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img19.gif99 박종표

위  치: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문화재: 전등사대웅전(보물제178호),   전등사약사전(보물제179호),전등사범종(보물제393호)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 정족산성 안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우리 나라에서 다섯 번째 크기를 가진 섬 강화도, 중부지방 전역의 물을 한데 모아 오는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합해져 서해바다에서 만나는 물머리를 막고 있는 강화도. 이 섬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군의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세 왕자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 민족의 성지이기도 하다.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리산(摩利山)이 있고, 그 한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鼎足山)이다.

  전등사는 삼랑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의 동문(東門)은 암문(暗門)이고 남문은 1977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북쪽으로 대조루(對潮樓)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고, 여기서 한 단 높은 곳에 남향한 대웅보전이 이 건물과 축을 맞추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요사가 있고, 서쪽으로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전묵당, 종각이 있다. 다시 서북쪽으로 한 층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어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1942년 편찬된 《전등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그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했으며, 또 고려시대 고종과 원종 때에 가궐(假闕)을 짓고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베푼 다음, 1266년(원종 7)에 사승(寺僧)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창건에 관해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예컨데 강화도가 고구려 영토가 된 것은 소수림왕 11년보다 약 100년이 지난 475년(장수왕 63)의 일로서,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백제의 불교공인은 384년)로 보아서 백제 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도화상의 창건이라는 전설을 부연시킨 후대의 윤색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366년(공민왕 15)에 제작된 연기(年記)를 지닌 향로에는 ‘진종사’라는 절 이름이 보이고 있어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 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향로는 일제시대 때 반출되어 1910년에는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찰 측의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이름 전등사는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이곳에 시주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했다는 것다. 혹은 당시 고려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조계선종의 법맥과 종지(宗旨)를 천명하는데 필수적인 책이었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의 이름에서 기인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할 뿐 단정을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 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거치면서 전등사는 국가적 기여로 인해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으며 1660년(현종 즉위년)에는 강화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이 이곳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과 장사각을 지어 왕실세보와 문적 그리고 역대 조종의 실록을 이곳으로 이관보장할 계획을 세운다. 1678년(숙종 4)에는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그리고 충주사고에 보장되어 있던 왕조실록이 왜란으로 소실되자 전주사고본을 마리산사고로부터 정족산 사고인 장사각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며, 아울러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관계 문적들도 선원각에 보장하게 된다.

  이로 인해 1734년(영조 10)에는 선두포의 곡식 수십 석을 하사 받기도 하며, 경기서부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는 수사찰의 지위를 확보합니다. 이러한 사중의대외적인 일 뿐만 아니고 사중에는 영조의 시주에 힘입어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대조루가 건립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한일합방 이후의 전등사는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본사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1911년 6월 3일에 새로운 체제로 개편된 사찰령에 따른 사찰령시행규칙이 반포된 것에 기인한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특히 현재 조실로 있는 서운(瑞雲)스님 등에 의해 주요전각에 대한 해체 및 수리작업과 중건이 자주 이루어지는 등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전등사대웅전(보물제178호)>

 

보물 제178호로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등사본말사지》의 1266년(원종 7) 중건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614년(광해군 6)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으나 이듬해 4월 역사(役事)를 시작하여1621년(광해군 13)에 완성하였다.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처마곡선이 잘 처리되어 매우 소박하고 아담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기둥은 고대의 엔타시스(배흘림)를 갖고 있으며, 내부는 고주(高柱)가 없는 단일공간으로 정면이 27.86굽은척(尺)이고 측면이 24.2굽은척이 되어 그 비율은 1.15:1이 된다. 이 건물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외부에 나신상의 목조장식이 네귀퉁이 보머리 사이에 끼워져 있습니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짓던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그가 믿고 맡긴 돈을 챙겨 달아난 아랫마을 주모가 벌을 받는 형상이라고 한다. 대웅전 내부의 본존불로는 목조로 된 석가·아미타·약사여래의 삼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후불탱화(1916년 제작)와 신중탱화(1916년 제작)가 있다.

 

  <전등사약사전(보물제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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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9호로 대웅보전의 서쪽에 있다. 이 약사전은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 건립의 창건 시기는 확실치 않다. 대체적으로 건물의 외양은 대웅보전과 동일하여 대웅보전의 건축양식에 따르는 조선 중기의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물로 볼 수 있다. 법당 안의 주존은 약사여래를 봉안했다. 이 약사여래상은 석조좌상으로 크고 높게 솟은 귀와 육계, 그리고 이에 비해 다소 작은 느낌의 눈과 귀, 입 등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볼 때 고려 말~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불화로는 약사후불탱화(1884년 제작)와 현왕탱화(1884년 제작)가 봉안되어 있다.

 

<전등사범종(보물제393호)>

img21.gif우리나라 범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용두(龍頭)의 음관(音管)이 없고 용 두 마리가 등을 마주해 꼭지를 이루고 있다. 용두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으며 그 옆에는 9개의 매화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종신(鍾身) 위 부분에는 팔괘가 나열되었고, 종신은 아래위 두 개의 가로띠로 상하 2구(區)로 구획되어 여기에 명문이 양각되었다. 또한 종구(鍾口)는 8능(稜)의 파장을 이루고 그 위에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 4개를 배치하므로써 전체적으로 중국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종신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 종이 1097년 중국 하남성의 백암산 숭명사에서 봉안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로 건너온 연유는 지금 알지 못한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으며, 개성의 연복사 중국종과 매우 비슷한 모습이다.

 

법화경판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법화경목판 104매가 전래되고 있는데, 《전등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이 경판은 1544년(중종 39) 정수사에서 개간한 것이라고 한다. 법화경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불경으로서, 이 경판은 처음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본사인 전등사로 옮겨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전등사대조루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인 대조루는 아침 저녁으로 떠오르고 지는 해와 밀려오는 조수를 대할 수 있어 주변경관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어 이 절에서 없어서는 안될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1749년(영조 25) 주지 초윤과 화주인 전민 보학 등이 고쳐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 《전등사본말사지》에 명기되어 있다. 현재 대조루 안에는 목어와 법고가 있고 네 벽에는 현액과 선원보각·장사각 및 1726년(영조 2) 왕이 이곳에 와 직접 썼다는 ‘취향당(翠香堂)’ 현판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선원보각·장사각터

 전등사의 산내암자인 극락암 뒤쪽으로 약 50m 정도 올라가면 예전 전등사의 부속시설이었던 선원보각 및 장사각의 옛터가 남아있다. 선원보각은 조선 왕실의 계보와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장서각 역시 《조선왕조실록》등 나라의 귀중한 사서를 보관하던 건물이었다.

 《전등사본말사지》에 의하면 본래 묘향산에 있던 선원보각과 장사각을 1660년(현종 1)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부터 전등사에서 줄곧 이 건물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국가의 명으로 선원보각이 철폐되고 책은 서울로 옮겨졌으며, 그 뒤로 이 건물들은 퇴락되었다. 현재는 계단석 일부와 축대석 정도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