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지역개관

01학번 김상우

※ 화성

화성시는 한반도 중서부에 속하는 경기도의 서남 해안을 끼고 위치해 있으며 육지로는 7개 시를 접하고 바다로는 서해의 평택항으로 충청남도와 경계되며 서쪽의 옹진군과 접하여 선감도, 대부도를 마주하고 있다.

육지의 경계는  동으로 용인시 남사면, 이동면과 접하고   남으로는 오산시와 평택시의 진위면, 서탄면, 청북면, 포승면과 연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수원시, 안산시, 시흥시의 수암동 및 용인시 기흥읍이 각기 접하고 있다.

 

화성시의 지역특성

면적이 688㎢로서 道내 자치단체중 5번째로 넓음

농지면적이 271㎢로서 농업 웅시의 위치

도시지역, 농촌지역, 어촌지역, 공업지역, 산간지역 등이 고루 분포

특성 개발에 따른 『투자사업비의 과다 소요』

토지규제지역(수도권정비 권역 100%, 군사시설보호구역 1%, 개발제한구역 14%)

수도권에 연접된 중심지로서 사회간접시설이 갖춰진 개발 잠재력이 큰 지역

경부. 서해안 양대 고속도로, 철도, 국도 등이 관통하는 사통팔달의 도로망 연결

서울 중심에서 1시간 이내 거리이고 대도시와 연접되어 인구증가 급증

각종 산업시설, 택지개발 등 대규모 개발사업의 가속화

대규모 간척사업 시행지역(시화지구, 화옹지구)

역사성 있는 충. 효의 전통문화와 천혜의 관광자원 보유

제암리와 수촌리의 3.1독립운동 유적지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융.건릉과 용주사(『효』의모체)

152km의 해안선과 천혜의 바다가 위치한 해상 관광자원

http://www.hscity.net/index.html

 

※ 수원

부족국가시대 (삼한시대) 모수국

고구려시대 (475년) 매홀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 - 757년) 수성군

고려시대 (태조23년, 940년) 수주

조선시대 (태종13년,1413년) 수원도호부

조선시대 (정조17년, 1793년) 수원유수부

조선시대 (고종32년, 1895년) 수원군

1914년 3월   수원군 수원면

1931년 4월 1일   수원군 수원읍

1949년 8월 15일   수원시 승격

1967년 6월 23일   경기도청 수원이전

1988년 7월 1일   수원시 장안구, 권선구 2개구 개청

1993년 2월 1일   팔달구 개청

http://www.suwon.ne.kr/submain2_frame.asp?TopID=sub0212&MenuID=sub0212

 

※ 여주

여주군은 경기도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 광주군,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면적은 608.23㎢이며, 1읍 9면 1출장소와 145개의 법정리가 있고 군청소재지는 여주읍 홍문리이다. 여주군은 태백산맥, 차령산맥, 광주산맥 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주평야가 남한강을 끼고 펼쳐져 있다.

여주군을 관통하여 흐르는 남한강을 여강이라고 부르며 여강의 동북 지역은 산지가 많고, 강남지역은 전형적인 여주평야로서 넓은 들과 야산이 잘 발달되어 있다.

 

서기  475년― 고구려 시대 골내근현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35代) 기천

서기 1305년― 고려 충렬왕 (25代) 여흥

서기 1401년― 조선조 태종시 여주 그후  주내면

서기 1938년― 여주면이라 개칭

서기 1941년― 여주읍으로 승격

http://www.yeoju.gyeonggi.kr/main.htm

 

※ 경기도 광주

위치: 경기도 중앙에서 약간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양평군과 여주군, 서쪽은 성남시와 서울특별시 남쪽은 이천군과 용인군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양주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431,67㎢이며, 광주읍 1읍과 중부면 남종면, 퇴촌면, 초월면, 실촌면, 도척면, 오포면의 7면 165리로 되어있다.

※ 용인

용인시(龍仁市)는 본래 용구현(龍駒縣)과 처인현(處仁縣)을 합치고 용구(龍駒)에서 "용(龍)"자와 처인의 "인(仁)"자를 합쳐 용인현(龍仁縣)이라고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陽智郡)을 합쳐 오늘의 용인시(龍仁市)가 되었다. 용인지방(龍仁地方)은 부족국가시대 이래 광주지방(廣州地方)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일찍이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서 즉위한 이후 계속 백제의 영토에 속하였다. 용인지방이 용구현(龍駒縣)이란 명칭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것은 서기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년)이며 이것이 최초이다. 이 해에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정하여 백제의 왕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아단산성에서 백제 제21대 개로왕을 죽였다. 이때 고구려는 새로운 점령지인 용인지방을 중앙집권적 군현 제도에 따라 구성현(駒城縣)으로 명명하고 자국의 영토로 귀속시킴으로 비롯되었다.

용구현(龍駒縣)을 일명 멸오현(滅烏縣)이라 했던 별칭이 기록상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백제때의 용인지명으로 우리말의 "말아"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며 고구려가 편입한 새로운 영토를 구성(九成)으로 한것도 "말아"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말아" 또는 "말"은 마루와의 동의어로서 크다와 높다의 의미가 포함된다고 풀이할 때 구성(駒城)은 큰성(大)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삼국이 통일되어 신라의 통치를 받게된 용인(龍仁)은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1주(州), 1소경(小京), 28군(郡), 46현(縣)을 한주(翰注)(現 : 廣州)의 영현(領縣)으로 할 때 龍仁을 이에 속하게 하였고, [구성(駒城)]을 [거서(巨黍)]로 고쳤다. 이때에도 크다는 뜻의 "말아"를 "거(巨)"로 표기하였다. 그 후 신라(新羅)가 망하고 고려 태조(高麗 太祖)가 즉위하자, 서기 940년 (고려 태조23년 3월) 광주을 大都督府로 한 전국의 주(主),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을 고칠 때 용구현(龍駒縣)이라 하였다. 고려(高麗) 제8대 현종(顯宗) 9年인 서기 1018년에 전국을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珍藏), 20현령(縣令)으로 개편할 때 용인(龍仁)을 광주목(廣州牧) 임내(任內)에 두었다. 이로부터 154년이 경과한 서기 1172년에 와서야 광주(廣州)에서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현감(縣監)으로 보직(補職)하였다. 처인현(處仁縣)을 본래 수원부(水源府)에 속해있던 부곡(部曲)이었는데 처인(處仁)이란 명칭은 이미 고려 현종(高麗 顯宗)때에도 그렇게 불리워졌다.

한편 양지현(陽智縣)은 본래 수주(水主)(現 : 水源)이었다가 朝鮮 正宗2년인 서기 1399년에 양지현(陽智縣)으로 승격(昇格)되었으며 태종(太宗) 13년인 서기 1413년 광주부(廣州府) 관할구역(管轄區域)인 추계향(秋溪鄕)으로 치소(恥笑)를 옮겼다.

그 후 세종(世宗)때까지 광주진(廣州鎭)의 관할구역(管轄區域)으로 계속되었는데 방면(方面)이 6방(坊)에 불가하였으므로 당시 현감(縣監) 양원(兩院)이 상계(商界)하여 성종(成宗) 경인년(庚寅年)인 서기 1470년 죽주(竹柱)의 고안(考案), 대곡(大哭), 목악(木岳), 제촌(蹄村) 등 4부곡(部曲)을 영현(領縣)으로 하고 충청도에서경기도로 래속(來屬)되었다. 고종(高宗)32년인 서기 1895년 4월 전국 아문(衙門)의 칭호를 부(府)로 고치는 지방관제(地方管制)의 개혁(改革)에 따라 용인현(龍仁縣)이 용인군(龍仁郡)으로 개칭(改稱)되었고, 다음해인 1896년 경기도의 4등군(等郡)이 되었다. 또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지방관제(地方管制)의 개편(改編)에 따라 건양원년(建陽元年)인 1896년 양지군(陽智郡)으로 되었다가 1914년 용인군(龍仁郡)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http://city.yongin.kyonggi.kr/index.asp

 

※ 강화도

▣ 상 고 시 대 : 갑비고차(甲比古次)

▣ 서기 400 년 : 고구려 광개토왕시 혈구군(穴口郡)으로 호칭

▣ 서기 742 년 : 신라 경덕왕시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

▣ 서기 939 년 : 고려 태조시 강화현으로 개칭

▣ 서기 1377년 : 고려 우왕시 강화부로 승격

▣ 서기 1413년 : 조선 태종시 강화도호부 설치

▣ 서기 1627년 : 조선 인조시 강도로 승격

▣ 서기 1895년 : 조선 고종시 강화군으로 개칭

▣ 서기 1915년 : 교동군을 강화군에 편입

▣ 서기 1962년 : 볼음출장소 설치

▣ 서기 1973년 : 강화면을 읍으로 승격

▣ 서기 1995년 :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리웠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리웠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39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었던 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 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 세력인 몽고군이 송경, 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 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전후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서울이었다. 그 뒤 25대 충열왕은 재위 17년 12월에 또다시 거란군의 화를 입어 강화에 들어 왔다가 2년 후에야 겨우 송도로 환도하는 등, 강화는 양차에 걸쳐 고려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는 고종때의 천도를 계기로 당시의 서울인 송도를 폐하고, 강화를 항구적인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고려 제23대 고종은 그해 8월(음 6월)에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이령군으로 하여금 국도의 방어선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모두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에 송악이라는 산 이름까지 짓게 했던 것이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게 했고, 22년 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년 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고병의 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강화도의 임시 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했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강화는 몽고군에게 유린한 바 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년 6월에 몽고 내지로 납치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했고, 뒤를 이은 24대 원종도 강화를 서울로 이어받을 생각이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이를 실현치 못하였다. 이로써 강화는 천도이후 39년간 고려의 국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강화서울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치 않았다. 제 25대 충열왕 10년에는 원나라의 반적, 흡단의 내구로 충열왕이 일시 강화로 피했던 일이 있고, 고려 말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해 강화천도가 논의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정종, 태종의 3대왕이 일시적이나마 강화에 잠행한 일이 있고, 특히 태종은 강화에 도호부사를 두어 방어를 강화했으며, 14대 선조도 강화의 방어에 주력해 왜병을 근접치 못하게하여 남북간 적병의 연락 차단에 성공했던 일도 있다.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제 1차의 난에서 40일간을 강화로 몽진, 겨우 난을 피했었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한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제 2차 내침 때에도 강화로의 몽진이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17대 효종으로 하여금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케 했고, 19대 숙종은 인조시대부터의 유수에 진무사를 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기위한 진,보를 증설하고, 각 진에 돈을 설치하여 분담 수비하게 하였으며 문수산성의 축성 등 모든 방비를 강화시켰다.

강화도의 수난은 현대에 까지 미치는데 조선 고종3년의 프랑스 군함사건과 동 8년의 미국 군함사건, 동 12년의 일본 군함사건 등 조선 최후의 비극을 연출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 곧 강화도라 할 수 있다.

http://www.ganghwa.incheo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