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感恩寺址)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감은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감은사(感恩寺)로 사명(寺名)을 고친 것은 대왕의 별세 후 앞바다에 장사지냈기에 대왕의 은혜를 감축(感祝)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와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때 금당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이 금당은 감은사지 앞을 흐르는 대종천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동해까지 이어진다는 설이 있다.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물길을 따라 감은사로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와 관련된 전설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전설이 있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보낸 동해의 용이 감은사로 와서 신문왕에게 검은 옥대를 주어 왕이 이 옥대로 피리인 만파식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검은 옥대는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얻었다는 설과 이견대에서 얻었다는 두 이야기가 있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 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동서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의 현존하는 탑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966년  동·서탑 중 서편 삼층석탑에서 왕이 보련형(寶輦形, 왕이 타는 수레 형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보물 제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은사지는 1960년과 1979년∼1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이 수습되었고 사지의 전모가 확인되었다. 감은사는 일금당쌍탑식 가람으로써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된 점과 금당(金堂, 본존불을 모신 곳)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回廊, 각 건물을 연결하는 통로)을 연결하는 중회랑인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사지의 남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이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설법을 하던 곳)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문 북쪽으로 금당 앞과 좌우에는 같은 형태의 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양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지가 있다. 정연하게 쌓아올린 2층 기단의 4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가공된 갑석과 지대석이 보인다. 금당의 바닥구조는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사각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서 마치 돌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되어 있다. 그 위에 주초(柱礎, 기둥 주춧돌)를 배열하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서, 금당의 정면에서부터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형성하여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의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부합하고 있다. 금당 북쪽의 강당지는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것을, 후대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쳐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감은사지 [感恩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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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    에 있는 신라 때의 감은사 절터.

  지정번호 : 사적 제31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시대 : 신라시대

  종류 : 절터

 감은사는 신라문무대왕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 난 후, 부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즉위한지 2년 되던 해인 682년에 완성한 신라시대의 사찰이었다.

문무대왕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 사 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며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여 사찰을 완성하고 이름은 감은사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부터 2년에 걸쳐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얻어진 자료를 통해 창건당시의 건물 기초대로 노출, 정비한 것이며, 아울러 금당의 지하에는 바다용이 된 문무대왕의 휴식을 위한 상징적인 공간을 마련한 특수구조와 동쪽으로 통로를 만들었다고 하는 흔적도 밝혀놓은 것이다.

 우뚝 솟은 두 삼층석탑은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3m에 이르는 신라 삼층석탑중 최대의 것이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의 뜻과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에 감사해서 지은 효, 즉 충효의 정신이 깃들인 유적이라 하겠다.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

 신라시대 감은사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부로서 설치된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신라 제 35대 경덕왕 18년(759년)에 감은사성전을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개칭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7세기말 혹은 8세기초에 설치된 듯하다.

 감은사성전은 다른 여러 성전과 마찬가지로 왕실 발원에 의하여 창건된 원찰로서의 감은사의 조영과 수리뿐만 아니라 왕실의 봉사기관으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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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감은 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2기의 화강석제 석탑.

 지정번호 : 국보 제112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감은사지

 시대 : 통일신라시대

 크기 : 동 ·서 탑 모두 13.4m

 종류 : 석탑

 감은사탑은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일금당 쌍탑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기운차고 견실하며, 장중하면서도 질박함을 잃지 않는 이 위대한 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삼층탑으로 화강암 상·하 2층 기단위에 3층으로 축조되었다. 신문왕2년(682년)으로, 축조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초기 작품이다.

우선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장의 석재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장이다.

 기단 양쪽에 우주(모서리 기둥)가 있고 탱주(버팀 기둥)가 3주씩 있다. 상층기단 면석 역시 12장에 갑석은 8장으로 구성되었으며 2주의 탱주가 있다.

 탑신부의 1층 옥신(몸돌)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 몸돌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장으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하였다.

 지붕돌의 구성은 각층 낙수면(탑지붕 윗면)과 옥개받침(탑지붕 아랫면)이 각기 따로 조립되었는데 각각 4장이므로 결국 8석으로 구성되는 셈이다.옥개받침은 각층 5단으로 짜여졌고 낙수면의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3층 지붕돌 위부터 시작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이상의 부재는 없었으나, 현재 약3.9m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다.석탑의 전체높이는 13m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3개의 몸돌을 실측해보면 그 폭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있으며, 높이는 4:3:2가 아닌 4:2:2로 나타난다. 곧 1층 몸돌이 2, 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으로 만약 정상적인 체감률을 따랐다면 지금과 같은 상승감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각 부의 구성이 백제시대의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목조건축에 있어서의 구조성을 잃지 않고 있는 증거라고 보여진다. 감은사 동·서탑은 이러한 목조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내유물 [感恩寺址西三層石塔內遺物]

   통일신라시대의 청동제 사리기 및 4각감(四角龕).

   지정번호 : 보물 제366호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 통일신라시대

   종류 : 청동제 사리기 및 4각감

 1959년 12월, 이 석탑을 해체 수리하다가 발견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로, 원래 감(龕) 안에 장치하였으나 감은 이미 부식하였다. 청동제 사리기 높이는 20cm, 기단지대의 1변은 14.9cm 가량이며, 청동제 4각감 총 높이는 31cm, 감 높이는 25.2cm, 감 몸통의 1변은 각각 18.9cm이다.

  청동 4각감:감의 형태는 방추형(方錐形)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깊은 상자에 4모서리마다 발을 달고 있다. 옆면에는 각각 사천왕상(四天王像) 1구와 그 좌우 8능형의 바탕에 새긴 수환(獸環)이 있고, 이 수환 상하인 옆면 4구석에는 풀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장식들은 다른 동판(銅板)에 새겨서 잔 못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가장자리에는 두루 꽃과 잎을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의 바탕은 어자(魚子)무늬를 메운 가는 장식판으로 단을 돌렸으며, 밑의 4모서리에는 ‘ㄱ’자형의 받침이 붙어 있다. 뚜껑의 가장자리에도 상자의 무늬와 같은 장식판의 단이 둘려 있고, 다시 풀꽃무늬를 교대로 배치한 장식판이 대각선으로 ‘十’자형을 이루었다. 꼭대기는 여의두(如意頭)무늬의 사각형 장식판을 덮고 그 한가운데에 마름모형 고리를 달았다. 사천왕상은 1장의 동판으로 새겨낸 것으로, 만든 당시의 일부 손상 흔적이 있다. 모두 갑옷을 입었으나, 그 중 2구는 복부에 사자형이 있다. 두광(頭光:머리부분의 광배)은 원형이고, 한 손은 허리에 댔으나 다른 손은 탑 ·보주 ·창 ·방망이[金剛杵]를 들었고, 소나 난장이[侏儒]를 타고 섰다. 이 자세와 옷 무늬는 당나라 조상(彫像)에서 볼 수 있지만 얼굴은 중앙아시아의 이란계(系) 사람을 표현하여 매우 주목된다. 감 안에 사리기를 넣었는데, 고정시키기 위하여 몸통 윗면 상부에 소형 자물쇠를 닫고 비녀못을 꽂았다.

  청동제 사리기:기단(基壇) ·몸부분 ·뚜껑[寶蓋]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 보좌형(寶座形:부처의 자리 형태) 사리기이다. 기단은 연꽃과 당초(唐草)무늬로 장식한 하대 위에 1면에 2좌씩의 고식(古式) 안상을 투각한 직사각형의 외벽을 세우고, 그 안에 중대를 깔고 또한 외벽과 중대 사이에는 각 면에 2구씩의 신장상을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다. 연꽃을 돌린 상대 위에 2단의 직사각형 난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상단 4귀에 주악상(奏樂像)과 그 사이에 동자상(童子像) 1구씩을 배치하여 장엄을 더하였다. 사리병은 복발형(覆鉢型: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양)과 연꽃 ·보주(寶珠)로 장식한 청동용기에 들어 있는데, 복발형의 4면에 고리가 달려 있고, 그 위에 배치한 연꽃이 크게 돋보인다. 수정으로 만든 보주는 이 중의 작은 연꽃 위에 얹어서 청동으로 오려 만든 화염(火焰)을 씌웠다. 이 안에 든 사리병도 수정제로 높이 3.8cm이고, 금선과 금싸라기로 뚜껑이 덮여 있다.

 

  참 고

   감은사지 동탑 출토 금동사리함

 통일신라 금동사리함 복원 - 96년 경주서 출토

 지난 96년 경주 감은사지 동쪽 (국보 제112호)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이 보존처리를 거쳐 공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6일 3년 7개월간의 처리과정을 거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금동사리함은 탑을 해체하던 중 삼층 탑신 윗면 사리공(舍利孔)에서 파손된채로 발견된 것으로, 바깥을 감싼 외함과 안쪽의 사리기로 구성돼 있다. 외함은 높이 27㎝ 폭 19㎝ 외함의 겉면에는 사천왕상이 있고, 사리기는 사각연화대좌 위에 연꽃이 조각된 탑신을 안치되고 있다. 이 금동사리함은 7세기 신라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연구소는 보존 처리 과정에서 사리기 장식물 중 하나인 금제풍탁(金製風鐸)이 길이5~7㎜, 무게 0.04g로 현미경으로 본 결과 매우 정교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외함의 도금막도 두께 17㎛로 균일해 당시 도금기술이 뛰어났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준호 기자 < juno@chosun.com > 조선일보 제24546호 30면 1999년 12월 7일 (화)>

 

"금속공예 진수" 감탄 - 0.04g '금제풍탁' 극미의 예술

6일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공개한 7세기 통일신라의 금속 공예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증거하는 온갖 기술이 망라돼 있다. 즉 녹인 금속을 주물틀에 부어 모양을 내는 주조, 금속을 두들겨 모양을 다듬는 단조, 선을 나타내는 선각, 금속을 입히는 도금, 표면에 금덩이를 붙여 모양을 내는 누금(樓金)기술 등이 모조리 동원돼 있다. 특히 사리함 장식물 중 하나로 5개가 수습된 금제풍탁(金製風鐸)은 길이가 겨우 5~7㎜고 무게는 0.04g에 지나지 않아 육안으로는 무슨 물건인지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다. 풍탁이란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는 일종의 풍경으로 현미경으로 확인한 결과 비로소 풍탁이란 것이 밝혀졌다. 관찰된 풍탁은 금으로 납작한 판을 만든 뒤 이를 두루마리 감듯이 한 다음 고리와 고리를 지름 0.1㎜의 금덩어리로 눌러 붙여 감탄을 자아내개 한다. 또 X선 촬영을 통해 표면을 분석한 결과 17㎛(1 ㎛=0.001㎜)두께로 고르게 도금돼 있어 당시의 금세공 기술이 다다른 수준을 짐작케했다. 금동사리함의 보존처리 작업을 주도한 유재은 학예연구사는 "보물 366호로 지정된 감은사지 서쪽 석탑의 금동사리함보다 훨씬 정교해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국진 기자 kookjin@joongang.co.kr 중앙일보 1면, 30면1999년 12월 7일 (화)>

 

※참고자료※

두산 대백과사전

야후 백과사전

http://www.historic.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