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

1. 김영랑에 대하여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영랑 로터리>에 우리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그 영롱한 서정의 극치야말로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영랑은 그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고향 강진 어귀에 서서, 아직도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03년 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 기독청년 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나,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숲에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마침내 영랑의 서정시가 영롱한 광채를 발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이 동인이 되어 내놓은 <시문학>에서이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힘으로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그의 유명한 시<모란이피기까지>도이시집에수록되어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하 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2. 영랑 김윤식 생가 img38.gif

 이 집은 한국 초창기 문단의 거성 '모란의 시인'영랑 김윤식의 생가이다. 영랑생가는 당초 3채의 초가였으나, 대문이 있던 사랑채는 뜯겨져 없어졌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기와로 바뀌어 졌다. 그동안 개인소유로 되어있던 생가를    강진군에서 매입하였으며, 1986   년 2월 7일에는 지방 기념물(제   89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영랑이 낳고 자란 이 고장 강진   에는 1974년부터 모란촌 문학동   인회가 영랑의 대표시 '모란이 피   기까지는'이란 시제에서 인용한 『모란집』이라 제자(題字)한 동인지를 16집까지 발간하여 영랑과 현구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영랑이 낳아 유년의 시절을 보낸 곳은 강진군에서도 군청소재지가 있는 강진읍 북산 밑 탑동이다. 그의 집은 대지주의 집답게 넓은 대지에 집 주위로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늦은 겨울과 이른봄까지 내내 쉴새없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대밭에는 여러 종류의 야생종 차나무가 자라고 있고, 왕대밭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었다. 소슬대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강진북산이 있고, 언덕위에는 생가를 눈아래두고 강진의 젖줄인 구강포를 내려다보면 탐진강과 만덕산아래의 바다물결이 출렁대고  있다.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수학 중 기미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동년 4월 4일 강진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적을 두었으며 용아(龍兒)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수학 중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동에 참여하여 동년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등 4행소곡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 간 일했다.

 

3. 영랑생가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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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다며 9·28수복작전 때 복부에 포탄파편을 맞아 동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변경되었으나 1985년 12월에 강진군에서 이를 매입하여 원형을 복원하고 이의 유지, 관리를 맡고 있다. 영랑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81편의 시를 남겼으며, 그중 60여편 정도가 해방전 우리 강진에서 칩거하면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외면하고, 모란을 가꾸며 동백, 대나무 등이 가득한 남성리 집에서 썼다. 그래서 우리고장의 풍토와 지방사투리가 시로 표현될 수 있었으며, 10편 정도는 민족정신에서 우러나온 민족시라고 볼 수 있다. 소재 또한 생활주변에서 택한 것들이 많다. 영랑은 1931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중심이 되어 창간한 『시문학』지 1호를 통하여 "동백이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여기에 실린 13편의 시는 민족주   의 문학과 계급주의 문학의 대립을 겪으면서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 전개에 일대 전환점을 만들었다. 시문학 2호에는 "고흔 봄길 위에" 외 8편을, 3호에   는 "내마음 아실이" 외 6편을 발   표하여 우리 시 문학사에 상당한   위치를 가름하는 순수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다. 영랑은 1930연   대 전반기의 우리 시문학사의 가   장 보배로운 큰 빛이었을 뿐 아   니라, 우리말의 매력을 맨 처음으   로 의식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만   들어낸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작품생활을 하던 일제의 식민통치 시절에는 우리말이 무시되고 사상이나 행동도 극히 제한을 받던 때 인만큼, 영랑 처럼 훌륭한 시어를 조형한다는 것은 어두운 풀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