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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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그런데 신라의 아도화상이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조금씩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동만이 남아 있다.

 

1. 선암사 승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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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선교는 1713년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가 자연암반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며, 홍예(虹預)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으로 반원형을 이루어 아취형 모양이다. 홍예석 중간에는 이무기돌을 돌출시켜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재해를 막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그 안에 강선루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무지개 다리 중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다는 평을 듣는 다리이다.

 

2. 선암사 삼인당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사적에 따르면 이 연못은 신라 862년(신라 경문왕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으로 전하며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의 삼법인으로서 불교 사상을 나타낸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밖에 선암사 경내의 연못으로는 설선당 서쪽의 쌍지(雙池)와,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 축대 아래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방지(方池)가 있다. 쌍지는 중앙에 통로가 있어 걸어다닐 수 있으며, 방지 옆에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200년 된 적송 한 그루가 있다. 일주문 못미처 왼편으로는 방지와 쌍지에 고여 있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물은 인공수로를 따라 삼인당으로 흘러든다.

 

3. 선암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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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박한 표정의 용조각이 장식된 소맷돌이 있는 돌계단 위에 굵은 배흘림기둥 두 개가 화려한 공포를 인 모습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일주문의 배흘림기둥은 곧바로 낮고 작은 담으로 이어져 있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현판 기록에서는 산 이름을 청량산,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주문에서 계단을 오르면 곧장 범종루로 이어진다. 흔히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배치되는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

4. 선암사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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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395호인 선암사삼층석탑은 대웅전 앞 동쪽과 서쪽에 있다. 이 삼층석탑은 둘 다 4.3m이며, 신라시대 전형양식을 착실히 승계한 이중기단 석탑이다. 수매의 장석으로 기대석을 짜고, 하대석과 중석을 일석으로 하여 4매 장석으로 구성하였다.

 

5. 선암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조선시대(1825) 선암사는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후 1660년(현종 원년)에 중건하였고 1776(영조 42년)에 재차 화재를 만나 1825(순조 25년)년에 재 중건 하였다. 건물양식은 다포에 팔작집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이며 높직하게 다듬은 돌의 기단에 원형주초를 놓아 원형기둥을 세우고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단청을 하였고 문양이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흔히 순조 때부터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고 한다. 바로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를 했던 사람이 안동 김씨 김조순이다. 김조순이 혹 자신의 사위이며 국왕이신 순조를 낳게 해 준데 대한 보답이었는지는 몰라도 친히 '선암사'라는 현판을 써 주었는데 지금 선암사 대웅전 현판이다. 가만히 대웅전이라는 글씨 앞에 '김조순 서'라는 두인(頭印;글시 앞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있다. 원래 두인은 임금만이 할 수 있는데 김조순이 했다는 것은 당시 김조순의 권력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6. 선암사 전도선국사직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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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조 원형 개합식으로 된 이 직인통은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사용했다고 전하며 3개 모두 위에 뚜껑을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이중 1개는 8각으로 맨 꼭대기에 꼭지가 달려 있으며 전면에는 길게 장석을 달아 시건 장치를 부착하였고 그 양편에 고리를 상·하 두개씩 달아놓았으며 상단에는 통이 벌어지지 않도록 각종 장석을 사용하고 꼭지부분에도 화문 장석을 부착해 놓은 작품이다.

 

7. 선암사 대각국사진영

 보물 제 1004호인 선암사대각국사진영은 화승 도일비구에 의하여 1805년에 제작되었다. 이 초상화는 당대의 화풍이 살아있는 대표적인 수준작으로 평가된다. 대각국사는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불문에 들어갔으며 국사난원의 제자로 15세에 승통이 되었다. 30세에 송나라로 가서 화엄과 천태 등을 공부하고 천태종을 열어 불교계를 통합하려 했던 대종교이자 화엄종의 대가이다.

 

8. 선암사 괘불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큰 괘불 중의 하나로 이 괘불은 여래상으로서 장계와 과계를 갖추었고 눈은 정면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불타의 모습이며 괘불은 4월 초파일 행사 이외에도 나라에 내우외환이 있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기우제를 지내는데도 사용되고 있다.

 

9. 선암사 팔상전

 이 건물은 '조계산 선사 사적기'에 1704년(강희 43)과 1707년(숙종33)년에 중수한 18세기초 조선후기 익공계(翼工系) 건물이며 원형은 주심포 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배면은 익공계로 전면과 배면의 양식이 다르다. 이는 보수시 전면만 당시 유행하던 다포형식을 따른 건물이며 천정도 다포식집의 연등천장식이다.

10. 선암사 원통전

 1660년(현종 원년)에 경잠, 경준, 문정 등 3대사가 초창하여 1698년(숙종24) 호암대사가 중건하였고 그 후 1824년(순조 24) 해붕, 눌암, 익종3대사가 재중수한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건물로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를 내어 사찰건축에서는 보기드문 정자형 평면이 특이한 건물이다. 호암선사가 관음보살의 도움을 받은 이후 선암사를 중창하면서 원통전이라는 건물을 지어 관음보살을 모시는데 그 보살님이 영험이 많으셨다. 정조대왕이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중 원통전의 관음보살님께 기도 드리도록 한 후에 아들 순조를 얻으셨다. 후에 순조가 즉위하신 원년 1801년 당시 순조의 나이 12세 때 순조께서 친히 '대복전(大福田):큰 복있는 땅'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그 현판이 지금도 원통전 안에 모셔져 있다.

 

11. 선암사 중수비

 선암사 무우전 뒷편인 북암 길목에 있고 높직한 구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정상에 이수를 얹은 형태이며, 이수는 하단에 양련을 하고 그 상면에 두마리의 용이 반결하여 꿈틀거리고 있는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음. 이 비는 정유재란에 의하여 선암사가 소실된 것을 힘든 노력으로 선암사를 복원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한 중수비로서 조선조의 석비로서는 수작에 속한다.

 

12. 선암사 북부도img51.gif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300~400m 떨어진 선조암  (禪助庵)터의 우측에 위치하며 기단부인 지대석과 하대    석, 그리고 중석, 상대석을 갖추고 탑신부와 옥개석, 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작품이다. 부도는 경내에     있는 무우전 부도 및 대각암 부도와 함께 동시대인 고    려 전반기에 속하면서도 가장 빠른 시기인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명 선조암지 부도라고도 한다.

 

 

13. 선암사 동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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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우전으로부터 능선을 따라 약 200m 떨어진 숲속에 위치하고 외형은 팔각원당형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1매석의 8각지대석 위에 2단의 고임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단상형의 고임대를 조출하여 하대석을 받고 하대는 구름모양을 조각하였다. 이 부도는 선암사의 고려시대의 3기의 부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웅대하며 기단부에 비해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며 특히 전체규모가 3m가 넘는 대형부도이다. 일명 무우전 부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