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01학번 박한산

위  치: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문화재: 사적 57 호

 

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이 도읍을 정하여, 제13대 근초고왕 26년(371)까지 도읍지였으며, 백제가 점점 힘을 잃어가면서 공주로 도읍을 옮기자 이곳은 다시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 문무왕 12년(AD 672)에 당시 한산이었던 이곳을 한주라고 바꾸면서 토성으로 축성하여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였다.당시 남한산은 공기가 맑고 깨끗하여 청량산으로도 불렸고, 또 산이 높아 해가 오래 떠 있어 낮이 길다는 의미로 주장산, 일장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쌓은 남한산성은 고려시대에는 별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양으로의 천도와, 임진왜란등의 전쟁을 통해 방어의 기능을 하는 성의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에 청나라 침입을 대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에 이른다. 그 후 이괄의 난을 치루고 후금의 위협이 급박하여 인조2년 (1624) 수어사 이서에게 명하여 수축케하였는데, 벽암 각성대사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팔도 승군을 동원하여 축성공역에 임하였으며 2년만인 인조4년 (1626)에 준공되었다. 남한산성의 대부분의 건물은 이 시기에 완성 되었으며 지금 남아 있는 성곽의 모습도 인조때 쌓은 산성의 모습이다. 그후 인조 14년(1636년) 청태종의 침공으로 인조대왕은 이곳으로 피신, 45일간 항전하였으며 그 후 전쟁이 끝난 뒤 더욱더 남한산성의 중요함을 깨달은 조정은 계속해서 산성을 고치거나 새로 쌓았는데 숙종때는 성의 동북쪽에 바깥성인 벌봉과 신남성을 쌓았으며, 벌봉에 포대를 설치하였고 영조때는 한봉성을 고쳤고, 신남성에 돈대를 쌓았고 정조 3년 벽돌로 덮여 있던 곳을 기와로 갈면서 비로소 성의 모습이 완성되었고 그 후 성내의 조영(造營) 은 조선말 순조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1일 일본군에 의하여 산성이 무참히 폭파 되면서 우리의 많은 문화유산이 함께 소실되었다.

 남한산성에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한때는 인조5년(1627)에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으로 옮기면서부터 시작된다. 국가 유사시 성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산성 거유민을 전국적으로 모집하여 숙종17년 7월 13일 1,000호를 완성하여 주민을 더 이상 산성으로 들여 보내지 말 것을 왕이 윤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1,700여개의 성중에서 최대산성이며, 조선조 축성술이 절정에 달한 17세기에 만들어진 성으로 가장대표적인 한국의 산성으로서 전체적인 성의 형태는 주변부가 높고 협약한데 비해 성의 중심부는 낮고 평평한 입지를 이루어 공격과 수비가 용이하고 성내의 주거가 평안하여 산성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의 구성은 본성과 외성으로 되어있으며, 둘레는 9.05km이고 성곽의 높이는 3m~7.5m이고 4장대(서장대만 보존), 4문, 5옹성, 16암문, 2봉화대가 있고 성내에는 124개 요소에 군포 125, 지당45, 정호80, 수대 8개소가 있으며 유사시에는 임금이 이어(移御)할 수 있는 행궁을 비롯하여 종묘, 사직, 관아, 재옥, 객사, 종각등이 있었다.

 사찰은 축성전부터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으나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국청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를 지어 모두 9개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폭파 파괴되었고 지금은 장경사, 망월사, 국청사, 개원사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 지정된 문화재로는 수어장대, 청량당, 숭열전,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과, 문화재 자료로 는 지수당, 장경사 등이 있으며, 기념물로서는 망월사지, 개원사지등이 있다.

 

남한산성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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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당(淸凉堂)

남한산성 동남쪽 축조공역의 책임자 였던 이회의 원혼을 위안 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며 이회장군, 백암대사, 이회장군 부인 초상화가 개첩 되어 있다.

 

현절사(顯節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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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후 인질로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 순절한 삼학사 홍익환, 윤집, 오달제와 김상헌, 정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침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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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 간에는 백재 온조왕의 왕궁지라고 불리며, 현재의 건물은 영조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에게 중수케하고 침괘정이라 명명 하였다. 조선조에는 무기 재작소의 사물을 관장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연무관(演武館)

숙종때 종전에 연무당 이라 불리던 것을 개수하고 연무관 이라 하였다.이건물을 중심으로 무술을 닦고 무재가 뛰어난 사람을 뽐아 한양에 보내는등 군졸들의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다.

 

지수만(池水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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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화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는 이 건물을 중심으로 3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고관들의 정자로 이용된 곳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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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2년(1624) 단층으로 축조한 것을 영조7년(1715)에 2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외부편액을 수어장대, 내부편액을 무망루라 이름 하였다. 영장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산성 내 최고봉인 일장산성(해발 453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당초에는 단층 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를 맡았던 수어청 (전, 좌, 우, 중, 후의 5관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 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27년 (1751)에는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건 립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라 이름하였다.

 

숭열전(崇烈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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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당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곳이다. 본래 조선 인조 16년(1638)에 온조왕사로 건립한 건물인데 정조 19년(1795)에 왕께서 사액을 하사 숭렬전으로 바꾸었다. 인조 4년(1626) 수어사로서 남한산성의 수축에 힘쓰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병사한 이서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 이 불모로 심양(현 봉천)에 잡혀 갔다가 8년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 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 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때의 치욕사를 되새 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고종 건양 원년 (1896) 유수 박기수가 재건하였는데 2익 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하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를 세우고 주위 4면에 퇴칸을 돌렸으며 중앙에는 단을 만들었다. 상층은 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 되어 4면의 변주가 되어 평면 비례상 급격히 줄어 든 감이 있다.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장

병자호란(인조14년)사를 8폭화폭에 담아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쉽게 알수있게 게시하였으며 호국정신과 민족의 존엄성을 되새기는 교육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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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아(水確)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수력으로 방아를 움직여 곡식류를 찧는 장치로서 남한산성내에 광주읍치소가있고 민가가 1,000여호가 될때에는 8개나 있었다 하는데 그중에서 1개소를 1996년에 재현해놓았다.

 

동문(左翼門)

남한산성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정식 명칭은 좌익문이다.

img31.gif로 거칠게 가공된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면바르게 쌓았으며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문루는 초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문루 주위에는 전으로 평여장을 쌓았고 좌, 우로는 지형에 따라 층단을 두어 석축을 하고 평여장을 쌓았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부윤이 주둔해 있어 인근의 광주·양주·용인·이천 등지에서 잡혀온 많은 교우들이 성의 동문으로 끌려들어가 처형되었다. 그리고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교우들은 시체가 되어 동문 바로옆의 수구문으로 내던져졌다.

 

남문(至和門)

남한산성 남쪽의 성문으로 정식 명칭은 지화문이다.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그 좌.우로는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면바르게 쌓되 수평줄운을 맞추어 쌓았으며 그 높이가 매우 높아 성벽의 안전을 위해 위로 올아가면서 석축 면에 구배를 두어 점점 안으로 들여 쌓았다. 밑에는 큰돌로,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돌을 쌓는 것은 성벽축조의 일반적인 예이며 상부 여장에는 총안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장주초석을 세우고 초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북문(全勝門)

남한산성 남쪽의 성문으로 정식 명칭은 전승문이다.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그 좌.우로는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면바르게 쌓되 수평줄운을 맞추어 쌓았으며 그 높이가 매우 높아 성벽의 안전을 위해 위로 올아가면서 석축 면에 구배를 두어 점점 안으로 들여 쌓았다. 밑에는 큰돌로,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돌을 쌓는 것은 성벽축조의 일반적인 예이며 상부 여장에는 총안을 설치하였다.

서문(右翼門)

남한산성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정식 명칭은 우익문이다.

조선 인조4년(1626)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성문은 우리나라 산성문의 일반적인 구조로 거칠게 가공된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면바르게 쌓았으며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문루는 초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수문(水門)(시주문)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성내 대부분의 물이 이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가고있다. 성안에서 사망한자의시신은 四대문 통과를 할수없었고 이 수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갔다. 통행시간이 지나 동문이 닫혔을때는 이 문을 통해 출입하기도 한 비밀문이기도 했다.

 남한산성사찰                        

장경사(長慶寺)  

장경사는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로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측면의 칸은 정면의 칸보다 약간 좁아서 건물의 전체 평면은 장방향을 이룬다. 건물의 정면에는 각 칸마다 4쪽 여닫이 교자문을 달았다. 종무소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에 주심포식 4가가 모기둥을 썼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망월사(望月寺)

장경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9개 사찰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망월암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망월사의 돌축대는 옛 망월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한며 대형 맷돌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개원사(開元寺)

'개원' 이란 근본을 새로 시작한다는 뜻, 또는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서 신생국가의 연호에 사용되는 예가 많다. 이 절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승군 본영을 두었던 절로서 벽암 각성선사가 조선 8도의 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하였으면, 그후 수도를 방어하는 호국승군의 도장이 되었던 곳이다. 개원사는 창건 이후 의승방번제가 폐지되는 고종 3년(1894) 갑오경장 때까지 270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온 호국사찰로 번창했으며 전국 사찰의 승풍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하게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인조 15년(1637) 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으나 1907년 8월 1일 일제의 산성의 무기 수거와 화약 현지 폭파 사건을 맞아 법당 누각 등의 부속건물들이 모두 전소되어 개원사는 하루 아침에 폐사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원래 군기고지, 누각지, 종각지 등에는 주춧돌이 남아있어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케한다. 또한 이 사찰에는 남한산성 축성과 산성 수호승군들이 사용했던 유분 1점과 석장, 옹기 함지 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서 번창했던 사찰의 영광을 알려주고 있다.

국청사지(國淸寺地)

국청사지는 서문에서 남동쪽으로 228m지점의 해발 4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절이 있는 곳은 사지에서 북쪽으로 140m 지점인데 이절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은 절이다. 당초의 국청사는 누각 앞에 못이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겹처마 지붕의 천장을 만들고, 그 천장안에서 화약을 제조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사찰은 을사보호조약 이후까지 의병의 군기고 쓰이다가 일제의 무기 및 화약수거 때인 1907년 8월 1일 폭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