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01학번 박선희

위  치: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문화재: 신륵사극락보전(시도유형문화재128호)

@.창건과 사찰명의 유래

img32.gif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高宗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裨補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東臺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여주와 신륵사

img33.gif 조선 초기 학승學僧인 신미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金守溫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 후기 문인 김병익金炳翼은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儒學者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신륵사 중수기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이와 같이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들어 여주팔경驪州八景으로 일컬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이니,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신륵사(나옹화상과 신륵사)

 나옹선사가 일찍이 신륵사에 머물렀고, 훗날 다시 이곳에서 입적하므로써 신륵사의 사세가 확장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1376년 양주 회암사檜岩寺 중창 낙성식에 너무 많은 신도가 왕래하여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나옹에게 명을 내려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이주하게 하였다.

이때 몸이 병든 나옹이 여주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入寂 하게 되니, 그의 문도들은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하고 석종石鐘부도를 조성하여 나옹스님의 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신륵사는 이를 계기로 대전大殿, 조당祖堂, 승당僧堂, 선당禪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크게 중수重修되어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같은 사세를 기반으로 신륵사는 고려불교를 개혁하고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장경 봉안은 나옹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382년(고려 우왕 8년) 이색은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신륵사에 2층으로 된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1부를 봉안하였다. 이듬해 이숭인(이숭인, 1349-1392)이 지은 <신륵사대장각비神勒寺大藏閣碑> 비문에 의하면 목은 이색의 부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 한 벌을 인출해 내기를 서원하였는데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상총尙聰대선사가 목은에게 이 뜻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에 목은 이색의 주선으로, 부친 이곡이 서원을 세운지 30년 만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 봉인을 추진함으로써 이곡의 서원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대장경 불사에는 각처에 산재해 있던 나옹의 문도들과 국가 원로 중신 및 권문세가들의 호응을 받아, 바로 나옹화상의 열반처인 신륵사에 대장각을 지어 봉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륵사 대장경 불사의 규모와 내용을 보면 어느 한 개인의 발원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나 왕실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를 거행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 신륵사는 이미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도량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위치에 올라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의 신륵사(영릉英陵의 원찰願刹)

 고려말 나옹스님이 입적한 이후 사세가 확장되었던 신륵사는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시대가 되면서, 태종의 명(1401년)에 의해 소장하고 있던 대장경을 일본에 보내야 하는 등 배불정책으로 인해 사세寺勢가 위축되었다. 세종 22년(1440년) 태종의 장인이었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화상畵像을 봉안하기 위해 중수된 신륵사는 7년 후 영릉英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 되면서 다시 한번 큰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는 풍수지리상 지세가 불길하다고 하여 예종睿宗 원년(1469)에 서울 강남구 태모산 아래 태종의 헌릉 곁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게 하였다. 이에 세조의 유지를 받들어 원찰을 세우기로 하고 당세 권신權臣인 한명회와 한계희가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천년 고찰이라 알려진 신륵사를 택하여 추천하였다. 이에 따라 신륵사 내 옛 건물을 중수하기도 하고 새 건물을 건축하여 2백여 칸의 대가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중심 전각을 극락보전으로 바꾼 뒤 사찰명을 보은사報恩寺라 하고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로부터 절은 사세가 더욱 확장되었고, 여주는 부에서 주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현종顯宗 12년(1671년), 이조판서이던 김수항金壽恒과 이조참판 민정중閔鼎重, 호조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중심이 되어 임진, 병자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신륵사를 중창하고, 그 후부터는 다시 옛 이름을 찾아 신륵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숙종肅宗 28년(1702)에는 오대산의 위학偉學, 천심天心, 우안宇眼 스님등이 시주하여 절을 중수하였으며 영조英祖 원년(1725)에는 법밀法密, 영순英淳 스님등이 전탑을 중수하였다. 그후로도 신륵사는 정조正祖20년(1796)에 공명승첩空名勝捷을 받아 범중루泛中樓 12칸과 좌우 식간食間을 신축하였으며, 철종哲宗9년(1858)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장불전藏佛殿, 선료禪療, 종루鐘樓, 향주香廚를 중수한 후 그 내용을 신륵사 중수기에 기록하였다.

 @. 신륵사의 주요 인물

1.나옹화상

img34.gif나옹 혜근 懶翁 慧勤(1320-1376)

나옹 혜근은 서천 지공指空스님과 절강 평산平山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승풍僧風을 크게 떨쳤던 고려말의 고승이다. 스님은 중국으로부터 보우普愚와 함께 새로운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한국불교의 초석을 세운 장본인으로 유학하는 20여년 동안 강남지방의 간화선看話禪을 깊이 공부하고 귀국하여 간화선을 널리 선양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스님의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법호는 나옹懶翁이며 당호堂號는 강월헌江月軒, 시호는 선각禪覺이라고 하며, 1320년 1월 15일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일면에서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한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1344년(충혜왕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岩寺에서 크게 깨달았다.

 1347년 (충목왕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하고 정진하여 그의 법을 전수받은 후 1358년(공민왕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 이후 신광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홍건족의 침입을 법력으로 막아 신광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에서 수도 정진한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의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王師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낙성식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지고 유학자들이 탄핵함에 따라 밀양 영원사瑩遠寺로 옮기던 중 1376년 5월 15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니 나이 57세 법랍 38세였다. 제자로는 자초自超, 지천智泉 등 2,000여명이 있으며,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과 <가송歌頌>으로 스님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다. 신륵사와 관련된 나옹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보제사리석종기>와 김수온의 <보은사기報恩寺記>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륵사는 나옹이 도를 펼쳤던 곳으로 목은이색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교유하므로 인해 신륵사가 경기도의 유명사찰이 되었다 한다.

 2.무학대사

img35.gif무학 자초 無學 自超(1327-1405)

스님은 고려말 조선 초 불교가 위축된 상황속에서 사회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낡은 체제의 개혁과 더 나아가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한 조선 초기의 고승이다. 성은 박씨朴氏이고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으로 1327년 삼기(三岐:경남 합천)에서 아버지 인일仁一과 어머니 채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344년(충혜왕5) 18세에 소지小止선사의 문하로 출가, 혜명국사慧明國師로부터 불법을 전해받았다.

1353년(공민왕2) 원나라 연도燕都로 가서 인도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은 후 나옹懶翁을 찾아가 그의 전법제자傳法弟子가 되었다.

  나옹이 입적한 후, 다시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무학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太祖의 왕사王師가 되었고, 그 건국사업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불사佛事를 광명사廣明寺에서 베풀었다. 1402년(태종2) 왕명을 받아 회암사로 옮겼다가, 금강산 진불암으로, 다시 1405년 금장암金藏庵으로 옮겨 이곳에서 나이 79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후에 조선 태종太宗이 사리를 회암사 부도에 모시게 하였다.

스승 나옹이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고, 그 제자 무학이 신륵사 옆 고달사에서 은신하였던 것은 신륵사의 불교사상적 위치를 한층 고양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여말麗末과 선초鮮初의 두 고승이 맺게 된 인연으로 그의 영정이 지금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3.지공화상

지공 화상

img36.gif지공은 인도 승려로 법명 제납박타提納薄陀라 하며 禪賢이라 번역하고 지공은 호이다. 인도왕족으로 태어나 여덟살 때 출가, 나알란사의 강사 계현戒賢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열아홉살 때 남인도의 랑타아국 길상산吉祥山 정음암頂音庵에 가서 보명普明스님께 사사하고 그의 인가를 얻어 지공이라고 호號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원나라 황제의 후대厚待를 받으며 법을 펼치는 동안 많은 고려의 유학승과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금강산법기도량金剛山法起道場을 참배하고자 하는 염원과 고려스님들과 접촉을 통해서 얻은 고려에 대한 관심 등으로 충숙왕3년(1326년) 고려를 방문, 1년만에 원나라로 돌아갔다.

  지공은 고려말 승려들의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특히 나옹에게 있어서는 사상적인 원류로 평가되고 있다.

 

 4.목은 이색

 목은 이색(1328-1396)

img37.gif이색은 고려말의 유명한 삼은三隱중 한 사람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28년(충숙왕15) 영덕군 영해읍에서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한 이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의 발전을 꾀하였다.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되어지고 이후 석방된 후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1396년 신륵사에서 죽었다.

  신륵사와 이색의 관련된 기록은 아버지 이곡이 발원하여 조성하려했던 대장경을 1380년부터 3년에 걸쳐 완성하여 2층의 장경각을 지어 절에 봉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나옹은 한때 신륵사에서 교류하기도 하였으며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신륵사에 세웠다.

 문하에서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고, 저서에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試藁>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