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오죽헌

01학번 김현아

위  치: 강원 강릉시 죽헌동 201

문화재: 보물 165 호

강릉 오죽헌안에는 오죽헌을 비롯 여러 가지 볼 것들이 만다. 대표적인 것이 율곡 이이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문성사와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과  율곡이이 기념관 등이 있다.

 

 ①.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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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포호의 서쪽 들녘 너머로 보이는 죽헌동에 오죽헌이 있다.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시대의 가장 큰 학자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다. 그러나 오죽헌은 그의 친가가 아니라 외가, 곧 신사임당의 친정집 이었다.

 본래 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최응현의 집으로 그 후손에게 물려져 오다가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1975년 오죽헌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화될 때까지는 이율곡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주거 건축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죽헌은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용꿈을 꾸었다는 데서 이름 붙은 몽룡실이 대표가 되는데, 온돌방과 툇마루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순한 일(一)자형 집으로, 본살림채는 아니고 별당 건물이다. 본채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양측면에 합각을 한 팔작 지붕으로 내부는 연등천장이나 합각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대청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발랐다. 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막돌 초석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는 익공으로 처리하였다.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변해가는 주택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오죽헌은 외부인에게 개방되어 건물 전면에 문을 열어놓고 『격몽요결』, 「자경문」등의 명문장의 일부를 액자로 만들어 세워 두었다. 오죽헌 옆 문성사 주위에 '오죽'이 자라고 있으며, 율곡 생전에도 있었다는 수령 600년된 배롱나무도 앞뜰에 있다. 문성사는 율곡의 시호 '문성'(文成)에서 따온 것이며, 여기에 모셔진 율곡의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이다.  오죽헌 오른쪽의 작은 중간문을 지나면 안채 건물이 있다. 안채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해 놓은 것이다. 그밖에 정조 임금이 1788년 율곡의 유품인 『격몽요결』의 원본과 벼루를 보관하도록 지어준 어제각도 있다. 1975년에 대대적인 오죽헌 정화사업이 있었는데, 이 때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되었다.

 

②. 문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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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선생에게 내린 시호 이다. 뜻은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된 것으로,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영정은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③. 몽룡실

 '몽룡실'은 찬란히 빛나는 검은 용이 동해바다로부터 날아오는 꿈을 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았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엔 '오죽헌'과 '몽룡실'이란 현판이 두 개 붙어있으며, 본 살림채가 아니라 별당 건물이라 한다. "오죽헌" 양옆으로 600년 된 배롱나무와 화려한 매화, 줄기 검은 오죽이 무리 지어 있어 볼거리가 된다.

④. 율곡 기념관

 《율곡전서》를 비롯한 율곡의 저서와 율곡의 간찰이 전시되어 있다. 간찰은 짧은 글이긴 하나 율곡이 그의 신변적인 내용을 직접 쓴 것이어서 율곡의 서정과 생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유품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의 유품으로서는 습작매화도, 초서병풍, 초충도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초충도에서는 사임당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때의 묵매 양식을 잘 보여주는 매창(율곡의 누이)의 매화도와 한송이의 국화가 단정하게 그려진 옥산 이우(율곡의 아우)의 국화도가 전시되어 있으며, 초서에 뛰어났던 이우가 소년기에 쓴 귀거래사가 전시되어 있다.

 ⑤. 사임당과 율곡 이이에 대하여

1) 신사임당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아버지 평산 신씨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 태어난 다섯 딸 중 둘째였으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교경전과 문장, 글씨, 그림, 바느질과 자수에 능했다고 한다. 19세의 나이에 덕수 이씨 원수와 혼인하였으며 선과 매창, 번, 이, 우 등 자식 일곱을 두었다. 1551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묻혔다.

2) 율곡 이이

 img54.gif'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 호를 '율곡'으로 했으며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름은 이,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아명은 현룡이다.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의 나이에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어머니의 산소를 지켰으며 이때 불교를 배우기도 했다.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 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며 살았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고 예조좌랑, 이조좌랑, 청주목사,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저서로는 '만언봉사; 성학집요; 시무육조; 격몽요결; 자경문; 율곡전서' 등이 있고, 큰 변란에 대비해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 배치해야한다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와 '기'라는 두 개의 축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퇴계 이황과 달리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조선유학은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이후 영남학파는 남인으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맞섰다. 1548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