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塔)

                                                        02  전 하 영

 

 

 머리말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전국적으로 석탑이 많다. 이렇듯 석탑은 한국미술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불교조형미술품 중에서도 그 주류인 탑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 유물가운데 석조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그 수효가 단연 많다. 물론 석조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점판암이나 대리석 등으로 이루어진 석조미술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보다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훨씬 많으며 실제로 조사된 수에서도 화강암으로 된 것이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화강암이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특히 암질이 채석(採石)과 치석(治石)을 하기에 손쉬워 여러 가지 조각과 건조물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조나 지물(紙物), 토제(土製), 금속제(金屬製) 등의 여러 조형물이 재난을 당할 때마다 모두 불에 타버리고 파괴되어 때로는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석조물은 내구성이 있고 화재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다른 어느 유물보다도 많은 수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조형물이 석재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손쉽게 다량으로 채취되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교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불교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재료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불교의 융성은 곧 장엄미(莊嚴美)를 갖춘 여러 가지 조형물의 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 다량으로 필요했던 화강암 등의 석재가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충당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탑이 건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탑의 기원과 시대별로 탑의 특징과 대표적인 탑의 양식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탑의 일반

 탑의 개념과 목적

 탑이란 갖추어 말하면 탑파(塔婆), 즉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우파(St pa), 또는 팔리(Pli)어 투우파(th pa)의 음사(音寫)에서 유래된 약칭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사리(舍利, Sarira)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불도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의 예를 갖춤으로써 그 유신(遺身)인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파, 즉 불탑(佛塔)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탑의 어원에 대하여는 사리의 봉안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제(支提, Cha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우파'라고 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 탑을 '차이티야'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 즉 앞의 것은 방분(方墳) .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高顯處) 등의 뜻이 있고, 뒤의 것은 영묘(靈廟) . 정처(淨處) . 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스트우파'는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자는 순전히 불사리(佛舍利) 봉안처로서의 탑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석가와 관계되는 역사적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석가의 사리는 양적으로 제한된 것이므로 차츰 사리신앙에도 변화가 있었다. 석가의 몸에서 출현한 진신사리(眞身舍利)뿐 아니라 불경(佛經)인 법신사리(法身舍利)를 봉안한 모든 탑이 있어서도 단순한 탑이란 용어로써 통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함께 불교의 모든 기념물적인 성격을 지닌 '차이티야'까지를 통틀어서 넓은 의미로서 탑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탑파 건립의 목적은 사리신앙에 있으므로 이는 불상과 함께 불교의 양대 예배대상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즉 불사리를 지닌 불탑과 부처님의 품격을 형상화한 불상이 가람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소위 당탑가람(堂塔伽藍)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불사리의 전래가 바로 탑파 건립의 직접적 동기가 되고 있으나 이들은 호국(護國) . 호법(護法) 또는 기복(祈福)과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종교적 동기에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이곳에 탑파 건립의 외형적 동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도참사상과도 더욱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지세(地勢)나 형국(形局)에 따라 산천을 돕고 보호하려는 성격 아래 조성되었던 사례도 일단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한국적 특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다.

 

 탑의 기원과 전개

 한국의 탑은 어떠한 경로와 내용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과 함께 현존하는 유적·유물에 대하여 짐작할 뿐 보다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와 함께 탑의 건립도 시작되었으며 양식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전수한 중층(重層)의 목탑형식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존하는 유물·유적에 의하면 한국 탑의 기원은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삼국 말기의 시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석탑을 가리켜 [始原石塔]이라 부르는데 백제(百濟)의 것은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五層石塔과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多層石塔을 들 수 있으며 고신라(古新羅)에 있어서는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模塼石塔) 1기를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양국의 석탑은 그들이 석재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그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양식은 서로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백제의 石塔은 石塔발생 이전에 유행했던 목조탑을 모범으로 삼아 석재로서 번안함으로써 최초의 석탑을 건립하였고 이와는 달리 경주의 분황사탑은 전탑을 모범으로 삼아 안산암을 벽돌 크기로 작게 절단하여 쌓아 올린 점에서 그 양식의 특색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목탑이 지닌 내구성에 대한 취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탑파가 지향하는 종교적 영원성을 석재로서 완성한 탑이다.

 그후 삼국통일을 계기로 그 발생사유를 달리하는 목탑계와 전탑계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종합됨으로써 새로운 양식의 석탑을 낳았으니 오늘에 전래하는 신라통일 초기인 7세기 후반의 작품에서 그 事例를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신라의 석탑은 典型的인 양식에서 독특한 한국적인 양식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탑파형식은 그 전파국에 따라 각기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다. 그것은 불상과 같은 엄격한 규범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전파되는 각국의 건축기술에 의지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그대로 탑파건축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인도의 탑이 覆鉢形임에 비해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한결같이 층수를 지닌 중층의 탑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결과 신라의 전형탑의 경우는 이중기단 위에 중층의 층탑으로 전개되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건축양식과 조화미를 창안해 내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이것은 신라인의 예술적 천재성과 심미안의 접합에서 이룩된 일대 개가라 할 것이다. 이 조화미의 절정은 신라 8세기의 불국사 다보(多寶)·석가(釋迦) 양 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석가탑은 앞서 말한 전형 양식을 대표하는 석탑임에 비하여 다보탑은 소위 이형(異形)양식을 대변하는 절묘한 석탑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탑은 우리의 산하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주재로하여 수많은 석탑을 만들기에 족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의 탑파미술은 10세기에 들어와서 태조 왕건의 불교진흥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불교사원의 건립과 함께 불사가 도모되었으나 그 조형미에 있어서 다시금 신라시대와 같은 불교예술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기단부에 비하여 더욱 둔중해진 탑신부는 상하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였고 예술적인 면에서 더욱 낙후되었다. 이는 신라말 9세기경에 일기 시작한 선종(禪宗)의 발달로 조사(祖師) 숭배의 풍조가 유행되자 그 문도들에 의해 건립되는 부도나 석비의 제작에 그 찬란했던 예술적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따라서 고려에 있어서는 석탑미술보다는 석조부도의 조성으로서 한국 석조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각부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장식적 문양으로 더욱 화려해지고 복잡해지면서도 앞 시대와 같은 생명력 있는 예술적 기량은 영영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후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예술적 감각을 잃고 말았다. 이는 유교사회에 처한 불교예술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겠지만 장인을 천시하던 조선시대의 사회풍조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석탑은 초기의 몇몇 석탑을 제외하고는 더욱 치졸한 느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조선의 국운과 함께 불교정책에 가해진 외적 요소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탑의 형식

 한국 석탑의 형식은 정방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여 기단과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서 형성되나 기단은 이중 기단이 보편적이다. 이들 상하 기단과 탑신부에는 모두 목조탑의 결구 방식인 기둥을 모각(模刻)하였는데 이것이 각면의 모서리에 있다 하여 우주(隅柱)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단부에는 우주와 우주사이에 다시 수 개의 버팀기둥 즉 탱주( 柱)를 모각하여 목조탑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탱주의 수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줄어든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 역시 초기의 5단 받침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줄어든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옥개석 네 모서리[전각(轉角)]가 보다 경쾌하게 들려 반전(反轉)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초기의 경직되고 단조롭던 형식에 비추어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반전이 심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석탑 내부에는 사리를 봉안하게 되는데 그 소장처는 대체로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이고 드물게는 기단 또는 지하에 봉안되는 수도 있다.

 상륜부의 노반(露盤) 상부는 인도탑 형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최상층 옥개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覆鉢)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앙화(仰花)라든지 보륜(寶輪)과 같은 장엄구가 설치되지만 이들은 인도탑의 형식이 우리나라의 탑에 있어서는 그 상부 상륜부로서 대치되고 있다.

 

 탑의 종류

 

 주재료별 구분

 img7.gif우리나라의 탑을 재료면에서 본다면 흙·나무·쇠·돌·벽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 내에서 흑으로 만든 토탑이나 금속제의 소위 금탑이라 할만한 것은 주로 사리장엄을 위한 공예적인 소탑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국 탑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명실공히 한국의 탑은 목탑·석탑·벽돌탑 3종류에 국한시킬 수 있다.

 목탑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 55호)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에 전해지자 가람을 장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건축이 가미되었다고 짐작되는 바 이것이 바로 탑전(塔殿)의 형식이다. 이는 중국 고유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서 사리신앙을 위한 불전이면서 동시에 높은 누각형식의 목조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짐작된다.

 목탑의 형식은 전형적인 건축구조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단층기단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각 층의 옥개는 기와를 덮고 기둥사이에는 창방을 일종의 문호(門戶)로서 내어 내부에 출입을 가능케 함으로써 내부공간을 활용하는 건조물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부에는 금속제의 상륜을 설치하여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냄으로써 석탑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기단·탑신·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전탑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탑의 건립에 앞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하고 작업과정이 어려워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못한 것 같다. 전탑의 형식은 목탑·석탑과 동일하지만 다만 옥개의 상하에 층급을 나타내고 있음이 일반 목탑이나 석탑의 형식과는 다른 점이다. 특이한 것은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 제56호), 안동신세동 7층전탑(국보 제16호), 안동조탑동 5층전탑(보물 제57호), 그리고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제189) 등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탑이 전해지고 있으며 기록상의 전탑까지 합하면 10여 개에 달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게다가 인접한 지역에서 모전석탑이 다수 건립되어 더욱 특이하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우리나라 탑의 전형이다. 현존하는 탑의 대부분이 석탑인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활발한 건립이 있었으며 예술적으로도 가장 화려하였다.

 

 시대별 구분

  삼국시대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삼국의 불탑은 목탑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에 들어석탑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목탑이 삼국시대 불탑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추정되며,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목탑은 팔각차층탑이 주로 세워져 백제나 신라의 목탑과 구별된다 또 탑과 건물의 배치에서도 고구려의 절터에서는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면에 법당이 배치되는 이른바 1탑 3당식이 성립되고 이 형식이 백제의 군수리절터나 황룡사터의 후기 건물배치에도 응용되었으며 이러한 형식은 일본의 아스카데라의 당탑 배치형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탑과 법당 강당등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 1당식의 배치형식도 삼국에서 성행하였으며 역시 이 방식도 일본의 시텐노지 건립에  응용되는등 우리나라의 당탑 건립의 법식은 일본에 고스란히 전하여 졌는데 특히 백제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이 밖에 백제 미륵사의 경우처럼 3탑 3당식으로 탑과  법당이 배치되는 특수한 배치형태를 따른 것도 있었다. 또한 삼국의 불탑은 대체로 그  규모가 매우 거대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는 왕실에서 사찰의 건립을 후원하여 대규모의 공사를 계획할 수 있었고, 불상이 조성된 후로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 예배처로서의 비중이 커가는 가운데에도 아직은 불탑에 대한 신앙의 비중이 상당하였던 것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목탑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삼국 시대 말기에 들어 우리나라 불탑에는 석잡이 등장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이다. 신라의 분황사 모전석탑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한 것이고 고구려의 영탑사 팔각칠층석탑은 기록으로만 전할뿐 그 형태를 추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백제의 석탑은 이미 삼국시대의 뿌리를 내린 목탑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석탑을 재현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말기에 발생한 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이후 우리나라 불탑의 주류가 석탑으로 바뀌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원래 돌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재질이 견고하여 화재위험도 면할 수 있는 석재로서 불탑을 조성하여 영원히 버전하려는 염원이 백제인으로 하여 금석탑을 창출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 7세기에는 서산 마애삼존불, 군위 삼존석굴, 반가사유석상, 무열왕릉비등의 격조 높은 석불상과 석비들이 제작되는등 석조미술의 조형활동이 크게 일어나는 시대적 분위기도 석탑의 발생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통일신라시대 이후 전국적으로 수많은 석탑이 세워져 우리나라는 전탑이 성행한 중국, 목탑이 많은 일본등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석탑의 나라'로 불리우게 되었다.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 石塔)

img8.gif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탑이지만 근세에 이르러 그 상층이 붕괴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만 서탑의 6층까지의 동면(東面)만을 남기고 있어 그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이 탑은 가장 충실하게 목탑을 모방하여 목재대신에 각 부재를 화강암 석재로서 사용하고 있다. 단층의 낮은 기단을 갖고 있으며 제1층은 3칸4면을 모하여 중앙 칸을 통하여 내부에서 十字로 교차되고 있다. 넓은 옥개와 그리고 그 밑에 층급형(層級形) 받침도 모두 목탑의 그것을 모방하였거나 변형하고 있다. 이 탑에서는 예술적인 창안이나 변형을 찾기보다는 목탑을 충실하게 돌로서 번안하려는 의사만이 일관하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夫餘 定林寺址 5層石塔)

 이 탑은 오늘날 그 상륜부(相輪部)를 잃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미륵사지탑과 같이 단층의 기단 위에 8매(枚) 구성인 제1탑신을 가지고 있으며, 넓고 얇은 옥개석과 그 밑의 2단(段) 받침으로서 구성되었는데 이는 모두 목탑양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지탑에 비교할 때 목탑의 충실한 번안이라기보다는 이 탑에는 예술적인 변형이 곳곳에 가해져서 작품 그 자체로서 가치를 한층 더하고 있다. 각 층의 감축비율이나 석재 짜임의 규칙성 등은 이 작품에서 지적할 수 있는 높은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

 이 탑은 삼국사기에 분황사가 선덕여왕 3년(622)에 낙성기록에 따라 이 석탑의 연대를 추정할 수가 있다. 탑의 기단(基壇)은 잡석으로  쌓은 넓은 단층기단인데 탑신을 받기 위하여 1매(枚)의 화강암 부재를 그 중앙에 두었다. 감실(龕室)은 1층 4면에 마련되었으나 미륵사 석탑과는 달리 서로 교우(交又)되지 않았다. 현재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발굴된 석재로 미루어 5층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백제의 탑이 목조탑의 영향이  강한데 반하여 오히려 전탑의 영향이 강하여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왕조는 더욱 공고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불교가 융성하여 종단의 활동이 왕성하여 지고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중국 당나라의 선진문물이 활발하게도 입되는 가운데 불교문화도 더욱 새롭게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많은 승려들이 중국 또는 서역지방까지 구법을 위한 유학을 떠났으며 이들이 귀국하고부터는 새로운 불교사상을 들여와 선종불교가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시대의 불교가 국왕의 후원으로 발전한 반면 통일신라의 불교는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의 비호를 받아 전국도처에 사찰과 불탑이 세워지면서 조탑신앙도 단순히 불사리 신앙의 차원을 넘어 여러 가지기원과 불교경전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는 욕구에서도 불탑이 저영되었다. 심지어는 풍수사상에 의하여탑이 절의 건물배치와는 상관없이 절 바깥으로 벗어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화엄종의 우두머리 사찰인 부석사에서는 의상대사의 교시에 따라 탑을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탑은 사천왕사탑과 같은 목탑이 전통을 잇는 반면석탑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어 8세기에 들어서면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왕성하게 되고 이 양식은 또 하나의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전통으로 확립되어 후대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8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형양식의 석탑이 성행하는 가운데 이 형석탑이 등장하여 나름 대로의 특색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9세기 이후로는 신라왕실의 쇠망과 함께 석탑의 규모가 축소되고 결구법식도 일부 생략되며 탑의장식이 증가되기는 하나 전체적인 조형성이 퇴조를 보인다, 오히려 이 때에는 선종 불교의 등장과 함게 지방의 사찰에서 선승들의 승탑과 탑비 가격도 높게 조형되어 신라시대 석조미술의 또다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感恩寺址 東西3層石塔)

 이 탑에서는 삼국의 시원석탑에서 볼 수 없었던 정비된 2층기단을 지니고 있다. 1탑신은 4우주(隅柱)와 4매의 벽판석으로 조립되었으며 그 옥개석은 8매의 낙수면 돌과 다시 4매의 받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의 받침은 모두 5단이다. 이 같은 탑신과 옥개의 석재조립은 상층도 같은데 기단의 광활함에 대하여 탑신 또한 거대하여서 그 탑신이 주체적인 비중을 지니고 있다.

이 감은사탑은 통일 직후에 조성됨으로써 통일의 기념탑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이에 따라 탑이 지니는 양식은 삼국에서 각기 시원된 석탑양식이 종합됨으로써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낳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국사 석가탑(佛國寺 釋迦塔)

img9.gif석가탑은 신라 전형석탑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석탑이다. 이 탑의 형태는 2중 기단 위에 건립된 3층의 석탑이다. 상하, 좌우의 비례가 뛰어나서 다른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으며 기단을 위시한 탑신, 옥개석 모두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듬직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각 부분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탑 주변에는 장방석을 돌려서 탑구(塔區)를 형성하고 또 그 사이에 연꽃을 배치하였는데 그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한다.

석가탑은 1966년에 해체 수리 복원되었는데 2층 탑신의 상면 중앙부에 사방 50cm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동제사리외함(金銅製舍利外函)을 비롯하여 은제사리함(銀製舍利盒) 등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그리고 사리병에는 사리 1과(顆)가 있었고 또 곡옥(曲玉), 환옥(丸玉), 수정, 유리 등의 장엄을 위시하여 청동제 비천(靑銅製 飛天), 구리, 거울, 향목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유물 이외에 사리함 위에 얹혀 있던 두루마기 경전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장경으로 판명됨으로써, 세계 인쇄 기술사상 다시 한 번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 경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서 신라시대 조탑(造塔)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이 경전은 글자의 도법(刀法)으로 보아서 목판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 탑이 건립될 당시 신라에는 목조 인쇄술이 상당히 보급돼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인쇄술의 경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

 img10.gif이 탑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난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루어졌다. 각부의 조각수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의 구조물을 보는 듯 아름다우며 복잡한 상하의 가구(架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하나도 산란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인상적인 균정미(均整美)를 보이고 있다.

 다보탑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을 종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평면경영에서 전형양식의 기본인 방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바, 탑신부와 옥개석 등 각부를 8각 부재로 복잡하게 가구(架構)하였으나 상하부분이 서로 균형된 비율과 정형미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기단부 사방에 보계(寶階)를 가설하였다.

 셋째로 상층 기단에 방주를 세우고 목조건축의 두공을 연상시키는 받침부를 시설하였다.

 넷째로 갑석의 신부(身部)에 가구한 상하부의 난간과 죽절형(竹節形) 석주 및 앙련대석(仰蓮臺石) 등은 마치 목조 구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다섯째로 전 부재의 치석과 결구수법의 문제인데, 화강암을 이렇게 목재 다루듯이 석재로서 수려하게 각 부재를 조성하여 촉감마저 온유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

  화엄사 4사자 3층석탑(華嚴寺 4獅子 3層石塔)

 이 석탑은 상층기단에 돌사자 4마리를 배치하였는데 신라시대의 사자탑으로는 유일하며 그 작품이 뛰어나서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의 특수양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상층기단의 구조에 있어서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을 조립한 것과는 달리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각 면의 양 우주와 탱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자상을 일반형 석탑에 사용한 예는 이 석탑이 최초이며 이후 이러한 용례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러 기가 있다.

 사자는 특히 불교적인 조형미술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사자가 불교에서 연꽃과 함께 상징적인 존재로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의 위치에 비유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하층 기단 면석의 각 면에 여러 종류의 천인상을 각양각태로 조각하고 초층 탑신에도 각 면에 문비를 모각한 좌우에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각은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정형에서는 볼 수 없는 이후 전형에서 장식적으로 변한 특수형 석탑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실상사 동서 3층석탑(實相寺 東西3層石塔)

 기단 주위에는 넓게 장대석(長大石)을 둘러서 탑의 구획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불국사 석가탑에서의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와 같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구 내부의 중앙에는 지대석을 마련하여 석탑의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하층기단은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서 조성했다. 갑석은 상하 모두 경사가 급한 편이고 우주와 탱주 역시 우주 둘에 탱주 하나씩 상하 동일한 숫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다른 돌로 독립시켰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에 가까우나 낙수면의 전각(轉角)은 위로 솟아오르는 반전을 경쾌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의 석탑의 상륜부가 대부분 유실된 데 비해 이 탑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방면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

 통일 신라시대 말기에 후삼국으로가종교로 받아들여 전국적으로 불교가 활발하게 융성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전 시대를 걸쳐 탑이 가장 많이 조성되던 시기도 바로 고려시대였으며 탑의 건립에 대한 후원자로 분열된 국토를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국한 고려왕조는 개국 초기부터 불교를 국는 국가, 왕실, 귀족 등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도 참여하여 고려시대의 탑에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부터 비록 서툴지만 지방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작품들까지 나타나고 있고, 탑의 형태도 일반적인 사각다층탑으로부터 다양한 이형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던 것은 역시 목탑이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만 고려 초기의 서경구층탑, 규모가 200척이 넘었다는 광통보제사오층탑, 개국사, 혜일중광사, 진관사, 홍왕사, 민천사, 연복사 등 개성부근의 사찰에 세워진 목탑과 남원의 만복사탑 등에 대한 사실이 옛 기록들에 남아 있다. 그 중에는 이러한 목탑의 위용에 대한 내용도 간간히 실려있어 목탑은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건립되고 있었으며 워낙 공이 많이 들기 때문인지 비교적 규모가 큰 사찰에서 주로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시대 탑의 주류는 역시 석탑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통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약간의 변형을 시도하여 일반화된 양식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석탑양식이 이루어져 전국으로 확산되는 반면 일부에서는 지방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석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옛 백제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식의 석탑이 부활되고,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 이남의 지역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이 강하게 계승된 점을 들 수 있다. 또 전체적으로는 탑에 새로운 장식이 첨가되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이형석탑도 등장하는 등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석탑양식이 전개되었다.

  월정사 8각9층석탑(月精寺 8角9層石塔)

 이 탑은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건조한 형식으로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게 보이는데 이 석탑의 특징을 부재별로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체적으로 보아 서탑의 평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어서 선대의 方形平面에서 벗어나고 있다.

 둘째로 층수(層數)가 많은 것도 주목된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정혜사지 13층석탑과 같이 다층탑이 적지는 않으나 이것은 방형탑인데 반해 8각형인 월정사지 탑은 다층에 다각인 것이 특이하다.

 셋째로,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에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연화대(蓮花臺)를 마련하여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그리고 상층기단괴임대와 탑신괴임석이 끼워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넷째로 각 층의 체감률이 적으나 기단부가 안정된 편이어서 오히려 경쾌한 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상륜부재의 장식은 석탑 전체를 장식적인 형태로 보이도록 하고 있다.

  보현사 8각 13층석탑(普賢寺 8角 13層石塔)

 이 탑은 3단의 높직한 기대석을 중첩하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설치하여 13층의 탑신을 구성하였으며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는 가장 층수가 많으면서도 완형으로 보존되고 있는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기단부에 3단의 기대석 측면에 수미단(須彌壇)과 같은 문양을 조식(彫飾)하여 기저부터 장식적인 의장을 볼 수 있다. 기단은 역시 상하대에 앙복연(仰伏蓮)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 좌대(座臺)와 같은 형식을 이루고 있다.

 둘째로 탑신부에 있어서는 초층부터 身·蓋石의 체감이 아주 작은 편이어서 세장(細長)한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개석이 광대하지 않으므로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전각(轉角)의 반전과 잘 조화되어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셋째로 정상(頂上)에는 청동제의 연화좌(蓮華坐)위에 상륜부를 올리고 있으니 이것도 이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경천사지 10층석탑(敬天寺址 10層石塔)

 초층 탑신부에 새겨져 있는 '지정8년무자(至正8年戊子)'라는 명문(銘文)에 의하여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즉 이 석탑은 당시의 추세로 말미암아 원나라의 라마교(喇 敎)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으나 당시 고려의 불교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재료 및 건조양식과 각부의 기교에서 독창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이 석탑의 원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경천사지였으나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라로 불법반출했다가 그 후 한국으로 다시 반환되어 현재는 서울 경복궁 내에 세워져있는데 이로 인해 지대석은 결손 되고 없다.

이 탑의 구조는 기단부는 2층으로 이루어졌고 그 평면은 4면 두출성형(斗出星形)의 아자(亞子)형을 취하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각기 불·보살, 인물, 초화(草花), 반룡(蟠龍) 등을 양각하였으며 각 모서리에는 절목원주형(節目圓柱形)을 모각하였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층과 2,3층은 기단과 같이 4면 두출성형의 아자형 평면을 이루었고, 그 위의 4층부터는 방형이다.

 각 층의 탑신 위에는 옥개석을 놓았는데 탑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을 모각하고 각 층, 각 면에는 십이회상(十二會相)을 조각하여 불.보상, 천부(天部), 기타 여러 가지 상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원형의 평면으로 노반(露盤)과 연구문형(連球紋形)의 복발(覆鉢)과 앙련(仰蓮)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寶塔形)과 보주가 있다. 그런데 이들 상륜의 각 부재는 우리 나의 탑의 상륜형식과는 달리 오히려 라마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이 석탑은 목조건축물의 각부를 모각하고 또 각부에 불.보살상을 빈틈없이 배치하여 그야말로 건축과 조각의 양면을 다 같이 구비하고 있는 특이한 석탑이라 하겠다.

 

 조선시대

 천여 년간 민족신앙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해 온 불교는 고려시대 말기에 들어 국가의 무분별한비호와 불교집단세력의 비대정상적인 성장으로 오히려 사회적인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유학을 실천이념으로 표방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민족의 정소도 서서히 유교적 분위기로 탈바꿈하게 되고 불교는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과 거센 억압을 당하였으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불탑을 포함한 불교미술도 간혹 몇몇 왕들의 후원으로 약간의 조형활동이 지속된 적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선시대의 불탑건립은 왕실의 비호가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나마도 조선중기 이후로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Ⅴ 부도(浮屠)

1.우리나라 부도의 기원

 우리나라 부도의 건립은 불교가 전래함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는 있으나 처음부터 부도가 존재하지는 않았고 모든 승려의 유골이 화장된 후 부도에 안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고승 원효는 죽은 후 유골로 초상이 만들어져 분황사에 안치되었고 자장의 유해는 석혈에 봉안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현의 시신은 석실에 두어 호랑이 밥이 되게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는 죽은후 제자들이 흩어지려는 유골을 모아 흙 속에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고승들의 장례에도 부도가 세워지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오히려 진표율사와 같은 경우는 유골을 흙 속에 매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장한 곳이 파손되어 유골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바람에 일부는 잃어버리는 수난까지 겪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한편에서는 고승들의 유골을 안전하게 납골하여 보전하는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을 것인데 마침 중국으로 건너가 유학하고 귀국한 학승들로부터 부도을 세우는 새로운 장례 법이 들어봐 이로부터 우리나라에도 부도가 세워지기 시작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있는 부도들을 탐구하면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는 상당한 지위와 덕망을 갖춘 특별한 승려들에 한하여 부도가 조영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부도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신라 원광법사의 부도가 금곡사에 있고 혜숙스님의 부도가 안강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백제의 승려 혜현의 유골은 후에 석탑을 만들어 그 속을 안장하였다고 하므로 삼국시대 말기에는 우리나라에 부도가 존재하였다는 것이 기록으로나마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전반기에 해당하며 이때에는 중국에서도 고승 구마라습의 사리탑이 조영되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부도도 이러한 당나라 고승의 장례법을 들여 온 결과로 보여지며 이런 한 국내외의 정황을 참고하면 우리나라 부도의  기원은 삼국시대 말기로 추정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장례를 치르고 무덤을 만들 때에 고인의 관직 및 이름과 평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하나의 법식이 되어 왔다. 이러한 전통장례법은 고승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부도를 세울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고승의 생애와 업적을 칭송하는 기념비를 부도 앞에 (또는 까이에)세우는 것이 상례였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우린 나라의 부도와 탑비는 신라하대인 9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들로 당시는 신라의 불교계가 중국으로부터 새로이 도입된 선종불교가 크게 일어나 전국 각처의 산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선종불교의 종풍은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법통을 물려받은 사제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시된 까닭에 산문을 일으켜 선법을 널리 선양한 스승이 죽게 되면 제자들은 스승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 산문의 전통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스승에 대한 지극한 예우로써 부도와 탑비의 건립에 당대의 예술적 기량을 총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석탑을 능란하게 이루어 내던 기술은 9세기에 들어 부도와 탑비의 종영에 다시 한번 솜씨를 발휘하여 새로운 부도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승한 고려시대의 부도와 탑비 종에도 걸작품들이 다수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도와 탑비가 동시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더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오늘날에도 부도와 탑비가 온전한 짝을 이루어 남아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반면에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승탑조영이 일반승령들에까지 확산되어 몇 기의 고승들의 부도를 제외하고는 그 형식이 변하여 아주 간결하여지고 탑비도 대부분 생략되는 등 부도와 탑비에 대한 정성이 날로 쇠락하게 되었다.

 탑파의 건립이 사리봉안에서 출발하였던 고로 眞身舍利이건 法身舍利이건 탑내에는 사리를 봉안함이 원칙이다. 인도의 카니시카왕(재위140-170)元年銘이 있는 사리기는 유명하거니와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탑파에서 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탑 속의 사리장치는 다른 불교 국에 비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우수하다. 이를 시대별과 탑종별(塔種別)로 그 내용과 변천을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2. 부도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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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시대의 부도

 img12.gif염거화상탑과 같은 석조사리탑이 전형이 되어 이후의 부도은 상,중, 하대를 갖춘 불상대좌형 팔각기단 위에 팔각의 탑신과 지붕을 얹고 꼭대기에는 보개형의 상륜을 장식하는 기본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각 부재에는 화려한 장식이 베풀어지는데, 당시의 부도는전국의 선종사찰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조영되는 까닭에 장식기법이나 조성형식이 약간씩 변형되는 등 지역적인 특징과 양식적인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가지산문의 중시조인 염거화상탑을 비롯하여 동리산문인 전남 화순의 쌍봉사철감선사탑, 실상산문인 전북 남원의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과 수철화상능가보월탑, 가지산문인 전남 장홍의 보림사 보조서사창성탑, 희양산문인 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 경남 하동의 쌍계사부도,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부도, 전남 구례의 연곡사동부도 등은 비교적 조성연대가 확실한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부도로 팔각당형의 전형적인 승탑형식을 이루면서 조형적인 면에서는 조성시기와 기량 및 지역에 따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쌍봉사철감선사탑에서는 기단부의 하대에 구름무늬와 사자를 휘감아 돌리고, 중대와 상대에는 가릉빈가와 연꽃을 장식하였으며, 탑신 받침대에는 안상을 세련되게 조각하고 안상내부에는 사람모습을 한 가릉빈가가 비파, 장구, 피리, 제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탑신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새기고, 팔각의 면은 앞뒤에 문고리와 자물통이 달린 출입문을 새기고, 팔각의 면은 앞뒤에 문고리와 자물통이 달린 출입문을 배치하고 문 좌우에는 칼을 찬 사천왕상을, 나머지 양면에는 쌍으로 된 천인공양상을 새겼다. 기둥과 처마를 연결하는 부분에는 창방과 기둥머리를 표현하고 그 위로 지붕을 받아서까래와 기왓골, 처마받침의 향로와 꽃무늬 등은 마치 당시의 목조건물을 보듯이 생생하고도 완벽하게 표현되었으며, 심지어는 처마 끝의 수막새기와에도 일일이 연꽃무늬를 새기는 등 탑의 조형과 표면장엄에 원숙한 솜씨가 발휘되어 이미 9세기 중엽에 신라 석조미술의 백미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석조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약간 늦은 시기에 조성된 연곡사동부도는 기단으로부터 상륜부까지 완형을 남기고 있는데 각 부재마다 정교한 장식을 베풀어 다채로우면서도 당당한 구도를 창출하고 있다. 특히 이 부도은 날개를 활짝 편 새를 사방으로 배치하고 꽃무늬장식의 보륜과 보개를 쌓아 올린 상륜의 조형미가 돋보이        는데, 염거화상탑 계열의 부도 가운데 가장 심미적인 안목으로 조영된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4. 고려시대의 부도

 img13.gif9세기 말기에 들어서면 신라의 팔각당형 부도는 부분적으로 양식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기단부의 중대석이 기둥모양으로 길쭉해지거나 북을 눕혀놓은 형태와 같이 배가 부룩한 모습으로 바뀌어지고, 또는 중대석이 온통 구름과 용무늬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하대석은 넓어지면서 입체적인 운룡무늬로 장식되기도 하고 상대석 위의 탑신받침은 생략되며 지붕꼴은 경사가 심하고 둔중해지면서 처마가 심하게 휘어져 들리고 귀꽃장식도 높이 치솟은 형태로 표현된다. 이처럼 부분적인 변형을 보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신라의 팔각당형 부도의 기본형을 계승한 고려 시대 전기의 부도은 전체적인 외관이 비교적 장중하고 화려하여 새로이 건국한 고려왕조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부도의 전체적인 규모가 작아지면서 길쭉해지는 현상도 나타나는데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일반화 된다. 따라서 후기의 부도는 짜임새가 간단해지며 장식이 단순화되고 처마가 직선화되며 지붕꼴도 고깔처럼 폭이 오똑하여져 전체적으로는 딱딱한 느낌을 주게 된다. 아울러 일부에서는 중대석이나 탑신부의 각이 진 곳에 모를 죽여 약간의 곡면처리를 가미하는 기법도 나타나게 된다.

우선 9세기 말의 부도를 살펴보면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의 전 원감국사탑과 양양 선림원지부도 등에서는 높아진 중대석에 운룡무늬를 채우고 또는 거북의 모습을 등장시키고 있어 중대석의 장식에 변화가 일고 있으며,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에서는 북모양의 중대석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대안사광자대사탑, 보암사정진대사원오탑 등에서는 신라부도의 일반형을 계승하면서도 장중한 맛을 잃지 않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의 홍법사진공대사탑, 여주 고달원지원종대사혜진탑 등에서는 중대석에 구름과 용무늬를 채우고 있어 전 원감국사탑이나 선림원지부도의 중대석 장식기법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초기의 부도는 결같이 지붕이 둔중하면서 처마 밑이 보일 정도로 추녀 끝이 휘어들리고 있어 신라 하대의 부도와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충남 공주의 갑사부도, 충북 영동의 영국사부도, 강원도 명주의 굴산사지부도, 경북 군위 인각사의 보각국사부도 등 고려중기 이후의 일반형 부도에서는 규모가 작아지고 짜임새나 장식이 소략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편 서산 보원사지의 법인국사보승탑, 보림사서부도 등에서는 탑이 폭이 좁고 길쭉한 형태로 변하고 있으며 이같은 양식은 경북 영일의 보경사부도처럼 아주 늘씬한 부도를 낳게 하였다. 이와같이 고려시대의 일반형 부도는 전기에는 장중한 규모와 함께 부분적으로 변형된 새로운 장식이 가미되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으나 시대가 지날수록 기량면에서는 전대의 부도보다 후퇴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일반형을 벗어난 특수형식의 부도에서는 의외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다양화되는 고려부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5.조선시대의 부도

 조선시대의 일반형 부도은 고려시대의 일반형 부도을 계승하여 조성되는데 대체로 탑신이 북모양으로 비대하여지고 기단부와 지붕도 두툼해지면서 조각장식도 굵직하게 표현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탑신이 공모양으로 변하고 처마 끝이 두터운 수직단면으로 처리되며 지붕은 좁고 높아지는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 오히려 석종형 부도가 일반화되어 조선시대 부도의 일반형이 자리바꿈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또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함에도 불구하고 부도의 수는 무수히 많아지게 되는데, 이는 그간 고승대덕들의 로만 허용되던 부도가 세간 사찰의 주지승들에게까지 허용되어 부도의 건립이 분주하게 일어난 까닭이며, 그 결과로 오늘날에는 어느 사찰이든 많은 조선시대의 부도가 무리지어 있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조선전기의 일반형 부도으로 비교적 건립연대가 빠른 것으로는 충북 주원 청룡사의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을 들 수 있다. 이 부도는 기단부에 간단한 안상과 사자, 운룡 등이 장식되고, 배가 부른 탑신에는 용이 감겨진 기둥을 세우고 각면에는 무기를 든 팔부신장상이 배치되었다. 기둥 위로는 기둥머리과 창방 등 목조건축의 의장을 표현하였고, 처마는 많이 들린 편인데 처마 끝이 두텁고 추녀 위에는 용머리 장식이 귀꽃처럼 조각되어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발전한 양식의 부도로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의 무학대사탑이 있다. 이 부도에서는 둥근 탑신의 표면에 운룡무늬가 두툼하게 돌려져 있고 두터운 처마는 들린 채로 용머리형 귀꽃장식을 하고 있다. 아울러 이 부도는 탑 주의에 팔각의 난간을 갖추고 있어 새로운 조선 시대 부도의 구성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계승한 동일한 법식의 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양주 봉인사사리탑으로 비록 부도는 아니지만 조형양식이 흡사하며 다만 지부의 형태가 고깔 처럼 높이 솟아서 시대의 하락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 들어 더욱 간략화되어 기단부가 단순화되고 무늬장식도 거의 생략되며, 심지어는 판석과 같은 기단에 탑신과 지붕이 각각 하나의 돌로 처리되고 탑비는 아예 생략해버린 채 탑신에 간단하게 탑 이름을 새겨넣는 아주 기본적이면 왜소한 구성의 부도로 축소변형되기도 한다.

 이 밖에 연곡사소요대사탑은 주변의 10세기의 부도에 나타난 형식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부도로 착각하기가 쉬운데 자세히 보면 표면장식의 곡선처리가 무디어지고 탑신에 탑이름을 새기고 있어 조선시대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서 말기로 이어지는 기간은 석종형 부도의 전성기였다. 전통적인 팔각당형 부도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면서 부재의 구성과 전체적인 형태를 극도로 생략한 형식적인 부도들이 전통의 그림자를 희미하게 드리우고 있었지만, 오히려 석종형의 부도들은 도처의 사찰에서 수없이 조성되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석종형 부도들도 규모가 작고 낮은 기단 위에 단순한 석종형 탑신을 올렸으며 상륜은 탑식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지거나 팔각형의 지붕돌을 얹는 등 시대가 내려올수록 지극히 형식적인 명백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다만 선암사의 화산대사탑만이 신라시대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을 모방한 18세기 초의 불탑형 부도로 조선시대 부도의 이형양식을 마감하고 있다.

 

Ⅵ. 맺음말

 

 지금까지 탑에 대한 개념과 기원을 비롯하여 삼국,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는 탑의 양식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석탑은 삼국 말기인 600년경에 백제와 신라에서 발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을 얻게 되었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많은 우수한 석탑들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고려에 계승되어 조선 왕조 초기까지 미쳤다. 한국의 석탑은 전형양식이라 일컫는 일반형과 특수양식이라 일컫는 이형양식을 들 수 있는데 각각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민족의 문화적 창의성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선조 들의 혼이 담긴 이런 문화재를 잘 보존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느낄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塔婆는 사리봉안을 근본 목적으로 하는 축조물이다. 탑 속에는 신앙의 소산인 舍利寶가 장치되는 것이므로 와관상의 미적인 삼상과 아울러 내적인 면도 고찰되어야 할것이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담는 사리탑 형태로써 신라하대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 화려한 조각을 자랑하는 부도 또한 우리민족의 창의성과 예술성 세심한 면도 볼수 있었다. 탑의 웅장함과 달리 부도는 사진으로만 봐도 정말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정도였다. 부도는 탑과 다르게 부도에는 대개 탑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곧 개개인 승려들의 행적은 물론이고 다른 승려와의 관계와 사적(寺蹟), 나아가 당시의 사회 및 문화의 일단까지도 알리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선조 들의 혼이 담긴 이런 문화재를 잘 보존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느낄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자료※

송석상, 이강승   1996   <<그림으로 배우는 우리의 문화유산>>   학연문화사

장충식   1987   <<新羅 石塔 硏究>>   일지사

         1989   <<韓國의 塔>>   일지사

정영호   1989   <<빛깔있는 책들>>47 <석탑>   대원사

         1992   <<韓國 佛塔 100選>> <韓國 中 . 近世 佛塔의 硏究>   韓國精神文化硏           究院

황수영   1992   <<韓國 佛塔 100選>> <韓國 古代 佛塔의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http://www.tgedu.net/student/towerd/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