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조선 태종 17년(1417) 이전까지는 영암군에 속하던 도강현과 장흥부에 속하던 탐진현이 합쳐지면서 '강진'이라는 마을이 생긴 것이다. 강진은 흔히 남도답사의 일번지라고 불린다. 그럴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고 유서가 깊은 곳이 많다.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한 월남사지, 여러 점의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무위사, '모란이 피기까지'의 작가 김영랑의 생가, 고려청자가 구워지던 청자도요지 등이 모두 강진의 자랑꺼리다.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우리가 찾아갈 다산 초당이다.

 

1. 초당에 오르는 길

 초당에 가려면 우선 귤동마을을 지나야 한다. 구강포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다보면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뒤에 있는 만덕산 기슭에 다산 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원 주위에는 대나무와 동백나무, 삼나무 등 각종 수목이 우거져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천일각(天一閣)쪽에서는 강진만(康津灣)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등 자연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다산초당원으로 오르기 전 입구에는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심겨져 있고, 진입로는 가파른 오솔길과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는 계곡 및 울창한 수림이 있다.

 

2. 넓게 바라본 다산초당 img35.gif

 현재 다산초당원에 있는 건물은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으로 총 네 채가 존재한다. 건물이 배치된 향(向)을 살펴보면, 다산초당(茶山草堂, 14.3평)은 남향으로 앉혀져 있고, 초당 건물의 서측, 한 단 낮은 곳에는 서암(西庵, 8평)이 남동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동암(東庵, 8평)은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남동쪽으로 약 35m가량 떨어진 곳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다시 조그마한 언덕을 사이에 두고 약 30m되는 지점에는 남동향을 하고 있는 천일각(天一閣)이 있다. 천일각이 앉혀진 자리는 원래 '동(東)재'라 하여 과거에는 잔디밭이 있는 평평한 평지로 사람들이 이 산을 넘다 쉬어가거나, 정약용이 형 약전(若銓)을 그리며 앉아있곤 하던 곳이었는데, 1975년 2차 복원과정 중 '천일각'이라는 누각을 앉히게 되었다. 이 누각의 명(名)은 해남 윤씨의 후손인 윤재찬씨가 지은 것이라 한다. 초당에는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서암에는 '다성각(茶星閣)',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글들은 1956년경에 시행된 제1차 복원과정중에 고서화가(古書畵家) 김영리씨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이용, 집자(集字)한 것이다.

① 다산초당(茶山草堂)

 1930년대 이후에 멸실된 것을 제1차 복원사업 때 복원한 건물이다. 정약용이 거주할 당시에는 초막(草幕)이었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기와지붕을 얹었다. 전후와 좌우로 퇴(退)를 둔 정면 3간, 측면 1간의 팔작집이다. 평면구성은 중앙과 서측으로 2간의 대청을 들이고 동쪽으로는 1간의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좌우측과 전퇴(前退)에는 모두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막돌 허튼층 형식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으며 기둥 위로는 주두없이 창방을 걸었다.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여사이로는 소루(小累)를 끼웠으며 보머리 밑으로는 포작(包作)없이 보이지만 끼웠다.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5량가(梁架)로 전면의 주심도리(柱心道里)만 굴도리이고 나머지는 납도리로 되어 있다.

② 동암(東庵)

 정약용이 거처하던 시절에는 초막(草幕)이었으며,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 (欽欽新書), 경세유표 (經世遺表) 등 500여권의 책을 집대성한 곳이다.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도 하는데, 이는 동암 근처에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제1차 복원사업 때는 석축 공사를 실시하고, 제2차 복원사업 때 완전 복원하였다.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지붕 납도리집으로 전면 반간은 툇마루를 놓은 퇴간(退間)이다. 중앙간에만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양측으로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낮은 막돌 허튼쌓기 형식의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운 일고주(一高柱) 5량(梁) 형식이다.

③ 서암(西庵)

 서암 또한 정약용의 유배 당시에는 초막이었으며, 윤종기, 윤종벽, 윤종상, 윤종신 등 18명의 제자들이 거처한 곳이다.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5년 제2차 복원사업 때 건립하였다.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집으로 구조는 동암과 같고 다만, 평면형식에서 차이가 보인다. 중앙에 미닫이문을 설치한 2칸 방을 들이고 그 전면으로는 툇마루를 시설하였으며, 그 옆으로는 전퇴(前退)를 포함하여 부엌을 배치하였다.

  정석(丁石) img36.gif

다산초당원 서북쪽에 있는 바위에 정약용이 해서(楷書)로 쓴 글자를 가르킨다. 정원에 있어 암각의 행위는 회화에서의 낙관(落款)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정원의 소유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글자 자체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정원에 대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연지석가산

 연(蓮)이 자라고 있다던 연지석가산은 지금의 다산초당의 동쪽에 4.6m×9.6m의 규모로 방형(方形)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 못안에는 원도(圓島)가 있다. 세 봉우리의 석가산을 나타내기 위해 돌을 쌓아놓았으나 그 모양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상태이다. 또, 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대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이것 또한 비류폭포라 하기에는 그 규모가 상당히 외소하며 정약용이 만든 당시의 모양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못은 집 앞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외의 곳에 설치하는 것은 피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못의 위치는 건물의 툇마루나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경우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이다. 결국, 현재 다산초당 건물의 동쪽에 있는 연못의 위치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못의 모양은 원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산림경제』에서도 정약용은 '원지(圓池)' 형태의 못을 권장하고 있으며, 「사경첩」에 있는 '연지석가산'의 시에서도 "산 샘물울 끌어다 빙둘러 만든 연못(引山泉環作沼)"이라 하여 당시에 있었던 연못을 원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현재 다산초당원에 있는 방지형의 못의 형태는 잘못 복원된 것이다.

 

3. 다산 선생의 손때가 탄 다산사경

 현재 다산초당원에는 네 채의 건물 이외에 정약용이 직접 정했다는「다산사경(茶山四景)」이 있다. 초당 서쪽의 언덕에 있는 암석에는 '정석'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바로 앞에는 차를 다렸다는 다조가 있다. 또한, 초당 뒷편으로는 '약천'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샘이 있고, 동측으로는 4.6m×9.6m 크기의 방형(方形)의 모양을 한 '연지(蓮池)'가 축조되어 있으며, 이 연지안에는 원도(圓島)가 있다. 초당과 연지의 뒤쪽 경사면에는 1.2∼1.6m의 폭으로 5∼6단의 화계가 있는데, 정약용이 이곳에서 약초와 채소를 가꾸었다고 전한다.

① 다조 img37.gif

 다산이 직접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이어서 '다조(차부뚜막)'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래 '다조'는 다인(茶人)들이 흔히 사용한 기구로 풍로에 굴뚝이 달리거나 굴뚝 구멍이 있어 차에 연기나 나무냄새가 배이지 않게 한 독특한 구조를 가진 화덕이다. 옛날에는 추녀밑에서 흔히 차를 끓였는데, 당시에는 연료가 숯이나 나무 등이었으므로 연기나 가스 때문에 보통 바깥에서 불을 피워 차를 끓였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방과 제일 가까운 밖에서 끓이면, 방문을 열었을 때 찻물 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앉은자리에서 탕관도 들여올 수도 있어 편리했을 것이다. 다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대국가시대에도 다인(茶人)들이 차를 끓일 때 즐겨 이용되었다.

 

② 약천(藥泉)

 정약용이 직접 발견한 샘으로 물맛이 좋아 사경(四景)의 하나로 손꼽은 듯 하다. 현재는 다산초당원 서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예전의 위치와 같은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약천」의 주(註)에서 '정자의 서북쪽에 있다(藥泉在池亭西北)'는 것으로 보아, 현재 '약천'이라 불리는 곳과 거의 유사한 지점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