 한편으로는 중국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화의 양식도 새롭게 전개되어 조선후기의 불화제작에 자극을 주었다. 비단 중국불화의 영향 뿐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화법을 불화에 응용하는 등 불화의 표현기법이 다양해진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원색의 남용과 형태의 도식화 등 말기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찬란한 불교회화의 맥을 잇지 못한 채 쇠퇴의 길로 빠져들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의 아미타후불탱화(1712년), 운흥사 팔상탱화(1719년), 직지사 대웅전의 삼신후불탱화(1744년), 화엄사 대웅전의 삼신후불탱화(1757년), 장곡사의 영산탱화(1759년), 통도사의 삼장탱화(1792년) 그리고 동화사 극락전의 후불탱화, 쌍계사 대웅전의 삼신후불탱화 등 수많은 탱화를 열거할 수 있다.

 

결론

 위와 같이, 본론에서 부족하게나마 우리나라의 불화에 대해 서술해보았다. 다시 한번 불화에 대해 정리해 본다면, 불화는 불교의 이념과 교리에 입각하여 중생교화를 주목적으로 제작된다. 그러므로 심미주의적인 아름다움이나 추상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일반미술과는 달리, 불화의 영역은 불교교리와 사상을 주제로 한 성스러운 평면 조형예술로서 표현된다. 따라서 불화의 특성은 결국 경전의 내용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표출하는데 있으며, 더불어 경전의 극적인 장면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기도 한다.

 불화는 용도에 따라 후불탱화, 괘불, 신중탱화, 영정 등 예배용 불화와 후불벽화, 건조물의 단청 등 장엄용 불화 및 불전도(팔상도), 본생도, 극락왕생도, 감로도, 지옥도 등 교화용 불화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탱화(幀畵)라 함은 글자 그대로 벽에 거는 그림을 뜻하며 벽에 직접그린 그림은 벽화로 구분된다.

 불화의 바탕재료로는 천, 종이, 흙, 나무, 돌, 금속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가장 보편화된 불화의 바탕재료는 비단·삼베·모시 등의 천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불상의 후벽에 걸리는 후불화와 야외용의 괘불탱화는 거의가 천바탕에 그려지고 있다. 또한 사경화(寫經畵)와 변상도 등은 화선지·순지·장지·감지·홍지등의 종이바탕에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나무에 부조(浮彫)로 양각하고 그 위에 개금이나 채색을 하여 후불화로 봉안하는 것을 후불목각탱화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사찰에서는 문경 대승사, 상주 남장사, 예천 용문사, 남원 실상사 약수암 등의 목각탱화가 유명하다.

 벽에 불화를 그린 것을 불벽화라 하는데, 전통적인 불벽바탕의 재료로서 흙(회)벽·나무(판)벽·돌(석)벽등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찰건물의 벽에 회사무리를 바르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시멘트로 미장하고 있어 근래에 제작된 벽화는 시멘트바탕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는바, 그림의 보존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따르고 있다.

 우리 나라 전통사찰 건물의 대부분은 토벽을 지닌 목조건물이므로 사원벽화는 흙벽면에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흙벽에 그려진 불벽화로는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강진 무의사 극락보전 벽화, 안동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 양산 통도사 다보탑벽화 등이 유명하다.

 또한 목조건물의 외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붙여진 판벽위에 그려진 불화를 판벽화라고 하는데, 판벽화는 대체로 수명이 짧기 때문에 연대가 오래된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며, 파주 보광사 판벽화, 의정부 흥국사 판벽화, 해사 운부암 판벽화 등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돌벽화는 석굴사원의 돌벽에 그려진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기록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유래는 남아있지 않다.

 지금까지 서술해 본 것과 같이 이러한 특징을 가진 불화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지금껏 무심코 지나쳐왔던 불화에도 주제별로 재료별로 각기 다른 내용과 뜻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에 단순하게 느껴왔던 불화와는 다른 색다른 점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시대별로 다른 불화의 특징은 같은 민족인 한 국가 안에서도 각기 다른 특징의 불화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시대사에서의 굴곡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시대사별로 다른 불화의 특징은 그 시대만의 독특한 특성과 독자성 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특성과 독자성을 가진 불화의 의미와 뜻을 되새기며 학계에서는 더욱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불화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 주석(註釋)

 

*1) 이와 함께 청정을 뜻하는 연꽃이라든지, 부처님의 만행(萬行) 또는 행도(行道)를 뜻하는 불족(佛足)이 신앙대상으로 됐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2) 인도나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많은 석굴사원이 조성되었고 그 벽면에 대개 벽화들이 그려졌으므로 돌벽화들이 흔하다.

*3) 경주 석굴암, 군위 삼존불 등

*4) 이들 그림의 재료는 베(布)나 종이이며, 베바탕도 비단바탕(絹本)·삼베바탕(麻本)·모시바탕(苧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5) 하동 쌍계사 대웅전 후불화나 직지사 후불화, 그리고 고성 운흥사 대웅전 후불화 등이이 형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6) 최초의 예는 고려 말(1400년 전후)의 봉정사 대웅전 영산회도 벽화이며 모든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7) 법주사 팔상전은 그 대표적인 건물이다. 팔상도는 인도의 불전도를 배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다.

*8) 통도사의 삼신후불화 중 비로자나불탱(毘盧遮那佛幀)이 대표적인 예이다.

*9) 봉정사 대웅전 영산도 벽화

*10) 화엄사 대웅전 화신후불탱화가 대표적이며 청곡사, 해인사 대적광전의 삼신탱화 등 여러 예가 있다. 이외에 특이한 예로 기림사 대적광전에 중앙 바로자나불화, 좌우 약사아미타불화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11) 동화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 장곡사 아미타후불탱, 천은사 아미타극락회상도 등

*12) 동화사 염불암 아미타후불화, 천은사 아미타후불화 등

*13)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래영도 벽화

*14) 쌍계사 대웅전 왼쪽 약사후불탱·운흥사 대웅전·광덕사 대웅전·화엄사 각황전·직지사 대웅전의 왼쪽 약사후불탱 등이 대표적인 예이며, 운흥사와 광덕사의 대웅전은 동일한 구도로 되어 있다.

*15) 경신사 소장 수월관음도, 대덕사 소장 수월관음도 등이 대표적이다.

*16) 마두관음, 준지관음, 여의륜관음

*17) 통도사 응진전

*18) 통도사 조사당(120여 점), 송광사 국사전(송광사 출신 국사의 영정을 보관) 등의 예가대표적이다.

*19) 통도사 대웅전

*20) 파계사 선설당

*21) 동화사 대웅전, 송광사 화엄전

*22) 통도사 대웅전, 동화사 극락전 천룡탱

*23) 통도사 극락전 금강계단탱, 통도사 대웅전 금강탱

*24) 통도사 명부전 시왕탱

*25) 통도사 삼장보살·천은사 삼장보살·동화사 삼장보살 그림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26) 쌍계사 감로왕탱

*27) 봉정사·쌍계사 감로왕탱 등

*28) 송광사 칠성도

*29) 통도사 안양암, 파계사·동화사 극락전 칠성그림 등

*30) 통도사 안양암

*31) 송광사 칠성화

*32) 통도사

*33) 동화사

*34) 국내에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나한도(羅漢圖)를 비롯하여 부석사 조사당 벽화, 그리고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주목되는 것은 강진 무위사의 벽화,여수 흥국사, 김천 직지사의 후불탱화, 양산 통도사의 팔상탱화 등 다양하다.

*35) 일정한 시점에서 본 물체 및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내도록 평면에서 표현하는 방법

*36) 벽에 거는 그림으로 접고 이동 할 수 있다.

*37) 불교의 덕을 원만하게 갖춘 경지를 나타낸 그림

*38) 이 같은 생각은 삼국유사에 신라의 유명한 화가였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림을 그렸다거나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의 담징 스님이 일본의 법륭사에 화려한 금당벽화를 남겼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39) 이 벽화는 묵서명에 의하여 1377년 작으로 밝혀졌다.

*40) 선으로만 그림

*41) 求道의 보살 이름

*42) 이밖에도 동경(東京) 세이카당(靜嘉堂)의 지장시왕도, 1306년에 그려진 아미타여래도, 1309년의 아미타삼존도, 1320년의 아미타팔대보살도, 지온원(知恩院)과 서복사(西福寺)의16관경변상도 및 젠도사(善導寺)의 지장보살도 등이 주목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43)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44)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565년(명종 20)의 약사여래삼존도 역시 조선 초기불화를 대표하는 가작으로 꼽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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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dharm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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