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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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 시 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1. 주요인물img32.gif

 서산대사는 호가 청허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승인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 때에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와 판선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 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 두륜산 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 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게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간단한 주를 붙인 「선가귀감」과, 선과 교를 대비하여 풀이한 「선교석」, 선과 교의 차이를 간결하게 해설한 「선교결」, 수도생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은 「운사단」, 시문을 모아 놓은 「청허당집」이 있다. 사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촉으로 그 유품을 보관하면서부터 조선 후기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를 세움으로써 절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임진왜란 때 구국의 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산대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 역사

  대흥사의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48호)에 봉안된 천불상은 경주의 옥석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조각한 정교하고 신비스러운 천개의 불상이다. 천불은 각각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의 삼존불은 나무로 만들어진 목불이다. 대흥사의 유물·유적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세인의 관심을 끄는 유물은 천불이라 할 수 있다. 천불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 각기 이 세상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며, 단순히 천불이라 할 때는 현겁(現劫)의 천불을 말한다. 즉 이 세상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가 존재하며,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천불의 표현이다. 전설에 의하면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3년(순조 13)에 천불전을 중건하고 경주의 옥석으로 조각을 하게 했다. 10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완성한 천불을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울산과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했다.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일본 장기현(長岐縣)에 밀려갔다. 장기현에서 300여 개의 옥불을 실은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옥불(玉佛)을 보고 서둘러 절을 짓고 옥불을 봉안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일본인들의 꿈에 나타나 ‘바닷가에 떠밀린 옥불은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현몽하자 일본인들은 하는 수 없이 옥불을 해남으로 돌려보내면서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가 새겨 보냈다고 전해진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함을 보였는데 경상도 신도들의 꿈속에 불상들이 현몽하여‘가사를 입혀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가사는 4년마다 한번씩 갈아 입히는데 그헌가사를 가지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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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도는 8각 원당형 부도로 상,중,하로 구성한 기단 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정상에 상륜 을 장식하였다. 지대석도 8각인데 그 위에 하대에는 큼직한 8판의 복련이 조각되었으며, 상대석에는 하대와 대칭으로 앙련 8판이 장식되었고, 중대석에는 동물상 등이 조각되었다. 탑신에는 청허당 이라고 주인공을 밝혀 놓았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서까래가 모각되고, 낙수면에는 기와골이 표현되었다. 상륜은 용두를 조각하고 높직한 보주형을 이루었는데, 표면에 조식이 가득하다. 건립 연대는 청허당의 구비 건립이 인조 25년(1647)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때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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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건물의 짜임새가 매우 우아하고 화려하여 조선중기 이후에 성행한 다포계의 전형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흥사의 역사를 정리한 대둔사지에 따르면 천불전은 조선시대인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탔으며, 18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에 의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 형식으로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직경 70cm 가량의 거대한 괴목(槐木)으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昌枋)으로  이 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화려한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았다. 공포는 전면 어간에는 2구, 양 협간에는 1구씩의 공간포를 배치한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집을 이룬다. 외부로 뻗은 살미첨차는 간결하면서 강직하게 구부러져 끝에서 예리하게 솟아올랐다. 내부는 격자천장을 하였다. 특히 장주(長柱)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이한데 이는 아마도 천불을 봉안하기 위하여 공간을 충분히 사용하기 위한 배려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단 중앙으로는 7단의 계단을 짜 올려 전각에 오르게 하였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 하였고, 창호는 꽃살창으로 중앙칸에 3짝의 소슬꽃창문을, 좌우협칸은 2짝의 빗꽃살창을 달았다. 특히 국화무늬, 연꽃무늬, 무궁화무늬 등을 누각한 문짝들은 정교함이 드러나 있으며 창호의 상단에는 교창을 두지 않았다. 건물 정면 어간기둥의 상부에는 용두가 달려있는데 할아버지용을 보는 듯 무척이나 인자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천불전에 안치된 천불상(전라남도유형문화재 52)은 옥으로 만들어져 신비함을 더한다. 천불전의 현판은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가 썼다. 겉 벽면에는 3면에 걸쳐 심우도(尋牛圖)와 대행보현보살(大行普賢菩薩) 등 15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북쪽 벽에는 신중탱화와 사천왕탱화 등 불화(佛畵)가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탱화들은 초의(草衣)선사가 증사(證師)로 되어 있어 조선후기 불화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