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대의 도읍별 특징

 

                                                ·학  번 : 20010420

                                                        ·이  름 : 황 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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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흥망사를 개관해 보려면 먼저 그 전역사를 몇 개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이 경우 수도의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시기구분할 수 있다. 신라가 시종일관 경주를 고수했으나, 백제는 한성에서 탄생되어 웅진(공주)으로, 다시 사비(부여)로 몇 차례 수도를 옮겼다. 이 천도는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실로 그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데 왜냐하면 천도를 하게 되면 그에 수반하여 족제적 성격이 강한 왕도의 부족조직은 일단 약화되기 마련이며, 이에 따라 새로운 도읍지에 연고를 갖고 있는 재지세력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지배세력을 다시금 편성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정치상의 개혁을 단행할 필요성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백제의 경우 한성시대와 웅진시대 그리고 사비시대는 각기 국가체제라든가 사회조직면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1. 한성시대(漢城時代;B.C 18A.D 475)

한성시대는 백제 역사 중 493년 간이나 되어 그 알려진 것에 비해 너무나 장구한 기간이다.

이 시대에는 마한의 일국인 백제가 차츰 성장하여 종주국인 마한을 압도한 끝에 마침내 마한사회 전체를 통일했다. 한성시대 백제의 수도를 위례성이라고 했으며, 백제가 위치한 한강 하류지역사회는 중국 군현과 인접해 있었던 관계로 일찍부터 군현세력과 접촉하면서 성장, 발전하였다. 본래 한강 하류의 충적평야 지대는 농경행활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엇거니와, 특히 낙랑군으로부터 이 지방에 야철(冶鐵) 기술이 전해짐으로 해서 사회 발전에 커다란 활력소가 마련되었다.

백제의 마한 정복은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제의 성장을 견제하는 중국 군현세력 및 맥족(貊族)의 방해공작이 만만치 않았고 한편 백제에 밀리고 있던 마한세력도 단결해서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군현세력이 남김없이 소멸되면서 백제의 남진은 다시금 계속되었다.

백제가 그 전성기를 맞기는 近肖古王(346375)때였다. 태자인 仇首와 함께 서남해안의 마한 잔존세력을 경략하고 북쪽으로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옛 대방군(帶方郡) 땅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와 전투하기도 하였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케도 하여 백제는 현재의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전부와 낙동강 중류지역, 강원, 황해 양도의 일부까지를 점유하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같이 영토가 크게 팽창됨에 따라서 자연히 백제의 국제적 안식도 넓어지게 되어 27년(372)에는 서쪽으로 중국 東晉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고, 남쪽으로는 倭와 통하여 그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후 고국원왕 전사에 기인해 고구려와 백제간의 분쟁이 더욱 악화되면서 크고 작은 공방전이 그칠 날이 없었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균형이 고구려에 광개토왕이 등장함으로써 무너지고 이는 광개토왕릉비문에 주시한 바와 같은 연이은 백제의 참패로 이어진다. 이후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위협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른바 羅濟동맹이 성립된 것이다.

  최근 서울 풍납동의 풍납토성의 발굴로 이제까지의 백제사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발굴을 통해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시기인 B.C 18년의 설에 큰 근거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제껏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어던 정치적 목적에서 조정한 가공적인 연대로 짐작하고 백제의 연맹왕국으로서의 성립이 이보다 늦었을 것이라고 보았었다. 하지만 풍납토성내부의 유물은 모두 기원전후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의 것이 존재하고 비록 폐성이 되었지만 범람한 한강의 퇴적물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유물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에 백제가 한강유역 일대의 여러 성읍국가들을 거느리는 연맹왕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들어서 제8대 고이왕(234286)이 여러 가지 제도정비와 법령의 반포를 통해서였다고 보았으며 중국 정사인 <周書>등에 나오는 백제 시조가 仇台(구태 혹은 구이로 발음될 수 있음)라는 기록을 근거로 仇台(즉 고이왕) 시조설이 나오기도 했었다.

2. 웅진 시대(熊津時代;475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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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시대라함은 백제 개로왕(蓋鹵王;455 475)이 고구려군에 의해 뜻밖에 한성침공을 받아 참살을 당한 후 그의 동생 文周가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남천할 때부터 역사가 전개되어 聖王(523 554)이 왕권 및 중앙집권적 지배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의시기를 말하고 있다. 백제의 웅진 천도는 미리 계획된 구안에 따라 행해진 것이 아니고, 고구려군의 불시적인 침공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후 백제사의 전개에 있어서 여러 측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웅진천도의 직접적인 계기는 개로왕이 추진했던 무리한 왕권강화책에서 비롯되고 있다. 개로왕은 대내적으로 진씨(眞氏), 해씨(解氏) 등과 같은 대성귀족들의 발호를 제어하여 왕권 중심의 새로운 지배 질서를 확립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더욱 첨예화되어 가고 있던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그의 동생인 문주를 上佐平에 임명하여 왕정을 보필하고 왕실세력의 결속을 다지게 하였고, 또 다른 동생인 昆支에게는 병권을 장악케 하는 등 왕족을 중용하여 친정체제의 기반을 다지고, 기존의 귀족 중심의 연합정치체제를 고수하려는 대성 귀족세력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귀족세력이나 일반 백성들로부터 불을 사게 되어 그들이 이탈하는 현상을 빚기도 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구책의 일환인 전방위 외교책을 강구하였다. 신라와는 비유왕(毘有王;427 455)에 맺은 나제동맹체제를 기본 축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였고, 왕제 곤지를 일본에 파견하여 유사시에 請兵을 위한 외교적 포석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조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北魏에도 고구려를 응징하기 위한 군사파병을 요청하였다(472). 이것은 도리어 고구려를 자극하여 475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고구려군은 3만의 대병을 거느리고 불시에 백제의 왕도였던 한성을 함락시켜 개로왕을 참살하였으며,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무렵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는 신라로부터 원병 1만명을 얻어 가지고 한성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으나, 개로왕의 참살 비보를 듣고 중신들의 보필을 받아 웅진으로 남천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웅진시대의 역사가 펼쳐진다.

그러나, 웅진 천도 직후에는 漢城의 상실, 권신의 발호 및 왕권의 실추로 인하여 일년의 政情불안이 야기되었다. 이후 한 동안의 政情불안을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시켜 왕권의 전제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동성왕(東城王;479 501) 때의 일인데 동성왕은 귀족세력 전체를 통제하고 在地세력과의 연결을 꾀하는 과정에서 담魯제도를 시행하는데 이 지방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강화하려고 한 이 제도는 한편으론 재지세력의 이해와 충돌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무령왕(武寧王;501 523)대에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하류유역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선제 공격하여 크게 이겨 고구려의 침략이 한동안 뜸하게 하여 다시 고구려를 상대로 하여 당당히 맞설 수 있을 만큼 국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령왕을 이은 聖王이 泗 로 천도하면서 재중흥의 발판으로 삼게 된다.

3. 웅진에서 사비로..

웅진(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어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었으나, 그 자체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서기에는 너무나 협소햇다. 그래서 충족한 평야 지대였던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미 동성왕 때부터 공주 서남방 30km쯤 떨어진 부여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 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부여지방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 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 검토해 왔다. 錦江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한 점이 있었다. 즉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 작업 끝에 재흥의욕에 불타는 성왕의 웅대한 경륜에 의해서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漢城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을 살펴볼 때 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要害地)에 부분적으로 나성(羅城)을 쌓아 방어 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이로써 사비도성이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地勢의 취약점은 크게 극복된 셈이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 아래 남쪽에 지었는데, 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4. 사비시대(泗 時代;538 660)

왕(聖王;523 554)의 천도와 더불어 22부의 중앙관서와 5부, 5방의 수도 및 지방 행정제도가 갖추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러한 관제정비야말로 왕권 강화의 핵심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한 성왕은 불교의 진흥을 꾀하고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굳게 하였다. 한편, 밖으로는 梁과 倭와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여 梁으로부터는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다.이렇게 길러지고 조직된 힘을 가지고 성왕은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는 한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성왕이 관산성(管山城)싸움에서 전사하면서 이제껏 120년간이나 계속되던 신라와의 동맹관계는 깨지고 만다. 성왕을 잃음으로써 백제의 왕권강화의 노력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여 왕권이 위축된 반면 대귀족 세력이 크게 대두하게 된다.

그러나 무왕(武王;600 641)때에 이르러서는 국력이 회복되었고, 동맹관계에서 배반한 신라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인 데 힘입어 왕권 또한 전제화(專制化)되어 간다. 무왕은 전북 익산 지방을 중시하여, 이 곳에 別都를 경영하고 나아가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그것은 동방 최대규모의 미륵사를 이 곳에 창건한 것이라든지, 또한 흔히 궁원(宮苑) 안에 있어서의 내불당(內佛堂)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제석사(帝釋寺)를 이 곳에 세운 것으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아마도 무왕은 사비를 떠나 이 곳에 新都를 경영함으로 해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꾀하려한 듯하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의자왕(義慈王;641 660)은 무왕의 뜻을 이어 신라에 대한 공격에 열중한 나머지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고 羅唐간에 있었던 국제관계 정세에 어두웠고 失政이 겹치면서 사회 혼란 속에 겹친 나당연합군의 대공세를 막을 여력이 없어 결국 서기 660년 680여년의 장구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