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개관

김 민 수

 

 1.백제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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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왕과 왕위계승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이다. 그에 따르면, 백제는 시조 온조왕을 포함하여 모두 31명의 왕이 있었으며 이들의 성은 모두 부여씨(夫余氏)였다. 왕위 계승은 부자상속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예외적으로 5대 초고왕(肖古王)부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까지는 일부 형제상속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 한편,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왕실교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과 같이 부여씨가 대대로 왕위에 오른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로 그 이전에는 다른 성씨의 왕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실이 교체된 시기를 8대 고이왕(古爾王), 11대 비류왕(沸流王), 12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중 어느 때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왕실교대론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다음의 내용을 들기도 한다.

 

img58.gif▶즉, 『삼국유사』「남부여 전백제(南夫余 前百濟)」조에는 백제의 왕실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해씨(解氏)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이 외에도 다른 중국 쪽 기록을 참고할 때, 백제의 왕 중 부여씨임이 비교적 분명하게 입증되는 최초의 왕은 근초고왕이고 그 이전의 왕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다만, 5대왕인 초고왕의 이름이 13대 근초고왕과 같다는 점 때문에 초고왕 이하가 모두 부여씨이고, 그 이전의 개루왕까지는 부여계통의 해씨(解氏)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8대 고이왕과 그의 자손인 9대의 책계왕(責稽王), 10대 분서왕(汾西王), 12대 계왕(契王) 등을 우씨(優氏)로 보고 일정 기간 부여씨 대신 우씨가 왕실을 차지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2.백제의명칭

img59.gif▶ 백제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위례성에 정착한 온조가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로 하였으나, 후에 비류 집단이 합류하면서 명칭을 백제(百濟)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같은 명칭의 변화는 한자(漢字)에 입각한 해석으로 생각되는데, 나라가 성장하면서 ‘십(十)’에서 ‘백(百)’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백’을 염두에 두고 ‘십’을 지어낸 듯하다. 한편, 중국의 진수가 3세기 후반에 편찬한 『삼국지』의 「한전(韓傳)」에는 삼한(三韓)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마한 54개 소국 중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백제국(伯濟國)의 위치가 한강 유역으로 추정되고 백제(百濟)와 같은 음을 가진 한자라는 점에서 백제국(伯濟國)을 백제(百濟)의 초기단계로 이해되고 있다.

 

▶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한자의 뜻이 더 좋고 세련된 백제(百濟)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720년에 편찬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아래그림)에는 ‘위례국’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위례성에 도읍한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위례국이 백제라는 국호보다 먼저 사용되었던 정식의 국호였을 가능성과, 단지 하나의 별칭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모두 있다고 하겠다.

 

img60.gif▶ 또한, 시조 온조의 이름에서 백제라는 국호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온’은 순수 우리말에서 ‘백’을 뜻하는데, 이 때의 백은 아주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온조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을 가지며 ‘온제’라 읽을 수 있으며 ‘백제(百帝)’와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그 외에, 광명을 뜻하는 우리말인 ‘밝’과 ‘백’을 관련시켜 태양숭배사상을 함축한 국호로 보기도 하고, ‘백(百)’과 ‘맥(貊)’의 음이 모두 ‘백’이라는 것을 들어 맥족이 세운 나라를 뜻하는 국호로 보기도 한다.

 

 

3.백제의 성립

img61.gif▶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온조(溫祚)를 중심으로 한 건국설화와 비류(沸流) 중심의 건국설화가 함께 실려있다.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졸본부여의 둘째딸과 주몽 사이에서 온조와 비류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인 유리(琉璃)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온조와 비류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위례에 정착하였다가 비류가 죽자 그 무리가 온조집단에게 통합되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해부루(解夫婁)의 서손인 우태와 졸본부여 연타발의 딸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우태가 죽고 소서노가 졸본으로 망명해 온 주몽과 결혼한 후 그의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나, 주몽이 부여에 두고 왔던 아들 유리가 왕위를 잇자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로 이주해 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한다.

 

▶ 설화의 내용으로 보아, 백제를 건국한 중심세력은 북에서 내려온 부여·고구려계의 이주민 집단이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실은 백제 역사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백제 왕족의 성(姓)이 부여(夫余)씨이고,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유사한 대형무덤이 한강유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점도 그 중 하나이다. 또한, 5세기 중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였으며 6세기 전반 성왕 때에는 일시적으로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기도 하였다.

 

▶ 비류와 온조가 이주해 온 한강 유역에는 기원 전후부터 상당수의 부여·고구려계인들이 꾸준히 내려와 정착하고 있었다. 또한,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이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남쪽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서 온조집단은 하북위례성에 정착하여 십제(十濟)를 세웠다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각지에 정착한 이들은 집단별로 서로 통합되어 갔고, 초기에는 미추홀 집단이 보다 우세하여 연맹체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차츰 위례 집단이 강해져 중심세력이 되는 과정이 건국설화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4.백제의 발전과 전개

▶ 백제가 처음 건국한 한강유역은 지리적으로 서북과 동북 방면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집단이 거치게 되는 위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 정착한 유이민 집단들을 통합하고 인근 마한의 여러 읍락들을 병탄하면서 집권력 있는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북과 서북 방면에서 침공해 오는 세력들을 저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의 초기 기록에는 동예나 낙랑군과의 분쟁에 대한 것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백제는 주변국과의 관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성장, 발전, 쇠퇴하였으며 그 과정은 도읍을 기준으로 세 시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 한성(漢城)시대

한성시대는 백제가 건국된 때부터 고구려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전사했을 때까지로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있던 시기이다. 고이왕(古爾王) 때에 이르러 고대국가체제를 갖추었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에서부터 직계인 초고계(肖古系)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 근초고왕은 당시의 대표적 귀족 세력인 진씨 세력 출신의 여자들을 왕비로 맞이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 때부터 백제는 아신왕대까지 진씨가 왕비족을 이어가게 되었다.

왕권을 강화한 근초고왕은 지방 통치조직으로담로제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은 벌여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병합하여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영역을 확장하고 나아가 낙동강 유역의 가야 지역까지 영향권 안에 포함시켰다. 또한, 현도군이 물러간 것을 노려 예성강 유역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키고 지금의 황해도 신계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나아가, 근초고왕은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하여 요서 지방에 무역기지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고,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상업권을 형성하고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였다.

근초고왕 이후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수용하여 고대국가의 지배이념으로서 이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침류왕이 죽은 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또한, 아신왕과 전지왕의 즉위를 둘러싸고 해씨세력과 진씨세력이 갈등하면서 국력을 낭비한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정벌로 58개성, 700여개의 촌락을 잃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사업과 활발한 대중국외교를 펼쳤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왕마저 전사하게 된다. 이에,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게 되니, 이 이후를 웅진시대라 하겠다.

 

▶ 웅진(雄鎭)시대

웅진시대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한 때(475년)부터 성왕이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수도를 사비로 옮긴 538년까지의 기간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자,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文周) 왕자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서 1만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한 상태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한 문주(文周)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백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천도 후 백제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안으로는 한성에서 남하해 온 귀족들이 분열하여 국정을 좌우하던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살해하였다. 또한, 그 뒤를 이은 삼근왕도 귀족들의 정쟁으로 인해 3년 만에 물러나고 동성왕이 즉위하는 상황이 벌어져 왕권도 강력한 힘을 갖추지 못하였다. 게다가,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게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하면서 백제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조성되어 있었다.

내외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 동성왕(東城王)은 신라왕족인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아 신라와 돈독한 동맹체제를 유지하고 이를 통해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또한, 신진 지방 세력들을 중앙 정치에 등용하여 한성시대의 세력들과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도 남제(南濟)와 다시 교통을 열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 역시 피살되고 그 뒤를 이어 무녕왕(武寧王)이 즉위하였다.

 백가의 난을 평정한 무녕왕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왕권강화에 힘썼다. 그를 위해, 고구려의 남진을 억제하고 동시에 중국 양(梁)나라와 외교를 맺어 국제 관계에서 백제의 위치를 새로이 하였다. 무녕왕은 또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경제력을 보완하기 위해 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유랑자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 농업에 종사토록 해, 생산력 증대와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이르러 백제는 비로서 정국이 안정되고,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침공으로 위축된 국력을 상당히 회복하여 새로운 중흥기의 기초를 다졌다. 이데 대한 대표적 증거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화려하고 풍부한 부장품들을 들 수 있다.

▶ 사비시대

사비시대는 성왕 16년에 사비로 천도한 이후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를 말한다. 무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동성왕과 무녕왕을 거치며 이룩한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백제의 중흥과 왕권 강화를 위해 사비로 천도하였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로 고쳐,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하고 중국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그 문물을 받아들였다. 또한, 16관등제와 22부제 등 중앙 관제와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가 정치일선에서 밀려 나게 되었다.

이같이 왕권을 강화하여 백제 중흥의 시대를 연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위협과 귀족 세력의 내분으로 인해 한강유역을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강 하류와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은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마저 차지해 버리자 이에 격분한 성왕이 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 결과, 위덕왕이 즉위한 이후 다시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가 나타났다. 6좌평제로 불리는 것으로 사비시대 전기의 5좌평제를 확대, 개편한 최고귀족회의체였다.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무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 단행, 익산 천도를 위한 왕궁과 제석사(帝石寺) 건설, 거대한 미륵사(彌勒寺) 창건 등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익산 천도가 실현되지 못하면서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이후, 의자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5.백제의 정치제도

 

▶ 1. 중앙 정치제도

 백제의 중앙통치조직의 핵심은 관등제도와 관직제도 및 귀족회의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국가운영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초기의 부족 세력 수장들은 중앙의 귀족으로 바뀌게되면서 관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로써 그들은 지배체제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관직을 통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귀족회의체는 이들이 국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구였다. 이러한 중앙통치조직은 백제가 한성시대를 거쳐 웅진, 사비로 천도하는 과정 속에서 상황에 맞게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백제가 소국연맹단계에 있을 때에는 정치수준이 미약하여 관등과 관직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매우 단순하고 소규모적인 관제가 있었을 것이지만, 이들 관제의 명칭은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이후 중앙관제로 좌보와 우보가 처음 등장을 하고, 고이왕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앙귀족화된 세력들이 왕도의 일정한 지역에 편제되어 자리잡게 된다. 이들 귀족의 정치적 거주처가 바로 '부(部)'였다. 당시 성립된 부는 모두 5부였는데, 이 명칭은 후에 동, 서, 남, 북, 중부라고 하는 방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제 정치체제는 5부체제라고 할 수 있다.

 5부체제의 성립으로 중앙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배조직도 확대되는데, 그러한 확대과정에서 관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관등은 중앙귀족들을 서열화하여 그들 상호간의 위계를 구별지어주는 제도적 장치였는데, 당시 상위관등으로는 좌평, 달솔 등이 있었고 하위관등으로는 좌군, 진무 등이 있었다. 고이왕은 이러한 관등을 귀족들에게 수여함으로써 이들을 왕권 아래로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고이왕대를 거쳐 근초고왕대에 오면서 백제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비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후대의 16관등체제가 거의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 이후 백제는 개로왕 때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전사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후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정치는 불안정하게 이어졌고 무녕왕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안정되었다. 그 토대 위에서 성왕은 다시 사비로 천도하여 백제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비된 관등제가 바로 16관등제이다.

 16관등제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좌평이었다. 좌평은 1품으로서 최고의 관등이었고, 동시에 귀족회의체의 의장으로서의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좌평의 정원은 처음에는 1명이었으나, 차츰 분화하여 상, 중, 하좌평 등이 만들어졌고, 정원도 5명이 되었다. 한성시대의 이 5좌평제는 웅진을 거쳐 사비로 천도한 후,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패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자 정원이 6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백제의 6좌평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한편 백제의 중앙행정조직은 한성 및 웅진시대에 관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 사비시대의 것은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의 백제전을 통해 대략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백제의 행정부서는 모두 22부인데, 이 22부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구성되었다. 내관은 궁중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이며, 외관은 일반 행정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이처럼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부서가 외관부서보다 많다는 사실은, 왕실업무와 방대함과 아울러 백제가 왕실 중심의 정치운영을 했다는 점이다.

 

▶ 2. 지방 행정제도

 초기 백제의 지방통치는 그 지역 부족 수장들의 자치적 기능에 맡겨져 있었다. 고이왕 이후 5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그들 수장들은 점차 중앙귀족화되어 부에 편입된 후, 지방에 대한 통치는 이들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가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후 왕권의 강화와 아울러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갖추어짐에 따라 지방에도 직접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는 형태로 변화해갔다.

 백제가 지방조직을 정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게 된 시기는, 사료를 통해 볼 때, 근초고왕 때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마련된 통치조직이 바로 담로제이다. 백제의 읍을 일컫는 말이 담로인데,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갖는 지방통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담로의 수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백제 영역의 확장과 축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백제 영역이 북으로 황해도 지역까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크게 확장되었을 때는 50여개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후 차츰 영역이 축소되면서 담로의 수는 22개로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제의 22담로는 웅진시대의 담로 수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담로에 파견된 지방관은 대개 왕족출신이거나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등으로 말하자면, 좌평 내지는 솔계 관등이었다.

 한편 한성시대에서 웅진시대까지 실시되었던 담로제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정비된 지방통치조직이 바로 방-군-성(현) 체제인데, 이것은 성왕이 중앙통치조직을 정비함과 동시에 지방통치조직도 정비하면서 새롭게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군-성 제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방, 즉 5방이었다. 5방은 전국을 크게 5개의 구역으로 나눈 것으로, 동, 서, 남, 북, 중방을 말한다. 이 5방은 사비시대 말기에는 5부로도 표현되었다. 방의 중심지, 즉 행정소재지는 방성이라고 하였으며, 그 장관은 방령이라고 하였는데, 좌평 다음의 2품인 달솔의 관등을 가진 고위 귀족이 임명되었다.

 군은 방과 기본성격상에서는 동등하였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방령의 관할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군의 수는 37군이었으며, 각 군에는 기본적으로 5-6개의 작은 성(현)이 소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의 장은 군장, 또는 군령이라고도 했는데, 한 군에 파견된 군장의 수는 3명이었다. 군장이 이처럼 복수였던 까닭은 군사와 행정업무를 분장하기 위해서 나온 조치로 판단된다. 이 군장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달솔 다음인 덕솔의 관등이었다.

 방-군-성 제도는 웅진시대의 담로에 비해 다음과 몇 가지 진일보된 특징을 가졌다. 첫째, 방이라고 하는 광역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이 방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중앙의 명령을 받아 효율적으로 하위 지방행정조직에 전달하고 통솔하였다. 이는 종래의 담로제보다 진일보된 지방통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성이라고 하는 하위 지방조직을 만들고 그곳에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지방관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재지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그만큼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킨 것이었다.

6.백제의 사회, 경제

▶ 3세기 전반 한반도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의 세력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백제는 비교적 큰 나라에 속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1호당 5명 안팎으로 계산 할 때, 대략 5-6만명의 인구를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인구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4-5세기에 70-80만명, 7세기에 약 120만명이 가장 개연성 있는 수치라고 생각된다.

 

▶ 백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구별되었다. 우선, 지배층의 중심인 왕과 왕족이 있는데, 이들은 부여족의 일파가 남하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중 진(眞)씨와 해(解)씨가 각각 전기와 후기에 왕비족이 되었고, 특히 해씨는 부여씨가 왕실을 차지하기 전의 옛 왕족으로서 부여·고구려 계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이들 외에도 사비시대의 귀족 8개 성씨가 중국측 기록에 남아 있다. 이같은 귀족 신분은 백제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 토착세력의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의 지배세력들이 몇 개의 신분층으로 세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리들은 공복과 복색과 관등제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솔계통 관료들은 자주색 옷을 입었고, 덕계통 관료들은 붉은색 옷을, 그리고 문독 이하의 관리들은 파란색 옷을 입었다고 한다.

 

▶ 피지배층으로는 자유민인 일반농민이 있었다. 이들은 붉은색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었다고 전하는데, 파란색이 제외된 것으로 보아 문독 이하의 하위 관리들은 일반 백성과 신분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농민은 소규모 토지를 가지고 있으며 농·공·상에 종사하였다. 이들 중 15세 이상은 성인으로 분류되어 매년 세금을 내었으며 병역과 부역의 의무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 중에는 전쟁 등에서 공훈을 얻어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하층으로는 천인과 노비가 있었다. 이들에는 정복전쟁과 통일전쟁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이나 포로, 또는 범죄자, 간통한 여인 등이 포함되었다. 노비에는 관노(官奴)와 사노(私奴)가 있었는데, 관노는 국가 또는 관청에 예속되어 있었고, 사노는 개인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 백제 사회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쌀·보리·조·콩·기장 등 5곡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고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 4-6세기에 철제 농기구의 수와 종류가 모두 급증하고 특히 대형 보습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우경(牛耕)이 실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을 생산하고 각종 철기를 제작하는 일은 대체로 국가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4-5세기까지 무기 및 사치품은 물론 농공구까지도 제작과 보급을 대부분 중앙에서 관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 웅진·사비 시대에 백제의 수공업과 관련된 중앙 관청으로 궁실 업무를 맡은 마부(馬部)·도부(刀部)·목부(木部), 일반행정을 맡은 사군부(司軍部)·사공부(司空部)·주부(綢部) 등이 있었다. 명칭으로 보아, 마부는 말과 수레의 부속품 제작 및 관리, 도부는 각종 칼의 제작과 관리, 목부는 토목·건축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군부는 각종 무기의 제작 및 관리, 사공부는 일반 토목·건축, 주부는 직물 수공업과 관련된 부서로 생각된다.

   

7.백제의 문화

 

▶ 고대국가 형성 이후 귀족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 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시하였고 유학 교육기관이 존재하였으며 이를 일본에 전하기도 하였다. 한문이 사용되면서 유교 교육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국사도 편찬되었다. 또한, 침류왕 때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여온 불교는 사비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교리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가사상이 전해진 기록은 없으나, 신선사상이나 방술(方術)이 일찍부터 존재하였고 도가적인 잡술도 이른 시기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 백제의 예술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완만하고 부드러우며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빠르고 격렬하고 긴장된 고구려의 동세를 대폭 누그러뜨리고 보다 부드럽고 여유있으며 조화된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자신들의 미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 특유의 미술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부여 능산리고분의 벽화, 산수문전, 각종 와당, 짙은 미소를 머금은 불상 조각<옆사진 >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같은 백제 미술에 대해 일찍이 고유섭은 ‘귀공자연(貴公子然)한 것’이라 말한 바 있고, 김원룡도 ‘우아한 인간미’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8.백제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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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대외관계는 낙랑과 대방군이 멸망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전 과정을 대략 6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기는 4세기 초에서 4세기 말로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대응책으로 신라와 화호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냈다.

제 2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으로 백제-왜-가야 연합과 고구려-신라 연합의 대결 양상을 띠던 시기이다. 백제에서 신라가 이탈하여 고구려에 접근하자 백제가 왜군과 가야군을 모두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아신왕대에 한강 이북지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기도 하였다.

제 3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해당되는 시기로서,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천도에 위협을 느낀 백제가 신라와 함께 공수동맹을 맺어 신라-백제 연합과 고구려가 대결하는 구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img63.gif제 4기는 6세기 중엽에서 6세기 말로 웅진 천도 후에 혼란을 겪었던 백제가 사비천도 후 중흥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그 힘을 바탕으로 신라-가야군과 동맹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나 신라가 고구려와 연결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나,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이 시기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는 관계로 시작하였으나, 신라-고구려와 백제가 대결하는 양상으로 끝나게 된다.

제 5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관계가 깨지면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이다. 이 때에 백제와 신라는 각각 수나라나 당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개별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img64.gif제 6기는 7세기 초에서 7세기 중엽의 시기로, 중국에서 당나라가 강성하고 고구려가 중국과 강력히 대립하였다. 이 때에 백제가 친고구려 외교로 기울자 신라는 당나라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남북진영과 신라-당나라로 연결되는 동서진영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대립 상황에서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는 동진(東晋)이후로 남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여 수준높은 문화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일본과도 전통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때에 따라 왜군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우수한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9.백제의 멸망

▶ 무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만큼 투철한 유교정신을 가지고 무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즉위한 다음 해에 내자평 기미 등 유력귀족 40여명을 추방하는 등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고구려·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여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강화된 왕권으로 국력을 모은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 등 40여 개 성을 빼앗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이같은 승리로 인해 의자왕은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 그 결과, 의자왕의 탐락과 그에 따른 궁중 내부의 분열과 부패는 백제 사회를 약화시켰고,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나당연합군의 압력으로 백제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어 갔다. 따라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결국, 절대적 전략요충지인 기벌포(伎伐浦)를 당나라 군대가 통과하고, 탄현(炭峴)도 신라군이 무사히 통과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백(階伯)이 거느린 5천 명의 결사대마저 신라군에게 패배해 버리고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들어오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러나,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왕자 태(泰)가 당나라 군에게 항복하자 의자왕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당나라에 항복하니, 백제가 멸망하였다. 백제의 멸망 이후, 유민들에 의한 백제부흥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