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지역개관♠

 

  경주 땅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타임머신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단지 수만 년 전부터 살아왔으리라 짐작한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경 박혁거세의 건국 이야기에 전하는 육촌이다.   이때에 경주는 서라벌(徐羅伐), 사로국(斯盧國), 사라(斯羅) 등으로 불렸으며 당시 사람들은 도읍의 이름(지명)과 나라이름(국명)을 동일시하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계림(鷄林)이란 이름이 있는데 이는 제4대 탈해이사금 때 김알지의 탄생과 관련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마찬가지로 지명으로도 쓰이고 국명으로도 쓰였다. 신라의 왕성은 시조 혁거세 거서간 때 지은 금성(金城)과 제5대 파사 이사금 때 쌓은 월성이 있는데, 월성은 그 생김새 때문에 반월성이라고도 불려왔다.

 2∼3C의 서라벌은 대내적으로 제3대 유리 이사금 때 육촌을 육부로 재정비하고 대외적으로는 주변의 다른 소국들과 경쟁하며 그들을 차츰 정복해 가며 영토국가의 서울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한편 왜구의 침입이 잦아 장기읍성(포항시 남구)을 비롯하여 포항, 울산 등지에 왜구로부터 서라벌을 방어하기 위한 여러 성들을 쌓아두었다. 서라벌은 신라(新羅)란 국호를 정하고 혁거세,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기존의 칭호를 벗어나 시호(諡號)와 왕(王)이란 칭호를 쓰기 시작한 제22대 지증대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교적 도읍명과 국명이 구분되어졌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뒤 7∼9C의 서라벌은 신라의 서울로서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경주의 위치가 심하게 치우쳐 있어 한 때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서라벌 기존 세력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경주의 위치적 결점은 5소경을 설치하여 보완하는 정도였다. 한편, 제35대 경덕왕 때 우리말로 된 전국의 지명들을 모두 한자명으로 고치면서 경주 지역의 여러 군현들 역시 마찬가지로 비화현이 안강현으로(現 안강읍), 모화군이 임관군으로(現 외동읍), 구도성에서 대성군으로(現 보문동) 바뀌는 등 한자음이나 뜻을 빌려 표기했던 우리말 지명들이 한자명으로 고쳐졌다.   

 절정기의 서라벌은 호구수가 18만 호(인구 약 90만으로 추정)에 달했으며(現 경주시 인구는 28만 정도) '초가집이 한 채도 없고 처마가 서로 맞닿아 있었으며, 사람들은 피리를 불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세웠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신라는 장보고의 활약, 당나라의 신라방 등 활발한 국제 활동에 의해 대외 무역이 성행하였다. 이 때 서라벌의 외항으로는 울산이 이용되었는데 이슬람 상인들까지 내왕하여 서역의 문물이 울산을 통해 신라로 들어와 (주로) 귀족층들에게 소비되고 일부 무슬림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잘 나가던 서라벌은 신라의 국운이 기울면서 점차 쇠락하여 갔다. 심지어 후고구려의 궁예는 서라벌을 멸도(滅都)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하였다. 결국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제56대 경순대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면서 서라벌 천년 도읍의 위상은 한 나라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경주는 비록 더 이상 중앙은 아니었으나 고려 시대에 영남지방의 행정, 군사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영향력을 유지하였고 고려 3경의 하나로 중시되었다. 이는 어쩌면 경순대왕의 선택 덕분일 수도 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까지 저항하여 피를 봤던 후백제와는 달리 순순히 나라를 바쳐 온 신라가 이쁘게 보였을 테다. 실제로 경순대왕은 고려 태자보다 높은 벼슬을 받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이승을 떠났다. 고구려나 백제의 마지막 왕들과 대비했을 때 넘치는 대접을 받은 것이다. 경순대왕을 성군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은 경순대왕이 왕위를 버리면서까지 무고한 백성들이 상하지 않도록 한 것을(혹은 의도의 여부를 떠나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을) 높이 평가한다.

 고려 시대의 경주는 경주부, 낙랑군, 동경(東京), 계림부 등으로 불렸으며 그 영역은 때에 따라 변동이 많았다. 고려 왕조 500년 동안 경주에는 두 번의 큰 일이 있 었다.

 그 하나는 12C 말 경주 지역에서 몇 차례의 민란이 일어나 동경의 지위가 격하되었다가 고려 고종 때 다시 동경으로 승격된 일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광역시가 시로, 시가 군으로, 동이 리로, 읍이 면으로 격하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격하는 아주 큰 손해였다. 이런 저런 권한이 줄어들고 그 지역주민에 대한 대우도 달라졌었던 것이다. 12C 말에는 망이, 망소이의 난(공주), 전주 관노의 난(전주), 김사미의 난(청도의 운문), 효심의 난(울산의 초전), 만적의 난(개경), 광명, 계발의 난(진주), 이비, 패좌의 난(동경), 최광수의 난, 이연년의 난(담양) 등 전국적으로 많은 민란들이 일어났었는데 이는 집권자들의 지독한 수탈과 무신의 횡포에 흉흉해진 나라, 향·소·부곡민의 불만 등이 터져 나온 것이다. 주로 농민들은 수탈에 반발한 것이었고 천민들은 신분 해방을 주창한 것으로 천민 출신인 이의민이 최고통치자에까지 오르자 이에 자극 받은 면도 있다. (만적 왈 "어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이런 민란들은 전국적인 기세였고 경주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주 지역 및 영남 지방에서의 민란은 신라 부흥 운동의 성격도 띈다는 것에서 특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13C 고려를 짓밟았던 몽골군의 말발굽이 경주에까지 닥친 것이다. 몽골의 3차 침입(1235. 7.∼1239. 4.)이 있었던 1238년 겨울, 동경에 몽골군이 쳐들어 왔고 황룡사는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황룡사는 6C에 지어진 큰 절로 신라 3보의 하나인 장육존상(丈六尊像)과 유명한 솔거의 금당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9층 목탑이 세워졌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약 80m로(추정) 이는 현존하는 최고(最高) 목탑인 요나라의 목탑보다 높은 것이다.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로서 이후 몇 차례 벼락을 맞기도 하고 기울기도 하였으나 신라가 망한 뒤 고려 시대에도 꾸준히 중수되며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고려 불교의 중심이었던 황룡사였다. 황룡사의 소실은 고려인들에게 있어 동경 사람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를 잃은 크나큰 상처였으며 지금의 우리에게도 조상의 업적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물질적으로는 중요한 관광 자원(-표현이 좀 그렇지만- 볼거리, 돈벌이)의 상실로 다가온다.

 고려 말 충렬대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이름이 바뀌었던 경주는 왕조가 바뀌고 나서 조선 태종 때 경주부(慶州府)로 다시 한번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주는 고려 때보다 지위가 축소되어 경상도감영이 상주(尙州)로 옮겨져 좌우 병영만 남았었다가 좌우도제 실시 때에는 경상좌도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조선 중기 왜란(倭亂)의 전화에 휩쓸려 사람들이 많이 죽고 땅은 황폐해졌으며 많은 문화재들이 훼손되었다. 다른 지역들처럼 경주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에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문화재 피해로 난리통에 불타버린 불국사를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고종 때 23부제 실시로 경주부가 경주군(慶州郡)으로 바뀌고 대한제국 광무 원년에는 13도제 실시로 경상도 경주군에서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경주는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무관심 속에 옛 신라의 흔적들이 사라지거나 손상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시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진 도굴, 일제에 의한 잘못된 유물·유적 발굴과 관리, 근대적 개발 사업 등으로 훼손이 많아졌었다. 일제 시대 경주의 행정 변화를 살펴보면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부군면 폐합이 이루어져 장기군의 양북, 양남면이 편입되면서 경주군의 면적이 넓어진 뒤, 1931년 조선총독부의 읍면제 실시로 경주면이 경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37년 양북면 일부를 분리하여 감포읍을 설치하였다.

 광복 후 이남에 속한 경주군은 1949년 강서면을 안강읍으로, 1973년 서면 일부를 분리하여 건천읍으로, 1980년 외동면을 외동읍으로 승격하면서 4읍(경주읍 제외) 8면이 되었고 경주읍은 1955년 외동, 내남, 천북면 일부를 편입하여 경주시로 승격하면서 경주군(→1955년 월성군으로→1989년 다시 경주군으로)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전국적으로 행정이 바뀔 때 (예: 직할시→광역시, 시군 통합 등)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 경주시로 출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경주. 경주 IC의 화랑 동상, 길가의 십이지신상, 경주 사람들의 사투리, 도로에서 귤, 뻥튀기를 파시는 아줌마들, 명소마다 있는 기념품 가게들, 배반지하로 벽에 그려진 화려한 벽화, 경주문화엑스포 마스코트 화랑이와 원화, 수학 여행 온 아해들과 걔네들을 태운 관광버스, 벚꽃길,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 십 원 짜리 동전에 새겨진 다보탑, 여기 저기 들에 흩어져 있는 이름 모를 탑들, 여러 왕릉들, 불국사, 잘 정리된 남천과 북천 둔치. 경주는 내게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현재 수도(Capital)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란 고유 명사가 경주의 옛 이름 서라벌에서 나왔듯이 경주는 이제 더 이상 국도(國都)는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