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인돌

99학번 임정섭

img9.gif위  치: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문화재: 사적 137 호

강화지역 고인돌은 분포면에서 지역적으로 5개의 고인돌군(밀집형)과 그 밖의 단독형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현재까지 조사된 고인돌의 약 70%는 하점면 부근리와 고려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강화의 고인돌문화가 형성된 것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형식면에서는 탁자식과 개석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기반식 고인돌도 일부

 발견되고 있다.

 입지면에서는 평지 분포형과 산상분포형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산상형 중 고려산의 해발 300m에 가까운 고지에 분포한 고천리 고인돌군은 매우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강화도의 최북단에 속하는 교산리 고인돌군은 강화도의 지리적 위치와 고인돌 형식을 고려할 때 서북한 지역의 고인돌 문화가 강화에 전해진 것임을 뒤 받침하는 자료로 평가된다.

강화 지석묘 (江華 支石墓)

 

현재 남한에서 일명 탁자식이라 부르는 북방식 고인돌로서는 가장 거대한 이 고인돌은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하며 1964년 사적 13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어 왔다. 사실 남한에서 고인돌하면 이 강화 지석묘를 말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거석과 멋있는 모양으로 과거부터 여러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한 선사시대의 주요 유적이었다. 이 곳 강화도에서는 이 유명한 강화 지석묘 이외에 탁자식 고인돌로 확인할 수 있는 형태의 고인돌이 최소한 십여기 이상 발견되고 있다.  강화도 내에는 파괴된 것을 포함하여 무려 80여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덮개돌의 길이는 7.1m, 너비 5.5m의 둥글고 넓적한 바위로서 그 아래에는 두개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원래 마감돌과 함께 사방에 돌이 있었으리라 추정되지만 현재는 둘만 남아있다. 석질은 흑운모 편마암 (黑雲母 片麻岩) 이며, 이것과 함께 강화도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화강 편마암 (花崗 片麻岩) 으로 이루어진 고인돌도 상당수 된다 한다.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전체의 높이는 2.6m이고, 길이 약 4.2m, 두께 약 60Cm의 판석을 약 1.1m의 간격을 두고 세워 놓았으며 지하에 묻혀있는 부분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무덤방 안의 높이는 대략 1.3m이며, 이러한 탁자식 고인돌은 굄돌로 무덤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탁자식 고인돌 대부분이 막음돌이라 하는 짧은 쪽 돌이 없어지고 덮개돌을 받쳐주는 양쪽의 굄돌만 남아있다.

 덮개돌의 모양은 평면도에서 보듯이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방패 모양을 하고있으며, 덮개돌 장축 전체를 고이는 것이 아니라 방패 모양의 상단에 치우쳐 굄돌을 배치하여 넓은 쪽의 무게를 지탱하게 하였으며, 좁은 부분이 공중에 떠서 옆에서 내려보면 남서쪽으로 고개가 삐죽나온 'ㄱ'자 형의 모양이 된다. 무덤방의 장축이 북동 60도이며, 굄돌 두개가 똑같이 동남쪽으로 약 20도 기울어져 있는데, 무덤방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북동쪽에서 보면 덮개돌이 마름모꼴로 보이면서 굄돌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어 마침 동남쪽으로 달리려 하는 공룡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결국 20도 기울어져 있는 두 개의 굄돌에 약 50여톤의 거석이 얹혀있는 것인데, 대여섯 명의 장정이 올라가도 전혀 미동도 안한다. 남한에 현존하는 탁자식 고인돌 대부분이 10도에서 20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굄돌 위에 거석이 얹혀 있으며, 원래 기울어 설치한 것인지 똑바른 것이 기울어진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황해도 은률에 남아있는 거석 고인돌이 똑바르게 세워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원래 바르게 세워진 것이 두개의 굄돌을 지지하여 주는 막음돌을 인위적으로 파괴하여 도굴하므로서 바르게 지탱하여 주는 역학관계가 무너지고, 또한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지표면의 토사 유출과 막중한 덮개돌의 무게로 인하여 비스듬히 기운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img10.gif그렇다면 이 거대한 거석을 어떻게 굄돌 위에 올렸을까? 어찌해서 굄돌 만으로 막중한 덮개돌을 수 천년간 지지할 수 있을까? 또한 20도나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어떻게 50여 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 여기의 '강화지석묘' 앞에 서서 이런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인돌이 세워져 있는 자리는 여느 땅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지반의 선택도 상당히 중요하리라 생각되는데, 필자는 객토 (客土)에 의한 방법은 오히려 지반 침하 현상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될 수 있는 한 암반이 풍화되어 흙으로 변한 단단한 지반 (언덕이나 구릉의 끝자락이 바로 그렇다.)을 택하거나, 충적토가 오래되어 단단해진 구릉이 최우선의 입지조건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지반 위에 구덩이를 파서 굄돌을 밀어 넣고, 익히 알려진 대로 흙으로 굄돌을 뒤덮은 다음에 덮개돌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여하튼 현존하는 고인돌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석들이 서로 어우러져 수 천년을 지내면서 하늘과 땅, 산과 강처럼 태고에서부터 존재해온 기이한 자연물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탁자식 고인돌을 보면 굄돌과 막음돌로 인해 사면이 벽으로 되어있고, 넓적한 덮개돌로 인해 지붕이 씌워져 있다. 어찌보면 간단한 구조의 초가집을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선사인들은 어떤 이유로 이 같은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을까? 단지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풍습 때문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유난히 집 모양으로 만든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죽은 자에 대한 의미있는 배려심에서 이런 형태가 출발되지 않았을까 싶다. 탁자식의 경우에서는 시신의 보호라는 측면보다는 시신을 지상에 드러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매장 의식과 다르고 죽은 자나 산 자나 동등하게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죽음에 대한 관념이 물질적인 소멸이거나 관계의 단절이 아니고, 물질적인 변형과 연속성으로 죽은 자의 집은 곧 산 자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어찌보면 고인돌은 죽은 자를 대신하여 보여주려는 지상의 살아있는 구조물로서 시신의 부패나 침해는 별 문제가 안되었을 것이다.

지붕과 사면의 벽은 주변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으며, 비와 이슬을 막아주고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인류만의 보금자리로서 인간이 짐승과 다를 수 있는 중요한 발명품이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더구나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인 것이다. 그런 집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지켰으며, 자손을 생산하여 부족을 일으킨 본거지로서 집에 대한 애착이 컸으리라는 것은 두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결국 이 탁자식 고인돌의 원형은 주거지인 '집'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 당시 선사인들의 집도 현대와 마찬가지의 구조를 이미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실은 1966년 점골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주거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산 북쪽 능선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이 유적은 작은 신작로가 나면서부터 대부분 파괴되었고 발견될 당시 동쪽 한 벽면의 길이가 2.5미터, 남쪽 벽면이 1.6미터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반수혈식 (半竪穴式) 벽면은 대부분 무너지고 동면만 15센티미터 높이로 남아있어 형태만 짐작할 뿐 전체적인 윤곽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벽면 아래서 일렬로 작은 기둥을 세웠던 기둥구멍 (小孔) 이 발견되었고 이 집자리 주거면 가운데에서 각형 (角形) 토기의 바닥 모양을 갖춘 토기 조각도 출토되었다. "

 또한 대부분의 탁자식의 경우에서처럼 계란 모양의 타원형의 둥글고 거대한 덮개돌의 외관이 눈에 띄이도록 강조되어 있으므로 족장의 움막에는 단순한 지붕의 기능에서 벗어나 장식이나 치장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되었지 않았을까도 생각할 수 있다.

'강화지석묘'에서 서남쪽으로 백여미터 떨어진 은행나무 숲 속에는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판석 하나가 20도 정도 동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세워있는데, 이 돌을 굄돌이라고 한다면 무덤방의 방위는 북동 30도이며, 지상에 남아있는 규모는 3m x 2m x 40Cm 로서 이 것이 덮개돌과 함께 제대로 남아 있었을 때에는 '강화지석묘'에 버금가는 웅장한 고인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부근리 (富近里) 점골 지석묘

 부근리 '강화지석묘'에서 삼거리로 가다보면 언덕에 네 갈래의 소로 교차지점이 있는데, 교차로 옆 남쪽 산기슭에 무너진 탁자식 고인돌이 보인다. 과거에 이곳에서는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점골'이라고 한다.

비록 무너져있어서 정확한 방위와 원래의 상태를 알기 힘들지만, 현재의 무덤방 방향은 대략 남북향이며, 강화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덮개돌 남쪽 부분의 약 1.4m 정도가 굄돌을 벗어나 공중에 떠있다. 결국 한쪽에서만 처마가 없는, 즉 측면에서 보았을 때, 'T'형이 아닌 'ㄱ'형으로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부근리 일대의 고인돌과 황해도 연탄군 오덕리 고인돌이 같은 형식과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내가면 오상리 (內可面 鰲上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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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삼리에서 5Km 남쪽으로 가다보면 오상리 삼거리에서 강화읍으로 가로질러가는 도로가 나온다. 여기서 약 600m 남짓 올라가다보면 고개 오른쪽에 고인돌 하나가 납작하게 누어서 내려다보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이며, 고인돌 위치에서 북서쪽으로는 서해가 보이고 북동쪽으로는 고려산의 서쪽 사면을 보게된다.

 전체 높이가 겨우 85Cm 정도이어서 산에서 얼핏보면 그냥 넓적한 바위로 오인할 정도로 굄돌이 낮으며, 그대신 굄돌에 비해 면적이 매우 넓은 덮개돌을 올려 놓았다. 덮개돌은 무덤방의 종축 방향으로 3.8m, 너비 3.4m, 50Cm 두께의 모서리가 둥근 오각 방패형의 판석이며, 2.3m x 1m x 40Cm의 굄돌 (물론 지상에 돌출되어 있는 부분임) 위에 3.8m x 3.4m x 50Cm의 막중한 무게의 판이 올려져 있는 것이다. 장정 여러 명이 올라가도 전혀 미동도 안하는 (절대로 이같은 무모한 실험은 하지 말기 바란다) 불가사의한 구조를 갖고있으며, 쉽게 노출되는 굄돌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으며 대신에 넓은 덮개돌이 돋보이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있다. 무슨 이유로 이와같이 굄돌을 작게하고 덮개돌을 크게 하였을까? 아직도 인근의 고려산에는 얼마든지 여러 형태와 크기로 판석을 채취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산재하고 있다. 그러니 채취할 수 있는 석재가 부족하였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고려산을 사이에 두고 '강화지석묘'와 6Km의 거리에서 같은 구조로 전혀 다른 외양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분의 차이에 따라 석재의 규모와 비례를 달리하였을까? 그렇다 하여도 고려산 능선에서 볼 수 있는 전체적인 규모의 축소이지 여기처럼 눈에 뜨일 정도의 비례 변화는 아니다. 덮개돌의 크기에 비하여 무덤방을 작게 한다는 것은 곧 죽은 자에 대한 배려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무덤방의 기능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지표에서 돌출되어 살아있는 능동적 형태에서 지표면에 가까이 하면서 수동적으로 변모하는 정적인 외양을 보여주고 인간의 신장보다 낮아진 높이로 인하여 이미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인간 이상이 아닌 평범한 자연물로서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덮개돌의 크기를 비교하여 보면, '강화지석묘'는 7.1m x 5.5m, 여기의 '오상리 고인돌'은 3.8m x 3.4m, 고려산 능선의 경우 가장 큰 것이 3.2m x 1.5m로서, 오상리의 것이 중간에 속하며, 또한 무덤방의 높이를 비교하여 보면, 1.3m : 1m : 60Cm이고, 무덤방의 폭은 1.1m : 80Cm : 70Cm로서 무덤방의 규모도 중간에 속한다. 그러고 보면 강화도 내에서는 현존하는 '강화지석묘' 이외에는 전부 인간의 신장에 못 미치는 작은 규모이어서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함께 신분의 차이에 따라 규모와 높이를 달리하면서 점차 매장 관념이 달라졌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된다.

이 오상리 고인돌은 아직 지상에 무덤방을 두는 전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덮개돌의 규모를 크게하여 외부에서 보통 바위로 착각할 수 있는 보호색의 역활도 겸하고 있다.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보다는 숨기려는 의도가 강하며, 좌향 만큼은 북향으로 하여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물 주변에 자갈과 흙이 메워지게 되면 겉보기에 여느 바위와 다를게 없는 영락없는 개석식 고인돌로 변모하게 되어 탁자식과 개석식의 중간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 보고서 탁자식과 개석식의 중간 단계라고 섯불리 말할 수는 없으며, 단지 이와 비슷한 구조 주변에 자갈이나 흙이 쌓여있는 고인돌이 발견되면 보다 확실한 변화 과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필자는 이러한 2차 중간 단계의 고인돌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설사 탁자식 고인돌 주변에 자갈이 있다하여도 대부분은 주민들이 밭갈이하다가 드러나는 자갈을 고인돌이나 바위 주변에 쌓아 놓기에 더더욱 이 중간 단계의 고인돌을 찾기 힘들며, 강화도 내에서 발견되는 개석식 고인돌들이 여늬 바위처럼 다루어져서 이미 파괴되었거나 이동되어서 일일이 발굴하여 보지 않는 한, 추정뿐이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덮개돌 아래에는 두께 15~20Cm의 판석을 평행으로 세워 놓았고 무덤방의 좌향은 북서 330도이며 2.3m의 길이와 60Cm의 폭으로 되어있다. 뒷편의 막음돌은 그대로 남아있고 동남향에 있는 앞쪽의 막음돌은 반이 부러진 채 남아있다. 앞뒤의 막음돌은 굄돌 끝에서 45Cm 안으로 들어가 'ㅍ'자형으로 세워져 있고, 무덤방 안은 지상에서 약 30Cm 정도 구덩이가 파여져 있어 지표면까지 물이 고인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의 고려산에서 내려 뻗은 산줄기가 이 고인돌을 지나 자그만 야산을 형성하고는 곧바로 해안의 평야에서 사라진다. 즉 활처럼 완만하게 휜 능선 중간에 이 고인돌이 위치하고 남북쪽으로는 경사면이다. 현재는 고갯길이 능선 중간을 잘라 산에서 내려오는 날렵한 기운이 끊어져버리고 고인돌이 있는 자리는 따로 떨어져있는 언덕처럼 되었다. 능선축은 대략 남서 220도이며, 무덤방은 이 능선의 방향을 거의 직각으로 가로지른다. 여기서도 예외 없이 굄돌이 남서쪽으로 10도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오상리 고인돌에서는 특이하고 불안정한 구조에도 매우 튼튼하게 보존되어온 상태이어서, 약간 기울어진 지금의 상태가 오히려 원래대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힘의 불균형이 주어질 때는 금방 무너져버릴 것 같은데도 아직까지 건재한 것이다.

고인돌 동쪽 윗 부분에는 성혈 하나가 파여져 있는데, 가장자리에서 40Cm 들어가 있어 사람이 서서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결국 여기서의 성혈작업은 남서쪽을 향하고 서서 단지 하나만 팟다는 것인데, 전곡 양원리와 포천 수입리의 고인돌처럼 탁자식 고인돌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성혈이 하나씩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파괴되어 볼품이 없어져버린 덮개돌이나 거석의 고인돌 또는 산중에 있는 고인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이하다. 필자가 이곳저곳 고인돌을 답사하면서 성혈을 확인하였는데, 장소의 일관성이 없고 다양하며 단지 한 곳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앉거나 서거나 하여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작업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고인돌 축조 시기와 같은 시대에 성혈이 파여진 것이 아니라 고인돌의 축조와 무관하며, 고인돌 축조 이후에 기원 (祈願)의 행동 양식으로서 성혈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하점면 신삼리 (河岾面 新三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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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근리에서 동촌을 지나서 가다보면 오른쪽 길 아래에서 무너진 고인돌 1기를 볼 수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4m x 2.6m, 굄돌의 크기는 3 x 2m 정도로서, 모두 30~33Cm 정도의 두께를 갖고있다. 고려산 일대에 산재하고 있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해발이 낮은 곳에 있으며, 무너져있는 상태로 보아서 원래의 지표는 덮개돌 아래의 흙 무더기 꼭대기가 될 것 같다. 일반적인 고인돌의 위치가 단단한 지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상태는 논으로 경지정리하면서 고인돌 주변을 채토한 때문이라 생각된다. 양쪽에 누어있는 돌들은 분명 굄돌로 여겨진다. 점골의 경우를 보더라도 덮개돌과 굄돌의 면적의 비례는 대략 14 (4m x 3.7m) : 9 (3m x 3m) 로서 보통 굄돌의 2/5 이상을 지하에 매립한다고 하였을 때 (황해도 연탄군 오석리 고인돌 참조), 여기의 신삼리의 굄돌은 의외로 덮개돌에 비하여 작은 것으로 복원하게되면 기껏해야 전체높이 1.5m를 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덮개돌 한쪽에는 정으로 홈을 파서 돌 귀퉁이를 자르려고 시도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는데, 그 홈 속에는 아직도 정이 부러진 채로 남아있다. 이는 고인돌의 재료로 쓰였던 흑운모 편마암이 상상을 초월한 매우 단단한 암질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흑운모 편마암은 주로 고려산이나 별립산 (別立山) 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산 (高麗山 ; 샘말 뒷산)

 신삼리 고인돌에서 동촌마을을 거쳐 고려산 서북쪽으로 가면 산아래 삼거리 샘말 (三巨里 泉村) 이 자리잡고 있다. 주민의 말로는 전에 고인돌이 2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파괴되었으며, 뒷산 능선에만 남아있다 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것은 5기이었고 완전한 구조의 고인돌이 하나 더 있다고 한다.

샘말에서 약 30~40분 정도 능선길로만 따라 올라가다 보면 북서향의 평평한 능선마다 탁자식이라 추정할 수 있는 고인돌이 5기 연속되어 있다. 현재는 덮개돌이 굄돌에서 벗겨져 있기 때문에 도굴의 흔적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각각의 위치가 유난히 능선 가장자리에만 위치하고 있어서 고인돌의 배치가 능선이나 언덕과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또한 굄돌들이 토사의 흐름대로 경사면을 향하여 기울어져야 할텐데, 거꾸로 능선 가운데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축조 방법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여 준다.

필자가 이 능선에서 확인한 고인돌 대부분이 조그만 규모이었으며, 그 중에 아래에서 세번째 고인돌이 그 중 크다고 할 수 있는 데, 덮개돌의 크기는 3.2m x 1.5m, 지상의 굄돌 크기는 길이 1.8m, 높이 60여Cm, 두께 30Cm이며, 무덤방의 규모는 1.8m x 70Cm 이었다. 이곳의 고인돌은 파주 덕은리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며, 무덤방의 규모가 실제 신장에 비하여 너무 왜소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평지에 산재되어 있는 거석 고인돌에 비하여 굄돌의 모서리가 직각과 수평을 이루면서 거의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결국 강화 지석묘에 비하여 돌을 가공하는 기술이 발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강화지석묘 축조 이후에 고려산 능선의 고인돌들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능선의 고인돌을 답사하고 내려오다 샘말 뒷편 서쪽 경사면에서 신삼리 고인돌과 같은 암질의 거대한 바위를 보게되었다. 이쪽의 능선 주위는 대부분이 나무와 흙으로 덮여있으며, 간혹 바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만 암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바위만큼은 주변의 토양이 무색할 정도로 불룩 솟아있으며, 그 크기 또한 압권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사진에서 보듯이 유리 같은 광물질 (규사?) 알갱이가 모여있는 부분이 파여진 것을 발견하였다.

단순히 광물을 판것이 아니라 알갱이의 띄를 따라 홈을 파다 중지한 흔적이 역력하여서, 이것이 바로 고인돌의 채석 방법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우선 바위의 취약한 부분을 걷어내고 그 틈새로 쐐기를 꽂아 물로 불리어, 바위가 갈라지게끔 하는 전통적이고 단순한 방법으로 커다란 바위를 조각내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흔적은 내가면 오상리에 있는 고인돌의 덮개 윗부분 중간의 틈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