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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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 이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혜철 부도비 에는 혜철이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 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839년 이전에 이미 쌍봉사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혜철의 선맥을 이은 징효는 강원도 영월 흥녕사 에서 사자산문을 개창 하였다. 곧 철감선사는 사자산문의 개조가 된 것이다. 철감선사의 종풍은 널리 펴져 경문왕은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선사가 입적하자 철감이란 시호를 내리고 부도탑명을 징소라 내렸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윤(道允)이 창건하고 자신의 도호(道號)를 따 쌍봉사라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 그 후 고려 시대인 1031년(문종35) 혜조국사(慧照國師)가, 공민왕 때는 관찰사 김방(金倣)이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을 1628년(인조6년)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 1667년(현종8)·1724년(경종4)에 계속 중수하였다. 1950년 6.25를 만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 극락전과 대웅전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1978년 명부전의 재건 등 옛 영화를 꿈꾸던 중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1986년 대웅전이 복원되고 해탈문, 요사채, 종각이 건립되었고 1997년에는 철감선사탑 탐방로 정비와 육화당 신축공사가 있었다. 사찰 경내에는 국보 제57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보물 제163호인 쌍봉사 대웅전, 보물 제170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浮屠)로, 그 시대의 부도 중 최대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대웅전은 평면이 네모 반듯한 3층 전각으로 목조탑파(木造塔婆)의 형식인 희귀한 건축물이다. 철감선사탑비는 귀부(龜趺)와 이수(촬首)만 남은 무신비(無身碑)이다.

 

1. 쌍봉사철감선사탑img14.gif

 부도(浮屠)는 스님의 사리를 안치하는 일종의 탑인데 그 형식에 따라 팔각원당형, 석종형 등으로 구분한다. 이 부도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중에서 조식이 화려한 걸작품이다. 상하 각부가 평면 8각형을 이루는 것은 통식(通式)에 속하나, 2단을 이룬 하대석에는 하단에 구름무늬, 상단에 사자를 조각하고, 상대석에는 앙련(仰蓮) 위에 8각 대석이 있어, 2중으로 된 안상(眼象) 안에 가릉빈가(迦陵頻伽) 1구씩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을 받는 부분에는 연꽃무늬가 둘려 있다. 탑신은 각 우각(隅角)에 원주형(圓柱形)을 세우고, 각면에는 전후에 문비형(門扉形), 그 좌우에 신장상(神將像), 남은 2면에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었다. 옥개부에는 연목(椽木)과 기왓골이 모각(模刻)되고, 옥리(屋裏)에는 각 면에 1구씩의 천인상이 있다. 조루(彫鏤)가 매우 정교하고, 탑신 원주에서 엔타시스의 수법을 볼 수 있으며, 옥개 추녀 끝 막새에는 연꽃무늬까지 새겨져 있다. 능숙한 수법은 당시 조각의 대표가 될 만하며, 목조 가구(架構)의 충실한 모각은 당시의 목조건축 양식을 추측하게 한다. 건립은 철감이 입적한 후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다른 부도에서 보다 완벽한 목조 건물을 재현한 형태로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철감선사의 이름은 박도윤으로 신라 원성왕 4년 한주 휴암에서 출생, 귀신사 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헌덕왕 17년에 입당하여 남전보원 에게 법을 받고 문성왕 9년에 귀국, 풍악산에 잠깐 주석 하였다가 화순에 옮겨와 쌍봉사에 주지후 경문왕 8년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 부도탑명은 징소라 하였다. 신라 구산선문의 종풍으로 크게 진작시킨 분이다.

 

2. 쌍봉사 대웅전img15.gif

 우리나라 사찰의 주 불전은 대웅전일 경우가 많다. 대웅전의 의미는 석가세존의 덕을 찬탄한다는 의미로 대웅세존등으로 높이 부르고 있는데 이를 줄여서 석가모니불이 있는 전각을 대웅전이라 이름한 것으로 전한다. 보물 제163호.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서, 충북 보은에 있는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과 더불어 목조탑파 형식을 유지한 희귀한 건축이다. 제일 위의 3층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1962년에 실시된 해체·복원공사에서, 그 원래의 형태는 보통 탑파건축과 같은 사모지붕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각층마다 옥신은 4면이 한 칸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첫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을 설치하였다. 규모는 1층 1변이 4m, 2층은 3.3m, 3층은 2.6m이며, 2층과 3층에서는 옥신 높이가 극도로 줄어들어 벽체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뱀包)들은 2·3층은 2출목(二出目), 초층은 3출목(三出目)이며,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초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그러나 2·3층은 통층(通層)으로 되어, 그 중심에 심주(心柱) 하나가 있는데, 각층 지붕의 춘설(春舌)들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심주의 높이는 lOm이고 l층의 한변의 길이는 440cm 2층의 한변의 길이는 357cm 3층의 한변은 285cm 이다. 1962년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724년(경종4)에 삼중창(三重創)하였을 때의 상량문이다. 이중창(二重創)에서 삼중창에 이르는 기간은 30여 년에 불과하고, 삼중창은 부분적인 중수공사(重修工事)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이 건물은 1690년(숙종16) 이중창 때에 세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l936년 보물로 처음 지정되어 보존해 오던중 1962년 해체수리, 1973년 번와보수를 했고 1984년 4월 신도들의 부주의로 불타버리고 말았으며, 1985년 8월 5일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l986년 l2월 30일 3층 사모지붕을 올렸고 지붕 맨 위에는 보주를 시설하였다. 즉 이전 팔작지붕 형태의 전각이 아닌 사모지붕을 한 3층 목조탑의 양식으로 복원한 것이다. 낮은 석조기단 위에 축조된 목조 건축물 형태의 삼층구조는 일반적인 석탑과 흡사한 비례감각을 지녔다.  

 

3. 쌍봉사 철감선사탑비img16.gif

 이 탑비는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며 비신은 유실되었고 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구전에 의하면 이 비는 일제시대 일인들의 손에 의해 비신이 없어졌고 탑비 부근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비신(碑身)이 없어서 그의 행적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절중(折中),825∼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하여 김제 비신사 (지금의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을 읽으면서 수학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입서 하였다. 그는 남전보원(748∼834)의 심인을 전승받아 그 후 문성왕 9년(847)에 굴산사를 개창 했던 범일선사 와 함께 귀국하였다. 풍악 장담사에 머무르면서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케 하고 징효대사 에게 불법을 잇게 하여 강원도 영월지역에서 개창한 사자산문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또한 선사는 말년에 주석한 쌍봉사를 중창하였으며 이곳에서 경문왕 8년(868) 4월 18일에 입적하였다. 왕은 시호를 철감(澈鑒), 탑명(塔名)을 징소(澄昭)라 하사하였다. 비신의 기록을 볼 수 없어서 이처럼 간단한 내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귀부는 방형의 대좌위에 있으며 높이가 아주 낮고 깨진 부분 없이 완전히 잘 남아 있다. 귀부 머리는 용두화 되었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입에는 둥근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에는 뿔 한 개가 돋아나 있고 입가에는 활짝 펴진 날개 같은 것이 있다. 구(龜)는 가운데에 복갑(腹甲)형식의 중첩문이 정연하고 등에는 중곽육각구(重廓六角龜) 갑문(甲紋)이 선명하다. 갑(甲)의 바깥선 에는 귀갑문이 반으로 자른 듯 옆으로 선명하게 돌려져 있다. 그리고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만들고 연문(蓮紋)을 돌리고 그 윗면에 3단의 각호(角弧) 괴임을 조각하였다. 귀부의 네발은 발가락이 3개씩인데 오른쪽 앞발만 발가락을 위로 들고 있어 마치 귀부가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수는 비신을 덮고 있는 밑면을 제외한 5면에 운룡문(雲龍紋)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세 마리의 용이 좌우와 중앙 상단에 꿈틀거리고 있으며, 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몸을 뒤틀며 허공을 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수 정상부 에는 보주형 귀꽃이 3개 솟아 있었으나 향좌측 의 것은 유실되고 없으며 그 자리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나머지 2개는 원석에 조각하였는데 유실된 부분만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때 별조 하여 끼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수 전면에 위패형의 액을 만들고 그 안에 '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 (雙峰山故澈鑒禪師碑銘)'이라고 서종(書縱)으로 2줄 음각 하였다. 이 2줄의 10자(字) 명문(銘文)이 다행히 남아 있어 탑비와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고 조성연대도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이 입적한 868년 후로 추정되고 있다.   

 

4. 쌍봉사 극락전img17.gif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 으로 단아한 다포계 양식이다. 잡석으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축대 위에 낮은 외벌대 기단을 놓고, 커다란 덤벙주춧돌 위에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끼워 넣고 평방을 올린 다음 공포를 배치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 이출목으로 공간포를 기둥 사이마다 1좌씩 배치시켰다. 설첨자 부분에는 연봉과 봉두를 깎아 장식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이다. 처마는 앞면은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뒷면은 홑처마이며, 양 측면에 방풍판을 달았다. 가구(架構) 구조는 평5량으로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종보를 얹은 다음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였다. 1978, 1982, 1991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극락전은 서방극락 정토의 주제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흔히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으로 불리는데 대웅전, 대적광전과 함께 3대 불전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