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궁지

99학번 김일환

위  치: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문화재: 사적 133 호

[1.강화동종, 2.외유장각 발굴지,3.유수부동현, 4.유수부이방청, 5.승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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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이다.

이 궁전은 건립한지 400년만에 조선조 행궁이며 유수부를 세웟으니 그동안은 1245년 견자산 북편 민가에서 실화로 인하여 연경궁 기타 법왕사 어고(御庫) 태상부(太常府)등 건물과 민가 800여호를 소실하였으며 1270년 (원종11년) 개성 환도직후에는 몽고군이 저항군 삼별초 잔당을 소탕한다고 도성에 불질러 많은 건물을 태웠고 또 1637년(인조15년) 병자호란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다음에 또 조선조의 궁전을 세웠으나 병인양요로 인하여 조선조때 건물 행궁 및 장령전등을 소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세월따라 세우며 태우고 무너지는 사건이 반복되어 왔다.

①.강화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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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종은 옛 남문터 동편 지금의 김상용선생순절비 자리에 있었는데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 정화하면서 궁터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이 종은 1688년(숙종14년)에 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이라 적혀 있으며 그후 유수 민진원<1705-1707>이 전등사로 옮기어 큰 규모로 주조한 것이 지금의 종이다.

중량 3,912kg (약4톤) 높이 198cm (6자 6치) 구경 138cm (4자 6치)의 대종형이며 강화내성 4대문의 개폐를 알리는데 쓰여졌다고 하며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이 탈취하여 가려고 갑곶으로 운반하다가 너무 무겁고 우리군의 추격에 포기하고 갑곳리 중도 토끼다리 근변에 버리고 철수했다고 한다.

이종은 정상이 반구형이며 그 중앙에 용뉴가 붙었는데 용뉴의 형태는 유자(U子)를 엎어놓은 모양에 용두가 붙은 쌍룡이다. 따라서 용통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종견은 입화식이 퇴화된 전 같은 변죽을 돌리고 있고 종신의 중앙에는 굵게 도드라진 두 줄의 횡선대가 돌려져서 상하로 양분하였고 윗부분에는 상대와 분리되어서 4개의 유곽이 배치되었다. 유곽 대는 연주문 같은 둘레 장식이 전혀 없고 보상당초문이 양주 되었고 유곽 안에는 6판 연화로 된 유좌에 얕은 반구형인 9개의 유두가 표현되었다. 종신에는 당좌가 없고 명문만 주조되어 있으며 하대에는 보상당초문으로 장식 되었다. 주조된 명문에 의하면 주조 년대는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 종의 양식에서 퇴화하면서 조선시대 종의 특색을 뚜렸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종은 옛날에는 초저녁 종을 인정이라 하여 성문을 폐문 하였고 새벽 밝으면서 치는 종소리는 파루라 하여 비로서 성문을 열게 하여 잡인의 출입을 제한하였으며 매년 제야의 종소리와 3.1운동을 회상하는 기념 타종등 강화군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내 기관장들이 33번 타종하던 것을 1995년부터는 종신에 금이 가서 타종치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

원본은 현재 강화역사관에 보관되어 있고 똑 같은 복사본을 만들어 고려궁지 종각에 보관 하고 있다.

 

②. 외유장각 발굴지

 

조선 궁전지 (외유장각)를 발굴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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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1년(정조 5) 3월에는 이곳 궁전 자리에 외규장각이 설립되었다. 강화유수 徐浩修가 왕명을 받아 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燕超軒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강화부 內冊庫의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고, 또 서울 궁성으로부터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왔다. 내책고는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들의 보관을 위해 1753년 유수 申思가 객사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1778년(정조 2)에 反庫御史 沈念祖는 이곳의 軍器別貯置事를 감사하면서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璿籍, 어필, 어제, 金寶, 玉印, 竹冊, 敎命, 典章의 文字, 文簿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칠" 정도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왕은 이 보고를 받고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史閣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는 찬사 속에 외규장각 설립의 뜻을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외규장각은 이런 경위를 배경으로 1781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어, 1782년 2월에 건물 준공을 본 뒤 4월 2일을 길일로 잡아 직제학 심염조, 검교 직각 서정수가 배진관으로 봉안사와 찰리사의 직함을 받아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과 대비전과 혜경궁과 정조의 책보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어제·어필로 사고에 흩어져 있는 것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여, 어제·어필은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에만 봉안하도록 하였다.

 

③. 유수부동헌   

 img8.gif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東軒)은 오늘날 군청과 같은 기능을 담당했던 관아 건물로서 고려 고종때의 궁궐이 있던 곳에 조선시대 유수부의 동헌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인조 16년(1638)에 개수 한 것이며 일제시대부터 해방 뒤까지 군청으로 사용했었다. 관호는 "현윤관(顯允館)" 이라 하였으며, 현재는 영조때 이름난 학자이자 명필이었던 백하 윤순이 쓴 "명위헌"이라는 관호가 걸려 있다. 건축 양식은 정면 8칸·측면·3칸의 겹처마단층 팔작 기와지붕의 익공집으로 이중 장대석으로 조성된 기단 위에 네모꼴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화반없이 간단한 형태의 초익공으로 되어 있으면 내부 가구는 2고주 7량으로 되어있다.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있고 동쪽 한칸에는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정면은 모두 사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다 동쪽 한칸에는 높은 석축으로 단을 조성한 고려 궁궐터로 전하는 건물터가 있고 그 앞에 낮은곳에 이방청 건물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④. 유수부이방

 

 원래 강화유수부 육방(이방, 호방, 형방, 예방, 공방, 병방)중 하나인 이방청 건물이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효종 5년(1654)에 강화유수 정세규(鄭世規)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조선 정조 7년(1783) 강화유수 김노진(金魯鎭)이 중수하였다. 일제시대 (1915-1972년)부터 강화등기소로 사용하다가 1977년에 고려궁지와 함께 정비하여 복원하였다.

 "이방청"은 온돌방이 8간, 마루방이 12간, 부엌이 1간으로 모두 21간이나 되는 'ㄷ'자 형태의 건물로 이다.

 

⑤. 승평문

왕궁의 정 남문 이었다. 즉 지금의 선원비각 주위에 있었다 하며 왕이 거동할 때에 전용 하였고 환궁할 때에는 조정대신 이하가 문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영입하도록 되었다.

이 문루는 삼문으로 되었으니 가장 광대하였고 오직 임금만이 출입하며 외국사신도 옆문으로 통용케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하세한 후 다음해 태자(太子) 전이 몽고로부터 환도함에 있어 승려(僧侶) 대강화상(大康和尙)과

함께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오게 하셨다고 전례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