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의 佛像

 

· 학  번 : 97305014

· 이  름 : 백 성 신

[目  次]

Ⅰ. 序論

Ⅱ. 本論

1. 불상의 종류

 (1) 여래상(如來像)

 (2) 보살상(菩薩像)

 (3) 신중상(神衆像)

2. 백제 불상조각의 조형정신배경

 (1) 문화적 배경

 (2) 종교적 배경

3. 백제불상의 조형성

 (1) 금동불(金銅佛)

 (2) 석불(石佛)

Ⅲ. 結論

※ 參考文獻

 

Ⅰ. 序論

불교미술이란 불교적인 것의 미술적 표현이다. 즉 이는 불교의 장엄인 것으로 만약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불교에서 그 예술적인 것의 전부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할 정도로 불교정신을 표현함에 있어 불교미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불교의 본질은 심오하여 언어사량(言語思量)의 피안에 있으므로, 그를 표현함에 있어 예술적 표현을 중요시하여 왔기 때문이다.

상식적 사량은 분석하고 예술적 표현은 종합한다고 한다. 여기 불교는 언어불급의 그 진체(眞諦)를 표현하기 위하여 주로 종합·직관의 예술적 표현을 하여 왔다. 예컨대 불상은 한마디의 법문을 하지 않고 있으나 명공거장(名工巨匠)의 지극한 정성으로 조각된 자비스런 모습에서 법문 이상의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됨이 그것이다. 불교는 과거의 역사에 있어 미술적 표현을 중요시하였고, 미술에 의하여 그 자신을 표현하고, 미술적 표현에 의하여 그 자체를 이해시킴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불교미술의 참뜻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상이란 함은 불타(佛陀, Buddha)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조각상이다. 엄격한 의미로는 부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의 상은 물론 보살상(菩薩像), 신중상(神衆像) 등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에서는 불상의 종류, 백제불상조각의 조형정신배경, 백제불상의 조형성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Ⅱ. 本論

1. 불상의 종류

백제의 불상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불상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1) 여래상(如來像)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한 때에는 석가상만을 제작하고 이에 예배하게 되었으나, 석가상을 불상으로 제작할 즈음에도 이미 대승불교시대에 들어갔고 또한 이즈음의 석가여래는 현실적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인 불로서의 의미가 더욱 강해져서 이 때의 석가는 불교경전이 설하는 득오의 최고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절대적 존재로서의 불이야말로 범부 중생의 모든 고뇌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존재로서의 불은 중생의 구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행하기 위하여 불이 지닌 여러 가지 구체적인 성격을 실체화 해감에 따라 많은 불이 출현하게 되었다. 즉, 석가모니불이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되어짐에 따라 석가가 지닌 여러 가지 중생구제의 기능을 실체화하여 더욱 많은 불을 탄생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래는 중생구제의 각각 다른 기능적인 면을 실체화한 것이므로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라 하겠으나 양식적인 면에서는 다같이 여래로서 32상 80종호를 지니고 있어 이로써는 구분되어지지 않고 다만 인상에 의하여 구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상(印相)에 의하여 구분할 수 있게 되어짐도 불교 도상의 상징적 의미가 더욱 발전된 밀교의 수용 이후의 일이므로 우리나라 초창기의 불상은 인상에 의하여 구분되어지지 않는 것도 많다. 그럴 경우에는 명문(銘文)에 의하거나 그를 봉양한 전각 등 다른 간접적인 방법에 의하여 알아내는 길밖에 없다.

①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석가모니불은 역사적으로 실존적 존재이다. 비록 그 존재의미가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초월한 존재로 추앙되어졌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석가모니불은 그의 생애에조차 다른 상을 조각함에 따라 보다 많은 종류의 상을 조각하게 되어졌다.  

② 비로사나불상(毘盧舍那佛像)

석가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여래상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사상은 4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즉 5세기 초반에 한역(漢譯)되어진 화엄경, 범망경 등에 설해지고 있는 비로사나불이 그것이다. 즉 이에 의하면 비로사나불은 불교의 본원의 불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불이 모든 세계에 석가불로서 출현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설법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사나 법신불, 노사나 보신불, 석가 화신불의 3신불 사상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비로사나불상은 통일의 불, 법신불로서의 모습을 조상한 것이다. 즉 화엄경의 사상을 중심으로 조성된 것이 비로사나불인 것이다.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은 여래상으로서의 공통적 특징인 32상 80종호를 모두 갖추어, 이로서는 구분되지 않고 양손을 가슴 앞에 붙여 오른손으로 왼손의 양손가락을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의 인상(印相)이 비로사나여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③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아미타여래는 현재에는 서방 10만 억토를 지난 곳에서 극락정토를 열고 그 곳에서 설법하고 있다는 여래이다.

아미타여래의 모습과 극락정토의 광경에 대해서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아미타불상을 조상하거나 극락정토를 알고 싶어하는 자는 모두가 관문량수경을 읽게 된다.

아미타여래의 형상에 대해서는 다른 여래상과 마찬가지로 32상 80종호를 모두 구비하고 있어 이로서는 구분되지 않고 수인 즉 인상으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미타여래의 인상은 다른 여래에 비하여 인상의 종류가 많다. 그것은 왕생하는 이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극락정토에 있어 각기 다른 아미타여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인의 종류는 9가지인데 9품이 갖는 의미는 신앙인의 근기에 대응한 아홉 구분이라 하겠는데, 즉 아미타여래는 아홉 가지 신앙인의 근기에 대응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④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아미타여래에 대한 신앙이 죽음에의 불안 즉 사후의 신앙을 기본으로 성립된 것이라면 약사여래신앙은 현실적 이익을 바탕으로 성립된 신앙형태라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안심감을 부여하는 불로서 아미타여래가 일찍부터 출현하고 있었으나 죽음을 초래하는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불로서 약사여래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불로 대중의 신앙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불이 있으나 최고의 경지를 나타낸 불로서 현세이익을 직접 설하고 있는 불은 약사여래 이외는 찾아볼 수 없다.

현세이익 신앙이란 대중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성립연대도 늦을 뿐 아니라 불교사상 교리의 면에서 약사여래는 중요한 위치를 지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⑤ 미륵여래상(彌勒如來像)

미륵여래는 미래의 불이다. 불교에서는 그 교법이나 수행의 변천을 설하여 정(正)·상(像)·말(末)의 3법시대가 있다 하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세상은 악화되어 점차 불의 교설을 믿는 자가 적어지며 불교가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해탈이 불가능한 시대가 온다고 한다.

미륵여래의 상용(像容)은 다른 여래상과 전연 구분되지 않는다. 그 인상도 석가여래상과 구분되지 않고 있어 미륵여래로 조상하였다고 하는 조상기(造像記)에 의하지 않고는 구분이 불가능하게 된다. 아마 미륵여래가 아직 성불하였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지 못하여 그를 상징할 만한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성불이 보장되어 있는 보살이기에 석가여래상과 같은 상용으로 미륵여래상을 조상하게 되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2) 보살상(菩薩像)

보살들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불교적 경지를 나타낸 인격의 상태를 말한다. 즉 한편에서 보면 여래가 되기 위한 수행을 계속하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대중을 구제하기 위한 서원을 세우고 이를 위하여 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 서원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보살의 구분이 있게 되고 이렇게 서원의 내용이 다른 구제의 내용을 실체화하여 각각의 보살명이 붙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보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구제란 보살의 서원에 의한 구제라 할 수 있고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보살들이 내세운 약속에 의한 구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이 보살이 내세운 약속이 지켜지면 중생은 모두 구제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보살은 여래의 위치에 오르게 되고 그 국토는 이상세계 즉 정토를 이룩하게 된다는 것이 대승불교에 있어 중생구제의 신앙이론인 셈이다.

① 미륵보살(彌勒菩薩)

미륵보살은 수많은 보살 중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보살이다. 이 보살은 석가 재세시에 불법을 듣고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도솔천에 있으면서 수행을 계속하고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지상에 내려와서 성불하고 중생을 교화하게 될 보살이라 전해지고 있다. 즉 불교에 있어 다음에 올 미래불인 셈이다.

도솔천에서 현재에도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미륵보살에 대해서는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상세히 적고 있는데 이 경전의 내용에 따른 도솔천의 모습과 미륵보살의 모습을 미륵상생변상도(彌勒上生變相圖)나 미륵보살상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한편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이 지상에 하생하여 성불하고 용화나무 아래에서 3회 설법을 행하고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열게 된다는 미륵불에 대해서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상세히 설하고 있다. 미륵하생경에는 미륵보살이 이 지상에 하생할 때의 모습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이 때의 세계는 산과 골짜기가 없이 평평하며 토지는 비옥하고 언제나 풍요로우며 세상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인간은 병이 없고, 인심은 너그럽고 세계의 언어는 한 가지로 모두 통한다. 가히 이상세계를 이룬 세상이다. 이 때에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나무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광경을 미륵하생성불경변상도(彌勒下生成佛經變相圖)로 도설하고 미륵불을 조상하기도 한다.

②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불보살 중에도 관세음보살만큼 대중의 열렬한 신앙을 받게 된 보살도 드물다.

관음신앙이 성립된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미 2세기경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고 그 이후 얼마 있지 않아 무량수경 중에 아미타여래의 합시로서 관음보살이 등장하게 된다. AD400년경이 되면 아미타여래 협시의 관음상은 보관(寶冠)에 아미타여래의 화불을 나타낸 모습을 설한 관무량수경이 강설되어진다. 그리하여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제작된 관음상은 일찍부터 아미타여래의 화불은 그 보관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관음상의 기원은 관무량수경에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③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일반 민중의 두터운 신앙기반을 지니고 있는 2대보살의 하나이다. 일면 대원본존지장왕보살(大願本尊地藏王菩薩)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이 인간의 재난을 구제하는 보살로 신앙되어진다면 지장보살은 인간세상의 죄고(罪苦)를 교화하는 보살로 신앙되어진다. 즉 사거신앙(死去信仰), 명계신앙(冥界信仰)의 대상이며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소임을 맡고 있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자비행을 철저히 실천하기 위하여 여러 몸으로 변신하고 또한 여러 얼굴, 여러 손 등을 갖는 상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나 지장보살은 자비행을 철저히 실천하기 위하여 중생의 업고를 자기 업고로 대비(大悲)하는 보살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지옥에서 지옥중생의 업고를 대신하고 그를 구제하는 보살로 신앙되어진다.

 (3) 신중상(神衆像)

신중이란 불교를 보호하는 호법신이다. 그런데 호법신으로서의 신중의 실체는 과거 인도에서부터의 제반 토속신들이다. 그리하여 신중이란 호법신이되, 여러 신이라고 하는 복수개념이다. 이들 토속신들은 원래는 제각기 신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불교에 포용되어 불교화하여 호법의 기능을 다하게 된 신이다.

복수개념으로서의 신중은 그 개별적인 수는 수없이 많으나 대체로 천부상(天部像)과 무장상(武將像), 용왕상(龍王像) 등으로 나누어진다. 천부상은 제석천(帝釋天), 대범천상(大梵天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들 수 있고, 무장상은 금강역사(金剛力士), 인왕(仁王), 팔부신장(八部神將)을 들 수 있고, 용왕은 팔부용왕(八部龍王)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구성된 신중들이나 중국 및 우리나라에서 첨가된 신중도 있다. 즉 중국 도교계의 신으로서의 칠성과 우리나라 산신 등이 그것이다.

이들 신중들은 복수개념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조각하기보다는 그림으로 많이 그리는데 신중탱화가 그것이다. 오늘에 전하는 우리나라 신중탱화 중 가장 많은 신중에 의하며 구성되어 있는 그림은 104위 신중탱화이다.

한편 편 신중 각각을 조상하는 예도 있다. 이 때의 신중은 같은 호법신이지만 호법의 기능이 강조되어 독립적인 신앙형태를 지니게 되는데 사천왕상, 인왕상, 금강역사상, 제석상 등이 그것이다.

2. 백제불상조각의 조형정신배경

 (1) 문화적 배경

백제문화에 대한 이해나 인식부족의 원인은 빈약한 문헌과, 유적, 유물이 첫째이고, 또한 이유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三國史記, 三國遺事인데 이 著書들이 신라중심으로 편애하게 기록된 사실이다.

백제는 문화면에서 처음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서 기본적으로 고구려계 이다가 고구려와 적대관계가 된 4세기 후반 경부터는 해상을 통해 양자강 하류의 南朝와 직접 접촉을 하게 되어 실제에 있어서 매우 가까운 문화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보여진다. 특히 백제가 중국과의 문화적 관계에 있어 고구려에 비해 대조적인 점은 고구려가 다분히 투쟁적이었던 데 비해 백제는 고구려가 방파제적 역할을 하던 관계로 오히려 바다건너 남조와의 평화적인 유대가 깊었던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리하여 당시에 있어서 문화적 파급이 서해안에서 동해안쪽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백제의 磨崖石佛이 중국의 영향 하에 우리 중서부 해안인 서산에서 初出하였고 그것이 통일신라기에 들어가면서 軍威, 慶州로 퍼져간 것은 그 같은 성격의 문화현상을 말해준다. 또한 일본의 옛 기록에 백제관계 기사가 많이 나오는 사실에 대해서 당시 史官들이 백제계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고대 일본에 그만큼 문화적 충격을 준 것은 역시 백제였으며 이는 당시 백제가 문화적으로 단연 大國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독특한 위치와 문화를 가지고 678년 간 서해안을 확보하고 있었다. 현 인천지방과 당진, 그리고 금강의 출입구 등 서해로 통하는 항구가 있어서 중국과의 교섭이 빈번하여 그 문화를 수입하는데 유리하였고, 또 남해로는 일본의 출입이 잦았던 당진 등이 있어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다. 또한 백제는 산천이 수려하여 국민성에 끼친 영향이 컸으리라고 믿으며, 이것은 바로 문화적 창조면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믿는다. 또한 백제는 일찍부터 국민의 주식이 되는 곡식을 비옥한 전답에 파종하였다 하는데, 곡식을 재배할 수 있고 광범한 평야를 가지고 있었음과 또 예나 지금이나 농사에 절대 필요하였던 수리시설, 즉 김제의 碧骨提 등이 당시 국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농사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것 등도 백제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리라고 보여진다.       

다음은 국민을 영도하던 역대 왕들이 賢君이었음을 알 수 있고, 국민들은 順厚하여 도덕관념이 높은 반면에 상무정신도 강렬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까지 경략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백제의 정치적 기반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소화시키는 한편 신라와 일본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으니 이것은 백제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이라 하겠다.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를 三國遺事에서 살펴보면 당태종 17년(善德女王 10년) 慈藏法師는 唐帝가 준 經像·袈裟를 가지고 귀국하여 建塔에 관한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은 군신과 더불어 상의하였다. 그 결과 중론이 백제에 가서 工匠을 청해오는 수밖에 없다하여 寶帛을 가지고 가서 청하였다. 그리하여 阿非知라는 공장이 命을 받고 와서 木石을 마루재고 伊于龍春 등이 소장 이백 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黃龍寺九層塔을 세운 뒤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을 통일하였다하니 탑의 영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이 탑이 신라인 자신들의 작품이 아닌 백제인 아비지의 솜씨라고 명기되어 있음은 백제의 미술이 신라인의 崇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중국과의 교섭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불교의 백제전래이다. 백제는 南朝와의 왕래로 백제의 왕실과 귀족의 중국화도 현저하였으리라 믿어지는데 이는 공주에서 발굴된 武寧王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무령왕릉의 발굴에서 부장품 중 백자접시와 陶器 등의 많은 중국 것들은 南朝文物 백제유입이 얼마나 盛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무령왕릉 입구의 石獸彫刻은 梁나라의 석수를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 그 제작이 중국에서의 鎭墓獸와는 달리 석제조각에 그 의존했다는 점에서 백제적 독자성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다.

 (2) 종교적 배경

백제왕권이 지배세력간의 갈등을 통합,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불교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왕실 불교로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국가에서 불교가 고유신앙체계에 대신하여 수용된다는 것은 정치, 사회뿐 아니라 사상, 문화 전반에 걸친 그 의의와 기능은 지대하다 할 것이다. 각 국의 국가통일의 정신적 원리로서 동시에 국가수호의 왕법사상으로 다분히 이용한데서 왕실불교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백제에는 여러 가지 불교신앙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觀世音佛을 믿는 관음신앙과 彌勒佛을 믿는 미륵신앙은 新羅·高麗·朝鮮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마음속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백제의 관세음신앙을 살펴보면 聖王이 觀音像을 일본에 보냈고, 길이가 7자나 되는 대형 금동관음상도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지만 일본에 보내어졌다. 또한 현재 일본의 나라에 있는 法隆寺에는 「백제의 관음」이라 불리는 목제 관음상이 안치되어 있으니, 이로써 백제 사람들의 관세음보살 신앙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다.

관세음신앙은 구체적인 실적으로서의 靈驗談은 철학적인 해석과는 달리 종교로서의 실질적인 입상을 진지하게 관찰한 불교신앙의 수용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경전은 『法華經』·『彌陀經』·『十一面觀音經』·『4手觀音經』·『般若心經』·『華嚴經』·『楞嚴經』 등 7가지이다.

백제인들은 일찍이 수많은 미륵불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의 성왕 때 미륵석불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기록과 함께 국내에는 彌勒半跏思惟像이 남아 있다.

6·7세기 동북아시아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백제미륵사의 창건설화인 彌勒寺錄記說話에 따르면 백제의 무왕이 왕비와 함께 師子寺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에 있는 큰 연못가에 오니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났다. 이를 본 무왕이 어가를 멈추게 하고 미륵삼존에게 경배하자 왕비가 '여기에 큰 절을 짓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했다. 무왕이 이를 허락하고 신의 힘을 빌어 하룻밤에 산을 갖다가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고 미륵삼존을 모실 금당 셋과 塔 셋을 창건했다고 한다.

백제불교에 유포되었던 미륵신앙과 미륵사 창건의 관계를 의미 있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彌勒經에서 펼쳐지는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미륵불출현의 龍華回像을 백제 땅 益山에 끌어들여 구체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미륵신앙은 하생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은 미래불로서 미래의 부처가 되기 위하여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는데, 현재불인 석가의 세계가 다하는 56억 7천만년 뒤에는 인간세계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세 번에 걸쳐 설법을 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이 죽은 뒤에 도솔천에 상승했다가 미륵불과 함께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세 차례 설법에 참여하려는 신앙을 彌勒上生信仰이라 하고 도솔천으로의 상승은 생각하지 않고 미래에 있을 세 번의 설법에만 참여하려는 신앙을 彌勒下生信仰이라 한다.

戒律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상생신앙은 백제 귀족들 사이에 성행했는데, 예를 들어 스스로 新律의 서문을 썼던 백제의 성왕과 殺生禁止令을 내렸던 法王 등은 율령을 통하여 미륵상생신앙적 통치를 했다. 그러나 彌勒寺錄記說話에서 보여주듯 무왕 대에 이르러서는 미륵 삼존에 귀의하는 미륵하생신앙이 시작되었으니, 백제의 미륵신앙은 상생신앙에서 하생신앙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3. 백제불상의 조형성

여기에서는 백제시대의 불상 중 金銅佛과 石佛의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1) 金銅佛

①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이 불상은 높이가 9.3cm이고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6세기 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면 충남 서산군 보원사지에서 1968년 발견된 것이다.

비록 두 발 이하를 잃고 있으나 착실한 조각 수법과 두꺼운 도금이 이 불상의 우수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素髮의 머리 위에는 肉 가 있고 相好는 모가 난 듯한 긴 얼굴이다. 눈은 俯眼이고 코와 입에 손상을 입고 있으나 미소가 있음이 분명하다. 목에는 三道가 없고 法衣는 두꺼워서 어깨 이외에는 거의 몸의 윤곽이 나타나지 않았다. 옷자락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넓게 펴졌는데, 앞에 V자형의 주름이 있음은 고구려의 延嘉七年銘 佛像이나 癸未銘 三尊佛像과 상통한다. 옷자락 밑이 좌우 대칭으로 Ω형의 주름이 잡힌 것이다. 왼쪽 손목에 걸쳐 뻗는 法衣자락은 古式을 나타내고 있다. 높은 肉 , 약간 앞으로 숙인 긴 얼굴, 세장한 신체 施無畏, 與願印의 손모양, 오른쪽으로 휘어지면서 내려간 물결형 옷주름 등에서 延嘉七年銘 佛像과 비슷한 樣式系列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이 얼굴은 癸未銘 三尊佛像에 가깝게 뺨이 팽창되었고 僧脚崎가 Y자형으로 되어 있다던가 옷 양쪽 깃의 지느러미 같은 돌출한 날개가 없어지고, 衣端의 주름들이 극도로 장식화 되는 것 등에서 延嘉七年銘 佛像과는 다른 진전된 양식을 찾아 낼 수 있다.

②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

이 불상은 몸 높이 3.9cm의 소형 금동불로서 1959년 부여군 규암면 신리 중뜸부락 뒷산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상은 워낙 작고 전면에 녹이 많이 슬어 있어서 정확한 세부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대체의 형태만 알아 볼 수 있다. 머리는 몸에 비해 큰 편이고 큰 육계가 있다.

이목구비는 분명하지 않으나 눈은 俯眼이고 코는 크며, 입가에 미소가 있는 듯도 하다. 상체의 法衣는 비교적 얇아서 두 팔의 윤곽선이 나타나 있고, 두 손은 배 앞에 모아 마주 잡은 듯하다. 어깨에 팔에 걸쳐 굵은 융기선으로 옷주름이 나타나 있고 가슴 앞에는 큰 U자형 옷깃이 보인다. 하체는 법의가 두꺼운데 무릎을 꿇고 앉은 듯하며 무릎 위에도 더욱 굵은 융기선 옷주름이 있다. 臺座는 須彌壇形式이나 밑부분이 없어진 듯하며 옷자락은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사각형 대좌 위에 두 손을 깍지 끼어 禪定印을 짓고 몸은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자세는 뚝섬 출토 金銅坐像과 양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③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이 불상은 높이가 10.2cm이며 金銅如來坐像과 함께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서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6세기 후반 작품이다.

전면에 자주색이 나고 광배를 함께 부어 만들었다. 相好는 아래 볼에 살이 많아 통통한데 머리에는 三面冠을 썼고 머리칼이 길게 늘어졌다. 이목구비는 작은 편이고 입가에는 미소가 있는 듯도 하다. 목에는 三道가 없고 짧은 목걸이가 걸려 있다. 法衣는 두꺼워서 몸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 옷자락이 어깨부터 대좌에 걸쳐 좌우대칭으로 여러 단 고기 지느러미같이 전개되고 있으며, 天衣 자락은 앞에서 X형으로 교차되고 있다. 手印은 오른손이 與願印이고 왼손이 施無畏의 이례적인 通印인데, 모두 작은 손가락 둘을 꼬부리고 있다. 발 밑에는 伏蓮座가 있고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두 줄 음각선으로 원을 돌리고 그밖에 역시 음각선으로 화염문이 간단히 새겨져 있다. 배면 등 밑에는 구멍이 있는 꼭지가 있는데 이는 불상을 고정시키는데 필요했던 듯하다. 팽창된 뺨과 넓적한 얼굴 앞에서 X자형으로 교차된 天衣의 衣紋, 새깃 같은 양측의 옷자락 돌출, 두 다리의 표현, 대좌와 연꽃무늬는 물론이고, 특히 세 송이의 꽃모양 寶冠과 양쪽 귀로 내려뜨린 너무 지나치게 장식적인 머리 처리 등은 추상성이 강한 장식적 표현이 되고 있다.

④ 금동보살삼존상(金銅菩薩三尊像)

이 불상은 높이가 8.8cm이며 국보 134호로 현재 황규동씨가 소장하고 있다. 一光三尊의 형식을 취한 불상으로 양옆에 스님이 합장하고 있는 형식이나 본존은 이례적으로 보살형을 취하고 있다.

본존은 머리에 三面冠을 썼고, 머리칼이 두 어깨에 늘어져 있다. 相好는 갸름하나 이목구비의 표현이 정교하지 않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분명하고 목에는 삼도가 없다. 법의는 두껍고 불신 좌우측에서 거의 대칭형으로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옷깃이 전개되었음을 이 시대의 공통양식이다.

두 脇侍佛은 羅漢像인데 머리를 깎고 이목구비가 분명하다. 몸은 두꺼운 법의에 싸여 있으며 두 손은 앞에 들어 합장하고 있다. 광배나 대좌는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색 있는 것은 연꽃무늬이다. 外緣에는 평행 음각선으로 된 고식 화염문이 있고 대좌는 밑에 작은 仰蓮과 위에 큰 伏蓮을 각각 음각한 것으로 끝이 뾰족하고 어깨부분이 넓으며, 이 안에도 2중으로 U자꼴을 새겼는데, 모두 선각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광배의 머리둘레 연꽃도 끝이 뾰족한 선각무늬이다.

⑤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이 불상은 높이가 11.5cm, 보물 330호이며 1936년 부여읍 군수리 백제시대 사지를 발굴할 때 塔址地下에서 石造如來坐像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머리에는 三山冠을 썼고 머리칼이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相好는 볼에 살이 많이 찌고 눈은 아래를 보며 입가에 미소가 있다. 목에는 三道가 없고 가슴에는 작은 목걸이가 걸려 있다. 法衣는 두꺼워 밑에서 두 다리가 나타나 있을 뿐이고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여러단 전개되었으며, 天衣자락은 앞에서 X형으로 교차되었다.

이 불상의 조형적 특징을 보면 첫째, 전혀 측면과 후면을 고려하지 않은 正面觀 위주의 평면조각 즉 偏佛이라는 점이다. 둘째, 기이한 형태로 늘어진 좌우대칭적인 衣褶處理한 기하학적이고 관념적인 옷주름의 표현이다. 셋째, 둥글고 平偏한 얼굴에 나타난 평화롭고 여유 있는 표정과 양 입끝은 위로 당겨 미소 - 흔히 말하는 古拙의 미소 -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2) 石佛

① 석조반가사유상(石造半跏思惟像)

이 석불의 높이가 13.3cm이며 일제 침략기에 부여 부소산 동쪽의 建物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접하는데, 발견 당시 조사를 위하여 일단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광복 후 반송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백제시대에 적지 않은 반가상이 조성되어 金銅의 우수한 작품을 남기었으나 이 석상과 같은 것도 상당수 제작되었다. 이 불상은 불행히 상반신을 잃고 있으나 그러한 석상 중에서도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이 불상은 상체가 허리에서 절단되었는데 그 절단면으로 보아 반가상 특유의 가는 허리임이 一見하여 짐작된다. 왼쪽 다리를 늘어뜨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쪽 발은 얹고 왼손으로 그 발목을 잡고 있는 공통된 형식이다. 왼쪽 발은 없어졌으나 그 자리에 구멍이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 足座와 함께 따로 만들어 끼웠던 듯하다.

臺座는 후면의 윗부분에 單蓮 10瓣을 돌렸고 밑면은 타원형으로 이루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蓮華臺座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뚫은 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1.2cm의 둥근 구멍이 있다. 이 같은 臺座의 형식은 국내외에 남아 있는 遺例에서나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彌勒半跏石像에서도 볼 수 있다.

②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이 석상은 높이가 13.5cm이며, 보물 329호로 1936년 부여읍 軍守里寺址에서 金銅菩薩立像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밑에는 방형의 높은 대좌가 있고 그 위에 結跏趺하고 앉은 좌상이다. 옷주름이 대좌의 반 이상을 덮었고 대좌의 상단은 밑의 노출된 부분보다 넓어 불신과 거의 맞먹을 만큼 크다. 밑에 늘어진 옷자락의 주름은 Ω형으로 좌우대칭의 형식을 취하는 고식을 보여 주고 있다. 머리는 剃髮인데 肉 는 작다. 두 귀는 착 붙어서 거의 없는 듯하고 눈은 俯眼에 작은 입가에는 미소가 뚜렷하며 相好는 살이 많은 원만상이다. 법의는 두꺼워서 두 무릎 이외에는 몸의 윤곽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옷무늬는 매우 간략하고 무릎 사이에 처진 옷자락에는 U자형의 주름을 낸 듯하다. 가슴에는 卍자가 음각되었고, 두 손은 손등을 밖으로 보이면서 오른손을 안에, 왼손을 밖에서 잡고 있어 古式의 手印이다.

이 석상의 조형적 특징은 우선 얼굴을 숙인 것이 아니라 번쩍 들었고, 두 뺨이 적당하게 팽창하여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흡사 현실적인 백제 사람의 구김살 없는 소박한 얼굴을 대하는 것 같다. 어깨는 角이라고는 전혀 없고 둥글면서도 좁아지고 있으며, 두 팔굽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처리하여 마치 무릎 위에 두 팔굽을 기댄 채로 앉아 있는 모습 같다.

③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이 석상은 높이가 1.56m이며 국보 45호로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불상은 법의는 通肩인데 비교적 얇게 처리되었으면서도 무겁게 느껴지며 도안화된 느낌마저 주고 있으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 안정감이 있다. 두 손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 앞에 자연스럽게 놓은 이례적인 수인이다. 또한 가운데 손가락과 무명지를 구부린 퍽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거구이지만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며, 이를 감싼 법의는 얇아지고 몸에 밀착하여 현실적으로 된 것이며, 주름 역시 凸형으로 바뀐 데다 가슴에는 승각기가 비스듬히 흐르고, 여기에 띠매듭이 있어서 벌써 운삭식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대좌로 흘러내린 裳顯座의옷주름은 중심의 U자형 옷주름의 좌우대칭으로 Ω꼴의 주름이 두 단씩 표현되었지만 그보다는 생략된 편이며, 光背는 6세기 금동불에 흔히 있는 광배이지만 불꽃 무늬가 퍽 장식적으로 처리되었다. 광배는 頭光과 身光 윤곽을 잡고 두광에는 三重 圓圈을 돌리고 각각 연꽃을 조각하였으며, 그밖에는 古調를 띤 화염문 속에 7구의 化佛을 표현하였다. 광배 상부가 손상되었으나 원래는 丹形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④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이 석불은 本尊 전체높이가 2.8m, 半跏像 전체높이 1.66m, 菩薩立像 전체높이 1.7m이며 국보 84호로 1960년에 발견되었고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산골 높은 암석 위에 조각되었다. 산밑에는 시내가 흐르고 普願寺址로 통하는 길이 나 있다.

本尊은 당당한 체구의 立像이고 머리에 寶珠形 頭光이 있다. 소발한 머리에 육계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눈, 코, 입이 크며, 또 묵중한 옷이 중심선을 따라 평판적으로 내려가고 있으며, 특히 띠매듭이 나타나고 승각기가 Y꼴로 표현되고 있다. 옷 끝단도 대의의 손목에서 내려간 끝단에만 Ω꼴 주름이 두 개 잡혔을 뿐 대의의 끝은 발위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얼굴은 눈을 크게 바로 떠서 쾌할하게 웃고 있다. 이 불상은 눈이 큼직하고 풍체 좋은 백제 사람이 유쾌하게 웃는 모습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었지 않았는가 한다.

이런 쾌할한 웃음 좌우 보살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보살들은 눈을 크게 뜨지 않은 것이 다르다. 또한 서산 마애불에서 특이한 점으로는 삼존불의 脇侍佛로서 半跏像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는 특이한 것이지만 백제의 반가상으로 이렇게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니 더욱 귀중한 것이리라 하겠다.

이 불상의 위치가 서해안에 가까운 서산이라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보나 조각 양식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예이어서 백제조각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성 연대는 조각 수법으로 보아 6세기 말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⑤ 태안마애삼존석불(泰安磨崖三尊石佛)

이 석불상의 높이가 2.55m, 좌우여래상 높이 2.42m, 중앙보살상 높이 1.33m이며 보물 432호로 태안면 바닷가에 위치한 岩山으로 된 白華山의 산정 밑에 높이 3.94m, 넓이 5.45m, 東面한 암산 위에 좌우의 여래입상과 중앙에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오랜 풍화로 인하여 磨損이 심하나 대체의 윤곽은 알 수 있다.

북쪽에 있는 여래상은 素髮에 肉 는 작고 相好는 살이 찌고 장대하다. 두 귀는 크고 길며 눈은 俯眼인데,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三道가 없고 몸은 어깨가 벌어져 역시 장대한 체구이다. 법의는 두꺼운 通肩인데 옷주름은 마손으로 그다지 분명하지 않으나 U자형이 평행되면서 힘차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들어서 施無畏의 印이나 끝의 두 손가락을 꼬부렸고, 왼손은 가슴 앞에까지 들어서 손등을 밖으로 하여 작은 합 같은 것을 잡고 있다.

남쪽의 여래상 또한 조각 기법이 북쪽 여래상과 동일하다. 작은 肉 , 尊容의 미소, 장대한 체구, 소박한 옷주름 등 양식적으로 다를 바 없다. 다만 手印에 있어 通印을 취하고 있으나, 모두 끝의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음은 백제불상의 공통된 양식이다.

가운데 보살상은 마손이 가장 심하여 조각의 세부를 알 수 없으나 머리에는 높은 관을 썼고 좌우에는 돌기가 있다. 相好는 더욱 손상이 많아 알 수 없으나 윤곽으로 보아 여래상과 같은 수법으로 보인다. 목에는 三道가 없으며 두꺼운 법의가 밑으로 처져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서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寶珠를 잡고 있다.

이 삼존은 모두 문양이 없는 보주형 광배가 따로따로 있고, 지금은 묻혀서 보이지 않으나 조사 결과 伏蓮臺座가 각각 조각되었다.

Ⅲ. 결론

이상으로 불상의 종류와 불상 조형의 배경, 현재 남아 있는 백제의 불상을 소개하면서 불상의 조형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불교조각의 중심은 불상이다. 불상은 불타(佛陀, Buddha)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조각상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불교가 유포되어진 곳에서는 유명무명의 불상이 수없이 제작되어졌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불교가 존속하는 한 불상은 언제나 새로이 많이 제작되어질 것이다.

백제가 공식적으로 백제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보다 12년 늦은 384년의 일이었다. 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 전도되었고 佛像과 經文이 전래되었다. 그 다음해 절을 짓고 봉안할 불상은 輸入佛像이었는 국산불상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본격적인 寺院이 이루어졌다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작은 輸入佛像보다는 국산제 불상을 사용했다 보는 것이 온만한 견해일 것이다.

이 때 불상조각을 만들었다는 최초의 불상조각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뚝섬에서 발견된 불상과 비슷한 양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백제의 불상은 中國六朝時代의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고구려의 경우와 같지만 고구려가 北朝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대해 지리적, 정치적 관계로 南朝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서기 541년 梁에서 工匠들이 백제로 왔다는 三國史記의 기록 같은 것도 그러한 百濟·梁간의 생생한 문화교류의 일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백제불상은 기본적으로 매우 자연주의적이며 표정이 온화하고 인간적이고 대부분의 얼굴에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는 특유한 미소를 띠고 있어 고구려나 신라의 불상과는 구별 할 수 있다.

※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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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